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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1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제1독서 : 1코린 5,1-8
복 음 : 루카 6,6-11
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십계명에서 안식일 규정의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일곱째 날에 쉬시면서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날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는 측면과(탈출 20,8-11 참조),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음을 기억하여
인간이 해방을 누리게 하여야 한다는 측면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인간이 — 나와 식구들과 종들이 —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축과 이방인까지도 일을 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신명 5,12-15 참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하신 일들은 그 두 측면에서 모두
그분께서 “안식일의 주인”(루카 6,5)이심을 드러내었습니다.
첫째로 안식일이 주님께 속한 날이라면
예수님께서는 그날의 주인이시므로, 안식일 규정에 매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난 토요일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막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안식일이 인간이 해방되는 날이기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제약에서 풀려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안식일 계명은,
주일이 주님의 시간이고 또 인간의 시간이라는 두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본래 의미를 올바로 깨닫고 살아갈 때, 안식일 규정은 폐지되지 않습니다.
현대인에게 주일은 평일에 하지 못한 밀린 일들을 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즐기기 위한 날이 되기도 하여 그 거룩함이 잊히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고 인간이 해방되는 안식일의 본뜻을 되살려야 하겠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마 초등학교 3학년 때쯤으로 생각됩니다.
누나 방에 들어갔다가 아주 낯선 모습을 본 것입니다. 훌쩍이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어디 아프냐고 물으니 읽고 있던 책 내용이 너무 슬프다는 것입니다.
며칠 뒤, 누나가 외출해서 자리에 없을 때 방에 들어가 눈물 흘리며 읽던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과연 누나처럼 눈물을 흘렸을까요?
흘리긴 했습니다. 책 내용이 너무 지루하고 이해가 안 돼서 하품하니 눈물이 나더군요.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었고,
더군다나 책과는 친하지 않았던 시기라 더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이해하기 힘든 한 가지는 ‘어떻게 책을 읽으면서 울 수 있을까?’라는 점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어떨까요? 지금도 책을 읽으며 울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현재 책을 읽다가 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작가의 마음에 동화될 때입니다.
책에서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뜨거운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알면 알수록 동화됩니다. 우리 주님과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그 사랑에 감사해서 눈물도 흘리게 됩니다.
일상 속 기쁨도 주님을 알면서 더 커지고 의미도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주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자기 원하는 것만을 외칩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고발할 구실만을 바라보고 있지요.
안식일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칠 것인지, 그냥 내버려둘지만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커다란 스캔들이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 사람을 고쳐주시면 어떻게 공격해 올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이것이 당신이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당사자가
사랑하는 가족을 고쳐주셨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때는 예수님의 사랑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보지 못하니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를 서로 논의합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을 봐야 이 세상을 더 잘 사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앞 장면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루카 6,5).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루카 6,8)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에 숨어있는 저희를 빛으로 불러내십니다.
당신 면전으로 불러내십니다.
자비와 치유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생명과 구원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손을 뻗어라.”(루카 6,10)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란?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쥐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며,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있는 불통을 의미합니다.
또한 자신을 꼭 쥐고 있어서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묘한 것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납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곧 ‘손 오그라든 이’는 죄에 물든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상입니다.
사실 선악과를 따먹고 높아지려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을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그것은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결국 움켜쥐는 것은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쥔 것을 놓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놓고서 고통과 은총의 못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심을 의미합니다.
이제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심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구원을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사랑을 건네주기보다 자애심과 이기심을 채웠던 우리의 손을,
위로하기보다 돌팔매질했던 우리의 손을 뻗어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이제는 움켜쥔 것을 놓아야 할 일입니다.
마음을 풀고 손을 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마음에 품고 구원된 자로 살아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손이 당신 구원과 사랑을 건네는 손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손을 뻗어라.”(루카 6,10)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움켜쥔 것을 나누어주고,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굽은 마음을 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합니다.
맑고 푸른 하늘은 곡식을 여물게 하는 더없이 좋은 선물입니다.
수확의 때가 되면 수고와 땀의 결실을 맛보게 되는 기쁨이 함께합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때를 기다립니다.
약속된 하느님의 나라를 기억하며 지금 여기서부터 수고와 땀의 결실을 기뻐합니다.
