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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어린 나귀(donkey)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까닭은
열왕기 상권 1장 32절에는 다윗 임금이 솔로몬에게 자신의 노새(mule)를 타라고 하면서 후계자로 임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 19장 30절에는 예수님께서 마을로 가서 어린 나귀(donkey, colt)를 끌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어린 나귀를 끌고 오자 사람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어린 나귀에 덮고 예수님께서 그 위로 올라타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마태오 복음 21장에는 암나귀와 어린 나귀를 타고 가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마르코 복음 11장 1-10절에는 어린 나귀를 데리고 와서 제자들이 겉옷을 덮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옷을 땅에다 까는 것으로 기록됩니다. 복음서기자마다 디테일은 조금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이 부분이 열왕기에 나오는 노새 타는 왕의 이미지와 연결된다고 설명하는 신학자들이 많습니다. 왜 하필이면 말이 아니고 나귀나 노새일까요. 또 재미있는 것은 솔로몬 임금은 노새를 탔는데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셨을까요. 우선 당시 이스라엘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말보다는 노새와 나귀가 더 좋은 운송 수단이자 노동력이었다는 것을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나귀건 노새건 선진국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노새나 나귀는 야생말보다 체구는 좀 작지만 훨씬 더 힘이 세고, 주인의 말도 잘 복종하고, 꾀도 있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가성비가 좋은 가축입니다. 반대로 말은 전쟁을 하거나 마차를 끄는데 제격이지만 농사를 짓거나 가까운 곳을 가는 데에는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나귀는 노새를 낳을 수 있지만 노새는 더 이상 새끼를 낳지 않아 대가 끊깁니다. 그럼에도 나귀와 노새는 둘 다 현대사회에 자동차가 발명되기 이전까지는 일종의 훌륭한 운송 수단이었습니다. 말보다 몸집은 작지만 더 많은 짐을 질 수 있었고, 또 말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지혜롭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멋지게 기사나 군인들을 태우고 달리는 말과는 달리 큰 짐을 지고 가다 힘이 들어 움직이지 못해 채찍질을 당해야 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말도 아니고, 노새도 아닌 어린 나귀를 마을에서 끌고 오라고 했는지 혹시 그 속에는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솔로몬 임금 이후로 이스라엘 왕국은 분열되고 그 이후 영성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계속 박해와 쇠퇴의 길을 걸었지만, 다윗의 자손이긴 하지만 예수님의 왕국은 붕괴나 쇠퇴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상징이 혹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아직 크지 않아 짐 싣는 것도 버거울 어린 나귀를 끌고 오라 해서 타신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인류의 죄라는 어마어마한 짐을 대신 지고, 거기에 더하여 채찍질을 당한 후 십자가에 매달릴 것이라는 예시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은 아닐까요. 한편 부처님을 낳은 마야부인은 코끼리를 타고 가다가 부처님을 낳았다고 합니다. 코끼리는 힌두교에서 가네샤, 즉 신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귀족이나 왕가의 귀한사람들이 타는 영험한 짐승입니다. 그러나 힌두 신화에는 인연 업(karma)으로 인해 가네샤가 어머니를 죽여야 하는 일화도 있습니다. 왕자로 태어나 어머니를 일찍 여읜 부처님과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보다 먼저 하느님께 가신 예수님의 탈 것조차 의미가 다른 것 같습니다.
나귀와 노새의 상징을 우리 자신의 심리에 적용해 보면, 대부분 여러 가지 노동에 시달리며 일상을 살아 내고 참아 내야 하는 시기에 대한 비유 같기도 합니다. 내가 이러려고 공부를 했을까, 내가 이러려고 결혼을 했을까. 내가 이러려고 서울로 왔을까, 같은 생각들을 하게 되는 고된 노동과 희생의 시간은 마치 자신이 채찍질 당하며 견디는 나귀나 노새처럼 생각됩니다. 정말 형장에 끌려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몹시 어려운 곤경에 처할 때가 누구든 인생에는 한 번 이상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바로 이런 순간에 있는 약하고 불안한 인류를 위해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여 주셨던 것은 아닌지 상상해 봅니다.
