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9월 12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제1독서 : 1코린 8,1ㄷ-7.11-13
복 음 : 루카 6,27-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복음 말씀은 참으로 부담스럽지만 피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하였다면 스스로 복음을 재단할 수는 없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나에게 잘하는 사람에게 잘하고,
나쁘게 하는 사람에게 나쁘게 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합리적인 행동에는 결코 미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도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와 같은 동물도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단순히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는 것으로는 충분히 인간답지 않습니다.
이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인간이 자기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감정대로만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은 결코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루카 6,35)는 다시 이것도 넘어서야 합니다.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오늘 복음의 말씀은 은총의 힘으로 살아가라는 뜻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처럼 자비롭게 되려면 내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이 작용하여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내 안에 살아 있다면,
분명 그 능력을 받지 않은 사람과는 삶이 달라야 할 것입니다.
전원을 켜면 기계가 돌아가고 끄면 멈추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 힘으로만 살고 있는지는
그 행위를 보고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이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나 혼자서는 못 살아.
헤어져서는 못 살아, 떠나가면 못 살아.”
가수 패티킴의 히트곡 ‘그대 없이는 못살아’의 가사 일부입니다.
어렸을 때 그냥 흥얼거리며 부르던 노래였는데, 며칠 전에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너무 부담되고 무서운 내용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나는 스스로 행복할 수 없어. 나와 함께할 거지?
그러면 나를 행복하게 해줘야 해.’ 일 것 같습니다.
깊이 당신을 원하고 있다는 말은 듣기에 아름답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행복을 책임져 달라는 정말로 대책 없는 말이 아닐까요?
종종 데이트 폭력 문제로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하지요.
‘사랑하는 것이 죄입니까?’라는 것이지요. 당연히 사랑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집착은 죄가 됩니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집착은 추합니다.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들은 입으로 사랑을 말할 뿐
집착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결코 아름답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헤어지고 떠날 수도 있는 것이 진짜 사랑의 모습일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은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위한 진정한 사랑에 집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진짜 사랑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도 이 사랑에 관한 말씀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범위를 뛰어넘습니다.
나에게 잘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잘못된 사랑인 ‘집착’이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기준을 뛰어넘는 사랑은
집착의 모습도, 욕심과 이기심이 담긴 모습도 없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는 전혀 받을 것이 없을지 몰라도,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사랑하라고, 혹시 반대의 마음이 들 때라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랑을 하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짜 사랑에 가까워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세상에는 내가 잘했든 잘못했든,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거나 내 뺌을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대응하나요?
만약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기를 멈춰버린다면 그것은 중책이요,
그들이 한 대로 되돌려주거나 보복한다면 그것은 하책이요,
악을 선으로 갚는다면 그것은 상책입니다.
우리는 어떠한지요?
상책을 행하고 있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을 선언하신 뒤에
제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윤리를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느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대상을 가리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자비를 받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자비를 이미 받아서 가진 존재이기에, 그것을 내어줄 수가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의 거룩한 형상을 우리 안에 심어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자비로운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형상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자비는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것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앞의 둘은 행하지 말라는 것이요, 뒤의 둘은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의 둘을 행하게 되면 나빠지지는 않겠지만 그저 그 자리에 머물 것이요,
뒤의 것을 행하게 되면 우리 안에 심어준 하느님의 형상으로 돌아가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이미 심판과 단죄를 벗어나게 해 줍니다.
그것은 우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일입니다.
곧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엎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가 울려 퍼져 타인에게 흘러들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자신 안에 들어온 용서가 울려 퍼져 타인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담아봅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좋은 말씀이 아니라
내가 행할 때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무리 살아있는 말씀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서운함이 있다면 이 말씀을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발 더 나가십니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어라.”,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충고를 듣는 것도 힘이 드는데 누가 나의 뺨을 때린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나도 상대방을 한 방 먹여야 속이 후련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뺨을 내주라고 하십니다. 겉옷뿐만이 아니라 속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간 쓸개 다 빼주라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그렇게 행하는 사람입니다.
희생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사랑을 살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당시 겉옷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사막 지역에서 겉옷은 낮에는 천막이요, 밤에는 이불입니다.
그래서 겉옷을 담보로 잡았다 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줘야 하는 법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속옷까지 내주라 하시니 한마디로
상대방을 위해 간, 쓸개 다 빼주고 덤까지 주라는 말씀입니다.
