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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문의 용호구곡 경승안내(번역문)
방장산(山)은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이요. 용호(龍湖)는 방장산에서 제일로 손꼽히는 승경이다. 세상 사람들 중에 산수벽(山水癖)이 있는 자만이 나막신을 드날리며 금강산(金剛山)을 찾아 유람하니, 금강산은 과연 세계의 명승이다. 옛날 교통이 개발되지 않은 황량한 시대로부터 이미 그 이름이 높아 당나라 때 시호(詩豪) 이적(李勣)은 고려국(高麗國)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탄식을 담아 시를 지었다. 김사문은 이 시구의 작자를 이적이라고 하지만, 북송의 동파 소식이 지은 것이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또한 당나라 때의 이백(李白)이라는 설도 있다. 따라서 이 시구의 작자에 관한 설은 현재까지는 명확하지 않은 듯하다.
'산과 구름이 함께 희니, 구름과 산을 분별하지 못하겠네. 구름 돌아가고 산만 홀로 서 있으니, 일만이천봉이라네.[山與雲俱白 雲歸山不容 雲歸山獨立 一萬二千峰]' 라는 우암(尤庵) 선생 [ ※우암(尤庵) 선생 :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가리킨다.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에는 보이지 않는다] 의 활화첩(活畵帖)과 '짚신 신고 대 지팡이 짚고서 동쪽 언덕을 올라 동해를 바라보니, 동해의 동쪽은 동쪽이 없어라.[履草履杖竹杖 登東皐望東海 東海之東無東] '라는 미수선생 [※ 미수(眉叟) 선생: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 허목(許穆, 1595~1682)을 가리킨다.
이 시도 또한 미수 허목의 문집인 『기언(記言)』에 보이지 않는다.]의 달관시(達觀詩) 등 여러 이름난 시축을 감상하여 남김없이 알 수 있다. 오늘날은 교통편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 탐승의 열기가 절정에 달한 시대이다. 봄꽃이 피고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 금강산이 인해(人海) 가운데 부침하는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이처럼 탐승의 열기가 높은 것에 짝하여 예전 금강산에 심취한 자들이 지금 용호를 찾아오는데, '진작 이런 곳이 있는 줄을 알았다면 어찌 멀리까지 수고로이 갔을까.'라는 탄식을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리하여 매번 봄가을에 지팡이를 짚고 나막신을 신은 자들이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입으로 찬탄하며 반드시 구곡(九曲)의 신비로움을 낱낱이 찾아보려 하니, 과연 용호의 빼어남이 금강산과 비교해 어떠한가.
1. 제일곡(第一曲)_송력동(松瀝洞)
제일곡은 '송력동(松瀝洞)'이니, 골짜기 입구의 마을 이름이 먼저 호(湖)수의 풍경을 소개한다. 호경리(湖景里) 마을로부터 물소리를 밟으며 동쪽으로 몇 걸음을 걸어가면 남쪽으로 열린 골짜기가 작은 물줄기를 흘려보내며 용호와 물결을 합하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송림이 봉긋 솟아있으며 골짜기 입구에 인력으로 크고 작은 돌을 쌓아 올려 축대를 지은 것이 있다. 옛날 말에 근거하면 호경의 어떤 인사(人士)가 풍수설에 의해 을진수층(乙辰水沖) [을진수충(乙辰水冲) : 을진(乙辰)은 동동남의 방위를 가리키며, 수충(水冲)은 물이 들이치는 것을 말한다]을 방비한 것이라고 한다.
송림과 축대를 넘어 몇 걸음을 옮기면 한 길 높이의 바위 꼭대기에서 맑은 물이 옥처럼 쏟아지니, 이것이 이른바 '송림약천(松林藥泉)'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무렵,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려는 화장한 여자들과 정장한 남자들이 길을 다투어 운집한다. 송력의 골짝 이름이 이로 인해 유래된 것이다.
맑은 물을 거슬러 올라 남쪽으로 1리를 나아가면 둥근 모양의 폐허지에 부서진 탑과 깨어진 기와가 지난 역사를 증명하고 있으니, 송림사(松林寺)의 유허이다. 절은 고려조의 고찰인데, 한때는 매우 부유하고 성대했다. 용호의 명승을 곁에 둔 탓으로 시인과 풍객이 너무 빈번하게 올라왔으므로 승려들이 괴로움을 겪었다. 저들의 무례를 느낀 한 지사(地師)가 탐방객을 막을 묘안이 있다고 말해 절 남쪽의 돌무더기를 도끼로 깨뜨려 절이 망했다고 말을 퍼뜨렸다. 지금 황량한 유허지를 올라가 보면 다만 산이 깊어 느껴지는 정취뿐이요, 볼만한 푸른 승경은 별반 없다.
