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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거룩한 사람이 되라
출 22: 28-31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인지를 가르쳐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빌 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본문 31절 말씀에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설명하면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권위나 물질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에게,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본문에서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정신으로 살아갈 때 거룩하게 되어지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믿음의 길에 바로서서 영적인 정신을 세워 나갈 수 있는지 보여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감사를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감사하는 삶을 통하여 거룩하게 되고 풍성한 영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 내닫는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삶은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의 길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은혜에 감사하고 풍성한 마음으로 기쁨이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여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본문 28절 말씀을 보면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공동 번역 성경의 말씀을 보면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욕되는 말을 하거나 너희 백성의 지도자에게 악담을 하지 못한다." 원문에 보면 재판장을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레위에게는 손손자가 되는 고라와 르우벤의 자손 중에서는 다단과 아비람 그리고 온이 이스라엘 중에서 족장 250명의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고 불만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 사람들의 하는 말이 "모든 이스라엘이 다 거룩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우리 가운
데 계시는데 어찌해서 모세와 아론만 이스라엘의 높임을 받아야 하느냐~!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응답하고 우리의 기도도 들으시는데 왜 당신들만이 우리의 지도자고 될 수 있느냐고 불평하고 노골적으로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속한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거룩한 자가 누구인지 보이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라와 그 무리에게도 향로를 취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향로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두라고 하였습니다. 이백 오십개의 향로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각기 향로에 불을 담고 향을 그 위에 두고 모세와 아론으로 더불어 회막문에 섰습니다.
고라가 온 이스라엘 사람들을 회막문에 모아서 그 두 사람을 대적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광이 온 회중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면에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에게서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물건도 아무 것도 만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땅이 갈라지고 동시에 그들 모두를 삼켜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은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것은 먼저 하나님의 것을 거룩하게 하며 원망이 없이 오직 겸손함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길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나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감사의 자리를 우리가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한 명령에 순종하여 오직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거룩한 예물은 신속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본문 29절 이하의 말씀에 "너는 너의 추수한 것과 너의 짜낸 즙을 드리기에 더디게 말지며 너의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너의 소와 양도 그 일례로 하되 칠 일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팔 일 만에 내게 줄지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물을 드리되 추수한 것에서 그리고 짜낸 즙을 더디게 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처음 난 아들과 소와 양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그런 예물은 아니지만 헌금을 준비하여 드립니다. 이 헌금은 세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예물을 가지고 주 앞에 나오라"고 하시는 말씀을 따라 드리는 우리의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소중한 모범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대상 29:14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표현함으로써 다윗은 자기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으로 받은 것임을 인정하고 드렸습니다.
바울 사도도 고린도전서 4:7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처럼 자랑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헌금은 세금이 아닙니다. 감사의 예물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자원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모세 시대에도 헌금과 관계된 이야기에서 "자원해서, 기꺼히"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억지로 드린 헌금은 우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바울 사도도 주께서 자원하여 드린 예물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는 찬송의 고백처럼 오늘의 나의 호흡도, 들여 마시는 공기도 하나님의 은혜인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릴수록 기쁨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에서도 저축을 하는 것처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준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향하여 부요한 자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말씀처럼 하늘의 부요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되지 않고 오직 하늘의 부요한 자가 되어서 살기 바랍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귀한 은총에 든든히 세움을 입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보다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본문 31절의 말씀을 보면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것의 고기를 먹지 말고 개에게 던질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궁국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지도자들을 저주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시는 소망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추수한 예물과 즙 짠것과 여러 예물을 드리도록 말씀하시는 것도 역시 어떻게 하면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물질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신기하게도 인간이 가난을 느끼고 부요를 느끼는 것은 물질의 많고 적은 것에 있다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더 많이 라는 단어를 가슴에 새기고 살아갑니다. 미국인의 통계에 따르면 지금부터 100년 전에는 그들의 생활에 필요한 것은 200가지 품목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16가지가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품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72가지는 부족한 것이었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최근에는 더 복잡해져서 사람들에게 32,000가지의 품목이 필요하고 필수품도 94가지로 늘었지만, 부족한 물품은 484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문명의 이기의 갖가지 혜택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평과 불만, 왠지 모자라는 자신의 삶에 깊이 회의를 보내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욕망을 추구하고 향락을 추구하다보니 감사의 마음은 사라지고 자신의 삶에 만족은 없고 결국 하나님께도 감사할 줄 모르는 절망적인 영혼의 병에 걸려서 신음소리를 내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2차 대전'이라는 대하소설을 집필하여 세계인의 주목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코넬리우스 라이언은 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코넬리우스는 5년간 암과 투병하다가 죽었습니다. 그의 미망인이었던 라이언 여사는 그가 죽은 후에 '가장 길었던 날'이라는 회고록을 썼는데 거기에 코넬이우스의 죽음 앞에서도 영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의연한 고백이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드린 다섯 가지 감사가 있었다.