기쁨은 희망하는 만큼 확인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며
당신의 능력으로 오그라든 손을 이전처럼 성하게 하셨습니다(루카6,10).
손을 뻗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주는 행위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을 받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손을 뻗어 서로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손을 편다는 것은 본인뿐 아니라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기쁨이라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안식일의 본질적 의미보다는
규정과 규율에만 얽매여 있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그 사람들입니다(루카6,7).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들어서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고
마침내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을 것인지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든 자신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손뿐만 아니라 마음도 고치시는 분입니다.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골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것은 마음이 오그라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조롱거리가 되어도(예레15,10)
뼛속에 가두어둔 주 하느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예레20,9)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혹시라도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것은 아닌지?
내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 상’ 때문에 다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길 청합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시길 희망합니다(에제36,26).
그리하여 안식일은 물리적으로 쉬는 것보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더불어 향유하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얻길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은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일에서든 트집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는 무엇인가 꼬인 사람입니다.
얽힌 것을 풀면 좋으련만 바른 것도 그릇 것으로 보니 그 사람은 불행합니다.
사사건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을 찾아내는 삶입니다.
긍정의 주 하느님을 생각하십시오!
행동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주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굳건히 하여 참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불평으로 세상을 더럽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프란치스코).
손을 뻗어 주님의 손을 꼭 잡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미국에서 자동차는 신발과 같습니다. 이번에 자동차를 새로 마련했습니다.
전에 사용하던 자동차는 오래되기도 했지만, 일정 속도에 이르면 소리가 났습니다.
뉴욕에서 사용하던 자동차에 익숙해 있었기에 비슷한 차종으로 바꾸었습니다.
제가 처음 운전을 시작한 것이 1991년이니 어느덧 33년이 지났습니다.
처음에 중고차 르망을 사서 1년간 다녔습니다. 다음에는 현대 엑셀을 사서 7년간 다녔습니다.
경기도 적성성당에 있을 때는 중고차 코란도를 사서 다녔습니다.
코란도는 비포장 길에도 잘 달렸고, 사륜구동이라서 눈길에서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로 연수 가면서 코란도는 동창 신부에게 주었습니다.
동창 신부는 제게 전자사전을 주었습니다.
캐나다에서 와서는 동창 신부의 권유로 소나타를 샀습니다.
그렇게 12년을 타던 소나타는 미국에 오면서 아는 분에게 드렸습니다.
뉴욕에서는 하이랜더를 탔었고, 댈러스에서는 제네시스를 마련했습니다.
33년 자동차를 이용하면서 자동차의 기능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걸 보았습니다.
수동기어는 대부분 자동기어로 바뀌었습니다.
운전자의 편의를 위한 기능이 많아졌습니다.
블루투스 기능이 있어서 스마트폰과 차량이 연결됩니다.
스마트폰에 있는 음악도 들을 수 있고,
전화를 걸 수 있고, 내비게이션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차량의 문을 열 수도 있고, 시동을 걸 수도 있습니다.
차량 점검을 스스로 해서 교체해야 할 부품을 미리 알려 줍니다.
최근에 발전하는 부분은 자율주행 기능입니다.
차선을 유지하는 기능도 있고, 차선 이탈 방지 기능도 있습니다.
속도 조절 기능이 있습니다.
일정 속도를 정해 놓으면 액셀러레이터를 밟지 않아도 속도를 유지합니다.
앞의 차가 속도를 줄이면 같이 속도를 줄이기에 안전한 운행이 됩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탑재되면 자동차는 움직이는 사무실이 될 것입니다.
운전자가 목적지를 이야기하면 자동차는 인공지능과 함께 목적에 도착할 것입니다.
운전자는 자동차에서 업무를 보고,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처음 운전면허를 취득했을 때입니다.
본당 신부님이 제게 이렇게 당부하였습니다.
“자동차는 신발과 같다. 너무 크면 움직이기 힘들고, 너무 작으면 발이 불편하다.
발에 딱 맞는 신발이라 생각하고,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도 하였습니다. 5분 먼저 가려다가, 50년 먼저 가는 수가 있다.”
신발과 같은 자동차는 자기의 수준에 맞는 것이 좋습니다.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안전운전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기능이 좋은 차도,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으면 사고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교통법규의 기본은 교통신호와 규정 속도입니다.
