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지나 겨울 속으로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존재한다. 물론 기후변화로 인해 봄, 가을이
다소 불명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이라는 사계절이 순환하며 돌아가고 있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며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겨우내 무채색이던
산하가 봄의 기운을 받아 생기를 띠며 강산을 푸릇푸릇 혹은 알록달록
꽃망울을 터트린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이 선홍빛 핏물을 흘리면
남도에서는 화려한 벚꽃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만물의 소생이라는
힘찬 에네르기아는 사람들로 하여금 움츠렸던 삶의 새로운 준비를 선물
하며 춘풍을 일으킨다.
또한 여름은 그야말로 계절의 청춘기라 하겠다. 산이란 산은 푸른 실록
을 두르고 따가운 뙤약볕을 대적하기도 한다. 봄 한 철 꽃을 피우던 나무나
식물들이 태양이 주는 에너지를 흡수하여 왕성한 숲을 이루며 푸르름을
인간들에게 선물하니 장대비 후려치는 날은 계곡 어딘가에 수직으로 직하하는
김수영의 폭포수를 만나기도 한다.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그 여름의 끝은 시인 이성복의 아름다운 시처럼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고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가운데 우리의 청춘은 장난처럼
막을 내릴 것이다.
그 뜨거운 태양의 정점을 지나 서서히 낮과 밤의 주기가 변하기 시작할
즈음 밤낮으로 서늘한 바람이 부는 내적 침잠의 시간 가을이 시작되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 내내 방안을 회전하는 신일 선풍기도 면벽한 에어컨도
노동을 멈춘다. 쌔롱 싸롱 나무에 매달려 가는 절기를 불태우던 매미울음도
이때 즈음이면 가을의 전령 귀뚜라미나 쓰르라미가 울어대는 것이다.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옛 선인의 말씀처럼 하늘은 쪽빛으로
바다를 풀고 산은 산대로 저마다의 색과 향기로 한껏 멋을 뽐낸다.
또한 가을은 사색의 시간이다.
저녁놀에 걸린 감나무의 붉은 까지놀을 보며 생의 여백을 상기하는가 하면
서리 맞은 감나무의 마지막 남은 잎사귀를 바라보며 삶의 측은지심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신경림 시인의 갈대라는 시인데 가을바람에 서걱이며 흔드리는
갈대를 보며 산다는 것은 속으로 조용히 우는 것임을 시인은
깨닫는 것이다.
인생의 청춘기를 지나 가을이라는 사색기에 이르면 강가나 길가의
백발로 흔들리는 갈대들이 단순히 바람이나 달빛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반성하고 초월하려는 내적인 울림으로 느껴봄도
좋으리라.
가을이 깊어갈수록 나무들이 잎을 떨구고 대지에 뻗은 뿌리의
수도꼭지마저 걸어잠근다는 것은 그만큼 앞으로 닥칠 겨울을
대비하는 것이리라. 이같은 자연의 정화작용 탓에 우리는 그 어느
계절보다 화려한 강산의 불붙은 단풍을 덤으로 선물 받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