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와 더불어 일본영화 전성기를 대표하는 거장 중 한 사람인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1910-1998)는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최초의 아시아 감독이기도 합니다. 그는 일본 내 저널리스트들에 의해 ‘일본영화의 천황’이라 일컬어졌으며, 지인들과 후배감독들로부터는 ‘영화의 스승’이라 불리기도 했던 영화계의 진정한 거인이었습니다. 구로사와의 열렬한 팬 가운데 하나였던 미국의 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즈는 “구로사와가 전 세계의 영화감독들에게 미친 심원한 영향은 그 누구의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고까지 말한 바 있습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미의식과 예술형식, 서구적인 예술적 교양과 영화문법, 그리고 세계관으로서의 휴머니즘이 조화된 구로사와의 영화들은 실제로 많은 감독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여전히 보는 이들을 강력하게 영화적 스! 펙터클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데뷔작 <스가타 산시로>부터 <7인의 사무라이>와 <요짐보> 등의 대표작, 노장의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는 <란> 등의 후기작까지,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적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대표작 15편을 상영합니다.
강하고 고집 센 젊은이인 산시로는 수련을 위해 도시의 유도도장에 입문한다. 유도사범 야노의 제자가 된 산시로는 유도에는 완벽한 기술뿐만 아니라 자연의 법칙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정신 수양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곧 그는 도장의 노사범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고 그의 딸인 사요의 마음을 얻게 된다. 유도시합장면 등 액션영화로서의 재미와 젊은이의 정신적 성장이라는 주제를 동시에 갖추고 있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데뷔작.
▶ 주정뱅이 천사 醉いどれ天使 4.16. 2:30 / 4.24. 12;00
1948 | 98min. | b&w | 출연: 시무라 다카시, 미후네 도시로, 야마모토 레이사부로, 고구레 미치요
종전 직후의 일본. 폐결핵에 걸린 고집불통의 젊은 야쿠자 미후네 도시로는 알콜중독자인 주정뱅이 의사에게 치료를 받게 된다.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의사에 모습에 감복한 야쿠자는 새로운 삶을 살려 하지만, 전 두목의 보복으로 인해 곤경에 처한다. 대도시 빈민가에 사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삶을 섬세하게 그려낸 수작으로 비평과 흥행 양쪽에서 최고의 찬사를 받은 40년대 리얼리즘 영화의 걸작.
▶ 들개 野良犬 4.17. 12:00 / 4.21. 3;00
1949 | 122min. | b&w | 출연: 미후네 도시로, 시무라 다카시, 아와지 게이코, 미요시 에이코
젊은 형사인 무라카미는 버스에서 소매치기를 당해 권총을 잃어버린다. 분노와 수치심으로 가득 찬 그는 미친 듯이 권총을 찾아 헤매지만 단서가 보이지 않는다. 곧 그는 노련한 동료형사인 사토의 도움을 받아 범인을 찾아 나선다. 찌는 듯한 여름의 끈적끈적한 분위기가 죄의식과 가치관의 혼란으로 고민하는 인물들의 갈등과 결합된 필름누아르 영화.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이 느껴지는 작품으로, 탐정영화의 틀을 빌어 전후의 피폐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무사안일한 삶을 이어가던 공무원 와타나베 칸지는 어느 날 자신이 간암에 걸렸으며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의 삶에 회의를 느낀 그는 자신의 삶이 가치 있었다는 증거가 될 만한 일을 뭔가 하기로 결심한다. 결국 와타나베는 공원을 만들어달라는 시민들의 진정을 받아들여 버리진 땅을 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죽음을 선고받은 중년의 남자가 새로운 삶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통해 생의 의미를 긍정하는 한편, 근대 관료주의의 위선을 비판하고 있는 리얼리즘 걸작.
수확기만 되면 어렵게 거둔 식량을 산적들에게 약탈당하던 어느 빈촌의 주민들은 자신들을 지켜줄 사무라이를 모집하기로 한다. 촌장은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진 간베이를 포함한 7명의 사무라이들을 찾아내고, 이들의 지휘 하에 방위태세를 갖추고 전투훈련을 시작한다. 사실적인 성격묘사, 화려한 카메라 테크닉과 역동적인 편집으로 탁월한 미학적 성취를 이룬 장대한 액션 서사시.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영향을 받은 주제와 구조는 이후 5-60년대 미국 서부극에 다시 영향을 미쳤으며, 구로사와의 액션 연출은 조지 루카스, 스필버그, 코폴라 등의 감독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전쟁에 크게 승리한 두 명의 영주 와시주와 미키는 짚은 안개가 낀 거미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신비한 노파를 만난다. 그녀는 와시주와 미키의 후손들에게 일어날 사건들을 예언한다. 숲에서 빠져나온 와시주는 야심만만한 아내의 꾐에 넘어가 노파의 예언을 실현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드>를 중세 일본으로 옮긴 작품. 서구적 내러티브를 동양적인 색채와 형식 속에 완벽하게 결합해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종반부의 전투 장면은 구로사와식 액션의 진수를 보여준다.
▶ 숨은 요새의 세 악인 隱し砦の三惡人 4.17. 8:20 / 4.22. 12;00
1958 | 139min. | b&w | 출연: 미후네 도시로, 우에하라 미사, 치아키 미노루, 후지와라 카마타리
전쟁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가던 두 명의 농부들이 황금을 가지고 있는 정체불명의 남녀를 만난다. 그들은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공주와 그녀의 호위무사이다. 두 농부는 황금을 받게 되리라는 기대감에 그 두 사람이 적국의 국경을 넘는 것을 돕기로 한다. 구로사와의 첫 번째 와이드스크린 영화이자,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작품. 코미디와 액션이 절묘하게 결합된 내러티브와 거칠것없는 전개가 호쾌한 즐거움을 주는 영화.