2. 제이곡(第二曲)_옥녀봉(玉女峯)
제이곡은 옥녀봉(玉女峯)이다. 송력동(松瀝洞)으로부터 호수를 거슬러 올라 동쪽으로 돌면 단아한 봉우리 하나가 '용호의 빼어난 경치를 구하거든 나를 찾아 물으라.'라는 듯한 모습으로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물은 바위와 다투며 층층이 떨어지니 폭포가 아닐 수 없는지라, 한 자 높이 두 자 높이 거슬러 올라갈수록 점점 높아져 옥룡추(玉龍湫)의 쏟아지는 폭포에 이르러 장관을 드러내었다. 바위는 옥을 투기하여 새하야니 각기 그 형상을 지닌 모습이 두 손으로 어루만질 만하다. 누운 것은 물고기 성품이요 서 있는 것은 들짐승 형태이다. 볼수록 더욱 기이하여 고암대(鼓巖臺_북을 치던곳)의 반석에 이르러 그림 같은 경계를 열었다. 물의 성질은 흘러가는지라 부득불 내려가거니와 바위의 형세는 누구 때문인지 위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호수 하나를 누워 마시고서 동쪽에 머리를 두고 서쪽에 꼬리를 내린 채 아가미가 움직이는 듯한 것은 이름이 '이암(鯉巖)' 이요, 잉어가 마시는 못은 이름이 ‘불영(佛影)’이니 부처의 그림자가 임하였기 때문이다.
이암(鯉巖)을 등지고 북쪽 기슭을 우러르매 암벽의 돌 처마가 높이는 한 길 됨직하고 넓이는 열 명이 앉을 만한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감실(龕室)에 한 구의 석상(石像)을 안치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불신당(佛神堂)'이다. 고대 송림사(松林寺)의 유물인데 등림객이 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리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지난 갑술년(1934) 여름에 운악암(雲嶽菴) 승려에게 도둑맞아 호경의 인사들이 자취를 추적하여 돌려놓도록 책망하니, 애석하도다. 도둑 승려가 삼가지 않아 머리와 얼굴이 온전하게 돌아오지 못했다. 감실 벽면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고 새로 새긴 붉은 각자는 노수현(盧洙鉉)의 정성어린 묵적이요, 불신당 벽의 동쪽에 '용호석문(龍湖石門)이라는 큰 네 글자는 이삼만(李三晩) [이삼만(李三晩) : 조선 후기의 서예가로, 생몰은 1770~1847이다. 자는 윤원(允遠), 호는 창암(蒼巖)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전북 정읍에서 출생했으며, 만년에는 전주에 살면서 완산(完山)이라고도 호를 썼다. 어린 시절에 당대의 명필이었던 이광사(李匡師)에게 글씨를 배웠는데, 글씨에 열중하여 포(布)를 누여가면서 연습하였다 한다.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으나 글씨에만 몰두하여 가산을 탕진했으며, 병중에도 하루 천자씩 쓰면서 "벼루 세 개를 먹으로 갈아 구멍을 내고야 말겠다."고 맹세했다 한다. 글씨 배우기를 청하면 점 하나 획 하나를 한 달씩 가르쳤다고 한다. 그의 글씨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우연히 전주에 온 부산 상인의 장부를 쓰게 되었는데, 그 상인이 귀향하여 감상가에게 보이게 된 것을 계기로 필명이 높아졌다고 한다. 하동 칠불암(七佛)의 편액과 전주판(全州板) 칠서(七書)도 그의 필적이라고 한다. 또 전주 제남정(濟南亭)의 편액을 썼는데 갑오경장 때 제남정(濟南亭)은 소실되었으나 편액은 집안의 뜰에 날아 떨어졌다는 일화도 있다. 오세창(吳世昌)은 “창암은 호남(湖南)에서 명필로 이름났으나 법이 모자랐다. 그러나 워낙 많이 썼으므로 필세는 건유(健愈)하다."라고 평했다. 특히 초서를 잘 썼으며 그의 서체를 창암체라 하였다. 전라도 도처의 사찰에 그가 쓴 편액을 볼 수 있다]
의 고필(古筆)이요, 석문의 서쪽에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이라는 새로 새긴 각자는 김두수(金斗秀)가 8살 때 쓴 글씨이니 어린아이의 묘취가 사랑스럽다.
봉우리를 돌아 길을 접어들면 육각형의 새로 지은 정자(육모정)가 옥룡추(玉龍湫)의 쏟아지는 폭포에 임하여 멀리 아득하게 보이니, 이곡(二曲)의 빼어난 경관이 여기에 그쳐 지극하도다. 열길 높이의 곧추선 파도가 동이를 뒤집은 듯 우레처럼 떨어지니, 사람의 말소리를 지척 간에도 알아듣기 힘들다. 권삼덕(權三德)[조선 후기의 판소리의 명창. 판소리 8명창 중의 한 사람이다. 《흥보가》를 잘 불렀고, 그의 더늠(판소리 명창들이 작곡하여 자기의 장기로 부르는 대목)은 《흥보가》 중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이며, 그의 제(制:음악적 특징)를 설렁제 ·덜렁제 또는 드렁조(調)라고도 한다]이 노래를 익힌 곳이다. 고암대(皷岩坮) 동서쪽에 반반하게 트여 있는 바위는 넓이가 천 명이 앉을 만하다. 고금 인사의 성명이 적힌 글자로 인해 고암대 전폭이 한 조각의 여유도 없다.
