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호
지난호에 이어 이번호에서는 조선 명종때 영의정을 지낸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의 운명을 분석하여 보자.
이준경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이다. 1499년(연산군 5) 홍문관 수찬 이수정(李守貞)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수정은 할아버지 이세좌(李世佐)와 함께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죽임을 당했다. 이때 어린 이준경도 연좌되어 형 이윤경(李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으로 유배되기까지 했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외가에서 성장했으며, 축재(蓄齋) 황효헌의 문하에서 「小學」을 배웠고, 열여섯 살 때부터 사촌 형인 이연경(李延慶)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갔고, 능력을 인정받아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승지, 형조 참판, 평안도 관찰사, 병조 판서, 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58년(명종 13) 우의정에 오른 이후 좌의정을 거쳐 1565년(명종 20)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가 살던 시대에는 성리학을 펼치려던 사림들과 훈구파의 격돌로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가 있었고, 그도 그 피해자중의 한사람이었지만, 포용과 중용의 리더십으로 정계를 잘 이끌어갔다.
3) 동고 이준경李浚慶(영의정)
乾命 1499년 12월 27일 丑시
己未년 丁丑월 癸未일 癸丑시
陽遁
小寒 上元 2局
| 丙 九 庚 六 孫
死 天 朱 天 天 門 醫 雀 英 符 | 戊 四 丙 一 孫
驚 遊 九 天 太 門 魂 地 芮 乙 | 癸 一 年 戊 四 [世] 支
傷 歸 九 天 軒 門 魂 天 柱 轅 |
庚 十 己 五 父
生 禍 勾 天 招 門 害 陳 輔 搖 | 三 辛 二 鬼
靑 龍 | 壬 六 癸 九 兄 ▴ 景 福 直 天 太 門 德 符 心 陰 |
己 五 月 丁 十 父 支
杜 生 六 天 天 門 氣 合 冲 乙 | 丁 二 乙 三 財
開 絶 太 天 攝 門 命 陰 任 提 | 乙 七 壬 八 財
休 絶 螣 天 咸 門 體 蛇 蓬 池 |
중궁에 二火 鬼가 있어 世궁 四金과 <화금상전火金相戰>이라 얼핏 보면 흉명으로 보인다. 그러나 7시~8시 방향(艮宮)의 월지(月支)궁에 十土 父가 <화금상전>을 통관하여 오히려 <관인상생官印相生>의 국으로 전환시켜서 길격 길명이 되었다.
관귀에 청룡까지 있고, 전체국은 숫자의 상하합이 5가 되는 <낙서현출국>이라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至上)인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다만, 9시 방향(震宮)의 아버지를 상징하는 연간(年干) 己土 위에 太白 庚金이 있어 아버지를 일찍 비명에 여위게 된 것도 팔자인가보다.
[명리해설]
시癸丑 | 일癸未 | 월丁丑 | 년己未 |
| 71己巳 | 61庚午 | 51辛未 | 41壬申 | 31癸酉 | 21甲戌 | 11乙亥 | 1丙子 |
<癸水 사령>
丑月중 초기생 癸水 사령으로 종(從)할 정도로 신약하지 않아서 사주의 많은 土를
감당하여 종격이 되지는 않으나 그래도 土가 부담스럽다.
비록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으나, 일주의 힘을 보강시켜주는 癸酉운부터 출사
하여 영의정에 이르렀다.
[丙子운] 丙火가 生土하여 어린나이에 모진 일을 겪었다.
6세 | 1504 甲子 | 5월, 사화가 일어나 할아버지와 부친이 죽음을 당하다. 연좌되어 형 이윤경과 함께 괴산에 유배되었다. |
8세 | 1506 丙寅 | 신원(伸寃)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오다. |
9세 | 1507 丁卯 | 외조부 신승연(申承演)의 상주 임소(任所)에 따라가 축재(蓄齋) 황효헌의 문하에서 「小學」을 배우다. |
[乙亥운] 乙木이 多土를 극하여 다소 안정을 찾았다.
