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3일장을 치룹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래도 3일 안에는 죽은 사람이 되살아 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일이 지나고 나흘이 되면 시신이 부패해서 더 이상 살아날 가능성은 사라진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예로부터 3일장을 장례의 기본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첫날은 시신을 바로잡는 수시를 하고 부고를 합니다. 둘째 날은 염습과 입관을 하여 문상객을 접객하고 셋째 날 발인과 운구, 하관을 함으로 장례절차는 마치게 됩니다. 이렇게 3일이 지나면 그 실낱같은 희망마저도 저물고 그 어떤 기대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베다니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초상이 났습니다. 일찍부터 조실부모하고 두 여동생을 돌보며 소년 가장으로 살아온 두 여인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은 것입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이 친구라고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그의 누이들은 예수님께 연통하기를 (요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나사로의 집은 주님이 종종 예루살렘 여행 때면 가까운 베다니에 들어서 그분의 피곤한 육신을 쉬게 한 그분의 은신처이기도 했습니다.
생과 사를 오가는 환자의 병은 위중해 보였습니다. 가족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지만 예수님 당도하신다는 소식은 도무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골든타임은 지나고 사랑하는 오라비 나사로는 마침내 잠들고 말았습니다. 우리 가족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변한 것일까? 예수님은 과연 우리의 기대를 외면하신 것일까? 마리아와 마르다의 마음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한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때였습니다. 이미 희망과 기대는 저물었고 살 소망은 사라진 뒤였습니다. 예수님의 늦은 도착에 마르다는 아쉬움과 원망이 섞인 말로 (요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아직 생명이 붙어 있다면 예수님은 능히 오라비 나사로를 고쳤을 것을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나사로는 죽었고 죽은지도 이미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요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시신은 이미 부패하였습니다. 기회는 놓친 것이었습니다. 마르다는 돌을 옮겨 놓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자신의 견해를 말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능력을 믿습니다만, 이제는 때가 지났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11: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고는 깊은 무덤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때 어떤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그가 살아있다” “나사로가 살아났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정한 시간, 우리가 기대하는 때가 지나면 실망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왜, 주님은 그때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셨나요? 지금 저에겐 주님이 필요한데 왜 아무 도움도 되어 주시지 않나요? 우리의 마음은 의문으로 가득 찹니다. 그러나 우리의 때와 하나님의 때는 다릅니다. 우리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분은 바로 그 정확한 시간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때가 지나고 하나님의 때가 이를 때 바로 그때에 주님은 오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수많은 문제들도 우리들의 때에는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주님 왜, 주님 왜죠?”를 외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때가 지나가 주님의 때가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늦었다고 하는 그 시간이 주님께는 정확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지금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점점 희망은 저물고 기대마저 꺼져 갈 때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주님께 애원해 보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낙심 하지 마십시오. 고통과 슬픔의 시간이 지나고 주님의 때가 되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이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 계시던 그분이 오늘도 여전히 동일하신 우리의 주님이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