정자는 원동(元洞) 계원이 지은 것인데, 계는 300년 전의 선대 장로로부터 주희(朱熹)와 여대림(呂大臨) 두 선생 [주희(朱熹)와 여대림(呂大臨) 두 선생 : 향약은 '일향(一鄕)의 약속(約束)'을 줄인 말로, 중국 송나라 때인 1076년 여대충(大忠)·대방(大防)·대균(大)·대림(大臨) 네 형제에 의해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에서 시행했다고 한다. 『소학(小學)』에도 간략히 소개된 그 향약은 덕업상권(德業相)·과실상규(過失規)·예속상교(禮俗相交)·환난상휼(患難相恤)의 4강령으로 되어있으며, 이를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 또는 줄여서 '여씨향약' 이라고 한다. 이것을 주희(朱熹)가 남송 사회의 현실을 참고하여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으로 만들고 '월단집회독약지례(月旦集會讀約之禮)'를 덧붙였다. 이것 역시 그대로 '여씨향약' 또는 '주자향약'이라 부르기도 했다.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소학』에 실려 주자학의 수용과 함께 우리나라에 소개된 향약은 일찍부터 사족들 사이에 행해졌다. 따라서 호경리 원동계가 주희(朱熹)와 여대림(呂大臨)의 영정을 모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닦아오던 것이라는 설은 향약을 만들고 보급한 두 인물을 깊이 존경하여 예식을 행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을 이곳에 영정으로 모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닦아오던 향약계인 바 이태왕(李太王) [이태왕(李太王) : 구한말 순종(純宗) 재위 시에 태상왕(上王)인 고종(高宗)을 이르던 말이다] 께서 무진년(1868)에 조령(朝令)으로 서원을 철폐한 후 두 선생의 영정은 남양재(南養齋)에 옮겨져 봉안되고 서원의 터는 거듭 팔려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어 지금은 영송(嶺松) 김재홍(金在洪) 처사의 강학소가 들어섰다. 다행히 이 문지(文地)가 본래의 영화를 잃지 않았다. 강당(講堂)에서 '목간(木澗)'이라고 편액한 곳은 처사의 집편실(執鞭室)이니, 나무 열매를 먹고 시냇물을 마신다는 뜻이다.
'수성(須成)'으로 편액한 곳은 문생의 독서실이니, ’벗을 기다려 덕을 성취한다.‘라는 뜻이다. 편액 글자는 모두 주자(朱子)의 유묵(遺墨)이니, 집자(集字)해서 사용한 것이다. 강학소의 왼편에 별도로 지은 각(閣)은 곧 주부자(朱夫子) [주부자(朱夫子) : 주희를 높여 일컬은 말이다]의 영당(影堂)이다. 이곡(二曲)은 구곡 가운데 가장 트인 곳이므로 이러한 볼만한 모습과 사물을 얻었다.
3. 제삼곡(第三曲)_학서암(鶴棲巖)
제삼곡은 학서암(鶴棲巖)이다. 호수의 형세가 잠시 평탄한 흐름을 나타내어 백 명이 앉을 만한 반석과 만 섬 물길이 회류하는 맑은 연못은 평이한 흐름 속에서 기이한 볼거리를 얻을 수 있다.
4. 제사곡(第四曲)_서암(瑞巖)
제사곡은 서암(瑞巖) [서암(瑞岩) : 당(唐)나라 때 서암(瑞巖)이란 승려이다. 매일 스스로 자문자답(自問自答)하기를, “주인옹아! 깨어 있느냐?” “깨어 있노라.” 하였다 한다.《心經 卷1》 이 성성법(惺惺法)은 마음을 어둡지 않게 항상 일깨우는 방법을 말한다. 스님이 독경하는 바위의 형상에 서암(瑞巖)이라는 스님의 이름을 붙인 듯하다]이다. 산세는 점점 높아지고 바위 빛깔은 더욱 하얀데, 새로 지은 칠성암(七星庵)에 티끌 하나 머물지 않는다. 지반은 제이곡에 버금하여 조금 트였으며 호수의 물결은 바위 형세를 좇아 아래로 달려가니, 비록 눈처럼 뿜어지고 우레같이 울리는 장관은 아니지만 맑고 깨끗하여 들을 만하다. 이른바 '챙이소', '구시소' [챙이소와 구시소 : 계곡 내 바위가 곡식의 쭉정이, 티끌 등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데 쓰인 도구인 '챙이'(키의 전라도 방언)를 닮아 챙이소라고 하고, '구시'(구유의 경상도 방언)를 닮아 구시소라고 하였다]는 그 형상을 형용한 것이다. 암문 밖의 시원한 정자 그늘은 패송(唄誦_염불)이 곁들여져 한적하니, 등림하여 이곳에 오르면 '티끌 세상이여 어디에 있는가.'라는 느낌이 나의 꿈을 무르익게 한다. '칠성암'으로 초막 이름을 지은 것은 일곱 명의 뜻이 있는 사람들이 함께 지었기 때문이다.
5. 제오곡(第五曲)_유선대(遊仙臺)
제오곡은 유선대(遊仙臺)이다. 칠성암에서 다리를 쉰 후 호수 수면에 나란히 놓인 징검다리를 밟고 남쪽으로 건너면 유선대의 입구이다. 지팡이를 들어 동쪽으로 가리키면 호수 빛과 바위 색이 서로 비취어(투과하여) 동천(洞天)이 티없이 밝으니 과연 신선이 사는 곳이다. 산 이름은 '병암(屛巖)'이니, 천길 높이로 깎아지른 듯한 모습이 한번 우러러보면 그림으로 바뀌어 층층이 드러나 있는 기암이 황홀히 병풍에 먹으로 수를 놓은 것처럼 펼쳐진다. 형상으로 비유하자면 병풍이라 이름하지 않기가 어렵다.
