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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0일 연중 제23주일
제1독서 : 이사 35,4-7ㄴ
제2독서 : 야고 2,1-5
복 음 : 마르 7,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구약의 예언을 배경으로 놓고 볼 때,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신 일은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그 예언이 선포된 때에는 비현실적인 꿈이었습니다.
뜨거운 땅이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이 샘터가 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일이고, 이루어지기 어려운 희망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눈먼 이들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의 귀가 열리는 것도 머나먼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마르 7,37)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기적들을 이루시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은 이제 약속이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됨을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화답송에서는 하느님께서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눈먼 이를 보게 하시는 것이, 바로 그분께서 영원히 다스리시는 방식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느님의 통치나 권력은 세상의 통치자들처럼
“백성 위에 군림하고, 백성에게 세도를 부리는”(10,42)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하느님 나라를 우리는 어떻게 선포할 수 있을까요?
야고보서에서 그 답을 말하여 줍니다.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야고 2,1).
우리가 눈먼 이의 눈을 열고 귀먹은 이의 귀를 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통치가, 그분의 나라가 가난한 이들을 돌보시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그 가난한 이들을 대하는 모습은
하느님의 통치를 우리가 실현하고 있는지
아니면 가로막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척도가 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 53항에서
“나이 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것이 말이나 되는 것입니까?”라고 하셨습니다.
교황님의 탄식이 실제 우리 삶에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돈과 연관 된 세상의 것만, 더 크게 부각 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무관심’이라고 합니다.
‘무관심’이 많은 세상인 것을 보면,
그만큼 우리는 사랑의 반대편을 서 있는 것이 아닐까요?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관심은
자기가 아닌 국가가 또 교회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가난 속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점입니다.
허름한 마구간에서 시작해서 아버지로부터 목수 일을 하셨고,
또 공생활 중에도 늘 가난 속에 사셨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해서 제자들이 자주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의 관심은 지극했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했던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 들린 사람 역시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리, 창녀 등과 같은 소외된 사람에게도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가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따뜻한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사람들이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 뒤의 행적을 이렇게 복음은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33.34)
손만 얹어 주셔도 사람들은 충분히 만족하셨을 텐데,
귀에 손을 넣고 침을 발라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지저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면 전혀 지저분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갓난아기의 아빠 엄마는 아기의 똥을 지저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 보십시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늘 사랑으로 다가가셨던 주님이십니다.
이는 우리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무관심하다면,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기에 그런 말과 행동을 했었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었을까요?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향한 관심이 필요한 요즘입니다.
이런 관심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하고, 또 함께하는 유일한 끈입니다.
성모 성탄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축하합니다. 오늘은 ‘성모 탄생 대축일’입니다.
동시에, <몬떼 올리베또 성 마리아 대수도원>과 연합회의 주보성인 축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욱 기쁜 날입니다.
이 기쁜 날, 아기 성모님과 함께 벌어진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찰찰 넘쳐 나길 빕니다.
사실, “성모성탄 대축일”인 오늘로부터 10달을 거슬러 올라가면,
12월 8일은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이 됩니다.
그러니, 성모님의 탄생은 ‘원죄 없으신 잉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성모 마리아를 원죄 없는 잉태로 탄생시킴으로써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춘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곧 구원 역사의 중요한 국면이 시작됨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탄생은 우리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됩니다.
곧 구세주께서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탄생으로 구원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토록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성모님을 원죄로부터 보호받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는 비록 인간이 죄의 굴레에 있다 하더라도,
결코 하느님의 축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보다 먼저 축복을 받은 존재’입니다.
‘죄보다 먼저 축복이 왔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축복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의 탄생으로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성모님께서는 원죄조차 없는 티 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대성전이셨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을 품으신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참으로 기쁨과 찬미와 감사의 날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주시는 분”이시오,
성모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루가 1,28)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 안셀모는 성모님을
“넘치는 은총으로 충만하신 분”, “복되시고도 지극히 복되신 분”이라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과 복이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축복을 받고,
창조주께서는 그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충만함의 흘러넘침을 입어 새싹이 트듯 되살아났다.”
이는 성모님께서 받은 은총과 축복이 성모님으로 말미암아
온 피조물에게 흘러들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아드님과 형제가 되며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며, 그분 안에 수렴(accapatulatio)됩니다.
이토록, 우리는 ‘은총에 은총을, 축복에 축복을 입게 되었습니다.’(요한 1,16 참조).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흔히들, “부모의 기쁨은 자녀에게 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기쁨도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구세주 아들을 탄생시키기 위해 원죄 없이 잉태되셨으며,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의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어머니의 그 은총과 축복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특별히 축복에, 축복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
많은 은총에 은총을 입은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고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한번, 이 기쁜 날,
아기 성모님과 함께 벌어진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찰찰 넘쳐 나길 빕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
주님!
