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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이야기 1940년 김사문의 용호구곡(龍湖九曲) 경승 안내
칠성 추천 0 조회 174 23.06.20 11:38 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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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3.06.21 08:46

    첫댓글 이번 토욜 답사갑니다~^^

  • 작성자 23.06.21 08:58

    김재홍이 용호정사(精舍)를 건립하여 차후에 이곳이 용호서원(龍湖院으로 확장되었으며, 주자와 다른 한 명의 영정 대신에 이곳을 다녀간 송병선과 용호서원의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김재홍 및 김종가(金種嘉)가 배향 인물이 된 연유를 추론할 수 있는 근거 자료가 된다.

    이 외에도 제일곡동(洞)의 이름이 붙여진 유래, 송림사(松林寺)가 폐사가 된 전설, 제이곡 불신당(佛神堂) 주변의 석문을 쓴 작자들, 제사곡 칠성암(七星庵)의 명칭 유래, 제오곡 유선대(臺)에 전해지는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의 일화, 제팔곡 경천벽(壁)과 제구화굴(窟)이 그 이름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경관의 모습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곡진하게 묘사하고 있어용호구곡의 곡명(名)·고적(蹟)·전설 등을 이해하는 데에 현재로선 이보다 더중요한 자료는 없다고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서문에서 서술한 중국 당나라 이적의 시구, 송시열의 활화첩과 허목(許穆)의 달관시는 모두 인용한 출처(出處)가 불분명하다. 그리고 다른 부분에서도 구체적인 기록이나 자료에 근거한 것이기 보다 구전(口傳)에 바탕한 내용이 있어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있다는 점을 밝혀둔다.

  • 작성자 23.06.21 20:54

    龍湖品題

    己巳春 松察與諸同志游湖上 選次九曲地名 刻平石年 : 기사년 봄은 송찰(松察?)이 여러 동지(同志?)들과 호상(湖上)을 유람하고 구곡의 지명을 선정하여 평평한 바위(平石)에 새긴 해이다.

    八斗孫待行三月望日 : 팔두(八斗?) 손대행 삼월 보름

    注 品題 : 사물의 가치나 우열을 문예적으로 평가하는 일. 選次 : 차례대로 선정하다. 九曲地名 : 구곡의 지명. 松察과 八斗의 의미를 모르겠다. 同志의 판독도 불분명하다. 己巳는 1929년이다. 남원군수 李東漢(1923~25)과 白定基(1926~27) 재임시 용호구곡을 다녀가면서 " 진기한 경승이 이름이 없는 것은 가히 한탄할 만한 일이다.'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1927년 이후에 용호구곡이 설정되었다. 확인이 더 필요하겠지만, '용호품제(龍湖品題)' 己巳(1929)년 봄(春)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작성자 23.10.07 06:05

    팔두는 용호서원 초대 원장을 지낸 김재홍의 손자 김두수가 8세해란 뜻이다

  • 작성자 23.06.21 20:56

  • 작성자 23.06.21 20:57

    1655년 김지백의 「유두류산기」에 용추(龍湫)라는 지명이 나온다. 용추(龍湫)는 용호구곡의 옛이름이다. 용호구곡은 근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전에는 원천(元川). 용호동(龍湖洞), 용추동(龍湫洞)이라고 하였다. 1752년(영조 28)에 발간된 『용성지』의 '산천조(山川條)'에 용추동(龍湫洞)으로 소개하고 있다. 용호동 입구에 창암(蒼巖) 이삼만 (李三晩 , 1770~1847) 이 썼다고 전하는 용호석문(龍湖石門) 석각이 있다. 1879년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두류산기」에 "용호동(龍湖洞)으로 들어서니 계곡이 매우 깊고 그윽하며 흰 바위가 있었다. 시내의 너럭바위에는 구멍이 파여서 도랑을 이루었는데, 맑은 물줄기가 쏟아져 나와 아래로 떨어져 맑은 못을 이루었다. 그 위에는 또한 주자(朱子), 송자(宋子) 두 선생의 영정을 모셨던 집의 옛 터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 작성자 23.06.22 07:03

  • 작성자 23.06.25 15:47

    송력은 소나무의 송진처럼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여성의 애액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했다.
    여궁석의 음기를 막기위해 인공으로 쌓은 석축이 인상적이다

  • 작성자 23.06.26 00:49

    육모정 아래의 불이대(不二坮)와 풍호대(風乎臺) 석벽에 집중되어 있다. 풍호대 명칭은 후술할 김시문의『용호구곡승경안내』에서는 고암대(鼓巖臺)로 지칭되고 있다

  • 작성자 23.06.26 01:08

    현장 내촌마을 입구 맞은편의 용호구곡 제1곡 송력동 바로 아래 지류에는 ‘석녀골(石女谷)’ 혹은 ‘보지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 작성자 23.06.26 01:08

    육모정 하단 석벽에는 ‘용호정사동구(龍湖精舍洞口)’와 ‘갑자춘(甲子春, Figure 9 참조)’이란 바위글씨가 전한다. 이 바위 글씨는 1864년 또는 1924년 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 작성자 23.06.26 01:08

  • 23.06.26 12:27

    이 지도를 들고 반드시 가보고 싶습니다

  • 작성자 23.06.30 17:44

    꼭 댕겨오세요♡

  • 작성자 23.07.11 07:11

    1908년에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내동리에 사는 순흥안씨와 남원양씨 문중이 서로 합의하여 마을 앞 연당의 서재에서 학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안골서당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김사헌, 김사문 등이 초기 훈장으로 부임하여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으며, 해방 후 1949년까지 운영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작성자 23.07.17 11:38

    http://www.hankukmail.com/newshome/detail.php?number=32762

  • 작성자 23.07.17 18:09

    2곡의 명칭이 다른 것은
    1940년 김사문은 옥용추 석각을 못찾았을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자의 무이구곡중 2곡인 옥녀봉을 사용했을수도 있습니다.

  • 작성자 23.10.07 06:14

    ●1655년 김지백의 「유두류산기」에 용추(龍湫)라는 지명이 나온다.
    ●1752년(영조 28)에 발간된 『용성지』의 '산천조(山川條)'에 용추동(龍湫洞)으로 소개하고 있다.
    ●용호동 입구에 창암(蒼巖) 이삼만 (李三晩 , 1770~1847) 이 썼다고 전하는 용호석문(龍湖石門) 석각이 있다.
    ●1879년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두류산기」에 "용호동(龍湖洞)

  • 작성자 23.10.07 08:20

    중국의 성현 주자에서 남원의 충절 선비인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영송(嶺松) 김재홍(金在洪), 입헌(立軒) 김종가(金種嘉 1889 고종 26~1975)로 배향하고, 주자의 영정은 현재 보관 형태로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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