묻건대 선대(仙臺)는 어느 곳인가? 높이는 세 길 남짓하고 넓이는 백 개의 바둑판을 수용할 만한 우뚝 솟은 바위가 호수 중심을 점(點)으로 자리하여 동쪽 조금 치우친 곳에 올연(兀然_홀로 우뚝솟음)하여 상하의 여러 바위 중에서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유선대''이다. 유선대의 남쪽 약을 찧는 돌절구[搗藥石臼]는 신선 향기가 어제의 일인 듯하다. 직립형이므로 발을 붙일 곳이 전혀 없기 때문에 사다리를 설치하여 오르내리니, 담담한 구름과 상서로운 연무는 신선이 떠나간 후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가?
전체 호수 수면을 희게 단장한 것은 석반(石盤)으로 등급을 지어 층을 이루고 있으니, 맑고 차가운 급류의 여울은 마음속 깊은 회포를 절로 상쾌하게 한다. 바둑판처럼 정열되어 있는 집채만한 크기의 바위들은 그늘을 따라 앉거나 누우면 하루 종일 불볕에 햇빛을 접하지 않으며 온 하늘 가득한 비바람에 옷을 적실 염려를 하지 않을 것들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데, 선대를 제외하고 품명(品名)을 지닌 것이 하나도 없다.
예전에 남원 수령 이동한(李東漢)·백정기(白定基) [이동한(李東漢) : 순창군수(1918~19), 진안군수(1920~21), 임실군수(1922), 남원군수(1923~25), 정읍군수(1926~27)를 역임함. 白定基 : 일제 강점기에 부안군수(1921~25), 남원군수(1926~27)와 정읍군수(1928~30)를 지냄.(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타베이스)친일인사 매국수작자(관료) 명단에 등재됨] 등이 서로 이어 이곳에 임하였는데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안내한 면장 한규하(韓圭夏) [한규하(韓圭夏) : 주천 면장(1924~1933)을 지냄]에게 말하길, "이와 같은 호수와 산을 어찌 진작 나에게 보고하지 않았소? 저처럼 진기한 물품이 명칭이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로다.”라고 했다. 한규하가 웃으며 대답하길, "속세 관리의 심신이 선계에 치달리면 민정에 이롭지 않을 것이요, 또한 신선 세계의 물품은 속인이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서로 함께 문답하고 껄껄 웃었으니, 저들은 모두 금강산에 노닐었던 자들인데 오히려 빼어난 풍경을 감탄하고 칭찬하기를 그치지 못했다.
병암(屛巖)에 개미처럼 붙어 정상에 도달하면 위태로워 다리가 벌벌 떨리는 곳에 석구지(石臼址)라고 일컫는 작은 형국이 열려 있으니, 예전에 장군 조산서(趙山西) [조산서(趙山西) : 산서(山西)는 호이며, 이름은 경남(慶男, 1570~1641)이다. 조선 중기의 무인이자 의병장으로, 본관은 한양, 자는 선술(善述) 호는 산서(山西)·산서병옹(山西病翁)·산서처사·주몽당주인(晝夢堂主人) 등이다. 전북 남원 출생이다. 아버지는 사직을 지낸 조벽(趙壁)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梁氏)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조모의 손에 양육됐으나 기상은 활달했다. 1579년 10세에 유인옥(柳仁沃)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했다. 13세에는 난리를 예견하여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8세 때 조헌(趙憲)의 문하에서 배웠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는 군문에 들어가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1598년 29세에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광악(李光岳)의 막하에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에서 왜군을 무찔렀다. 1608년 39세에는 향시(양장) 1614년(광해군 6) 45세에는 삼장(三場)에 합격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난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 1623년 54세에 겨우 진사에 등과했으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방장산(方丈山) 용추동(龍湫洞)에 별장을 짓고 산서병옹이라 자처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가 은거한 곳이다. 산서(조경남)는 임진왜란 때의 위인인데, 무예에 능숙하고 문장에 박식했으며 빼어난 완력과 겨룰 상대가 없는 궁술은 사람과 귀신이 감복한 바였다. 이곳에 은거할 당년(當年)에 마실 물을 멀리 대양치(大陽峙) 넘어 구천(臼泉)에서 맑고 시원한 물을 취했으니, 발에 나막신을 신고 손에 동이를 쥐고서 한 걸음으로 치달아 길어다 썼다. 나무 활과 가죽나무 화살로써 멀리 숙성령(宿星嶺)의 침범한 적을 겨누어 명중하니, 활시위에 응하여 거꾸러지지 않은 자가 아무도 없었던 일은 야사(野史)에서 증명하여 역력하다. 유지(遺址)에 임하여 굽어보고 우러러보니, 아름답구나! 산은 높고 물은 길구나. 그분의 풍채를 여기에 의지해 헤아려보매 시대가 달라 만나지 못하는 감회를 한번 느껴보리라.
