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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단상(斷想))
전 호 준
밤부터 내리던 비가 하루 종일 오락가락 이어진다.
수줍은 봄 처녀의 입김처럼 뿌연 안개비가 소리 없이 조용조용 오는 둥 가는 둥 내리고 있다. 첫눈은 오는데, 왜? 첫 비는 오지 않을까?
한겨울에도 비는 오지만 한여름에 오는 눈은 볼 수가 없으니. 사람들은 봄비와 첫눈의 추억들만 노래하는 게 아닐까?기다리던 연인을 마중하는 마음으로 우산도 없이 홀린 듯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생각과 필요에 따라 봄비를 반기기도하고 싫어도 하지만 나에게는 봄비가 너무나 고맙고 잊지 못할 은혜의 비다.
“춘(春) 우(雨)여(如)고-나-행(行)인(人)-은-오(惡) 기(其) 이(泥) 녕(寧)하고” ....생략, 명심보감 성심 편에 나오는 당나라 때 정치가 허 경종이 말 한 글이다.
“봄비가 기름 같으나, 행인들은 그 진흙탕 길을 싫어한다는 뜻이다.”
만물을 소생시키고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기름 같은 봄비지만 잠깐의 불편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의 양면성을 돌아보게 하는 경구가 아닐까?
지난밤 기상정보와는 달리 내리는 빗방울이 감질나지만 그래도 마냥 반갑기만 하다. 봄비는 기름같이 귀중한 것이라 하늘도 절제하는 듯 비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야속하리 만큼 양이 많지 않다.
“아이구! 비가 계속 오네” 무슨 놈의 특별한 나들이 계획이라도 있는지 창밖을 내다보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대던 아내의 한마디가 여운이 남는다.
불과 이태 전만 해도 봄 가뭄으로 파종 시기를 놓칠까, 노심초사 하늘만 쳐다보며 비를 기다리던 농사꾼 아낙네의 시절을 벌써 잊어버린 것일까?
시들어 가는 과일나무의 꽃잎을 애처로이 바라보며 한 동이의 물도 아쉬워 물웅덩이가 바닥을 들어낼 때까지 퍼 올리던 지난 세월, 농사일을 접은지 두어해, 가뭄 따위는 강 건너 불구경 되었으니, 도시생활에 젖은 탓일까? 망각 탓일까?
인간들의 마음은 양심(良心)이 아닌 양심(兩心)이 조정하는가 보다.
우산 장수와 짚신장수 두 아들을 둔 어느 어머니의 옛 이야기와 같이 인간들의 이기심에 하늘도 어리둥절 하늘 노릇 하기가 쉽지 않을듯하다.
예로부터 봄비는 돈 비요, 가을비는 떡 비라 했다.
봄비가 잦은 해는 풍년이 든다고 한다, 하루는 새벽으로 시작되고 한해의 준비는 봄이 좌우하니, 그래서 봄비가 내리면 농부들은 돈이 내린다며 좋아했는가 보다.
철모르던 어린 시절 기다리던 봄 소풍이 갑작스러운 봄비로 울상을 짓고 있을 때 이른 아침 돈이 온다며 우장을 등에 업고 삽을 챙겨 들판으로 나가시던 아버지의 환한 모습이 원망스러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해마다 이맘때면 전국이 온통 축제와 각종 행사의 봇물이 터지듯 한다, 몇 시간 또는 하루의 행사를 위해 준비한 몇 날 며칠의 고생이 봄비라는 복병을 만나면 무산되거나 연기되는 일로 허탈함을 넘어 봄비를 혐오하게 한다. 특히 주말에 내리는 봄비는 희비가 엇갈린다.
고달픈 일상을 벗어나 모처럼 나들이를 준비하던 상춘객은 물론 상춘객을 기다리던 노점상들에겐 생계를 위협하는 달갑잖은 훼방꾼이지만, 봄날의 불청객인 산불예방에 비상이 걸려 달력의 주홍 글자를 보지 못하는 색명이 되어버린 일선 행정 공무원들에게는 삼대 구년 만에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며 심신을 재충전하는 하늘이 하사하신 크나큰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지난주 제7차 세계 물 포럼이 대구, 경북에서 열렸다.
생명의 근원인 물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앞으로 예상되는 세계적인 물 부족 사태를 범세계적으로 대비하려는 아주 의미 있는 모임 이였지만 천혜의 기후조건을 부여받아 이제까지 물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아온 우리들의 선조들은 졸부들의 무분별한 낭비벽을 빗대어 돈을 물 쓰듯 한다고들 했다.
물을 물 쓰듯 써버린 탓일까? 이젠 우리나라도 물 부족 국가로 지정될 만큼 위기가 코앞에 다가 왔는데도 대다수 사람들은 그 사실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으니, 멀지않은 장래 물을 돈 쓰듯 해야 할 시대가 가까이 온 것 같아 걱정스러운 마음이다.
