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문]
조의순 수필집 발문
‘삼사’에 드리운 인향, 문향에 번지는 ‘삼미’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수필은 일상의 형상적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정서와 그를 통해 획득되는 깨달음을 유감없이 기술할 수 있는 인간학이다. 무엇보다도 조의순 수필은 사람, 사연, 사상, 즉 ‘삼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까닭으로 멋과 맛 그리고 향, ‘삼미’ 세 가지 맛을 낸다고 하겠다. 이러한 수필의 고유한 영역과 특성을 제대로 살려서 잊을 수 없는 사람, 추억이 된 사연, 음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상 등을 수필화한 까닭으로 그녀의 수필은 청량한 선비의 향기를 낸다. 조의순 수필을 인간학이라 부르는 소이도 수필의 내용이 인간에 대한 성찰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흔히 수필은 자신의 심적 나상이라고도 하고 독백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조의순 수필은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기의 드러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비워내기를 통한 무욕의 소중함을 수필적 소재로 취택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현대는 다양한 욕구가 충만해 서로 좌충우돌하지만, 자신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눈을 돌리거나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없는 단절과 소외로 특징되는 시대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수필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삶 속에서 끝없는 욕망과 좌절과 갈등, 극복과 회피라는 심리 과정을 수필로 그려내면서 수필가 조의순이라는 한 인간의 자아가 건실하게 형성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수필집을 읽는 쾌미라 하겠다. 형성된 자아의 뒤편에는 무의식의 그림자도 웅크리고 있다. 무의식의 이 그림자를 의식의 세계로 불러내는 것이 조의순 수필의 핵심 과제다. 조의순은 수필쓰기를 통해 그림자의 인격화를 이루어내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조의순이 그려내는 수필적 주제는 자기실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사색과 성찰의 소중함을 그려내는 일이다.
조의순이 성찰의 세계에 푹 빠져들고 있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착한 심성이 그 원천으로 작용한 때문이라고 하겠다. <선비의 숲길을 거닐다>는 몰려드는 내면의 물음들을 접하고, 청빈한 선비정신으로부터 삶의 의의를 깨닫게 한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글이다. ‘까치구멍 집’이란 별호가 붙은 초가의 안방과 사랑방, 거기에 부엌밖에 없는 협소한 공간. 그 소박한 선비들 집에서 청빈을 실천했던 고고한 옛 문사의 기개를 음미하면서 작가는 우리 시대 불의한 세태에 편승하는 못난 무리들의 작태를 꾸짖는다. ‘부정과 부패, 불평등이 난무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범인(凡人)들’ 그녀는 ‘물질과 권력을 향해 불나비처럼 달려드는 저 우둔한 자들’에게 한 번쯤 영주의 선비촌을 둘러보고, 선비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라고 외친다. 이 작품집은 자기발견과 성찰의 소중함이 어떤 것인가를 엿볼 수 있게 하기에 인식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림자의 인격화란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진실되게 인식하여 솔직하게 드러낼 때만 가능하다. 위의 작품 <선비의 숲길을 거닐다>는 지성의 자리에서 겪었던 내면의 풍경을 작가가 정면으로 바라보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작가는 이 수필의 제목을 ‘선비의 숲길을 거닐다’라고 정하고, 발단부 첫 마디를 ‘오랜 지기인 문우의 친정집에서 하룻밤을 묵을 기회가 있었다.’라고 적었다. 그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기회’는 ‘위기’를 전제로 존재할 수 있는 말이다. ‘진정한 선비가 사라진 세상이다.’라는 진단은 이 글을 읽는 지금이 ‘기회’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오늘의 지성이 형성되기까지 자신이 거닐던 숲길을 되짚어 보고 자기 내면의 물음에 ‘선비들의 대쪽 같은 기개와 청빈의 향기’를 내며 살겠다고 답하는 과정이 물질에 대한 집착이나 집중보다 더욱 가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주어진 시간을 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우리 기억의 한켠에 속해 있는 체온보다 더 뜨거운 것으로 자리했던 자기의 그림자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며, 그림자를 의식화해서 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이다. 조의순 수필의 멋과 맛 그리고 향기는 이런 자기 성찰에서 나온다고 하겠다. ‘서원 뒤쪽에 있는 소나무 숲길을 천천히 걷는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보이지 않는다’ 의 눈은 자신의 그림자를 볼 수 있는 영적인 심안을 제공한다. 그 자기를 찾아가는 모습의 실체화는 인간이 표현하면서 어떤 인격을 완성해가는지에 대한 연구가 적다는 차원에서, 우리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을 수 없다. 고원한 정신과 내가 하나가 되겠다는 자세를 통해 인생사의 진리를 체득해 보여주고 있는 이런 멋진 조의순 수필집이 왜 이제야 나오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