특히 어린 나귀를 타고 가는 모습을 준비하시면서 앞으로 어린 나귀 보다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 주시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물도 다 깊이 사랑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창세기에 인간을 모든 생물을 다스리고 관장하는 존재로 신이 창조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인지, 그리스도인 중에도 인간과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를 마치 주종 관계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짐승이나 식물을 독단적이거나 파괴적으로 대하면서도 마치 하느님께 허락을 받은 것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약의 예수님은 식물과 동물을 다양하게 비유의 소재로 쓰고 계시지만, 행간에서 따뜻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마치 사람인 것처럼 말입니다. 무화과나무에 저주를 내리셨을 때도 있었지만, 입고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 들풀과 꽃보다 못한 존재라고 우리를 나무라시기도 했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나귀를 타는 모습을 보이신 것도, 그 이면에 많은 뜻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이유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나귀보다 더 고통스런 채찍을 맞으며 죽음에 이르는 예수님의 모습, 모든 것을 미리 아시면서도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한없이 몸을 낮추고 묵묵히 견뎌내셨던 모습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말로만 예수님을 사랑한다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나귀가 되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께 등을 내어 드릴 수는 없을까요. 서로에게 의존적인 인간은 사랑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으니, 나귀보다 오히려 더 약한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사랑을 가르치신 예수님이 더 위대해 보이는 이유입니다.
[유익한 심리학] BEING과 DOING 사이의 선택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시어 자기 의지와 의도를 가지고 행(行)할 수 있게 하셨다. 우리는 이를 ‘자유 의지’라고 부른다. 인간에게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의지와 의도를 가지고 행한다(살아간다)는 말이고, 행함을 통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인간은 선택을 통하여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의지와 의도가 없는 것이 ‘반응’이다.
반응은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이고 반사적인 몸의 움직임이다. 반응은 과거 경험과 축적된 정보에 의해 도식화된 것으로 생존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 한몫을 한다. 이는 자유 의지보다는 본능에 가깝다. 우리의 뇌는 내가 어떤 의지와 의도를 가지고 선택을 하기 전까지는 몸에 축적된 다양한 도식을 활용하여 효율적인 생활을 하도록 협력한다. 별생각 없이 그냥 살면, 우리는 뇌의 메커니즘, 즉 도식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는 외부 세계에 ‘반응’하는 것이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개나 돼지 등 동물은 ‘존재한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상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은 대상 세계의 일부가 아닌 존재하는 주체다.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선택’이라는 행위를 통해서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은 ‘존재하라’는 명령인 셈이다. 선택이란 것은 ‘살아야 하는’ 그 어떤 것을 암시한다.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고민해야만 하는 주체로서 인간이라는 것이다.
생각 없이 ‘그냥’ 사는 것은 동물적 삶과 다르지 않다. 그냥 사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반응하는 삶이다. 우리가 생각을 멈추면 우리 뇌의 메커니즘은 최고조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모든 상황을 뇌가 알아서 판단하고 몸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나의 뇌가 사는 것이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라고 여기지만 실상은 뇌에 의해 자동화되고 도식화된 몸의 반응일 뿐이다. 바로 매트릭스의 세상이다. 생각 없이 그냥 살면, 우리 몸은 과거의 도식과 높은 효율성으로 자동화된 반응을 반복할 뿐, ‘지금-여기’에 존재하지 못한다.
매 순간 자유 의지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BEING’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자유 의지로 선택한다는 것은 참된 자유 상태에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욕망의 노예가 된 마음, 명예욕에 빠진 마음, 타인과의 경쟁심에 불타는 마음은 비록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상은 욕망에 의한 반응인 DOING일 뿐 자유로운 선택으로서 BEING이 아니다. 무엇엔가 사로잡힌 마음, 사탄이 들었다든가, 귀신 들렸다든가,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자유 의지를 상실한 상태임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자유 의지의 선택이 불능한 상태라는 것, 존재하는 삶을 살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스스로는 잘살고 있다고 여길지라도 실상은 그렇지 않으니, 코헬렛의 외침은 지금도 우리에게 유효하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코헬 1,2ㄴ-3)
[유익한 심리학] BEING과 DOING 사이, 존재의 상대화(相對化)
우리에게 비교 평가는 매우 익숙한 행동이다. 너무도 익숙하여 비교하고 평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행동인지 잊고 산다. 그런 결과 우리 자신은 물론 타인, 사랑하는 이, 자녀 등 소중한 사람들까지도 상대화(相對化)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인간은 상대화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 존재다. 인간이 절대적 존재라고 해서 하느님의 절대성에 견주는 절대성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자기만의 유일성(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지닌 개별자로서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 심부름을 잘하는 아이와 말 안 듣는 아이,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 등 이러한 평가에 쉽게 노출되다 보니 당연한 것으로 익숙해진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점차 자신을 상대화하거나 타인을 상대화하는 일에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자신과 타인을 비교 평가한 그 위에서 살아가는 인생이라니! 그들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배우기도 전에 비교당하고 평가당한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으로 인하여 우리의 존재는 인생 시작 전부터 뇌사상태에 빠진다.