교통신호는 서로의 약속이기에 교통신호를 무시하면 큰 사고가 될 수 있습니다.
규정 속도를 넘어서면 돌발 상황에서 차를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운전자에게는 안전운전이 필요합니다.
장거리 운행을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2시간 정도 운전하면 잠시 쉬면 좋습니다.
화물차나, 과적 차량의 뒤는 가능하면 피하면 좋습니다.
앞의 차량과 뒤의 차량도 살펴보면 좋습니다.
결국 자동차는 운전자를 위한 도구입니다.
장미꽃을 포장한 종이에는 장미 향이 나기 마련입니다.
생선을 포장한 종이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자동차로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면, 자동차로 가족을 돌보면 자동차는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자동차로 도박장을 다닌다면, 자동차로 남을 다치게 한다면 자동차는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안식일도 그렇습니다. 율법과 계명도 그렇습니다.
율법과 계명으로 무고한 사람을 단죄하고, 죄인 취급한다면
그것은 율법과 계명의 정신을 망각하는 겁니다.
안식일이라서 선을 베푸는 행동을 단죄한다면 그것은 안식일의 의미를 망각하는 겁니다.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도 율법과 계명에 근거했습니다.
하느님의 율법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새 반죽은 제도와 법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새 반죽은 순결과 진실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베네딕토 성인이 했던 것처럼, 프란치스코 성인이 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는 영성이 더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영성은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병자의 치유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은 항상 인간이 현재보다
더 자유롭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을 우선으로 하신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앞에 두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9절)
이는 사람을 제도라는 법에 묶어놓으려고 하는 그들을 공박하시는 말씀이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참뜻을 행하기보다는
인간적인 규례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관례와 규칙보다
사람의 생명을 돕는 일과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기적을 행하신 것은 그들을 자비와 동정으로 이끌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의 질문은 저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지혜로운 질문이다.
만일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치 않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 법에 금지되어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율법을 비난하는 자들이 된다.
“어찌하여 내가 안식일에 한 사람의 온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준 것을 가지고 나에게 화를 내느냐?”(요한 7,23)
그분은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따기 위해 내밀었던
손(창세 3,6)을 선행의 건강한 힘으로 회복시켜 주셨다.
범죄를 저질러 마비된 손이 선행으로 치유되었다.
우리도 주님께 우리의 오그라든 손을 뻗게 해 달라고 청하여야 한다.
“손을 뻗어라.”(10절)
손을 뻗는다는 것은 탐욕과 불경으로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이다.
이제는 손을 뻗어야 한다.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뻗고,
이웃을 돕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불의하게 모욕당하는 사람이 해를 입지 않도록 손을 뻗어야 한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손을 뻗어야 한다(이사 1,15.17 참조).
손을 내밀어 뻗으면 치유를 받는다.
손을 뻗는다는 것은, 옳은 일을 행하고 선을 실천하는 것이다.
제도와 규칙에 앞서 이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위하는 일인가,
괴롭히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나올 것이며 그 사랑이 이웃에게로 전해진다.
내가 율법주의자가 될 때, 지금 오늘을 사는 나도 그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이 현존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죽이는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잘못을 우리는 범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 즉 하느님의 모습임을
항상 기억하며 이웃을 대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무엇이 중헌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율법 학자가 주님께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여쭈었을 때
주님께서 사랑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늘 무엇을 할 때나 어떤 판단이나 결정을 내릴 때
제일 중요한 것을 기준으로 무엇을 하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 아니 저의 삶을 보면
아주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려 일을 그르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이나 삶을 그르치지 않고
잘살기 위해서는 우선순위가 잘 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가치가 전도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여서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법이나 정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여서도 안 됩니다.
생명과 사랑은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하고,
심지어는 주일 미사보다도 더 나아가서 나의 하느님보다도 중요합니다.
과거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이곤 했는데
그때 하느님은 그들의 하느님이지 하늘의 참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때 우리가 죽여야 할 것은 하느님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이는 불가에서 부처가, 집착을 하게 하면 부처를 죽이고,
법경이, 집착을 하게 하면 법경을 태워버리라고 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럴 정도로 우선순위가 잘 정립되어 있어야 하지만
가치 정립이 머릿속에서만 잘 되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뼛속까지 그렇게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고
의식화에 이어 무의식화까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계명이 제일 중요함을 늘 의식하며 살다가 보면
차츰 의식하지 않아도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
늘 사랑을 중심으로 판단도 하고 행위도 하는 것입니다.