보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당신의 역사를 보게 하소서.
세세 대대로 베풀어진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그 자비의 사슬 안에서 당신의 감실을 보게 하소서.
그들 모두가 당신이 담겨 있는 성합임을 보게 하소서.
오늘, 제 심장의 고동소리와 제 말과 발걸음과 손짓 모두가
당신의 자비를 엮어내는 사슬이 되게 하소서.
오늘, 저 안에 새겨진 당신 자비의 얼굴을 뵙게 하소서. 아멘.
제대로 듣고 말할 수 있는 은혜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사랑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몸소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고 입을 열어주십니다.
이 시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 관해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희망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
당신의 숨을 우리에게 불어넣어서 생명을 주셨습니다(창세1,27.2,7).
따라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제대로 말할 수 있도록 길들여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에 익숙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면 제대로 말할 수 없고 말씀대로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기를 간절히 원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어떻게 들을 수 있습니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성 예로니모).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우리가 눈을 통해서 마음으로 읽어야 하지만
그분은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하려는 정성이 있을 때
어느 순간 살아있고 힘이 있는 능력의 하느님(히브4,12)을 체험케 됩니다.
신자들이 세속적인 이야기는 많이 하면서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는 귀먹고 말을 더듬는 이가 많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겠다고 나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알아들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언어로 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고
또 복음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또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자!”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그룹모임에 가보면 자유 기도를 잘 하지 않습니다.
한다 해도 내 바람만 얘기하고,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하지 못합니다.
말씀 나누기에도 입을 꼭 다물고 계십니다.
사회적으로는 공부도 많이 했고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는 침묵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 밖에서는 그렇게 말씀을 잘하시는 분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노력하지 않은 채
그냥 세상에 묻혀 살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과 행동은 전혀 말씀과 함께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가 귀먹고 말을 더듬는 반벙어리입니다.
세상 것을 즐기는 시간과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비교해 보십시오. 부끄럽습니다.
성경을 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비판 정신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단순한 마음으로 읽으십시오.
마치 자녀가 아버지의 편지를 읽을 때에 문법을 따지지 않듯이,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에 영양가를 분석하지 않고 먹듯이
성경을 읽으시길 바랍니다”(알베리오네 신부).
일반 소설책은 밤을 새워 읽지만, 성경이나 신심 서적은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은총을 기대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시간을 내십시오. 그만큼 은혜로울 것입니다.
귀먹었다는 것은 들을 귀가 없다는 뜻입니다.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귀먹은 사람입니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대해 한마디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말 더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빵의 기적에 관한 가르침을 듣고도 마음이 완고해서 알아듣지 못했고,
호숫가에서 자기들을 구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비명을 지르면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의 치유 과정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환자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따로 불러낸다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고 배려입니다.
무엇보다 안정시킬 수 있는 곳이요, 당신의 말씀에 온전히 귀 기울일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러 자주 한적한 곳에 머무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쉬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 시간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의 영적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2).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습니다.
손가락은 창조하는 도구입니다.
내가 너를 치료해 주겠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표현입니다.
말을 못 하는 이들은 자기의 의사 표현을 손으로 합니다.
3).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셨는데
유다교에 있어서 침은 안질에 특효가 있는 치유로 여겼습니다.
당시 관습적인 치유행위 입니다. 우리도 벌레에 물렸을 때 침을 바릅니다.
엄마가 자식에게 먹을 것을 꼭꼭 씹어서 주는 것과 같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4). 하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5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을 행하실 때도 하늘을 우러러보셨습니다.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빵을 보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오늘도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고 기도하면 연민의 정과 측은한 생각으로 기도하겠지만,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면 전능하신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희망과 신뢰를 갖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더라도 상황만을 바라보지 말고 반드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는데 거센 파도를 보자 물에 빠졌습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는 걸었지만, 파도를 볼 때는 걸을 수 없었습니다.
5). 한숨을 내쉬셨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영, 숨을 얘기합니다.
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의 아픔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마르15,34),
절규하며 기도하는 그 아픔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숨은 절망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희망입니다.
6). 열려라! 에페타! 이 말은 부활입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열려라’는 말씀은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귀먹은 반벙어리에게 이보다 더 기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치유를 받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해 열려있어야 합니다.
능력의 말씀은 믿는 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열려있는 만큼 빛이 들어오고 은총이 열매 맺게 됩니다.