뇌사상태의 존재가 자유 의지로 선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자유 뒤에는 책임이 따르고, 권리 뒤에는 의무가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자유만 누리고 권리만 주장할 뿐 대부분의 사람이 성장을 멈춘 아이처럼 미성숙한 상태로 성인기를 맞는다. 이들은 자기가 얼마나 유일한 존재인지, 다른 자연 대상과는 달리 소중하고 귀한 존재인지를 배우기 전에 서로 비교하고 평가당하는 경험 속에서 존재에 대한 방어 감각만 잔뜩 끌어올린다.
타인의 눈치를 보는데 예민한 감각을 소유하고,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불편해하고 불안해하며 심지어는 두려워하기도 하여 우울, 불안, 대인기피라는 증상까지도 만들어낸다. 억지 부리기, 툭하면 성질내기, 작은 일에도 억울하고, 폭력적 언어사용 등 마치 초등학교 2, 3학년 생이 된 아이가 막무가내로 생떼를 부리는 모습과 흡사하다.
유독 심해지는 사람 사이의 갈등과 리더의 미성숙함으로 인한 혼란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적 문제로 인식해야 함을 제안하고 싶다. 우리 사회가 바벨탑처럼 쌓아 올린 무차별적 비교 평가의 문화와 존재에 대한 왜곡된 태도가 빚어낸 죄악상이다. 방어 감각만 각성된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란 이룰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고 살아가는 한 비교 평가를 피할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불가피하게 이루어지는 비교 평가는 행위나 능력에 대한 비교 평가지 존재에 대한 비교 평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은 뛰어난 행위를 할 수도 있고 저열한 행위를 할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무력함을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으로 사람의 존재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노동력과 자본이 깊게 결합한 사회다 보니 능력 있는 사람이 경제력을 획득한 결과로 높이 평가되어 대단한 사람처럼 보일 뿐이다.
이는 단순한 착시현상일까? 아니면 현대판 우상숭배 중 하나일까?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법
나이 들면서 갑자기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가까웠나 하는 말들을 툭 던집니다. 무의식이 자신의 죽음을 눈치채기 때문에 갑자기 죽음을 준비할 수도 있고, 또 실제로 뇌에 변화가 일어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수도 있습니다. 죽기 전 변화는 서로를 용서하고, 정말 사랑했던 사람에게 다가가 못했던 말을 하는 등 낭만적인 영화에서처럼 아름답고 긍정적일 수만은 없습니다. 전두엽쪽에 병이 생기면 오히려 더 난폭해지고, 더 수치심을 모르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장수 시대라, ‘철들자 노망난다.’는 옛말과는 조금 다르게, 꽤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 자신의 삶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고 정리 할 시간이 주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에는 단순한 산수가 적용되는 것이 아닌지, 늙을수록 더 추하고 더 초라해질까 봐 많은 이들이 걱정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과 관련있는 대목 중 하나가 마태오복음 17장 예수님의 변모 사화입니다. 우선 이 대목은 “여기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태 16,28; 마르 9,1; 루카 9,27)라고 말씀하신 후 엿새 후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같은 말을 마르코복음 9장 1절에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씁니다. 이를 예수님의 청중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역사의 종말이 닥친다는 ‘종말시한어’라고 정의합니다. 종말이 임박했다고 확신하는 말세 신앙과 연결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해석은 일주일 후에 닥칠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와 그가 아버지의 영광 속에 다시 돌아온다는 예지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사람의 아들이 갖고 있는 권위와 왕국이 부활 후 교회로 다시 내릴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신학적인 해석에 대한 판단능력은 없으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사람”이란 우리들이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진시황 식의 장수와 신체적 영생은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베드로를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런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졌습니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그분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스라엘의 동북쪽에 있는 헤르몬(Hermon, 헐몬)산에서 일어난 일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산들은 대부분 그리 높지 않지만, 헤르몬산은 해발 2000M가 넘기 때문에 초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후 사정으로 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이 산으로 올라갈 때는 수난과 부활 전 시기이니 충분히 눈이 많이 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그런데 선글라스 없이 설산에서 며칠 머물다 보면 설맹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일시적이라 대부분 하산하면 회복이 되는데, 옷이 하얗고, 얼굴이 해처럼 빛난다는 묘사가 어쩌면 그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하는 과학적인 추측을 해 보게 됩니다. 