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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서 굳게 서십시오
성경본문 : 잠언 8: 1-11
1.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2.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사거리에 서며
3.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가로되
4.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5.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찌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찌니라 너희는 들을찌어다
6.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7.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8.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
9. 이는 다 총명 있는 자의 밝히 아는바요 지식 얻은 자의 정직히 여기는바니라 10.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11.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무릇 원하는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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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 12-17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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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열렸습니다. 새해를 21세기의 진짜 첫 출발이라고들 많은 이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동양의 수 계산식으로는 새해부터가 21세기라는 말입니다. 하여간 20세기는 완전히 가버렸고 21세기의 첫해의 길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앞길에는 안개가 자욱합니다.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너무나 불확실한 길에 들어섰습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뛰고 싶어도 뛸 수 없습니다. 걸어가기는 하지만 소걸음입니다. 매사에 자신이 없습니다.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기에 엉거주춤할 수밖에 없습니다. 확실한 진리 위에 굳게 서 있지를 못한 때문입니다.
현금의 가치관의 혼란을 보세요. 무엇이 옳고 그른 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습니다. 이런 혼란은 이른바 “시장경제” 라는 용어가 잘 들어내 주고 있습니다. 최고의 정책입안자들까지도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고 있습니다. 최고 입안자나 결정자 자신의 어떤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경영하고 통치하는 것이 아니고 시장에 맡겨서 거기서 결과되는 것이 최고의 가치요 진리라는 것입니다. 신년사에서도 최고의 결정권자의 입에서 나라의 경제를 시장에 맡긴다는 말이 쉽게 내뱉어지는 것을 들으면서 문제는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늘의 사회전반의 가치관의 혼란은 이른바 “신자유주의”라는 용어 속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란 자본의 시장에게 정치와 경제를 몽땅 맡긴다는 뜻입니다. 국가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무너진 이후에 자본을 중심한 시장경제주의는 무서운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의 케인즈 경제학에서는 노동의 힘이 자본의 힘과 더불어 함께 가면서 서로를 견제하면서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화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는데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이번에 금융노조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굳어져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노동의 힘은 자본의 힘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고려대 교수였고, 매우 양심적인 지성으로서 인정받는 강만길 교수가 새해 1월 1일 신문에 기고한 신년특별기고를 읽어보니 지금 정부가 하는 일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신자유주의 정책이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월러스틴의 말을 인용하면서 신자유주의가 50년 못 간다고 언급을 했습니다. 자본주의에 맞섰던 사회주의라는 도전 체제가 없어진 후에 매우 방자하게 된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앞으로 꾀 오랫동안 거침없이 자기 세력을 확장할 것입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면서 강 교수는 21세기의 과제는 민족의 통일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어떻게 극복해 가는가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체를 지난 IMF를 당하면서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기독시민사회연대에 동참하면서 이 분야에 대하여 전문 경제학 교수들에게 듣고 배우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는데 미국과 구라파에서는 70년대 초부터 신자유주의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세계가 일차 석유파동을 겪던 1970년대 초부터 케인즈의 경제정책이 바뀌면서 신자유주의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원조가 오스트리아 출신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인데 1974년에 노벨경제상을 받았고 다음해에 시카고대학을 중심하여 신자유주의를 조직화시킨 밀튼 프리드만이 노벨 경제상을 받았습니다.
