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바 '비움'을 어떻게 증명할까요 어떤 상태를 비움이라 하겠습니까 비움을 설명하려면 공간 설정이 우선입니다 아니면 비워질 존재를 인정해야겠습니다
가령 '마음을 비운다'고 했을 때 마음 그 자체를 비운다는 것인가요 마음을 소프트웨어라 할 때 하드웨어라는 어떤 메모리에서 삭제함일까요 컴퓨터 휴지통에서 내용물을 비우듯 그렇게 어딘가 담겨 있던 마음을 비워내는 것일까요
마음이 질량을 지녔다면 비워진 휴지통은 깔끔하겠지만 오염된 마음이 버려진 곳은 버려진 갖가지 마음들로 인하여 썪고 오염되고 더러워져서 숨도 쉬기 어려울 테니 대관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지요
따라서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어딘가 담겨 있던 마음을 삭제한다는 게 아니겠는지요 마음이라고 하는 그릇에 담긴 탐욕 분노 어리석음 따위 백해무익한 것들을 비우는 일입니까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 대답이 궁색해지는데 괜히 마음 졸였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또 묻겠습니다 그 마음이라는 그릇은 어디 있습니까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요 아! 그렇습니까 생김새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큽니까 작습니까 둥급니까 모납니까 각설탕 모양인가요 사리함처럼 생겼나요 아니면 항아리처럼 생겼습니까 사람 마음이 다양하게 표출되지요
마음의 색은 어떤가요 빨주노초파남보 중 하나입니까 이들 전체의 색입니까 청황적백흑이 섞여 있나요 따로따로인가요 어쩌면 삼원색이겠군요 이들 삼원색이 한 데 어우러져 백천 가지 억만 가지 색을 마음은 연출해내지 않습니까
마음의 재질은 무엇일까요 몸의 구성요소처럼 산소25.5% 탄소9.5% 수소6.3% 질소1.4% 칼슘0.2% 인0.2% 칼륨0.07% 등과 같습니까 이는 마음과는 상관이 없다고요
마음은 소리가 있습니다 슬퍼서 내는 소리 아파서 내는 소리 기뻐서 내는 소리 마음이 내는 게 아니라 목구멍 목젖 혀 이와 볼과 입술 등이 어울려 마음 시키는대로 내는 것이라고요
마음의 소리는 때로 따스하게 다가와 감싸지만 때로 비수처럼 날아가 박힙니다
내가 몸의 구성요소를 앞에서 든 것처럼 얘기했더니 물이 불같이 화를 내더군요 물 탄소 암모니아 석회 인 염분 질산칼륨 불소 철 규소와 15가지 소량의 원소들이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산소 25.5%를 대치하느냐고요 자기의 고유이름인 물을 왜 빼먹었느냐며 야단이었습니다
반란은 또 있었습니다 세포였습니다 100조 개의 세포가 스트라이크Strike를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 세포는 왜 빼먹느냐고요
다음으로 원자가 들고 일어났습니다 세포 쟤네들은 하나 하나가 1천억 개의 우리 원자들로 되어 있는데 왜 우리 원자는 무시하느냐고요 세상은 어디나 시끄럽습니다 마음이 무엇으로 되어 있을까 하고 생각하던 중 나온 얘기지만 자기네 이름 따로 불러주지 않는다고 그 난리를 일으키니 말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마음에 향기가 있습니까 썪은 냄새만 풍기는 건 아니겠지요 누군가 마음에서 풍기는 향기를 맡아보았는지 마음의 향기를 노래했고 서정시도 여러 편 있습니다 마음에 향기가 있다면 마음에서 맛은 느껴지지 않습니까
빛깔이 있는 마음 표정이 있고 웃음이 있는 마음 모양새가 있는 마음 언어가 있고 시가 있고 노래가 있고 대화가 있는 마음 소리가 있는 마음 맛깔스러움이 느껴지는 마음
시기와 질투가 있고 미움이 있고 욕심이 있고 저주와 분노가 있고 욕설과 비방이 있는 마음 거짓과 왜곡이 있고 사기가 있고 아첨이 있고 횡령과 마약과 술수가 판치는 마음
마음을 비운다면 마음이란 그릇에 담긴 어떤 내용을 비우시겠습니까 아니면 8만4천 가지 다양한 마음이 있는데 그 중에서 나쁘다고 여겨지는 것을 하나하나 찾아 비우시겠습니까
어느 쪽이라 하더라도 쉬운 일은 아닐듯 싶습니다 첫째, 마음이란 그릇을 찾는 게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역대조사 천하 종사들이 찾았고 동서고금의 현철들이 찾았습니다만 아직 마음의 내용은 접어두고 그릇의 흔적조차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으니까요
둘째, 마음의 종류가 그리 많다면 부처님 말씀이 맞습니다 중생들의 마음은 복잡합니다 천 갈래 만 갈래로도 모자라 8만4천에 8만4천을 곱한 만큼 다양하다 하셨으니까요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마음을 낱낱이 헤아려 아신다는 것이지요