15세 | 1513 癸酉 | 曺湜과 함께 栖山에서 독서하다. |
16세 | 1514 甲戌 | 豐山 金氏와 결혼하다. ○ 從兄 李延慶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
19세 | 1517 丁丑 | 형 李潤慶과 함께 趙光祖의 私第에 찾아가 배알하다. |
[甲戌운]
24세 | 1522 壬午 | 봄, 생원시에 합격하다.봄, 생원시에 합격하다. |
26세 | 1524 甲申 | 1월, 모친상을 당하다. |
29세 | 1527 丁亥 | 성균관에서 修學하다. |
31세 | 1529 己丑 | 4月。큰 아들 禮悅 (官至倉守贈參議) 生。 |
[癸酉운] 신약사주인데 日主를 생조하니 발전의 시작이다.
33세 | 1531 辛卯 | 문과 을과에 합격하다. ○ 예문관 검열이 되다. |
34세 | 1532 壬辰 | 1월, 홍문관 정자가 되다. |
35세 | 1533 癸巳 | 承政院注書가 되다. ○ 弘文館著作ㆍ博士ㆍ副修撰이 되다. ○ 11월, 夜對에서 具壽聃과 함께, 安處謙을 죄줄 때에 죄없이 귀양간 사람을 석방하는 일을 啓請하다. ○ 12월, 파직되다. |
39세 | 1537 丁酉 | 호조좌랑을 거쳐 이조정랑이 되다. ○ 侍講院文學이 되다. |
40세 | 1538 戊戌 | 侍講院弼善이 되다. ○ 홍문관 교리가 되다. ○ 軍器寺僉正이 되다. |
[壬申운] 金水가 강하여지니 관운이 욱일승천으로 발전한다.
42세 | 1540 庚子 | 3월, 사헌부 장령이 되다. ○ 10월, 홍문관 응교가 되다. ○ 侍講院 輔德이 되다. |
43세 | 1541 辛丑 | 3월, 홍문관 직제학이 되다. ○ 9월, 特旨로 홍문관 부제학이 되다. |
44세 | 1542 壬寅 | 10월, 同副承旨가 되다. |
45세 | 1543 癸卯 | 우부승지가 되다. ○ 가을, 文臣庭試에서 居首하여 嘉善大夫가 되다. ○ 한성부 우윤이 되다. ○ 대사성이 되다. |
46세 | 1544 甲辰 | 12월, 告訃副使로 중국에 가다. |
47세 | 1545 乙巳 | 형조참판이 되다. ○ 8월, 평안도 관찰사가 되다. |
50세 | 1548 戊申 | 7월, 特旨로 병조판서가 되다. ○ 12월, 從兄 李延慶의 상을 당하다. |
[辛未운]
약간의 부침은 있으나 역시 辛金이 일주를 생하니 고위직으로 관운이 좋았다.
51세 | 1549 己酉 | 11월, 대사헌이 되다. |
52세 | 1550 庚戌 | 1월, 한성부 판윤이 되다. ○ 2월, 대사헌이 되다. ○ 3월, 지중추부사가 되다. ○ 5월, 報恩縣에 유배되다. |
53세 | 1551 辛亥 | 6월, 放還되다. ○ 12월,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다. |
54세 | 1552 壬子 | 3월, 형조판서가 되다. ○ 6월, 咸鏡道巡邊使가 되다. ○ 10월, 다시 大司憲이 되다. ○ 11월, 廉謹人으로 뽑히다. |
55세 | 1553 癸丑 | 2월, 다시 병조판서가 되어 知經筵春秋館事를 겸하다. |
56세 | 1554 甲寅 | 2월, 이조판서가 되다. |
57세 | 1555 乙卯 | 다시 형조판서가 되다. ○ 5월,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다. ○ 8월, 復命하다. ○ 10월, 우찬성이 되다. |
58세 | 1556 丙辰 | 元子輔養官이 되다. |
60세 | 1558 戊午 | 5월, 좌찬성이 되어 世子貳師를 겸하다. ○ 11월, 우의정이 되다. |
[庚午운]
61세 | 1559 己未 | 尹斗壽ㆍ尹根壽 형제의 방문을 받다. |
