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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고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던 그가 어느 날 친구들
과 돌팔매질을 하던 중 변복을 하고 잠행하던 황제의 발목에 돌을 맞췄다고
한다.
당연히 참수감의 사안이었으나 황제는 그를 궁으로 불러들여 쌀과 고기를
하사하며 훌륭한 장군감이라고 칭찬을 했고, 그에 감복한 소년 조치민은 이
를 악물고 무공에 정진하여 약관의 나이에 무가에 급제했다.
그를 기억한 황제가 기꺼이 곁에 두고 어여삐 여기니 당시 조치민의 입으로
아니 될 것이 없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황궁비고에도 한번 출입이 허용되었다고 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그의 갑작스런 무공 증진이 이런 소문에 무게를 실어줄 뿐
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조치민이 황궁을 뛰쳐나올 이유가 없군. 정말 모를 일이
야.”
“아니죠. 거기엔 밝혀지지 않은 사연이 하나 숨어 있소. 아까 말했잖아요?
황궁 털린 거.”
“황궁이 털렸다...”
장추삼이 목 뒤를 손으로 문질렀다.
“이건 수록되지 않은 사실이지만 백 년 전에 황궁의 고수들이 대거 무림에
파견되었었다는 사실은 잘 알 거요. 민심을 어지럽히는 광도 이한모를 잡
아들인다는 명목으로 말이오. 그런데 웃기는 게 그보다 더한 놈들이 횡횡할
때도 뒷짐 지고 나 몰라라, 하던 황실에서 도둑 하나 잡자고 무리수를 뒀
다는 건 누가 봐도 어불성설이지.”
“흠...”
“그리고 삼개월간 열심히 헛물만 켜다 꼬리 말고 황궁으로 돌아간 것도 알
거고. 근데 시기도 절묘하게 조치민이 관복을 벗었단 말이오. 공교로운 일
이라고 넘어가기엔 뭔가 이상하지 않소?”
“그렇다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 귀염장은 광도를 잡으려 위장강호인의 신분이 된
것이다. 황실의 이름을 걸고 일을 벌이면 제약이 만만치 않을뿐더러 만약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 무슨 망신이겠는가.
“정말 놀라운 일의 연속이로군. 귀염장의 탄생에 이런 비화가 숨어있다니.”
“그리고...”
다시 품에 손을 넣은 장추삼이 이번에는 빛바랜 종이 몇 장을 꺼냈다.“이
건 당시 무림맹의 북경지부에서 작성된 일지(日誌)에서 발췌한 거요. 이건
내가 직접 무림맹을 방문해서 입수한 거니 진위여부는 일단 읽고 판단하시
구려.”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작자들을 뿌리 끝까지 경멸해 마지않는 장추삼이었
지만 이번 강호행에서 그 생각은 많이 수정되었다.
지금 그가 내민 쪽지만 해도 무턱대고 나섰더라면 어떤 식으로든 충돌이 불
가피했을 것이나 남궁노가주의 친필 서명이 담긴 소개장 하나로 무림맹 북
경지부의 서고(書庫)는 간단히 그 문을 열었다.
적당한 타협, 그리고 적당한 자존심...
지금까지도 그 경계가 애매하니 아직 장추삼에겐 배울 부분이 많은가보다.
종이를 받아들며 죽선자의 이마에 내 천(川)자가 새겨졌다. 왠지 지금 얘기
되는 모든 일들이 현실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 년 전의 사람들...
백 년 전의 사건들...
백 년 전의 문서들...
그리고... 백 년 후의 되새김.
“어디 보세... 음?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그럼 귀염장과 광도가 조우했
다는 건가?”
대답 대신 장추삼이 두 팔을 살짝 들어보였다.
“아무리 신법이 뛰어나다고 해도 광도는 결코 귀염장의 패도적인 장력을
감당할 수준은 아니라고 했었네. 그렇다면 그들은 실종된 것이 아니라 귀염
장에 의해 광도가 관부로 압송된 걸까?”