이런 경제학자들의 지론은 국가가 시장개입을 못하게 하고 시장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자본이 시장에서 마음대로 활개를 치도록 정부가 막아서는 아니 된다는 경제이론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여 환율이 올라도 정부는 손을 못쓰니 것이 아니라 안 씁니다. 시장이 움직이는 것을 방관하고 방치하는 길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하여야 우리나라의 경제가 유지된다는 이론입니다. 지금 경제장관과 그 슬하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신자유주의를 서구에서 공부하고 돌아 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 교수의 말대로 우리나라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시행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종주국인 미국의 경제제제를 아니 받으려면 그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경제정책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힘도 없고 또한 그렇게 할 배짱 있는 관료들도 없습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의 삶이 시장의 경쟁과 싸움에 맡겨진 셈이 되었습니다. 세계를 주름잡고 마음대로 주무르는 저 거대한 신자유주의 앞에 우리 백성들 모두는 꼼짝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 엄청난 미국의 자본, 일본의 자본 앞에서 우리 가난한 백성들이 세계의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요? 정말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신자유주의 바람으로 하루에 일달라(1300원) 미만으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13억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절대빈곤층은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 중에 특히 어린이들과 여성들의 희생은 엄청나다고 합니다. 남미와 아프리카 지역의 빈민들의 삶은 처참하다고 합니다. 사하라사막 아래쪽의 가난한 국가들의 인구중 33%가 40세 전에 죽는다고 합니다. 가난하여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사니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실업자가 100만 명으로 다시 뛰어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시장에서 물건을 많이 팔아서 많은 이익을 남기려면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도 경쟁에서 이길 확률이 적은데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까? 여기에 우리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싫던 좋던 자본의 시장에 던져졌습니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이제 이 속에서 그리스도인들로서 어디까지 경쟁을 해야하는 가요? 어느 정도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싸움을 해야하는가요? 어떻게 해야 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일까요?
지난 일년동안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도 이 무서운 경쟁에서 져서 퇴출당한 분들이 여러 명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희생자들입니다. 그토록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회사를 살려 보려고 했는데, 그토록 자기기업과 자기 일터를 아끼면서 최선을 다 했는데 하루아침에 기업을 잃고 직장을 잃은 성도들의 그 아픔을 어찌 필설로 다 표현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전화까지 끊고 지내는 그 아픔은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억울함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를 그대로 나의 신조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인 경쟁을 하면서 살아야 할 판입니다. 돈이 돈을 만들어 가는 세상에서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돈을 벌어야하겠다는 앙심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추세가 아닐까요? 신자유주의를 100% 이
용하는 자들에게 패배 당하고 질식하는 이웃들을 생각하면 악이 바쳐서 별 생각들을 다하게 됩니다.
최근에 와서 기독교자선사업단체들이나 사회선교기관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회원들이 회비를 내지 못하여 비싼 임대료를 물던 종로5가의 사무실을 비어주고 값싼 동네로 이사를 가고 있습니다. 제가 공동대표로 있는 기독시민사회연대도 회원들의 회비가 거의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회원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양심적인 평신도와 젊은이들이 회원으로 있는데 지난 몇 달 동안 회비가 거의 들어오지 않아서 직원들 봉급을 못 주게되어 2명이 사직을 했습니다. 많지 않은 봉급인데도 조달이 안되어 직원이 잘리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경실련도 비슷한 형편에 처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공기관에 보조 청원했다가 빈축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의 영향입니다.
자본이 있는 자는 마치 눈덩이 불어가듯 점점 많아지고, 없는 자는 본전 자체가 점점 까 먹혀 줄어드는, 이른바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좀 나아지겠지? 이번 봄에는? 아니 가을에는? 내년에는? 하면서 기대를 거나 자본을 갖지 못한 자의 아픔은 앞으로 계속 심화될 것입니다. 단단히 각오하지 않으면 낙심하고 절망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점점 살기 어려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각오하셔야 합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진짜 불확실한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뉴욕의 월가에서 하룻밤 사이에 수조 원의 돈이 전파를 타고 세계의 사장을 석권하는 사이에 서울의 가난한 우리들의 살림은 더욱 쪼들리게됩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요?
우리는 계속적으로 이 문제 앞에 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시대 안에서 우리 기독인들의 영성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요? 지난 12월호 기독교사상에 우리 한국의 교회사에서 경건과 영성으로 산 사람들의 모습들을 소개하였습니다. 이유는 물질만능주의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영성을 잃고 점점 세속화되어 가는데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이들의 삶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중에 한 분이 제가 어렸을 때 다니던 아현교회 목사님 김현봉 목사님이었습니다. 제가 어머님의 손에 이끌려 이북 강원도 통천군 송전이라는 고향에서 월남하여 정착한 아현동 피난촌에서 살 때 만나게된 교회요 목사님이셨습니다.