온몸을 빗물에 던진 체 수성못 벚꽃길을 나 혼자 걸으며 이십여 년 전 내 생애 가장 고맙고 반가웠던 그해 봄비가 잊어진 나의 생각을 일깨운다,
일선 행정 기관에서 산불 주무 담당으로 근무할 때이다. 그해의 봄 가뭄은 유달리 심했다. 가뭄 탓인지 전국적으로 연이여 발생하는 산불로 소중한 산림 자원이 잿더미로 변하는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계속되는 비상근무에 파김치가 되어버린 심신을 달래며 오늘은 무사히. 퇴근을 서두르던 4월 초순 어느 토요일 오후 7시쯤 전화벨이 요란을 떤다.
00리 마을 뒤 00 산에 산불이 났다는 이장님의 다급한 신고 전화다.
입춘이 지난이후 벌써 몇 번의 크고 작은 산불로 면역이 생긴 터라, 오히려 올 것이 왔다는 마음가짐으로 전 직원 비상호출, 의용소방대 출동 명령, 지원 가능 마을 주민 등을 동원 현장에 도착했을 땐 어둠이 삼켜버린 저 멀리 산등성이에 삼각형 모형을 그리며 타오르는 불길이 악마의 혓바닥 같이 널름대며 춤을 추고 있었다.
아연실색 이 어두운 밤 험한 산속에 치솟는 불길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하필이면 이 밤에 어느 귀하신 몸이 불을 냈을까? 밤이라 헬기 지원도 불가능하다. 어쩔 것인가? 죽기 아니면 까물어 치기다.머뭇거리는 진화대를 독려하고 산길에 익숙한 현지 주민을 길잡이로 세워 십여 명으로 삼 개조를 편성 전투에 임하는 병사의 마음으로 삼각형 불길을 따라 휴대용 손전등에 의지해 위험하고도 무리한 진화 작업이 시작됐다.
신속한 신고와 발빠른 대처,산불 진화에 이골이 난 용사들이라 몇 시간의 사투 끝에 다행히 웃 불길은 잡을 수 있었다.
면사무소에서 보내온 우유와 빵으로 저녁밥을 대신하고 안도의 한숨을 돌리며 안전을 고려해 수고하신 주민들은 먼저 돌려보내고 우리 직원들과 의용소방대원들만 남아 모닥불에 둘러서서 잔불 정리 계획을 논의 중이었다.
야속하게도 산 중턱 한곳에서 다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잔불 정리를 하지 않고 내려온 터라 예상은 한 일이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험한 산길 다시 오를 엄두도 나질 않고 책임자로서 안전사고가 걱정되는 상황이다.
다시 기세를 더해가는 불길을 바라보며 공무원이 된 것을 처음으로 후회하며 회한에 잠겨 결단 을 내려야하는 순간 누군가가 “빗방울이 떨어진다”며 소리친다.분명 꿈은 아니었다. 고함 소리에 정신이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 한 점보이지 않은 먹물 같은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이런 것을 두고 천우신조라 했던가. 봄비 같지 않은 봄비가 한줄기 세차게 쏟아진다. 상황 -끝.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내 생애 이렇게 고맙고 반가웠던 봄비가 두 번 다시 있을까? 봄비 오는 수성 못 벚꽃길을 무작정 걸으며 봄비 사랑에 취해본다.
줄기줄기 후려치는 비바람에 꽃잎들이 눈송이 같이 휘날린다.
떨어진 꽃잎들이 어느 겨울 문턱에 살짝 뿌려진 싸락눈같이 아름답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떨어지는 꽃을 무척이나 애석해 하며 푸념들을 늘어놓는다.
봄비는 왜 바람을 동반할까? 영근 씨앗을 만들기 위해 봄비는 생명수를 공급하며 바람을 모셔온다. 꽃이 져야 열매를 맺는다는 자연의 이치를 봄비는 알고 있는데 사람들은 왜 모를까? 떨어진 꽃잎도 꽃 일진데 발아래 밟히는 꽃잎이 마음에 걸려 발걸음이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끝.
첫댓글 봄비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단장님의 격려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고맙음니다.
산불을 진화했던 고마운 봄비였습니다. 가뭄을 해갈해줄 뿐만 아니라 산불을 막거나 꺼주니 대단한 위력을 지닌 봄비입니다. 경험하신 바에 대한 느낌을 잘 정리, 의미 부여를 잘 하셨습니다.
봄비에 얽힌 님의 아름답고 힘들었던 사연 정말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봄비 오는날 문득 엣 생각이 떠올라 두서없이 몇줄을 적어 보았읍니다.
쫄필을 읽어주시고 격려해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행복한 나날 되십시요.
마른 대지, 산불 그리고 마침 내려준 고마운 비,시간이 지나면 잊게 되지만 봄비는 기다리던 연인을 마중한다는 비유가 참 아름답습니다.
가맣게 가슴이 타 들어가던 날이 기억납니다.
서정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봉제사도 옮겨서 모신 기억이 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