이때 환시나 착시 현상도 일어날 수 있어 모세나 엘리야의 모습이 예수님과 검쳐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조금은 발칙 한 상상도 해 보게 됩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런 장면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읽고 묵상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곧 있을 십자가에서의 수난과 부활을 준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당시 제자들로서는 모세나 엘리야에 버금가는 분을 모시게 되었으니 가슴 뛰는 순간이었을 터입니다. 한데,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모세나 엘리야와 함께했다는 사실은 이미 예수님께서 삶과 죽음의 차원을 넘어선 경계에 이르신 것이라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평범한 우리에게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므로, 사는 날까지는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열심히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기 암 환자도 죽는 그날까지 열심히 암과 투쟁하면서 사는 것을 영웅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이미 아시고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기 위해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간 것은 아닐까요.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을 데리고 간 것은 그런 족적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고 두고두고 새기라는 뜻은 혹시 아니었을까요. 가장 수수께끼 같은 대목 중 하나이긴 하지만,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과거에 죽은 사람들처럼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먼저 죽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배워 준비를 해야 할지는 각자의 선택일 것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 처럼 삶에 집착했던 이들과 매일 성스러운 죽음을 준비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삶은 많은 차이가 있을 듯 싶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준비와 완전히 반대편 쪽에 헤로데 임금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 20-25절은 아주 간단하게 헤로데 임금이 어떻게 죽었는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헤로데는 티로와 시돈 사람들과 분쟁관계에 있었는데 평화조약을 맺기로 한 날 용포를 입고 옥좌에 앉아 멋진 연설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신으로 추앙하게 됩니다. 그러자 주님의 천사가 헤로데를 내리쳤고, 그는 벌레에 먹혀 죽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신약에는 생각 외로 지옥에 대한 묘사가 많지 않은데 마르코복음 9장 48절에 지옥에서는 죄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사야서에는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이 나오고(이사 41,14) 다윗은 자신을 구더기요 백성들의 조통거리(시편 22,6)라고 비하했습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원전일까요. 벌레로 변한 자신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체험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때론 벌레보다 못한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고, 또 상대를 벌레 취급할 때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양쪽 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상실하는 순간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헤로데 임금이 벌레에 먹혀 죽었다는 것을 중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옥 불에 떨어졌다는 뜻일 수도 있고, 구더기 같은 백성들에 의해 며칠 동안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신의 반열에 이른 듯 연설을 하며 한껏 고조되었지만 결국 버러지보다 못한 죽음을 맞았던 헤로데 임금의 마지막은 예수님의 부활과 대조되는 장면입니다. 나 자신의 죽음이 언제 올지 모르나, 어떤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할지 냉정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구절입니다.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예수님의 유언
신약의 예수님 말씀 중에는 일종의 유언처럼 읽히는 대목들이 많습니다. 그중 한 대목이 마태오복음 16장 24-27절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이 대목은 마르코복음 8장 34-38절, 루카복음 9장 23-6절, 요한복음 I2장 25-26절인 사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은 꽤 많은 사람들이 자기 편한 대로 혹은 자기의 가치관에 맞추어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어쩌면 그중 하나일 것 같습니다.