김 목사님은 정말로 청빈한 삶을 사셨습니다. 6. 25 전후 당대의 생활상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집없는 가난뱅이들이 우글댔습니다. 이러한 분들에게 그가 가르친 것은 정직과 청빈의 삶이었습니다. 모두들 까만 광목 옷을 입게 하였습니다. 그분은 교인들이 내는 헌금으로 교회 뒷집들을(하꼬방집) 사서 교인들에게 나눠주면서 살게 하였습니다. 저희 가정도 그곳에서 오랫동안 산 기억이 납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실 때 리어카로 자기 시신을 운구하도록 했습니다. 그 장례식 사진이 지금도 제 어머님이 가지고 계시는데 그토록 청렴하고 청빈한 목사님을 통하여 저는 많은 영향을 받았고 목사의 길로 들어서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만약 지금 그 목사님이 사신다면 어떻게 사셨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그는 그 모습 그대로 사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에게도 그런 수도원적인 삶을 살도록 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때도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회적인 교섭을 하면서 살아야 할 일반 성도들로서는 머리를 빡빡 깎고 광목 옷을 입고만 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시대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물질적인 다과에 의하여 자신이나 이웃을 평가하는 잘못된 사고를 더 이상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김 목사님은 비록 겉은 보잘것없는 삶을 살았으나 그의 삶의 내용은 알차고 힘차고 의미로 충일했던 삶이었습니다. 이 점을 오늘의 우리들이 배워서 자본만능의 시대 속에서 외적인 치장에 절대 놀아나지 말고 믿음과 경건의 장식으로 알찬 삶을 만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무서운 경쟁사회 속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머리 둘 곳이 있으면 만족하고 큰 욕심을 버리자는 것입니다.
투기를 해서는 안됩니다. 나의 살 집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또 다른 큰집을 욕심내지 말자는 것입니다. 조그만 집에 살다가 가족들이 늘면 어쩔 수 없이 큰집을 구하여 나가야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작은 집이라고 하여 부끄럽게 생각말고 당당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작고 낡은 차라고 하여 창피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마음으로 새차를, 큰 차를 살려고 하지말고, 검소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예:우리 교회 모 장로님의 오래된 차와 늘 입는 옷. 정말 검소한 삶을 보게됩니다.
신자유주의 시대 속에서 세속화의 무서운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어닥칠 것입니다. 자칫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논리에 빠져들게 됩니다. 위에서 소개했던 1974년도에 노벨경제상을 받은 hayek는 그의 강연 “지식소유의 시도”에서 “의식적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원죄” 라고 규정했습니다.
즉 겸손하게 시장의 원리에 복종하지 않으면 원죄를 짓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신자유주의는 한 마디로 “선을 행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일을 금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지 말고 시장에 흐름에 자신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이런 무서운 논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논리에 빠져가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알게 모르게 선을 행하면 죄라고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청빈하게 사는 것이 죄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여러 성도님들은 오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이 시대 속에서 여러분들을 올바로 인도할 스승은 성경밖에 없습니다. 노벨경제상을 받은 사람,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의 말은 이 세계를 더 무서운 곳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딤후3:14절:“너는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
그러면 잠언 본문 그대로 지혜롭게, 명철하게 됩니다. 금년도 우리 교회 표어입니다.
하나님의 날 주일까지도, 주일 오후 시간까지 경쟁하고 싸우려고 세상으로 나가지 마시고 오후 성경반에 참석하여 차분히 말씀을 배우십시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와 명철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참석 아니하는 분들이야 말고 바보들입니다. 금년의 표어를 늘 생각하면서 먼저 겸손히 성경을 배우십시다. 각반으로 나뉘어서 재미있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참석을 아니한 분들도 오늘부터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잘 배우셔서 확신하는 진리 위에 우뚝 서서 당당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