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의 여류시인/1
나는 수필가가 되어 30여 년 활동하면서 고향 출신 대학총장 등 유력인사와 더러 막걸리를 마실 수 있었다. 더 좋았던 것은 빼어난 미모와 문재를 두루 갖춘 고향의 여류 네 분과 친면을 턴 것이다. 사실 그분들은 신비로운 분들이고, 수필가 아니었으면 내가 감히 범접도 못할 분들이다.
김정희 시인은 이런 인연으로 만났다. 한번은 개천예술제 때 진주 이영성 시인과 너우니 물박물관에 갔는데, 거기 벽에 어떤 시가 있었다. 진양호에 수몰되어 사라진 '까고실'이란 동네를 읊은 시였다. 나는 사실 진주에 갈 때 마다 매번 배 떠난 항구 같은 쓸쓸함을 느끼곤 했다. 설창수 선생이 가신 후 진주에 어떤 문인이 사는지도 모르겠고 쓸쓸하던 판에 그 시를 읽자, 아직도 진주에 이런 시인이 있구나 싶어 반가움을 느꼈다.
그래서,
'어이 농파! 이 시 쓴 김정희란 시인 자네 혹시 아나?'
혹시나 하고 물어보았더니,
'잘 알지.'
한다.
'그럼 언제 그분 나한테 소개 좀 해주소.'
해두었는데, 얼마 후 진주고 강당에서 열린 남강문학회 모임에서 그를 만났다. 교정에 고급 승용차가 하나 스르르 멎더니 노부인 한 분이 내리자 농파가 나를 불렀다.
'거사야! 이분이 자네가 소개해달라고 부탁한 그 분이다.'
이렇게 김정희 선배를 만났다. 김시인은 젊진 않았지만, 1974년에 첫 시집 '소심(素心)'을 낸 분답게 난초를 사랑하는 은은한 동양적 외모를 지닌 분이었다. 이렇게 인연의 첫 고리는 맺어졌고, 얼마 후 두 번째 고리도 이어졌다. 그분이 남강과 도동이 내려다보이는 정촌 세비리 벼랑에 땅을 가지고 계시어, 거기에 한옥을 세 채 지어놓고 시조문학관 간판을 건 것이다. 나는 진주에 첫 문학관이 선다는 그 자체가 반가웠다. 비로소 진주도 문향의 냄새를 풍길 수 있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 통화도 하고 내가 쓴 수필집도 줄줄이 보내드렸다. 그분은 나와 통화하면서 내가 혹시 진주에 와서 글을 구상해 볼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지 와서 문학관에 묵으면서 글을 써보라고 권해주시기도 했다. 사실 김시인은 배건너 천전학교 옆에 살던 분이고, 나의 동기 김두진 교수 숙모님이기도 했다.
그래 나는 남강문학회 서울 팀 회장이어서 2013년 남강문학회 진주 모임 숙소를 거기로 정했다. 그리고 익일 새벽 6시에 일어나 혼자 스윗치를 올리고 문학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누가 새벽부터 문학관에 불을 켰나 싶었던 모양이다. 김정희 선배님이 별빛 총총한 섬돌을 딛고 새벽에 문학관에 올라오셨다. 그리고 문학관 안내를 해주시다가 이영도의 <탑>이란 시 앞에 이르자, 나지막한 음성으로 시를 읊어주셨다.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번 흔들지 못하고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아시다시피 시란 미인이 읊어주면 더욱 감동적이다. 그것도 남들 다 자는 이른 새벽에 말이다.
문학관엔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었다는 청마와 김영도 두 연인 사이에 오간 편지, 이호우의 달밤, 김소월의 육필 시, 육당 최남선과 노산 이은상의 시집 등 희귀본이 많았다. 그런데 문학관을 돌던 중 거기서 선배님의 고마운 배려도 만났다. 진주 문학의 좌장 격인 한국문인협회 고문 이유식 평론가야 당연히 코너를 만들어 드릴 만한 분이다. 그런데 그 옆에 이름도 뭣도 없는 이 후배의 코너도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아마 너우니 물박물관에서 당신의 시를 읽고 꼭 만나고 싶어 한 후배라 특별 배려한 모양이다.
여하간 그 뒤 나는 더러 선배님과 통화를 했고, <화엄을 꿈꾸며>란 시집을 받고는 긴 통화도 했다. 그 시집의 추천 글이 동국대 목정배 교수 글인데, 목교수는 내가 근무한 불교신문 선배다. 그는 동대 총장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간혹 신문사에 오면 걸쭉한 농담 잘 하던 분이다. 그 책 서문에 나온 '귀의(歸依) 삼보(三寶) 하옵고'란 구절도 반가웠다. 그 건 내가 불교신문 기자 때 잘 쓰던 문구다. 책에 소개된 시인의 화엄사상도 반가웠다. 우주는 거대한 하나의 연꽃이다. 세상은 밝고 어두운 부분이 섞여있지만, 크게 보면 한 송이 연꽃이다. 모두 아름답다. 시비선악이 여기선 한송이 꽃으로 승화된다. 불교에서 이 대목이 내가 좋아하던 대목이다.
경주 남산을 읊은 시도 맘에 쏙 들었다.
<경주 남산에 가면>
경주 남산에 가면
내 그리운 사람이
바위 속 문을 열고
걸어서 나오실까
감실의 부처님처럼
집 지키고 계실까
하략
나는 바위 속에서 그리운 사람이 걸어 나오길 기다리는 사람, 감실의 부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불교 사상과 향냄새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진주에 가도 별로 쓸쓸하지 않다. 김정희 선배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첫댓글 김두진교수의 숙모님!김정희 선배님 정말 존경 스럽 습니다.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