먼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래서 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무, 혹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상황이나 대상들을 십자가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그런 상황까지 십자가로 이야기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깊은 성찰 없이 남용하니까요. 심지어는 타인을 무조건 비난할 때 ‘너는 내 십자가다.’라고 들이댑니다. 무조건 ‘나는 희생자고 너는 가해자다.’라는 이분법도 있습니다. 들여다보면 자신의 영달, 부귀영화를 위해 애쓰다 보니 생기는 일인데도 마치 대단한 희생을 하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지요. 어찌 보면 저를 포함한 모두가 자기의 이기심 때문에, 혹은 자기의 대수롭지 않은 재주 때문에 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집착 때문에 스스로의 무덤을 파거나 스스로 올라간 나무에서 떨어지면서 십자가 운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는 대목은 마치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 생즉사(死則生 生則死)’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오기가 쓴 「오자병법」 ‘필사즉생 행생즉사(必死則生 幸生則死)’에 나오는 말을 이순신 장군이 인용한 것이라 합니다. 「오자병법」의 원전 의도는 그저 전쟁터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곳이라 죽기를 각오해야 살지 행운을 기대하면 죽는다라며 군인들을 독려하는 문맥 중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보는 태도와 군인의 삶과 죽음을 보는 태도는 매우 다른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 말씀을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세속적인 주문으로 곡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즉 ‘목숨 걸고 일해야 출세한다, 목숨 걸고 싸워야 정권을 잡는다.’ 하는 식으로 편하게 해석하고 스스로의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이기심을 마치 예수님의 가르침인양 호도하고 포장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목숨이 프시케(Psyche), 즉 영혼, 혹은 마음으로 기록됩니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하는 대목은 육체의 손해가 아니라 영혼의 손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 목숨걸고 세속의 일에 투쟁하라는 주문으로 읽는다면 완전한 오독이 아닐까요.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자신의 육체적인 건강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소유에 목매달지 마라, 나의 행복이 중요한 것이다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물론 자신의 건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주문하신 것은 작은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큰 자기가 추구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기 때문에 본래의 의미를 자꾸 축소하고 왜곡하려는 우리 자신에 대해 좀 더 엄정하고 조심스러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스스로를 다독여도 살면서 원래 갖고 있던 순수한 꿈, 열정, 기개, 맑은 정신 같은 것들은 점점 사라지면서 그저 작은 일이나 사람에 매달리고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게 되는 것이 우리의 본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본능은 사라질 것 같지만 오히려 체력과 용모가 변해가는 만큼 자신감도, 능력도 떨어져 추한 면이 더 도드라지기도 합니다. 두려움, 공포, 피해 의식 같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만 점점 더 쌓이는 것이지요.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의연하게 아픈 나보다 주변을 먼저 살피고 따뜻하게 배려할 수 있는 이들을 만나기가 어려운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도 제자들에게 목숨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길을 잃고 주저앉아 있을 때 인생의 의무와 책임과 고통이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무겁게만 느껴질 때 “너도 나처럼 십자가를 지고 있구나.”라는 위로의 말씀이 아닌지. 그래서 어쩌면 손을 잡고 등도 밀어 주시는 격려의 처방전은 아닐까도 싶습니다.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
부활하신 후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이르신 말씀 중 핵심은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예수님을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교리에서 가르치기 때문에 예수님만 아버지의 진실한 자녀이지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하게 됩니다.
특히 어리석은 일을 했을 때, 마음이 사나와져 사랑의 마음이 사라질 때, 나는 참으로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존재이니 더더구나 하느님의 자녀는 절대 아닌 것처럼 생각됩니다. 무기력한 마음이 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거나, 혹은 스스로에게 화가 나면 나뿐 아니라 남들에게도 함부로 합니다. 하필이면 이런 존재로 태어나게 했는지, 또 그렇게 나를 키워 준 부모, 내가 속한 사회를 원망하게 되기도 합니다. 부모나 사회를 원망하는 마음은 다시 하느님께 대한 원망으로 번집니다. 하느님이 있다면 나한테 이런 불행을 줄 리 없어. 또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게 하는 하느님이라면 정말 나쁜 하느님일거야. 어떻게 세상을 이따위로 방치할 수 있지? 무책임하거나, 게으르거나, 아니면 정말 우리를 괴롭히고 싶으시거나. 그러니 하느님이 있다는 논리 자체가 틀린 것이야.… 이렇게 생각이 번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욕과 조롱 속에서 돌아가시면서 모든 희망이 사라진 제자들의 마음에도 아마 이런 번잡하고 시끄러운 생각들이 자리잡지 않았을까요. 억압과 가난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해 주실 메시아라는 희망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터라, 너무나 허무하고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셨으니까 말이지요. 이제 배신감까지 사로 잡힌 제자들에게는 뿔뿔이 흩어질 일만 남은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 당연히 믿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따지기 좋아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제자 토마스는 예수님의 몸을 만져 가면서 확인하려고 합니다.(요한 20, 25-29 참조) 무엇이든 만질 수 있는 물리적 증거가 있어야 참이라고 주장하는 현대의 과학자들과 비슷합니다.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빛, 또 형체가 없는 소리나 중력의 존재는 인정하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하십 니다.