시편에서는 “너 한껏 입을 벌려보라, 나는 곧 그 입을 채워주리라”(시편80,1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 귀를 열어주시고 입을 열어주시려 ‘열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인간이 협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힘입어 나의 영적 감각이 열리고 건강한 영혼을 지켜나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치유 결과를 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말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단순히 발음을 똑똑히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리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귀와 입을 제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제대로’라는 말은 ‘올바르게’, ‘정확하게’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해야 하는 입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데 사용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은 하느님 마음에 들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때로 조용한 곳을 찾아 침묵 속에 하느님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항상 열려있어야 합니다.
에파타! 열린 사람은 감사와 찬미로 제대로 말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해 주신 다음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사람들이 제대로 전하지 않고 반벙어리 고쳐주셨다는 얘기만 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엉뚱한 소리만 퍼질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는 것은
‘보시니 참 좋더라’는 창세기의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보기에 좋지 않은 것이 있다면 다시 회복시키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서 새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을 주님의 말씀으로 정화하여
들어야 할 것을 제대로 듣고 말해야 할 것을 확실히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단편 소설의 주인공인 파흠은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어느 날 아주 싼값에 많은 땅을 얻을 수 있는 마을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파흠은 그 소문을 따라서 원주민이 사는 동네를 찾았습니다.
정말 원주민들은 단돈 1,000원에 원하는 만큼의 땅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침 해가 뜰 때 출발해서 저녁 해가 질 때까지 돌아오면 그만큼의 땅을 준다고 했습니다.
땅을 많이 가지고 싶었던 파흠은 해가 뜨면서 걸었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땅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습니다.
걷다보니 어느덧 해가 지려했습니다. 파흠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조금만 더 걸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방향을 돌려 뛰기 시작했습니다.
돌아가기 전에 해가 지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뛰고 또 뛰다 파흠은 마을에 도착하면서 그만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파흠은 많은 땅을 원했지만 결국 파흠이 묻힌 땅은 ‘반 평’에 불과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시애틀’ 추장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주민 추장인 시애틀에게 땅을 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시애틀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백인 형제들이 나에게 우리 땅을 팔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 땅을 팔 수는 없다. 땅은 우리 어머니이며, 우리는 그 어머니의 일부분이다.
모든 것이 신성하다. 우리에게 이 땅은 우리의 조상들이 잠든 곳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백인들은 땅을 소유물로 여기지만, 우리는 땅의 일부이다.
모든 나무와 바위, 강물, 숲의 소리조차 우리 민족의 기억과 역사를 담고 있다.
우리가 죽으면 이 땅은 우리의 영혼을 품고 있기에,
그 어느 곳에도 우리 영혼이 없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우리의 일부분이며, 우리의 신성한 유산이다.
백인들은 자연을 파괴하지만, 우리는 자연을 돌보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판다면, 그 대가로 이 땅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 달라는 약속을 받아야 한다.
백인들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면,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하고, 그 땅의 신성함을 존중하며,
그곳에서의 삶을 소중히 여기기를 바란다.
하늘과 땅, 나무와 물이 모두 우리의 형제자매이며,
우리가 죽은 후에도 이 땅 위에 우리의 영혼이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시 땅을 사려했던 주지사는 원주민 추장의 깊은 성찰을 존중하며
도시 이름을 ‘시애틀’로 정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파타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던 언어인 ‘아람어’입니다. 뜻은 ‘열려라’입니다.
사람들이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에파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려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2년 넘게 전쟁 중입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땅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해가 지면 돌아와야 하는데 러시아는 2년이 넘게 진격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크라이나는 반대로 러시아의 땅으로 진격했습니다.
1,000킬로가 넘게 진격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서로 땅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정든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름다운 마을이 파괴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하실 것입니다.
‘에파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1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스라엘은 남의 땅에서 종살이했던 민족입니다. 나라 없이 2,000년을 방황하던 민족입니다.
‘홀로코스트’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문설주에 이런 말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여라.”
이스라엘은 좀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정착촌을 만들고, 이웃 사람을 내쫓고 있습니다.
하마스, 헤즈볼라, 시리아 민병대는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미사일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국제 정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위험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에게도 이렇게 말하실 것입니다.
‘에파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과 하마스에도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신앙과 미신은 비슷한 것 같은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미신은 나의 뜻대로 하느님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땅을 빼앗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대로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가진 것을 나누고,
하느님 때문에 희생하고,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변하기를 바라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에파타’ 열려라.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께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셨을 때,
군중들은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7)라고 경탄한다.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다시 듣게 된다는 기적적인 사실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셔서 해방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코는 자신의 복음을 쓰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그 메시아로 알아듣고자 했다.