꽤 설득력 있는 추리였으나 장추삼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렇다면 내가 무당까지 올 일이 없었겠지. 생각해봐요. 백 년 전에 끝난
, 그래서 흥밋거리로 반추할 정도의 사건이었다면 한밤중에 무당에 난입을
했을 리가 없잖소.”
“딴은...”
“몰랐는데 어지간히 성격이 급한가 봐요? 제발 다음 장을 보고 말을 해요!”
놀람 때문이었는지 죽선자는 뒷장을 읽지도 않은 상태란 걸 미처 깨닫지 못
하고 있었다.
자신의 실태를 헛기침으로 대충 때우고 뒷장을 넘긴 그가 짧은 경호성을 질
렀다.
“동행이라? 그것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북경을 떠났다는 건가?”
“보다시피 그리 써 있소. 설마 일지에 거짓을 기록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
면 뭘까요? 포쾌와 도둑의 동행... 거기다 북경을 벗어났다는 건 뭘 의미할
까요?”
“귀염장이 광도에게 패해서? 그건 아닐 테지. 만약 그랬다면 귀찮은 혹을
달고 다닐 리가 없는 광도니까. 그렇다면... 어깨를 나란히...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거요. 그리 추측이 됩디다. 이유는 다음 장에 수록되어
있어요.”
“다음 장이라, 다음 장...”
흥미진진한 얼굴로 뒷장을 넘긴 죽선자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이, 이런 고약한 경우가 있나! 대체 이자들이 우리 무당을 어떻게 보고
이따위 망언을 함부로 지껄였다는 건가!”
두두두-
다탁이 절로 흔들렸다. 저도 모르게 죽선자가 공력을 운기 했기 때문이니
그가 지금 얼마나 분노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백 년 전의 노강호들에게 존칭조차 쓰지 않을 만큼 그를 진노케 한 일은 대
체 뭘까?
마지막으로 둘은 섬서성으로 행선지를 정했음. 광도와 귀염장의 내기 때문
으로 사료됨. 무당의 조사전을 다녀오는 것이라는데 그 이유를 알기 어려움.
즉시 조치바람.
“이런 천하에 몹쓸 인간들! 조사전이 어떤 곳인데! 무당의 얼이 살아 숨쉬
는 거룩한 성지이거늘 단순히 내기 때문에 침입하겠다고!”
챙! 챙!
끝내 찻잔들이 산산이 부셔졌다. 그의 이런 박력에 장추삼도 일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하지만 의외로 그의 눈망울은 느긋했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기 때문일까.
잠시의 정적.
열이 받을 대로 받은 죽선자가 치밀어 오르는 노기를 겨우겨우 제어할 무렵
장추삼의 나지막한 한 마디가 그의 귓전을 때렸다.
“자신의 기준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뭐라고 할 생각은 없소. 그렇
기에 그들 역시 그런 내기를 한 걸지도 모르오.”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우리 무당의 조사전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잘 알거 아닌가! 아무리 강호초출의 무림인이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쯤은..
.!”
열화와도 같은 죽선자의 말은 장추삼의 차분한 응대에 의해 잘려졌다.
“그래요. 무림인들이라면 말이죠...”
“음?”
그의 대꾸는 별 다른 힘이 실려 있지는 않았으나 왠지 범상치 않은 무게를
담고 있었기에 화산처럼 폭발하려던 죽선자가 주춤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장문 말마따나 무당의 조사전이라면 강호인들에겐 둘도 없는 성지 중의
성지라고 할 수 있소. 그렇지만 그건 강호인들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이란 걸
생각해 보셨소? 늘 무림인들과 만나고, 그들과 호흡하기에 의식하지 못하
겠지만 사실 무당의 존엄성은 극히 한정적이란 말이오.”
‘호오...’
찬물을 한바가지 뒤집어쓴 기분이다. 이렇게 명쾌할 수가 있을까. 그저 버
르장머리 없고 싸움 재주만 출중한 사내라고 봤는데.
“그 말은...”
