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8(월)■
(마태복음 23장)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묵상/마 23:23-28)
◆ 우선 순위가 바뀐 자들에 대한 경고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23)
주님께서는 누구를 저주하셨는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자들이었다. 이들에게 왜 화가 있는가? 이들의 죄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들이 화를 받아야 할 가장 큰 이유는 율법을 안지켜서가 아니라, 율법의 우선순위를 뒤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친 것이다. 사실 이것이 율법을 어기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십일조나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모두 율법에서 명한 바다. 그러나 십일조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에 비하면 하루살이와 낙타의 차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십일조는 낙타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하루살이로 만들었다.
오늘 본문은 사람이 성경말씀을 열심히 지키면서도 결국 철저하게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할 수 있음을 깨우친다.
우선순위의 혼동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마귀의 전략이다. 예수님에게 와서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것도 우선순위의 혼동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속지 않으셨다.
만일 교인들이 우선순위를 혼동하고 있다면, 마귀는 교인들이 어떤 봉사를 해도 전혀 겁내지 않는다. 아니, 겁내기는 커녕 오히려 권장하고, 부추기고 박수칠 것이다.
지금도 세상의 교회에는 마귀의 이 전략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사소한 것에 집착하느라고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하는 이 기만을 어떻게 분별하고 벗어날까?
당신이 우선순위가 혼동되어 있는지 아닌지 간단하게 테스트해볼 수 있다.
당신에게 성도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무엇인가를 질문했을 때, '십일조'라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혼동하고 있는 것이며, 예수님의 이 저주의 메시지를 받아야 할 것이다. "화있을진저!"
당신은 기만당한 것이다.
구약성경을 아무리 여러 번을 읽어보아도 십일조 성도의 신앙생활의 우선순위가 된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성도의 우선순위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이것도 버리지 말라'는 말씀을 인용해서 십일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각인시키는 자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 십일조는 신약시대에도 의무인가?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23)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근거해서 신약에서도 십일조가 존속함을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본래 십일조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민 18:21).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제사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그리고 이스라엘 12지파가 레위지파에게 십일조를 주었다. 그리고 3년마다 각 성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위해 십일조를 따로 바쳤다(신 26:12).
십일조를 바치려면 두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 곧 제사장과 제사가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제사장도, 제사도 그대로 존재했다. 그것은 십일조가 존재해야 할 이유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일조를 폐기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신약교회에 세워지면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 들어섰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이며(벧전 2:9), 이제는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 참된 번제요(롬 12:1,2), 사람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다(히 13:16).
십자가 이후에 구약적 성전과 제사는 폐기되었고, 제사장은 흩어졌다. 더 이상 구약적 의미의 십일조가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예수님과 제자들 중에는 단 한명도 십일조를 받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레위지파가 없었으므로 십일조를 받을 수가 없었다. 만일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십일조를 받았다면 그 하나만으로도 처형 이유가 될 것이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이방교회인 고린도교회에 있을 때는 단 한푼도 요구하지도, 받지도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다(고후 11:7--9). 만일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십일조가 성도의 의무라고 강조했다면, 사도 바울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이 받지도 않고 요구하지도 않은 십일조가 언제부터 이렇게 성도들의 아주 중요한 의무로 둔갑했을까?
그것은 초대교회로 부터 한참 뒤의 일이다.
신약교회를 구약교회의 모방품으로 전락시키면서 성직자 그룹이 제사장 행세를 하고, 예배당이 성전으로 둔갑했으며, 헌금이 제사처럼 취급된 때부터이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은 유대인들이 보았을 때, 유대교의 조잡한 모방품이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유대교회의 모방품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교회의 실체로서 영적이고 하나님의 은총과 빛나는 복음이 있는 하나님 나라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십일조는 더 이상 의무사항이 아니다. 그러나 십일조에 대한 율법적 의무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너무 좋아하는 분들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구원을 얻은 성도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수입의 일정한 부분을 드리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성도는 헌금을 의무때문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때문에 드려야 한다.
조선 시대에는 지주들은 소작인들에게 무려 소득의 80퍼센트를 떼어갔다. 일본 강점기 시절에 전라도 증도 부근의 어떤 지주가 소작인들의 반발로 인해서 협상을 했는데, 소득의 몫을 오십대 오십으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다고 한다. 그 기념비가 세워지고 사회책에 소개될 정도였다.
이런 상황과 비교한다면 사실 십일조는 대단한 것이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러 소비가 많은 상황에서 세금떼고, 십일조 떼는 일이 버겁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헌금의 용도와 의미를 제대로 알고 나면 십분의 일도 부족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주님, 제가 신앙의 우선순위를 혼동하지 않도록 해주시고, 참된 분별력을 주시고, 주님께 기쁨으로 드리는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
성경적 헌금에 관하여는 좀 더 자세히 알기를 원하는 분들은 제가 조선족들에게 한 아래 강의를 참고했으면 합니다.
https://youtu.be/NylZSPZkYA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