의식의 무의식화 차원에서 저는 아직 의식하는 단계이고,
머리와 뼈 사이에서 아직 뼈까지 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제 있었던 것에 대입하면 짜증과 사랑 사이입니다.
어제는 수녀원 미사를 마치고 동포 미사를 봉헌하러
센터에 가기 전 식당을 들렀습니다.
식당 안팎이 주말 사이에 난장판 수준이었고,
센터에 올라가니 거기도 정리 정돈이 안 되어 심란했습니다.
청소하는 사람은 없고 이용하는 사람만 있다는 짜증이 올라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늘 그랬고 그래서 늘 제가 정돈해 왔는데 어제는 정리하면서
짜증이 올라온 것이고 짜증이 있는 상태에서 짜증 내지 말아야지
그래도 사랑해야지 하며 오시는 분들을 맞이했습니다.
이럴 때 저처럼 이렇게 애매한 또는 어중간한 상태에 있지 말고
얼른 사랑과 정리 정돈 중에 ‘무엇이 중헌디’ 하며 빨리 감정 정리해야 합니다.
사실 정작 정리해야 하고 빨리 정리해야 할 것은 물건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중헌디’ 물으십니다.
안식일이 중하냐? 사람이 중하냐?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리고 이 한 말씀으로 온갖 갑론을박을 중단시키십니다.
아주 명쾌하고 통쾌합니다. 쾌도난마(快刀亂麻)입니다.
“손을 뻗어라.”(6,10)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대인공포증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과도하게, 지나치게 의식하기에 파생된 병이지요.
이런 심각한 병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아오면서
계속 다른 사람의 시선視線을 의식하며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신감이 있으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겠지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에 매우 신경을 쓴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 지가
내 행동의 방향 도우미가 되면 그만큼 그 사람의 인생은 불행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하신 일을 지켜보고 있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당신의 치료와 치유가 필요한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당대의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친다, 는 것은
분명 법에 어긋나는 일이며 올바른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발단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마침 회당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두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를 돕지는 못할망정 잠잠히 있으면 좋으련만,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시선이 오그라든 사람보다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시선은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고
이미 예수님은 자신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직감하셨기에
따뜻한 시선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동일한 사람, 곧 도움이 필요한 오그라든 사람을 향한 시선이 전혀 달랐던 까닭은
사람에 대한 전혀 다른 시선과 접근방식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의 시선만이 아니라
자신이 손수 지은 사람에 대해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시는
아빠 하느님의 마음으로 그 오그라든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시선은 안식일 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도움을 필요한 사람은 보이지 않고 얄팍하고 편협한 시선에서
예수님의 행동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민간인을 사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사람이 우선하는 세상이 아니라 법이 우선하는 세상임을 절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지켜보고 있는 시선을 상관하지 않고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6,8)하고 그를 이끄셨습니다.
마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하고 예수님께 묻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18,1.5)하고
말씀하신 장면이 오버랩해서 다가옵니다.
이런 육체적인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예수님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자신을 보내신 아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깊은 마음은 바로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6,9)라고 묻고 질책하심에서 잘 드러납니다.
오그라든 그 사람 또한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일이 바로 하느님의 일 곧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는 일이었기에
예수님은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오그라든 사람을 살리는 일을 선택하시고 실행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오그라든 손을 가진 그 사람은
그로 인해 행동이 불편했겠지만, 마음은 오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손이 오그라들지 않은 그들은 마음이 이미 오그라든 사람들이었기에
예수님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골이 잔뜩 난”(6,11) 모습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손이 오그라들었던 그 사람은
“손을 뻗어라.”(6,10)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손이 다시 성하게 되었지만,
반대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마음은 더 오그라들고 더 굳어졌겠지요.
어느 쪽이 더 인생을 아름답게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행복하게 살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것이 곧 문제입니다. 그 해답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 구원하는 일입니다.
“주님, 혹여라도 제 마음의 오그라듦, 완고함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오늘도 제 손과 발이 당신 구원의 도구가 되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첫댓글 아멘.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