“광도와 귀염장... 둘은 엄밀히 말해 무림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소. 황실
에 적을 둔 귀염장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고, 의도야 어떻든 남의 집 담을
넘는 것이 천직이라는 광도 역시 무림인이라고 보긴 어렵단 말이오. 그게
둘을 의기투합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사람은 자신의
잣대로 세상을 느끼고, 행동하는 거니까 난 그걸 비난할 생각은 없소. 황궁
이 털린 것 역시 당시의 조치민이라면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는 일이겠지.
그것을 위해 무당의 조사전이 이용되었을지도 모르고. 문제는...”
고개를 숙이고 웅얼거리던 장추삼이 머리를 목을 쭉 펴고 죽선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당에서는 절대로 허용해서도 안 되고, 허용할 수도 없는 일이었겠지.”
“......”
둘은 아무런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뒤이을 얘기의 여파를 감내
하기 위한 시간을 버는 순간일지도 몰랐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침묵은 이야기의 진윈지였던 장추삼에 의해 깨졌
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두 사람의 뒤에
위치한 날짜 말이오...”
“듣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려 장추삼을 외면한 죽선자의 입에서 크나큰 한숨이 터졌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 그의 머리에서 수없이 교차하고, 그걸 감당하기엔 무당에
의 애정이 너무도 컸다.
“또 다른 문제가 있소. 귀염장과 귀도를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할 사람이 과
연 누굴까? 당금 강호의 최고수들인 그들인데 말이오.”
귀를 틀어막고 싶었으나 장추삼은 매정하게 말을 이었다.
“이 편지의 수취인이 바로 귀염장과 귀도의 마지막을 본 이겠지. 대체 누
굴까? 누가 있어 그들을 상대했을까? 필승의 자신감이 없었다면 무당의 장
문이 인장까지 찍은 편지를 보낼 리는 없었으니 분명 무서운 누군가가 있었
겠지.”
죽선자의 고개가 더욱 처연하게 내려졌다. 하지만 장추삼은 무심할 정도로
냉정을 유지하며 준비된 말을 차근차근 풀어냈다.
“앞서의 얘기들을 초월하는 가장 무서운 사실이 하나 있소... 그건 바로
편지의 양식이오. 뭐 느끼는 바가 없소?”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에게 장추삼이 처음의 편지를 불쑥 내밀었다.
이름, 날짜, 발신인, 그리고 인장...
“뭔가 빠지지 않았소?”
“......”
“수취인이야 겉봉에 썼다고 친다고 해도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양식이 하나
빠져 있소. 그게 뭘까요?”
죽선자의 얼굴이 사시나무 떨리듯 마구 요동쳤다. 그러나 장추삼의 다음 말
은 가련한 무당의 장문인을 나락으로 내던졌다.
“그건 바로 내용이오!”
쾅!
허물어지듯 의자에 앉은 죽선자가 다탁을 양손으로 꽉 잡았다. 이것이라도
의지하지 않으면 장추삼이 토해내는 말에 휩쓸려 알 수 없는 공간으로 하염
없이 침몰해 버릴 것만 같았다.
“내용이 없는 편지, 그러나 청부는 이루어졌다는 건 뭘 의미하는 걸까? 그
건 바로...”
“됐네! 제발, 제발 그만하게!”
뭔가 덧붙이려던 장추삼이 죽선자의 울부짖음에 고개를 한번 젓고 몸을 돌
렸다.
이제 알 건 다 알아냈다. 무당의 현임 장문은 과거사를 모르고 있음이 밝혀
졌고, 그것은 전 세대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끊어진 고리...
몸을 돌려 문을 열려는 그의 발을 애처로운 음성이 잡아챘다.
“이,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누구인가?”
“아직은 나밖에 모르오. 그리고 당분간 발설할 생각도 없고.”
이제부터가 시작이거든, 하고 말을 맺은 그가 죽선자를 한번 보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못할 짓이다. 그러나 이렇게 다그치지 않았다면 어떤 것도 도출해내지 못했
을 거다. 힘겹기는 장추삼도 마찬가지였기에 문고리를 잡는 그이 손바닥엔
땀이 홍건이 베어있었다.
‘송문인이라...’