6. 제육곡(第六曲)_지주대(砥柱坮)
제육곡은 지주대(砥柱坮)이다. 선대(仙坮)를 아쉬운 마음으로 이별하고 계속 걸어 동쪽에 오르면 길이 치솟아 절벽을 기어오르기 때문에 도끼로 깎아내어 발을 놓은 것이 수십 점이었다. 문득 남쪽을 보니 나무뿌리를 깨뜨리며 치달아 내려가는 골짜기 물이 호수 물결과 합쳐져 부딪히는 지점에 둥근 해가 지는 산이 서 있는 말의 형상으로 머리를 들고 서쪽을 우러르며 우뚝하니, 이것이 이른바 ‘지주대(砥柱坮)’이다. 두 갈래 물이 부딪히며 깎아내는 것을 참아내며 만여 년의 세월에 비늘 하나도 손실되지 않고 고색창연한 빛을 천연 그대로 굳게 보존하고 있으니, 옛 성인이 찬탄한바 “큰 홍수가 하늘에까지 닿았는데 지주(砥柱)가 꿈쩍하지 않는다." "큰 홍수가...... 꿈쩍하지 않는다." : 장자(莊子)』「소요유(逍遙遊)」에, “큰 홍수가 하늘에 닿을 지경이 돼도 빠지는 일이 없으며, 큰 가뭄으로 금속과 암석이 녹아 내려 대지나 산자락이 타도 뜨거운 줄 모른다[大浸稽天而不溺 大旱金石流 土山焦而不熱"라는 구절이 있다. 장자의 내용과 여기서 인용한 말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데, 현재까지 조사한 결과에 따른다면 다른 출처를 찾을 수 없다.
지주산(砥柱山)는 '황하 가운데 있는 산으로 격류 속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뜻에서 온 이름이다. 지주대(砥柱坮)는 절개를 의미하는데 숨은 뜻이 있는 듯하다. 지주대(砥柱臺) : 지주(砥柱)는 지주(厎柱)라고도 쓰는데 산의 이름임. 하수(河水)의 중류(中流)에 있음. 사람이 홀로 서서 흔들리지 않는 것을 중류지주(中流砥柱)라 이름.(고전번역원) 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군자가 그것으로써 입각(立脚)의 표준으로 기약해야 하리라.
7. 제칠곡(第七曲)_비폭동(飛瀑洞)
제칠곡은 비폭동(飛瀑洞)이다. 지주대(砥柱坮)로부터 거슬러 올라갈수록 한 삼태기의 흙도 허락지 않는 개골(皆骨_골산)의 산세는 금강산의 진면목을 몽상하지 않을 수 없는 별유천지(別有天地)이다. 둘러싸고 있는 것이 모두 절벽이기 때문에, 골짜기 형태가 깊어 하늘을 우러러보매 단지 한 닢 동전 같은 푸른 하늘이 보이고 상쾌한 기운이 사람에게 엄습해오는 중간이 두 갈래로 나뉘는 은빛 물결이 수직으로 천척(千尺)을 떨어져 흩날리며 부서지니 '은하수가 구만리 장천에서 떨어지는 것인가' [은하수가....… 떨어지는 것인가' : 이백(李白)의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햇빛 비치는 향로봉에 자줏빛 안개 일어나는데, 긴 강을 매단 듯한 폭포 멀리 보이네. 날듯이 수직으로 삼천 척을 떨어지니. 은하수가 구만리 장천에서 떨어지는 것인가[日照香爐生紫煙遙 看瀑布掛長川| 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라는 시구로 이백(李白)이 묘사해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인정하리라.
8. 제팔곡(第八曲)_경천벽(擎天壁)
제팔곡은 경천벽(擎天壁)이다. 비폭동(飛瀑洞)으로부터 문득 호수를 따라 거슬러 올라 동쪽으로 나아가던 발걸음을 바꾸어 남쪽으로 꺾어 호수를 쫓아가면 실낱같은 오솔길이 이끌던 매로(媒路_통로)의 희미한 선이 여기에서 멈춰 길이 다했다고 하였다. 이에 신과 갓을 벗고 맨발 맨머리로 물결을 밟으며 험로를 건너 일구(一口)의 석문(石門)을 뚫고 들어가면 문득 두 갈래 길의 석벽이 부딪히면 부서뜨릴 것처럼 위협의 기세로 먼 허공에 닿아 우러러 보매 동천(洞天)의 폭이 새 한 마리 지나갈 정도도 오히려 넓지 않은 것을 만나니, 명명한 글자의 뜻대로 이것이 이른바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석벽[경천벽(擎天壁)]'이다. 두려워 머물 수 없을 듯했다. 이로부터 곧장 제구곡(第九曲)에 이르고자 하면 거꾸로 선 석벽에 발을 걸고 어지러운 물결에 머리를 감지 아니하고는 붙잡고 오를 방법이 없으니, 만일 용감히 나아가고 돌아보지 않아 목숨 건 자가 아니거든 지팡이를 돌리는 편이 십분 옳을 것이다.
9. 제구곡(第九曲)_교룡담(交龍潭)
제구곡은 교룡담(交龍潭)이다. 두 갈래 길의 구름 덮인 산이 부딪히면 부서뜨릴듯하더니 한 줄기 강물이 희롱하는 듯 다시 열렸다. 위 폭포는 백 길을 드리우고 아래 폭포는 백 길을 드날리어 맹렬한 파도가 바위를 찧으니, 바위는 절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위아래의 돌절구가 모두 만 섬을 수용할 만큼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두 절구를 중간에서 받들어 한 줄기의 석룡(石龍)이 구부려 누워 머리를 든 채 물결 소리를 들으니, 이것이 곧 유명한 '용화굴(龍化窟_용이 살고 있는굴)'이다. 대낮에 우레가 크게 울리고 푸른 하늘에 비가 횡행하여 그림으로도 그려내기 어렵고 임하면 두려워할 만하니, 과연 신물(神物)이 간직된 곳이다. 이에 구곡의 승경이 한 곡이 지날 때마다 더욱 빼어나 가장 위의 곡이 마땅히 가장 빼어난 곡이라는 사실을 알겠다.