귀먹은 반벙어리 치유의 의미는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경청하려고 한다면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33-34절)
예수님의 이 행위들은 마술사들이 행하는 그런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당신의 구원 능력이 당신 인성을 통해 병든 이의 인성에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여기 나오는 한숨은 희랍어 원문으로 신음을 낸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하고 계심을 뜻하며,
하늘을 우러러라는 말은, 당신의 기적의 힘이 바로 하늘에서 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35절)
오늘의 귀먹은 반벙어리의 모습은 이것이다.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있으면
신앙을 통해 자신들 안에 이루어지는 구원의 놀라운 사실을 말할 수도, 선포할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귀먹은 반벙어리가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35절)는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집전자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세례자의 귀와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지며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신 주 예수님,
이 자녀가 오래지 아니하여 귀로 주의 말씀을 듣고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하고 기도한다.
이렇게 신앙생활의 모든 의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 “열려라!” 하는
그 행동과 말씀 속에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 놓고,
주님의 말씀을 자신을 변화되도록 주님께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생활로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것이 우리가 받은 세례에 충실한 것이다.
귀먹은 반벙어리의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사실이다.
귀먹은 것이 치유되어도 또다시 귀먹을 수 있고, 그래서 계속 벙어리가 될 수 있다.
벙어리는 귀가 먹었기 때문에 벙어리가 되지 않는가?
즉 주님의 말씀을 깨어 들을 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선포할 말이 없는 것이다.
이같이 오늘 복음의 반벙어리 이야기는 영적인 면에서 볼 때,
복음에 대해 병들어있는 사람의 이중적인 불행의 상징적 의미가 있다.
먼저 복음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듣지 않는 신자는
그 복음을 말로 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생활로 전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날에는 비록 육체적인 눈이 주님의 기적을 통해서 뜨이는 일은 없을지라도
마음의 눈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 뜨이고 있다.
그리고 시체는 다시 살아나지 않으나 살아있는 시체의 죽어있는 영혼은 다시 살아난다.
또한 귀먹은 육체의 귀는 소리를 듣지 못하나 닫힌 마음의 귀는 하느님의 말씀에 활짝 열린다.
그래서 믿지 않던 사람들이 믿고, 악하게 살던 사람들이 착하게 살고,
순종하지 않던 사람들이 순종하게 된다.”(훈화 88)
어떤 환경에서든 주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 놓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야고보서의 공동체는 귀먹은 공동체이다.
공동체 안에서 신자들이 부자들은 환대하고 아부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업신여겼던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마태 23,8)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셨다. 그러니 그러한 신자들은 복음을 배반하는 것이다.
그러한 신앙은 거짓된 신앙이다. 마지막 구절을 보자.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야고보 2,5)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다면, 잘 따른다면
그 말씀은 반그리스도적인 것을 분별하게 해 주며
공동체 안에서 차별 대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해 줄 것이다.
하느님 앞에 참된 부자는 믿음을 갖고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가난한 이들이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참된 상속자들이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가난한 이들을 선택해 주실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닮고자 하는 노력의 길이기 때문에 가야 할 길이 끝이 없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며
우리의 귀먹음을 주님의 강하고도 부드러운 손길에 맡겨 항상 새롭게 치유되도록 해야 한다.
말씀을 삶으로써 이제는 그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귀머거리가 되어도 다시 주님께 치유를 받고 다시 일어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죄인이면 죄인인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공생활 기간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었기에 원격치유까지 가능하셨던 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자가 현재 처해있는 위중한 상황을 예수님께 설명하면서
직접 가주실 것을 청하기도 했지만, 어떤 때 직접 가시지 않고도 원격치유를 하셨습니다.
굳이 가시지 않아도, 굳이 손대지 않아도 치유는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 모습은 꽤 특별합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데려오자 대뜸 그만을 따로 데리고 조용한 장소로 가십니다.
이어서 그의 두 귀에 당신 손가락을 집어넣으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당신 혀에 대시고 침을 발라 환자의 혀에 갖다 대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에 환자는 꽤 당혹스러웠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냥 치유해 주시지, 남의 귓구멍은 왜 손을 집어넣지? 왜 자기 침을 내 혀에 묻히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자의 귀에 손가락을 집어넣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적극적으로 접촉하시려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침을 환자의 혀에 바르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하나 되시려는 주님의 모습을 확연히 엿볼 수 있습니다.