62세 | 1560 庚申 | 6월, 좌의정이 되다. ○ 12월, 병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64세 | 1562 壬戌 | 8월, 형 李潤慶의 喪을 당하다. 行狀을 짓다.8월, 형 李潤慶의 喪을 당하다. 行狀을 짓다. |
65세 | 1563 癸亥 | 10월, 脚疾 때문에 呈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66세 | 1564 甲子 | 成守琛을 哭하다. ○ 4월, 체직되다. ○ 판중추부사가 되다. ○ 5월, 영중추부사가 되다. |
67세 | 1565 乙丑 | 8월, 영의정이 되다. ○ 百官을 거느리고 尹元衡의 죄를 청하였다가, 오히려 官爵을 삭탈당하고 田里로 放逐이 되었다. |
68세 | 1566 丙寅 | 겨울, 〈答災異求言疏〉를 올려 君德ㆍ士習ㆍ國本에 대하여 論啓하다. ○ 절도사 尹汝諧의 신도비명을 짓다. |
69세 | 1567 丁卯 | 사직을 청하였으나 홍문관의 상소로 유임되다. ○ 6월, 宗系辨誣의 일을 계청하다. ○ 을사년 이후에 죄를 받은 사람들의 放免ㆍ敍用을 계청하여 盧守愼ㆍ柳希春 등이 敍用되다. |
70세 | 1568 戊辰 | 을사ㆍ정미년의 寃死人의 復爵과 籍沒 재산의 환급을 청하여 허락되다. ○ 致仕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几杖을 하사하다. ○ 4월, 趙光祖의 追贈을 계청하여 허락되다. ○ 鄭夢周의 후손을 錄用하도록 청하여 허락되다. ○ 別坐 尹侹의 묘갈명을 짓다. |
[己巳운] 忌神土가 강해지니 사망하였다.
71세 | 1569 己巳 | 1월, 〈仁宗大王入祔文昭殿議〉를 올리다. ○ 3월, 李滉이 사직하고 歸鄕할 때 상에게 先生을 薦擧하다. ○ 7월, 李彥迪의 贈諡를 계청하여 허락되다. |
72세 | 1570 庚午 | 봄,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여름, 을사ㆍ기유년의 寃枉을 昭雪하는 일과 金宏弼, 趙光祖의 文廟종사를 계청하다. ○ 정미ㆍ기유년 獄事의 伸雪과 李芑ㆍ鄭彥殼의 삭탈관직을 계청하다. ○ 天災로 인하여, 포흠의 蠲減, 人材의 진작, 변방의 단속 등에 대하여 陳啓하여 採納되다. ○ 正供都監의 설치를 奏請하여 採納되다. ○ 百官을 거느리고 僞勳 삭제와 柳灌ㆍ柳仁淑의 寃枉을 伸雪할 것을 주청하다. ○ 겨울, 사직을 청하여 허락되다. ○ 영중추부사가 되다. |
74세 | 1572 壬申 | 7월, 遺箚를 올리고 卒하다. ○ 9월, 楊根郡 高要洞에 장사 지내다. |
※ 年譜ㆍ行狀(盧守愼 撰)ㆍ明宗實錄에 의함
첫댓글 칠살이 왕하니 축미충으로 개고된 축중 신금을 상신으로 용하여 칠살용인 명이 되어야 하나
천간으로 정화 재성이 투하여 인수를 극하는 중에,
계수 비견이 투하여 정화 재성을 극하니 패중유성이 되었네요.
병자대운에 재생살되니 부친은 세상을 뜨고 본인은 부친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고,
을해대운에 을목 식신이 투하고 해미회국으로 식신이 왕하게 움직여 칠살을 제압하고 재성을 생하니,
결혼도 하고 학문을 연마하는군요.
갑술대운에 갑기합으로 칠살을 제거하니, 정화 재성이 완벽하게 계수 비견에 제지되어,
출술형으로 개고된 辛금 인수를 용할수 있어 칠살용인명이 되니 과거에 합격하는군요.
계유 임신 신미 경오 대운에,
인수가 운에서 작동하여 일취월장하여 영의정에 이르는 시기네요.
기사대운 기토가 비견 계수를 극하여,
정화 재성이 살아나 재생살되고 지지방도 재방지로 흘러 재성과 칠살이 당살을 이루어 흉운이 되어
세상을 뜨는군요,
좋은 명조와 해설
감사히 잘 보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