윤회의 열차가 달립니다 열차 안에는 탑승객이 많습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또 다른 숱한 생명들이 각기 한 칸씩 차지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종 만큼이나 길게 이어달리는 윤회열차 더러 뒤섞여 탄 칸이 있습니다 소 말 양 돼지 개 닭들을 비롯하여 고양이 비둘기 매 앵무새 등 일부 야생들은 동물들 칸에서 빠져나와 사람들과 같은 칸에 타고 있습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이들 중생세계를 모두 아십니다 이들의 과거가 어떠했고 이들이 금생에 어떤 공덕을 닦고 어떤 업을 지어가는지 아십니다 윤회열차가 역에 설 때마다 어느 칸에서 누가 내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떤 생명이 열차에 오르는지 부처님께서는 다 얄고 계십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도 강제로 하실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자칫 강제성을 띠다 보면 생태계가 깨질 수 있는 까닭이지요 어린 톰슨가젤이 치타에게 잡히고 치타가 잡은 톰슨가젤을 암사자 한 마리가 와서 빼앗습니다 사자가 빼앗은 먹이를 하이에나 무리가 낚아 채고 다시 암사자 무리기 돌려 받습니다
이를 다시 숫사자가 빼앗더라도 옆에서 지켜보야만 하듯이 거룩하신 부처님께서도 윤회열차에 오르내리는 중생들을 그냥 지켜만 볼 뿐입니다
이토록 다양한 생명들 중에 공덕을 짓는 중생이 있었습니다 1923년 11월에 태어나 1935년 3월에 죽은 충견 하치 이 실화를 바탕으로 리차드 기어가 주연을 맡아 리메이크한 좋은 영화가 있습니다
2009년 나는 분당 야탑 CGV에서 이《하치이야기》를 보다가 문득《금강경》<정신희유분>이 떠올라 환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 하치야! 말세에도 너 같은 중생이 있었구나 참으로 기특하여라 그래서 우리 부처님께서는 말세를 걱정하는 수보리의 물음에 걱정하지 말라 하셨구나
개도 저토록 의를 아는데 비혹 아무리 말세末世라고는 하지만 하물며 수십억 명 사람들 속에 계戒 지니고 복을 닦는 자가 어찌 없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마음에 올바른 믿음 지닌 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인데 그래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드문 일이지만 있습니다 그러기에 '희유'입니다. 전에《금강경》을 그리 읽으면서도 느낌이 팍 오지 않던 말세설. 영화《하치이야기》한 편이 금강경의 말씀을 완벽하고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했습니다
바른 믿음正信이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깨끗한 믿음입니다 깨끗함은 올바름正입니다 올바름은 하나一에서 그침止입니다 하나는 한마음이고 그침은 그의 정의正義입니다 라이쳐스니스Righteousness지요
따라서 바른 믿음이란 고결하고 정직하고 공정한 믿음에서 벗어나지 않음이며 말의 무게와 신뢰성입니다 믿음信은 말言의 실천입니다 누구의 말입니까 사람亻의 말言입니다 사람들은 약속한 말에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날저날 조금씩 미루다가 나중에 가서는 뒤집어버리지요
예나 지금이나 또한 앞으로도 그렇듯 사람의 살림살이란 비슷합니다 사람亻의 말言은 믿음信입니다 말세가 되면 믿음이 약해지지요 말초만을 만족시키는 숱한 정보가 워낙 많이 쏟아져 나오기에 부처님 말씀에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오죽하면 여우狐처럼 의심疑하고 믿지 않는不信다 하셨겠습니까
마음 비움입니다 마음의 갖가지 모습多樣 중에서 남길 건 남기고 비울 건 비울 일입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그릇에 담겨있는 빛깔 따라가고 소리 따라가고 향기 맛깔 닿음 따라가고 얄팍한 이치만 따라가는 것들에서 비울 건 다 비우든가 마음 자체를 비우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다 보면 비우는 와중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덤으로 비워질 것입니다 알파거니 베타거니 감마거니 델타거니 복잡한 것까지 생각지 않더라도 마음만 제대로 비우면 부처님이 희유하신 게 아니라 비워낸 마음의 소유자 이들 중생들이야말로 더없이 희유하고 또 희유한 부처님이십니다
다시 묻습니다 된장이 담긴 독이 된장독이듯 마음 그릇은 마음을 담았습니까 청동으로 빚은 상이 청동불이듯 마음 그릇은 마음으로 빚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