환자를 사람들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 각자와 일대 일의 관계, 절친 관계를 맺고자 간절히 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측에서 바라볼 때 너무나 다행스럽고, 너무나 행복한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께서는 너무나 따뜻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너무나 다정다감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는지 우리와 끊임없이 접촉하길 원하시며,
우리와 1대 1로 만나기를 원하시며, 우리와 지속적인 스킨쉽을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주님께서는 존재 자체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허물투성이면 허물투성이 그대로,
죄인이면 죄인인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여전히 죄인인 우리와 하나 되기를, 완벽히 우리 안에 사시기를,
우리에게 기쁨과 웃음, 희망과 사랑, 결국 구원을 선사하기 위해 육화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청각 장애인 한 사람을 고친 이야기였습니다.
귀도 들리지 않고, 말도 더듬는 사람 하나를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두 귀에 당신 손가락을 넣었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시대 청각 장애인을 치유할 때, 사람들이 흔히 하던 동작입니다.
기름, 술 혹은 침과 같은 액체는 치유의 효력을 지녔다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손가락을 환부에 대는 것은, 氣를 넣는 행위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는 것은, 하늘에서 기의 힘이 내려오도록 하는 동작입니다.
오늘 복음이 그 시대 치유하며 다니던 사람들과 같은 동작을 예수님이 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 장애인을 치유하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사야 예언서」(35,5)를 인용하여 사람들이 한 말이라고 전합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예수님은 「예언서」가 예고한 구원적인 일을 행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초기 신앙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믿던 바를 「예언서」의 언어를 빌려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삶의 운동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에 대한 신비스런 이론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힘을 빌려 기적을 행하겠다는 野望도 아닙니다.
죽음 후의 來世를 위한 安全對策도 아닙니다.
신앙은 오늘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시게 합니다.
신앙은 율법을 지키고, 祭物을 바치는데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깊이 깨닫고,
그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이 우리 삶 안에 살아계시게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한 사람들이 그분의 죽음 후에 그분에 대한 이야기들을 남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 불렀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실천안에 그들이 해방과 구원을 체험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분과의 접촉에서 그들은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삶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과 실천에서 자비로우신 하느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체험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은 체험한 바를 기록으로 남겼고, 그것이 후에 「복음서」들을 포함한 「신약성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자유롭게 살 것을 원하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무엇을 강요하지도 않고,
인간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하느님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자유롭게 살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자유를 소중히 생각하십니다.
인간은 텔레비전의 채널을 마음대로 선택하고,
가게에서 자기가 원하는 상품을 마음대로 선택해 사듯이,
각자 자기 소신대로 선택하며, 자기의 인생을 삽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남긴 말들을 참조하여
자기 처지에 맞는 실천들을 자유롭게 실천하며 신앙인으로 삽니다.
오늘 예수님이 청각 장애인 한 사람을 고친 이야기 안에는
우리의 장애도 고치는 예수님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장애인 한 사람을 치유한 이야기였지만,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체험한 바를 그 이야기 안에 담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듣고 말하는 데에 장애를 지닐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過大評價하면, 이웃의 말을 그대로 알아듣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이 많아서, 혹은 자기의 身分 序列이 높아서,
남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 수 있습니다. 자기도취에 빠진 것입니다.
자기도취는 이웃의 말을 듣지 못하는 장애 현상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과시하는 말만 즐겨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는 모릅니다.
자기 안에 있는 恨이나 마음을 배설하는 데에 급급한 사람도
이웃의 말을 듣지 못하는 장애인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웃에게 해방과 기쁨이 되는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장애들을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극복하는 운동을 일으킨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라고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은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 사람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도 배워 실천하고자 가르치셨습니다.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면, 우리는 이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이웃의 말을 그대로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기쁨이 되는 말을 하지도 못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배려를 실천할 때,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은 그 실천으로 인류역사 안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이로운 말만 듣고, 이웃을 배려하지 못하고,
우리 말만 하는 장애를 넘어서 하느님의 자녀로 자유롭게 살자는 그리스도 신앙 운동입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 안에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이 청각장애인 한 사람을 고친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를 새로이 듣게 하고, 또 새로이 말하게 한다고 알립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에 도취되어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도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라고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자녀 된 사람의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 사회의 관행을 따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외면하던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에게 해방과 기쁨이 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죄인들도 포함하여, 모든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그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 모든 이의 종이 되라.”(마르 10,43-44)고
제자들에게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섬기는 사람은 상대가 기뻐할 일을 찾아서 행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理想으로 하는 것은 자기의 말을 남이 듣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사람,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어찌 보면, 남의 말을 듣지 못하는 장애의 상태를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세상의 일을 버리고, 하느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은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라고 말합니다.
이웃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게,
또 이웃에게 기쁨과 구원이 되는 말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예수님이고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