서서히 윤곽이 잡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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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산을 내려오며 세 청년과 한명의 소동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장추삼이 짓고 있는 무거운 표정도 한몫 했지만 무엇보다 무당에서 느낀 싸
늘한 분위기가 그들의 의사통로를 꽉 틀어막은 거다.
분위기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장추삼과 무당의 장문이 나눈 얘기가 그리
간단치 않았음을.
궁금한 게 너무 많으니까 역설적으로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피곤해 죽겠네...”
산을 내려와서 마치 묵은 짐을 풀 듯 토한 장추삼의 한마디에 모두의 얼굴
이 펴졌다.
“그야 많이 움직였으니 피곤한건 당연하오. 어디 객잔이라도 들어가서 한
숨 푹 잡시다.”
하운이 장추삼의 어깨를 두드리자 북궁단야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문득 정화진을 보니 벌겋게 충혈 된 눈을 가까스로 치뜨고 있는데 조금만
더 지났다간 눈동자가 튀어나올 판국이었다.
“모두들 궁금한 게 많겠지만 오늘 하루는 넘어가자고. 진짜로 피곤하니까.
그리고 무당에서의 일은 당분간 묻지 말길 바래. 이건 부탁이라기보다 선
언이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할 수 없어. 왜냐고 묻는다면 나도 아직 명확한
게 없어서 그렇다는 대답 외엔 할 게 없어. 확실하지도 않은 걸 떠벌일 수
는 없거든.”
이건 장난이 아니라고, 하며 강경한 어조로 말을 맺은 그가 하운과 북궁단
야를 지나쳐 성큼 성큼 걸어갔다.
뒤쳐진 두 청년이 서로를 마주보다 손을 들어올리는 것으로 황당함을 대신
하고는 급히 장추삼을 뒤쫓았다.
왠지 이대로 쳐졌다간 다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할 것만 같아서...
***
약속과는 달리 장추삼은 하룻밤 푹 쉬고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쳐 박고 몇 시진을 가만히 있기
도 하고...
아무튼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것으로 사료되었기에 하운과 북궁단야는 감히
말을 붙이지 못했다.
눈알을 부라리며 크르릉거린다면 한방으로 잠재워주겠지만 이건 영판 미친
사람 같았기에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심리가 발동한 거다.
괜히 심심해진 하운이 정화진을 붙잡고 이것저것을 물으며 한가로이 노닥거
리고 있을 무렵 장추삼을 멀거니 내려다보던 북궁단야도 곧 자리에 앉아 뭔
가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 두 분, 뭐하시는 거예요?”
“글쎄다? 뭔가 생각해야할 것이 있는 게지. 이럴 땐 그저 가만히 지켜봐
주는 편이 좋단다. 괜히 나서서 떠들면 막 들어오던 생각도 달아나거든.”
하운의 말에 정화진이 나이에 맞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참... 하남에서 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장형이 저러는 건가. 어쩐지
장형의 주위로는 사건이 끊이지 않는 듯하니...’
작게 한숨을 쉬고 저리에서 일어서려던 하운을 장추삼이 불러 세웠다. 잔뜩
찌푸린 인상이었지만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울 만큼 형형한 눈빛이었기에
늘 웃음을 잃지 않는 그도 얼굴이 굳어져버렸다.
“하형도 알겠지만 우린 지금 꽤나 골치 아픈 사건에 발을 들여 버렸어. 이
젠 빼도 박도 못한다고.”
하형도 알겠지만, 이라...
살짝 얼어버린 표정을 겨우 풀며 하운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나 같은 사람이 뭘 알겠소. 그저 장형과 북궁형이 가는 데로 따라 걷는
거지. 그나저나 이제야 입을 열기로 한 거요?”
“마냥 채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 말에 생각에 잠겨있던 북궁단야의 두 눈도 번쩍 떠졌다.
“전서를 통해 미리 밝혔지만 유한초자가 남겼다는 시구 말이야. 그거 의외
로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의미가 담겨 있었어.”
이 말을 기다렸다. 유한초자가 남겼다는 독해불능의 사행시... 몇 십 년을
난공불락처럼 해독되지 않았던 그것을 풀어냈다고 하니 어찌 궁금하지 않겠
는가.