한편으로는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을 거듭 물으십니다.(요한 21,15-19 참조) 세 번이나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했던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의 거듭된 물음에 대답을 하면서 슬픈 마음에 빠집니다. 이미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아시면서 왜 거듭 물어보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배신 때문에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의 위상이 흔들릴까 봐 더 단단한 입지를 만들어 주시려는 것, 또 용서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일까 하고 추측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난 사람과의 기억으로 행복하기 위해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용서와 수용이라는 점을 가르치기 위해 이런 일화들을 남기시지 않으셨을까요. 먼저 간 사람이 혹시라도 내게 서운한 것을 다 풀지 않고 갔다면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하고, 반대로 내가 부족해서 그 사람에게 더 큰 사랑을 충분히 베풀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자신을 결코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태도 역시 버려야 한다고 말이지요. 물론 남이든 나 자신이든, 잘못한 일을 용서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의 윤리적 소명을 수난을 통해 그대로 보여 주신 것 같습니다. 어떤 말이나 글보다 더 우리 인류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그 영향이 수 천 년 이상 지속될 수 있는 까닭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정말 세심한 마음으로, 제자들이 공과 과를 따지며 서로 다툴까 봐 말끔하게 정리까지 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애제자의 운명이 혹시라도 자신과 달리 특별하고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 또 그 사랑을 내 이웃과 실천하는 것까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잘못된 공정과 정의의 논리를 내세우는 우리의 마음을 다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속된 성공하는 일뿐 아니라 천국에 가는 것, 부활에 동참하는 것까지,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 하다니요!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죄가 많으니 천국에는 절대 못 갈 거야, 하는 식으로 남과 나를 죽을 때까지 비교하고 있네요.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느라 정작 필요한 내 일은 제대로 하지 못했던 잘못된 습관을 죽음의 순간까지 끌고 가면 내 손해입니다. 신앙이란 결국 신과 나와의 일대일 관계일 뿐이지 남들이 어떻게 되든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자녀다운 죽음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는 막막합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수난의 길은 도저히 실천할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는 일들입니다. 아마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자주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냥 오늘 하루 즐겁게 살면 되지, 하고 말입니다. 우리 모두 결국 겪을 마지막 종착지라 해도, 죽음의 과정은 상상만 해도 무서우니까요. 우리 모두 피하고 싶은 바로 그 마지막 시간이 결국 내 존재의 실체와 살아온 과정 전체를 정직하게 직시하게 해 준다는 점을 성경 속의 수난과 부활의 장면들은 넌지시 이야기해 줍니다. 그 마지막 순간, 부족하고 어리석은 자신에 대한 집착과 미련은 다 벗어 버릴 수 있다면, 그래서 오로지 사랑으로 살고 사랑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신에 대한 깨달음이 번개처럼 찾아오기만 한다면, 정말 크고 깊은 축복이 되리라 감히 상상하고 소망해 봅니다.
[유익한 심리학]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다 이루어졌다.”
이 말씀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마지막 말씀이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람의 행위로 그 존재를 평가해서는 안 되겠지만, 행위가 존재에 준한다는 라틴어 격언은 맞는 말이다. 사람의 행위는 그 사람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졌다”라고 하신 말씀에는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이루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로서 자신을,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살아냄, 자유로운 선택으로 이루어진 행위들의 집합체로서 자기 삶, 곧 존재를 이루신 것이다. 구세주로서 자기 존재를 온전히 살아내기 위해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십자가의 길’이었다. 따라서 누구든 자기 존재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자기 십자가’(마태 10,38; 루가 14,27. 참조)를 짊어져야 하는 까닭이다.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사람은 자아실현 경향성을 타고나며, 자기실현의 삶을 살아갈 때 행복하고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누구든 “다 이루어졌다”라는 마지막 말을 뱉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여기에 다른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누구든 자기 존재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하느님과 하나 됨에 이른다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하느님과 하나 될 때 비로소 모든 여정을 마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관계의 하느님이요, 그래서 인격신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자아실현은 우리가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를 결정하는 우리의 선택이 이루어낸 결정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다.
‘지금-여기’에서 주님의 크신 선물인 자유의 선택으로 나는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갈지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여기’에서 나의 행위요, 그 행위를 통해 ‘나는 존재한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은혜로운 순간인가?
이 순간을 놓치고 이승에서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 얼마나 나태하고 어리석은 생각인가? 어느 시대보다 현대인들은 ‘자기 SELF’에 관심이 많다. 아무리 관심이 많아도 그래서 욕심껏 하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제대로 보고, 제대로 생각할 줄 모르면 모든 것이 낭패로 끝날 수 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자기 존재는 궁극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로 나아가는 ‘나’를 이루는 일이기에 내 욕심껏 산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아실현에는 하늘의 뜻도 담겨 있으니 ‘나에 대한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자기를 실현하겠다고 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뜻이 있으니, 그것이 사람의 눈에는 작게 보이고 하찮게 보일지라도 하늘나라를 위한 일은 결코 비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충실한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5,23; 루카 16,10; 19,17.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