다음과 같이 평하노라. “용호의 승경, 용호의 승경이라고 하지만 그 속에 여러 빼어난 곳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어느 누가 삼신산(三神山) 중에서 어느 산이 가장 좋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구룡(九龍)이 제일승경이라고 대답할 뿐이다.”
경진년(1940) 가을 어느 날, 용호구곡을 탐방한 나그네 적다.
출처 : 내촌마을의 삶과 터전(2013, 내촌마을지 발간위원회, 지리산권문화연구단)
140) 김사문은 이 시구의 작자를 이적이라고 하지만, 북송의 동파 소식이 지은 것이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또한 당나라 때의 이백(李白)이라는 설도 있다. 따라서 이 시구의 작자에 관한 설은 현재까지는 명확하지 않은 듯하다. 141) 우암(尤庵) 선생 :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가리킨다. 142)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에는 보이지 않는다. 143) 미수선생 :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 1595~1682)을 가리킨다. 144) 이 시도 또한 미수 허목의 문집인 언(言)』에 보이지 않는다. 145) 을진충(乙辰水) : 울진은 동동남의 방위를 가리키며, 수출은 물이 들이치는 것을 말한다.
146) 이상만(李三晩) : 조선 후기의 서예가로, 생몰은 1770~1847이다. 자는 윤원(遠), 호는 창암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전북 정읍에서 출생했으며, 만년에는 전주에 살면서 완산(完山)이라고도 호를 썼다. 어린 시절에 당대의 명필이었던 이광사(李匡師)에게 글씨를 배웠는데, 글씨에 열중하여 포(布)를 여가면서 연습하였다 한다.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으나 글씨에만 몰두하여 가산을 탕진했으며, 병중에도 하루 천자씩 쓰면서 "벼루 세 개를 먹으로 갈아 구멍을 내고야 말겠다."고 맹세했다 한다. 글씨 배우기를 청하면 점 하나 획 하나를 한 달씩 가르쳤다고
한다. 그의 글씨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우연히 전주에 온 부산상인의 장부를 쓰게 되었는데, 그 상인이 귀향하여 감상가에게 보이게 된 것을 계기로 필명이 높아졌다고 한다. 하동 칠불암(七佛菴)의 전주(全州 그의 필적이라고 한다. 또 전주 제남정(濟南亭)의 편액을 썼는데 갑오경장 때 제남정은 소실되었으나 편액은 집안의 뜰에 날아 떨어졌다는 일화도 있다. 오세창(吳世昌)은 “창암은 호남(湖南)에서 명필로 이름났으나 법이 모자랐다. 그러나 워낙 많이 썼으므로 필세는 건유(愈)하다."고 평했다. 특히 초서를 잘 썼으며 그의 서체를 창암체라 하였다. 전라도 도처의 사찰에 그가 쓴 편액을 볼 수 있다.
147) 주희와 여대림) 두 선생 : 향약은 '일향(一鄕)의 약속(約束)'을 줄인 말로, 중국 송나라 때인 1076년 여대충(大忠)·대방(大防)·대균(大)·대림(大臨) 네 형제에 의해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에서 시행했다고 한다. 「소학(小學)』에도 간략히 소개된 그 향약은 덕업상권(德業相)· 과실상규(過失規)· 예속상교(禮俗相)·환난상(相)의 4강령으로되어 있으며, 이를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 또는 줄여서 '여씨향약' 이라고 한다. 이것을 주희가 남송 사회의 현실을 참고하여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으로 만들고 '월단집회독약지례(月旦集會讀約之禮)'를 덧붙였다. 이것 역시그대로 '여씨향약' 또는 '주자향약' 이라 부르기도 했다.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소학』에 실려 주자학의 수용과 함께 우리나라에 소개된 향약은 일찍부터 사족들 사이에 행해졌다. 따라서 호경리 원동계가 주희와 여대림의 영정을 모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닦아오던 것이라는 설은 향약을 만들고 보급한 두 인물을 깊이 존경하여 예식을 행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부분이다.
148) 이태왕(李太王) : 구한말 순종(純宗) 재위 시에 태상왕(上王)인 고종(高宗)을 이르던 말이다.
149) 주자(朱子) : 주희를 높여 일컬은 말이다.
150) 조산서(趙山西):산서는 호이며, 이름은 경남(男, 1570~1641)이다. 조선 중기의 무인이자 의병장으로, 본관은 한양
자는 선술호는 산서·산서병옹(山西翁)·산서처사·주몽당주인(夢堂主人) 등이다. 전북 남원 출생이다. 아버지는 사), 직을 지낸 조벽)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梁氏)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조모의 손에 양육됐으나 기상은 활달했다. 1579년 10세에 유인옥(沃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했다. 13세에는 난리를 예견하여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8세 때 조헌)의 문하에서 배웠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는 군문에 들어가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1598년 29세에 전라도병마절도사 이광악(光)의 막하에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에서 왜군을 무찔렀다. 1608년 39세에는 향시(양장) 614년(광해군 6) 45세에는 삼장(三場)에 합격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난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 1623년 54세에 겨우 진사에 등과했으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방장산(山) 추동(龍洞)에 별장을 짓고 산서병옹이라 자처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151) "큰 홍수가...... 꿈쩍하지 않는다" : 장자(莊子)』「소요유(逍遙遊)」에, “큰 홍수가 하늘에 닿을 지경이 돼도 빠지는 일이 없으며, 큰 가뭄으로 금속과 암석이 녹아 내려 대지나 산자락이 타도 뜨거운 줄 모른다[而不滿 大旱金石流 土山集而不"라는 구절이 있다. 장자의 내용과 여기서 인용한 말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데, 현재까지 조사한 결과에 따른다면다른 출처를 찾을 수 없다.152) 은하수가....… 떨어지는 것인가' : 이백(李白)의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햇빛 비치는 향로봉에 자줏빛 안개 일어나는데, 긴 강을 매단 듯한 폭포 멀리 보이네. 날듯이 수직으로 삼천 척을 떨어지니.은하수가 구 만리 장천에서 떨어지는 것인가[日照香爐生煙遙看瀑布掛長| 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 龍湖九曲十詠(용호구곡십영)
영송(嶺松) 김재홍(金在洪, 1867~1939)
武夷山上有仙靈 : 무이산 위에는 신선들이 살고 있고
山下寒流曲曲淸 : 산 아래 푸른 시내 굽이굽이 맑도다.
