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함의 미학
며칠 전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요일 복날 삼계탕 먹으러 오라고.
중계역 근처에 살고 계시는 부모님 댁에 갔다.
형들 가족도 가족 여행이나 직장 여행으로 오지 못했다. 결국 나 혼자였고, 준비했던 닭들은 냉동실에 들어가 있었다. 멋없고 무심한 삼형제 중 부모님께 살뜰히 안부전화 하는 자식이 없어 더욱 죄송하고 민망했다.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과 부모를 생각하는 자식의 마음을 떠올릴 때 우리 형제는 참으로 부족하다.
부모님 댁에 가는 길이었다.
중계역에 내려 출구를 빠져나와 보도를 걷는데, 플라타너스 가로수 밑을 보니 강아지풀들이 한창 바람에 날려 춤추듯 흔들리고 있었다. 아름답다. 반경 1m도 되지 않는 곳이 그들의 서식지다. 그곳에서 그들은 가족을 형성해 완벽히 적응해 있는 것 같다. 플라타너스는 그들의 믿음직한 버팀목 같다. 내가 과연 거기 사는 강아지풀들을 대변할 수 있을까? 그들의 살아 있음과 충만에 대해.
아침엔 망원동 파리바케트 옆 공터에 자란 명아주와 쑥대밭을 한참 바라보았다. 조만간 어떤 건물이 들어서겠지만, 지금 거긴 명아주와 쑥대의 세상이다. 그들이 돼서 흔들려보고 햇살과 바람과 빗방울을 맞아보고 느껴보면 존재하는 것들의 모든 삶이란 말할 수 없는 무엇이다.
묵시가 있다면 그러한 생명을 인식하지 못하는 비정한 냉혹일 것이다.
나는 사소한 것들을 옹호해야 한다. 말 없는 것들을 대변해야 한다. 아이들과 노인에 대해, 개미와 파리와 모기처럼 늘 있지만 배제되는 것들에 대해, 얼룩과 먼지에 대해.
사소함의 미학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자체가 가진 삶에 대한 인식에서 저절로 비롯되는 것이다. 종이 한 장에도, 밥 한 그릇, 신발 한 짝에도 미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