다시 한번 아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 아이들을 오늘 하룻 동안 볼 수 있었던 것, 소설을 거의 탈고할 수 있었던 것, 병과 싸울 수 있는 의지가 있었던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늘도 나를 향해 미소짓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세상에 돈이면 다 해결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길을 알았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도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거룩하신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는데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를 아시겠습니까? 영혼을 흔드는 거룩한 음성이 가슴속에 밀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하나님의 이 귀하신 초대에 오늘도 아낌없이 헌신하고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드리기를 더디게 말라
출 22: 29-3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정국가의 백성으로 마땅히 행해야 할 종교적 의무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행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의무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대한 모독 금지입니다. 곧 바른 대신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1계명, 제 2계명, 제 3계명에 속하는 것입니다.
둘째 올바른 헌금입니다. 곧 바른 대물관계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소유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인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거룩한 생활입니다. 곧 자신과의 바른 관계인 신전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른 대신 관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율례를 자발적으로 지킬 때마다 하나님이 나의 주시며 나의 지배자이시며 나의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하나님께 드리기에 더디게 말지며』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바른 대물관계에 국한합니다. 대물관계는 대신 관계와 대인관계와 자신과의 관계인 신전 인격과 각각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또 다른 관계들입니다.
"드리기를 더디게 말지며" 라는 말은
Ⅰ. 만인 제사장직의 실천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고 했습니다.
1) 추수한 것을 드리는 제사장 입니다.
본문 22장 29절에 『이는 너의 추수한 것과 짜낸 즙을…』라고 했습니다.
여기 '너의 추수한 것과 너의 짜낸 즙은 '너의 충만함과 너의 흘리는 것' 을 의미합니다. 풍성한 수확으로 인하여 곡식과 과일의 무르익어 땅에 떨어지고 있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는 하나님께 바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2) 처음 난 아들들을 드리는 제사장입니다.
본문 22장 29절에 『…너의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라고 했습니다.
처음 태어난 아들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규례를 통하여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신 것과 그의 백성의 구원자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3장 2절에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처음 난 아들을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는 것은 풍성한 수확에 대해 감사가 형식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형식적인 감사로 인하여 오히려 경시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장자들은 희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과정에서 나타났고 한나가 사무엘을 성전에 바치는 것으로 상징화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진정한 감사는 진정한 사랑에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3) 초태생 짐승을 드리는 제사장입니다.
본문 22장 30절에 『너의 소와 양도 그 일례로 하되 칠일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팔일만에 내게 줄지니라』고 했습니다.
소와 양의 초태생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드려졌습니다. 왜냐하면 새끼들이 어미를 떠나도 안전한 시기가 바로 이때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22장 27절에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칠일 동안 그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제 팔일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열납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8일이라는 숫자는 종교의식상 할례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7장 12절에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본문에 『내게 줄지니라』를 직역하면 '너는 그것을 나에게 줄 것이다'가 됩니다. 틀림없이 내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드리기를 더디게 말지며"라는 말은
Ⅱ. 감사와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사장직의 실천입니다.
본문 22장 29절에 『…드리기에 더디게 말지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더디게 말지며'를 직역하면 '너는 지연시키지 말라'가 됩니다. 더디다는 말의 우리 국어사전적 의미는 '움직이는 시간이 오래다' '몸과 마음의 동작이 느리다'입니다. 특별히 이 말은 할 수 있는데도 스스로 지연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감사와 진정한 기쁨 없이 형식적으로 드릴 때 더디게 됩니다. 의무감에서 드릴 때 억지로 드리게 됩니다. 의무는 달갑지 아니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국방의 의무를 대부분 억지로 하지 기쁨으로 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납세의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더디게 드리는 것은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1) 어떤 기쁨입니까?
① 그 기쁨은 구원 받은데 대한 기쁨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0절에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51장 1절에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5장 15절에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32장 6절에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라고 했습니다.
② 받을 상에 대한 기쁨입니다. 마태복음 5장 12절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했습니다.
③ 은혜에 대한 기쁨입니다. 열왕기상 8장 66절에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과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인하여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하였더라』고 했습니다.
④ 주의 교회가 든든히 서 가는데 대한 기쁨입니다. 사도행전 6장 4-5절에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라고 했습니다.
2) 어떤 감사입니까?
① 모든 은택을 잊을 수 없어서 드리는 감사입니다. 시편 103편 2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②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드리는 감사입니다. 하박국 3장 18절에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③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드리는 감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라고 했습니다.
④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했습니다.
⑤ 우리의 믿음이 세상에 공개된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로마서 1장 8절에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⑥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입은데 대한 감사입니다. 골로새서 3장 15절에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범사에 감사로 인하여 기뻐하고 기쁨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샘물은 퍼내면 샘물이 솟아납니다. 젖 짜는 소는 젖을 짜내어야 젖이 나게 되고 젖이 나는 소는 주인의 사랑을 받고 좋은 먹이를 먹을 수 있습니다.