欲識個中奇絕處 : 그 안의 기이한 절경 알고자 한다면
棹歌閑聽兩三聲 : 뱃노래 두어 가락 한가로이 들어보소.
一曲溪邊上鈞船 : 일곡이라 시냇가에 낚싯배를 띄우니
慢亭峰影藻晴川 : 만정봉 그림자가 맑은 내에 잠겨 있네.
虹橋一斷無消息 : 무지개다리 끊어지자 소식조차 없고
萬壑千巖鎖翠煙 : 온 골짝 바위마다 푸른 안개 자욱하네.
二曲亭亭玉女峰 : 이곡이라 우뚝하니 솟아있는 옥녀봉
揷花臨水爲誰容 : 꽃을 꽂고 물가에서 누굴 위해 꾸몄는가?
道人不作陽臺夢 : 도인은 양대의 꿈 다시 꾸지 않으니
興人前山翠幾重 : 앞산에 스민 흥취 푸르름이 몇 겹인가
三曲君看架壑船 : 삼곡이라 가학선을 그대는 보았는가
不知停樟幾何年 : 노 젓기를 멈춘 지 몇 해이던고?
桑田海水今如許 : 상전이 벽해되어 지금처럼 변했으니
泡沫風燈敢自憐 : 물거품 같은 인생 가련타 어이하리.
四曲東西兩石 : 사곡의 동서에 두 봉우리 우뚝한데
巖花垂露碧氈 : 바위틈 꽃잎 이슬 푸른 물에 번져가네.
金鷄叫罷無人見 : 금계 울음 그치자 본 사람 다시없고
月滿空山水滿潭 : 빈산에 달빛 가득, 와룡담엔 물이 그득
五曲山高雲氣深 : 오곡이라 산 높고 그름 깊어
長時煙雨暗平林 : 는개가 늘 끼여 평림이 어둑어둑
林間有客無人識 : 숲속의 이 늙은이 알아주는 이 없으니
欸乃聲中萬古心 : 어여라! 뱃노래에 만고 수심 서려있네.
六曲蒼屏繞碧灣 : 육곡이라 푸름 물굽 창병봉을 휘감고
茆茨終日掩柴關 : 띠집에는 온종일 사립문 닫혀있네.
客來倚棒巖花落 : 나그네 노 멈추니 바위 꽃잎 떨어지고
猿鳥不驚春意閑 : 새들도 놀라잖는 한가로운 봄날이여.
七曲移舟上碧灘 : 칠곡이라 노를 저어 푸른 여울 오르며
隱屏仙掌更回看 : 은병봉과 선장암을 다시금 돌아보네.
人言此處無佳景 : 사람들은 말을 하지 이곳엔 절경 없고
只有石堂空翠寒 : 쓸쓸한 석당만 덩그렇게 남았다고.
八曲風煙勢欲開 : 팔곡이라 안개 속에 산세는 트여가고
鼓樓巖下水瀅洄 : 고루암 아래로 물줄기 감아 도네.
莫言此處無佳景 : 이곳에 절경 없다고 말하지 마소
自是遊人不上來 : 여기까지 와 보지 않아서라네.
九曲將窮眼豁然 : 구곡에 다하려니 눈앞이 확 트이고
桑麻雨露見平川 : 싱그러운 뽕나무밭 평천이 나타나네.
漁郎更覓桃源路 : 어부는 다시 무릉도원 찾아가나
除是人間別有天 : 이곳 말고 별천지 어디 있으랴.
注 김재홍(金在洪, 1867~1939) : 자는 윤범(允範), 호는 영송(嶺松)이다. 남원시 송동면 영촌마을에서 출생하여, 연재(淵齋)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27년 용호서원을 세웠으며, 일제 치하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저서로는 『수오재집(遂吾齋)』 10책, 『산야문답(山野問答)』 등이 있는데, 『산야문답(山野問答)』은 김재홍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가치관을 읽을 수 있는 자료로서 야인(野人)의 물음에 산인(山人)의 대답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댓글 이번 토욜 답사갑니다~^^
김재홍이 용호정사(精舍)를 건립하여 차후에 이곳이 용호서원(龍湖院으로 확장되었으며, 주자와 다른 한 명의 영정 대신에 이곳을 다녀간 송병선과 용호서원의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김재홍 및 김종가(金種嘉)가 배향 인물이 된 연유를 추론할 수 있는 근거 자료가 된다.