“자, 보자고. 일단 첫 번째 구절 말이야.”
보았으면 잊어라. 들었으면 지우 거라...
“뭐, 비천혈서에 담긴 내용이 웬만한 사람은 감당하기 어렵다는 얘기지.
그러니 차라리 안 보고, 안 들은 거로 치는 편이 만수무강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일 테고.”
여기까지는 누구나 추측 가능한 일반론이다.
“이제 두 번째 구절.”
비천은 파천이고, 혈서는 유혈이니...
“이게 좀 애매한데 비천(飛天)이라함은 하늘을 날아오른다는, 다시 말해
뭔가 힘을 얻는다는 의미잖아. 가령 관직에 있는 사람은 더 높은 자리로 영
전되는 거고, 무림인이라면 더욱 고강한 무예를 익혔다거나... 그런 의미를
담겠지.”
북궁단야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잡설을 뺄게! 에, 또... 그 뭐냐, 뒤의 파천(破天)이
라는 말이 앞의 비천을 다 잡아먹어버리거든? 그건 뭘 의미하는 걸까? 그건
바로 비천, 즉 날아오르던 누군가가 금기된 무엇을 건드렸기 때문에 파천,
다시 말해 파국을 맞게 된다는 거지. 뒤에 언급된 혈서는 유혈이라는 말이
바로 그걸 말하는 듯해.”
비천혈서가 흉몽지겁을 불러왔다는 것은 무림에 적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장추삼은 그 이면의 추론들을 유한초자에게 들
은 바가 있기에 하운과 북궁단야의 시선에서 조금 다르게 제 2차 무림혈겁
이라는 흉몽지겁을 바라보게 되었다.
또한 한번을 더 틀어보는 그의 성격상 유한초자의 그것과 다른 시각으로 혈
겁을 분석해 보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그러니까 비천혈서라는 소문 한방이면 그대로 무림공적이었던 거야. 심판
따위는 애당초 없었던 것처럼 소문 한번 돌면 그 즉시로 끝장이었지. 그런
데... 난 문득 웃기는 생각이 들더군.”
장추삼의 입이 야릇하게 올라갔다. 수많은 유추해석이 가능한 겁난. 하지만
유한초자와 말을 섞으며 느낀 단상은 일단 숨겨두기로 했다.
아직 시기가 아니다...
“왜 공적이 되어야 하지? 생각해봐, 비천혈서의 내용도 모르잖아? 내용은
커녕 진위조차 파악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말 한마디로 멸문지화가
초래 되냐고! 그래서 다른 각도로 생각해 봤지. 그 혈서는 유혈이라는 시구
의 의미를 말이야.”
“흐음...”
북궁단야의 검미가 꿈틀 움직였다. 시구를 듣고 나름대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았지만 도무지 풀어낼 수 없었거늘.
역시 바라보는 관점상의 문제였을까.
“혈서는 유혈이니... 가 아니라 혈서는 유혈이라네, 라고 가정한다면?”
“음?”
침착하게 다음 말을 기다리던 하운이 눈을 치떴다.
“보기 나름이라니까. 이놈의 시구, 건성으로 훑으면 뭐가 뭔지 잘 모르겠
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무지하게 얍삽하다는 걸 느껴. 아니, 이
거 지은 인간이 무슨 여동빈 사촌도 아닐 텐데 어떻게 앞일을 그리도 잘 예
측하고 지 멋대로 단언하는 거야? 웃기잖아? 근데 더욱 가관인 것은 그게
그대로 되어 버렸다는 거지. 이게 뭘 말하는 건지 알겠어?”
“설마...”
“설마가 사람 잡지.”
하운과 장추삼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부딪쳤다.
“장형, 그런 말은 함부로 꺼낼 부분이 아니라오.”
“맞아, 그래서 여태 쉬쉬하게 된 걸지도 몰라. 그렇게, 그렇게 여기까지
흐르게 된 거고.”
이때 북궁단야가 불쑥 끼어들었다.
“저자가 사건의 주범이라는 건데... 하형의 말대로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
야...”