매일 매일 젖을 짜내지 않으면 얼마 지난 후에는 젖을 짤 수 없게 됩니다. 결국 그 젖소는 도살장으로 가게 되고 맙니다. 감사를 더디 하는 것은 기쁨과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데 대한 배은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자발적으로 하지 않고 그 어떤 의무감에서 할 때 견마지양(犬馬之養)격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도리어 하나님을 능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개 2장 8절에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를 당신 앞에 드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은 물질이 나의 지배자가 아니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드리기를 더디게 말지며"라는 말은
Ⅲ. 영적 예배를 드리는 제사장직의 실천 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너희 몸은 인격으로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산제사는 죽여서 드리는 구약의 제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예배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가치와 존재의의와 목적을 주님을 섬기는 데 두라는 말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은 우리에게 있는 유형무형의 달란트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즉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과 우리의 모든 소유된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라는 말입니다.
1) 기독교 윤리의 실천입니다.
로마서 8장 13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상한 윤리와 도덕성을 지향해야 합니다. 인간의 육적 욕구를 죄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육적 욕구가 지나쳐서 영적 욕구와 대립될 때는 육적 욕구를 복종시켜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와 관련하여 교훈하시기를 마태복음 5장 30절에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야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단순한 도덕철학이나 이상의 구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하는 진리실천의 현장화에 빛과 소금을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2) 자신의 소득(소유)을 드림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2-3절에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라고 했습니다.
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헌금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표시로 하나님께 바치는 물질을 의미합니다. 헌금(獻金, 율로기아, )과 연보(捐補, 카리스, )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의미는 다릅니다.
전자는 돈을 바친다는 의미로 광범위하게 쓰이지만 후자는 교회에 국한되어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오늘날 헌금은 예배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행위입니다.
첫째는 돈에 지배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헌신의 의미가 있습니다.
셋째는 감사와 기쁨입니다.
넷째는 더 나은 것에 대한 소망입니다.
(1) 헌금하는 이유입니다.
① 모든 은혜를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03편 3절에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라고 했습니다. 시편 116편 12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했습니다.
②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27장 30절에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고 했습니다.
잠언 3장 9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했습니다.
③ 하나님의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5장 1-11절에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고 했습니다.
(2) 헌금하는 자세입니다.
① 풍성하게 넘치도록 해야 합니다(고후 8:2). ② 힘에 지나도록해야 합니다(고후 8:3). ③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마 6:4).④ 대가를 바라지 말고 해야 합니다(마 10:8; 눅 6:38; 12:33). ⑤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고전 16:2). ⑥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고후 9:7). ⑦ 아낌없이 해야 합니다(민 7:13; 왕상 3:4; 왕하 5:5; 대상 29:2). ⑧ 순전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롬 12:8).
(3) 헌금의 바람직한 용도입니다.
① 성막(성전)건축에 써야 합니다(출 30:16).② 구제에 써야 합니다(신 15:7, 8; 고린도후서 9:1-15; 요일 3:17). ③ 제사장(하나님의 사역자들)의 분깃으로 써야 합니다(민 18:20; 살전 2:9) ④ 국내외의 선교사역을 지원하는 일에 써야 합니다(고후 8:16-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가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금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면 설교자와 성도들이 피차 부담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애써 한 마디로 정리하면 아직도 우리에게 있는 세속화 때문입니다. 그 세속화가 우리에게 황금만능주의와 과학지상주의를 합리화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겉잡을 수 없는 인본주의로 치우치게 합니다. 보지 않고 믿지 못하고 보고 경험해 보아야 믿게 되는 세상입니다.
실존주의자 샤르트르는 "나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나의 존재로서의 가치"라고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지는 목적론적 존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이 창조하는 것은 모든 것이 목적이 있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샤르트르는 하나님의 목적론적 창조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노자에게도 다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학" 에서 "누구나 남이 하여 주리라고 기대하는 , 임무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은 오늘날 극에 달하는 개인주의(aggressive individualism)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근래에 와서 가렛 하딘(Garrett Hardin)이나 일리노 오스트럼(Elinor Ostrom) 같은 학자들도 공유의 비극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기주의는 자신의 생명조차 거스리는 반인간적이고 반인륜적인 병폐입니다. 데이비드 흄은 그의 '인간 본성론" 속에서 "내 손가락의 상처보다 전 세계의 파멸을 더 선호하는 것은 이성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악의에 찬 말을 던지고 있습니다. 언제쯤 공중전화가 내 집 전화기처럼 깨끗해 질까 ?언제쯤 공중화장실이 내 집 화장실처럼 깨끗해 질까? 언제쯤 내 집을 마련하는 것처럼 교회 건축에 밤낮으로 고민할까? 학개는 이것을 지적했습니다(학 1:1-3).
하나님은 개인화는 기뻐하시지만 개인주의는 미워하십니다. 대상에 대해 관심이 있으면 더디지 아니하고 빨리합니다.
예수님은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행 20:35). 심고 거둠으로 우리의 필요한 물질을 공급하는 것이 하나님의 물질에 대한 경륜입니다 (사 55:10). 하나님의 창고에 들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고를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잠 3:9-10). 가난한 자를 권고하는 자는 복이 있어 재앙의 날에 하나님의 건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시 41:1).
잠언 11장 24-25절에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했습니다.
전도서 11장 1절에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욥기 22장 24-25절에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며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