이 외에도 제일곡동(洞)의 이름이 붙여진 유래, 송림사(松林寺)가 폐사가 된 전설, 제이곡 불신당(佛神堂) 주변의 석문을 쓴 작자들, 제사곡 칠성암(七星庵)의 명칭 유래, 제오곡 유선대(臺)에 전해지는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의 일화, 제팔곡 경천벽(壁)과 제구화굴(窟)이 그 이름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경관의 모습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곡진하게 묘사하고 있어용호구곡의 곡명(名)·고적(蹟)·전설 등을 이해하는 데에 현재로선 이보다 더중요한 자료는 없다고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서문에서 서술한 중국 당나라 이적의 시구, 송시열의 활화첩과 허목(許穆)의 달관시는 모두 인용한 출처(出處)가 불분명하다. 그리고 다른 부분에서도 구체적인 기록이나 자료에 근거한 것이기 보다 구전(口傳)에 바탕한 내용이 있어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있다는 점을 밝혀둔다.
龍湖品題
己巳春 松察與諸同志游湖上 選次九曲地名 刻平石年 : 기사년 봄은 송찰(松察?)이 여러 동지(同志?)들과 호상(湖上)을 유람하고 구곡의 지명을 선정하여 평평한 바위(平石)에 새긴 해이다.
八斗孫待行三月望日 : 팔두(八斗?) 손대행 삼월 보름
注 品題 : 사물의 가치나 우열을 문예적으로 평가하는 일. 選次 : 차례대로 선정하다. 九曲地名 : 구곡의 지명. 松察과 八斗의 의미를 모르겠다. 同志의 판독도 불분명하다. 己巳는 1929년이다. 남원군수 李東漢(1923~25)과 白定基(1926~27) 재임시 용호구곡을 다녀가면서 " 진기한 경승이 이름이 없는 것은 가히 한탄할 만한 일이다.'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1927년 이후에 용호구곡이 설정되었다. 확인이 더 필요하겠지만, '용호품제(龍湖品題)' 己巳(1929)년 봄(春)으로 추정할 수 있다.
팔두는 용호서원 초대 원장을 지낸 김재홍의 손자 김두수가 8세해란 뜻이다
1655년 김지백의 「유두류산기」에 용추(龍湫)라는 지명이 나온다. 용추(龍湫)는 용호구곡의 옛이름이다. 용호구곡은 근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전에는 원천(元川). 용호동(龍湖洞), 용추동(龍湫洞)이라고 하였다. 1752년(영조 28)에 발간된 『용성지』의 '산천조(山川條)'에 용추동(龍湫洞)으로 소개하고 있다. 용호동 입구에 창암(蒼巖) 이삼만 (李三晩 , 1770~1847) 이 썼다고 전하는 용호석문(龍湖石門) 석각이 있다. 1879년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두류산기」에 "용호동(龍湖洞)으로 들어서니 계곡이 매우 깊고 그윽하며 흰 바위가 있었다. 시내의 너럭바위에는 구멍이 파여서 도랑을 이루었는데, 맑은 물줄기가 쏟아져 나와 아래로 떨어져 맑은 못을 이루었다. 그 위에는 또한 주자(朱子), 송자(宋子) 두 선생의 영정을 모셨던 집의 옛 터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송력은 소나무의 송진처럼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여성의 애액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했다.
여궁석의 음기를 막기위해 인공으로 쌓은 석축이 인상적이다
육모정 아래의 불이대(不二坮)와 풍호대(風乎臺) 석벽에 집중되어 있다. 풍호대 명칭은 후술할 김시문의『용호구곡승경안내』에서는 고암대(鼓巖臺)로 지칭되고 있다
현장 내촌마을 입구 맞은편의 용호구곡 제1곡 송력동 바로 아래 지류에는 ‘석녀골(石女谷)’ 혹은 ‘보지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육모정 하단 석벽에는 ‘용호정사동구(龍湖精舍洞口)’와 ‘갑자춘(甲子春, Figure 9 참조)’이란 바위글씨가 전한다. 이 바위 글씨는 1864년 또는 1924년 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를 들고 반드시 가보고 싶습니다
꼭 댕겨오세요♡
1908년에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내동리에 사는 순흥안씨와 남원양씨 문중이 서로 합의하여 마을 앞 연당의 서재에서 학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안골서당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김사헌, 김사문 등이 초기 훈장으로 부임하여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으며, 해방 후 1949년까지 운영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hankukmail.com/newshome/detail.php?number=32762
2곡의 명칭이 다른 것은
1940년 김사문은 옥용추 석각을 못찾았을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자의 무이구곡중 2곡인 옥녀봉을 사용했을수도 있습니다.
●1655년 김지백의 「유두류산기」에 용추(龍湫)라는 지명이 나온다.
●1752년(영조 28)에 발간된 『용성지』의 '산천조(山川條)'에 용추동(龍湫洞)으로 소개하고 있다.
●용호동 입구에 창암(蒼巖) 이삼만 (李三晩 , 1770~1847) 이 썼다고 전하는 용호석문(龍湖石門) 석각이 있다.
●1879년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두류산기」에 "용호동(龍湖洞)
중국의 성현 주자에서 남원의 충절 선비인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영송(嶺松) 김재홍(金在洪), 입헌(立軒) 김종가(金種嘉 1889 고종 26~1975)로 배향하고, 주자의 영정은 현재 보관 형태로 관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