▶ 나쁜 놈이 잘 잔다 惡ぃ奴ほどよく眠る 4.16. 8:00 / 4.22. 3;00
1960 | 151min. | b&w | 출연: 미후네 도시로, 모리 마사유키, 가가와 교코, 미하시 다츠야
일본토지개발공단의 부총재 비서인 니시는 부총재의 딸인 요시코와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피로연이 벌이질 무렵 공단의 와다 과장이 경찰에 연행된다. 이것은 니시의 고발에 의한 것으로, 그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고 복수하기 위해 공단에 접근한 것이었다. 전후 일본사회의 위선과 봉건적인 관습에 대한 비판을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주제와 결합시킨 비극적인 미스터리 영화. 1959년 설립된 구로사와 프로덕션의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19세기의 일본. 어느 시골 마을에 산주로라는 이름의 떠돌이 사무라이가 도착한다. 그는 여관의 주인으로부터 이 마을이 두개의 패거리들로 나눠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양쪽을 왔다갔다 와며 이득을 취한다. 하지만 한쪽 패거리 두목의 아들인 오노스케가 그곳에 도착하면서 상황은 복잡해진다. 대쉴 해밋의 하드보일드 소설 <피의 수확>을 각색한 사무라이 활극. 세르지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 <황야의 무법자>와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라스트 맨 스탠딩>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늦은 밤 일군의 젊은이들이 외딴 집에 모여 그들의 성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패를 일소하기로 결의한다. 하지만 곧 그들은 그곳에 또 한 명의 낯선 사람이 자신들의 얘기를 엿듣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는 산주로라는 이름의 떠돌이 사무라이로 그 젊은이들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다며 비웃는다. 사무라이 액션과 블랙코미디가 결합된 작품으로, <요짐보>에 이어지는 구로사와식 엔터테인먼트 활극. 미후네 도시로의 시니컬한 캐릭터가 인상적이다.
신발회사의 중역 곤도는 회사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전재산을 회사에 투자한 상태다. 어느 날 그의 아들이 납치되고 범인이 엄청난 몸값을 요구해오자, 그는 회사냐 아들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하지만 곧 납치된 아이가 그의 아들이 아니라 운전사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는 또 다른 고민에 빠진다. 이반 헌터의 소설 <왕의 몸값>을 원작으로, 유괴 사건을 통해 60년대 고도경제 성장 속에서 생겨난 일본의 첨예한 계급 대립과 인간성 말살을 담아낸 걸작.
▶ 붉은 수염 赤ひげ 4.19. 7;10 / 4.24. 2;30
1965 | 185min. | b&w | 출연: 미후네 도시로, 가야마 유조, 야마자키 츠토무, 단 레이코
의대를 갓 졸업한 야스모토는 시골 진료소에 수련의로 파견된다. 교만한 젊은이인 야스모토는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을 진료하는 강직한 의사 니이데의 스파르타식 훈련에 불만을 품지만, 점차 ‘붉은 수염’으로 불리는 니이데의 헌신적인 성품에 감화되어 간다. 도스도예프스키의 단편소설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작품으로,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젊은이와 전통적인 가치관을 지닌 의사의 갈등을 통해 휴머니즘과 근대화의 문제를 동시에 묻고 있는 작품.
16세기 전국시대. 늙은 영주가 세 아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겠다고 한다. 큰아들과 둘째아들은 그 얘기를 듣고 크게 기뻐하지만 막내는 형들이 서로 싸우게 될 것을 염려한다. 결국 영주의 어리석은 자만심으로 인해 영토는 분열되고 왕국은 전란에 휩싸인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일본 시대극으로 각색한 작품. 공간의 깊이감을 강조하는 역동적이고 회화적인 구성과 강렬하고 표현적인 색채, 탁월한 음향효과 등을 통해 인간의 야만성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으로, 거장의 명성에 걸맞는 웅장한 시대극이다.
▶ 꿈 夢 4.18. 8:00 / 4.21. 12;00 / 4.25. 5;50
1990 | 119min. | color | 출연: 테라오 아키라, 바이쇼 미츠코, 네기시 도시에, 마틴 스콜세즈
여우비, 복숭아 과수원, 눈보라, 터널, 까마귀, 붉게 타는 후지산, 귀곡성, 물레방아가 있는 마을, 8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작품. 방대한 계획으로 인해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해 구로사와를 노심초사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루카스, 코폴라, 스필버그 등의 도움에 힘입어 미국의 워너브라더스가 제작을 맡았고, 마틴 스콜세즈는 한 에피소드에서 화가 반 고흐로 출연하면서 거장에 대한 예우를 표했다. 매혹적인 이미지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역사 해석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 마다다요 まあだだよ 4.20. 5;50 / 4.25. 8;20
1993 | 134min. | color | 출연: 마츠무라 다츠오, 카가와 교코, 이가와 히사시, 도코로 조지
구로사와가 83세의 나이에 완성한 그의 마지막 작품. 우치다 햣켄(1889-1971)이란 작가에 대한 이 영화는 그가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교직을 떠나던 1943년 봄부터 그의 70세 생일이 있던 1962년에 이르기까지 20년에 걸친 주인공의 삶의 궤적을 따라간다. 그렇듯 영화는 구로사와의 많은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역동적인 내러티브 구조를 축조하기보다는 햣켄의 일상적인 삶을 묘사하는 에세이처럼 만들어져있다. 그런 식의 이야기 안에 구로사와는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우아한 인간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