“쉽게 생각한 적은 없다고. 그저 상황이 그렇다는 거지. 내용도 모르고,
존재자체도 불투명한 책 쪼가리 하나로 무림이 평지풍파가 일어났어. 근데
근원지가 불분명해.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그 혈겁의 주역들을 우리가 모조
리 만났다는 거야.”
“생각해보니 그렇군. 우연으로 돌리기엔 뭔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어.
”
하운의 말대로 우연은 아닐 것이다. 무룡숙에서 만나 생사결을 치른 육천염
과 당문에서 맞닥트린 사방신.
흉몽지겁을 대변하는 두 무리의 고수들은 모두 삼성에 의해 유명을 달리하
게 되었다. 바꿔 말해 삼성과 피치 못할 대립관계에 서있었던 거다.
“문제는 피의 대가야. 그들 열 사람은 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진한 피비린내를 양손 가득 담고 살아왔다는 거거든. 그럼, 그 대가는 뭔
데? 싸워봐서 알겠지만 잘만 풀렸으면 일가를 이루고도 남음이 있는 사람들
이 뭐가 아쉬워서 끔찍한 살업을 치르고 삼십년이 넘는 시간동안 쥐새끼처
럼 은둔생활을 한 건데? 그게 대가라고? 은둔이?”
“음...”
하운과 북궁단야가 일순 말문을 닫았다.
“열 사람이 비천혈서를 탐내서 그 짓을 했다? 바보라도 그런 가정에는 웃
고 말 거야. 그럴 수도 있다고? 아니, 이건 단 한번의 싸움으로 입증돼. 뭐
냐고?”
장추삼의 고개를 돌려 객방 한 구석에 기대있는 북궁단야의 거검을 내려다
보았다.
“바로 사방신의 합격이지.”
“합격이랑 그것이 무슨 관계인가?”
“무인의 생명은 자존심이야. 거기다 음지에서 생활하며 양지를 바라는, 또
그만한 자긍심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러할 거야. 여기에 자신의 실
력까지 믿는 경우라면 앞서의 마음은 몇 배가 되겠지.”
“그럼...”
북궁단야의 표정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장추삼이 희미하게 웃었다.
“강호삼성이네, 어쩌고...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하고 꿈으로 먹고사는
후기지수들이 우리를 그리 높여주고 있지. 그런데 말이야... 과연 이 명호
가 매일 피와 마주하는, 칼밥으로 인생을 걸어온 진짜 노강호들에게도 먹힐
까? 어림 반 푼의 어치도 없는 소리지. 그들에게 우리는 그저 실력 좀 되는
애송이라고. 그런데 진짜 무인 넷이서 이제 강호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초짜에게 주저 없이 합공을 했다? 육천염을 쓰러트려서? 그런 일반론은 강
호인들에게 하품과도 같은 소리라는 걸 잘 알 테고. 만약 하나가 당해서 셋
이 달려들었으면 모를까. 그건 말이 되지 않아. 그렇다면 뭐겠어?”
북궁단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후...”
“그렇지. 그 자존심마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하는 거야
. 그런 가정이면 육천염과 사방신의 살행, 그리고 삼십 여년의 은거가 자연
스레 설명되는 거지. 아직까지 피의 대가는 밝혀진 바가 없지만 그런 희생
을 기꺼이 감수할 만큼의 반대급부가 주어진다는 걸 믿은 거지. 가장 중요
한 건...”
장추삼이 고개를 둘의 앞으로 하고 낮게 속삭였다.
“배후에 대한 신뢰야. 그가 어딴 존재인지 몰라도 열 사람은 완벽한 믿음
으로 따랐다는 거지. 이로 미루어 배후자는 단지 말만 잘하는 요설가(妖舌
家)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무엇이 있을 거야. 배후든, 실력이든 말이야.”
낭중지추라고 했다. 고집불통에 멋대로 튀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치밀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는데 지금의 장추삼을 본다면 그 누구라도 그런 말은 꺼
내지도 못할 거다.
첫댓글 즐감합니다.
배후에 대한 신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