상대를 위한 희생과 사랑을 다하기 위해 나를 내려놓으라는 요구입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가능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면’(갈라2,20) 가능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분의 연장입니다. 해도 해도 다 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에 충실하기를 희망합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않고 베풀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시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추슬러서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가는 징검다리여야 합니다.
사랑은 한결같이 주고 용서합니다.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선하게 대하니 덕(德)이 오직 선하기 때문”(노자).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 자체가 보상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인간의 마음은 유리판과 같다.
쉽게 금이 가고
쉽게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되기도 하지만
어느 한 부분만 충격을 받아도
전체가 금이 가거나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한다. -익명-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감싸는 큰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기를 기도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아버지는 약주를 좋아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금주를 하신 건 제가 고등학생 때인 1979년입니다.
형제 중에 술을 잘못 배운 형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며, 술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금주가 형에게 영향을 준 건 아니지만,
저는 아버지의 단호한 결심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성서 필사를 하였습니다.
자식이 사제가 된다는데 아버지로서
성서를 가까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성서 필사를 하였습니다.
나중에 제가 사제서품 받았을 때, 아버지는 저의 서품 성구를 족자에 써 주었습니다.
제가 받은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사제인 제가 책을 가까이 하기를 원하신 아버지는 늘 책을 읽으셨습니다.
제게도 책을 가까이 하면 좋겠다는 걸,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영정 사진은 헌팅턴 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는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밝은 모습으로 그토록 원하신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장례미사 강론 중에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읽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아름다웠다고 말하면서 하느님께로 갔습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아버지와 달랐습니다.
어머니는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형을 대하였습니다.
형이 집을 나가면 어머니는 늘 따뜻한 밥을 한 공기 남겨 놓았습니다.
먼 길에 지친 형이, 혹시 밥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을
형이 오면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늘 기다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기일을 꼭 챙겼습니다.
연미사를 신청하였고, 연도를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본인의 건강보다는 자식들의 건강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음력이라 생일을 기억하기 어려웠을 텐데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식구들의 생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생일을 제대로 기억 못했지만,
어머니는 저의 생일을 챙겨 주었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을 때입니다.
어머니는 인사이동이 되면 저보다 먼저 제가 가야 할 성당에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아들 사제가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었습니다.
제가 시골 성당의 본당 신부로 갔을 때입니다.
어머니는 저의 부탁을 받고, 3년 동안 저와 함께 지냈습니다.
사제관 일도 하였고, 예비자 교리도 하였고, 환자 방문도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영정 사진은 복자회 재속회 옷을 입고, 환하게 웃는 모습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어머니의 장례미사는 갈 수 없었지만,
추기경님께서 어머니의 장례미사를 집전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낌없는 사랑을 남겨 주고,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아버지와 함께 천상에서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선택받는 또 다른 길을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라고 하십니다.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이 길은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이루기 힘든 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 믿음의 황금률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27-28절)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만의 관습이다.
주님의 말씀은 적의를 품은 사람에게 사랑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저주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박해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고 가르친다.
예수님께서는 하신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23,34)라고 기도하셨다.
“눈에는 눈.” 이것은 정의의 실현이다.
그러나 “이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29절) 이것은 자비의 극치를 말한다.
주님께서는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29절) 말씀하신다.
이 자비를 우리는 스테파노에게서 볼 수 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는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라며 용서를 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첫 번째 순교자는 그리스도를 닮았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신앙인인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고 할 수가 없다.
우리 인간의 자비는 하느님의 모습을 갖고 있다.
이 자비는 더없이 훌륭한 덕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며,
우리 신앙인들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덕목이다.
그래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 말씀하신다.
이 자비를 실천할 때, 우리는 복수심을 없애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37-38절)라는 말씀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37절)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용서와 자비의 실천을 말하는데,
이 두 가지는 기도를 싣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는 두 날개라고 아우구스티노는 말하였다.
우리는 이 두 자선을 하여야 한다. 베풀고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도 주님께 좋은 것을 주시고 우리 악행을 갚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고,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원수 탓, 불행 탓.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해 주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던 중 갑자기 극단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저를 죽이려고 칼을 휘두르면
정당방위 차원에서 제가 그를 실제로 죽일까? 아니 죽일 수 있을까?
지금 생각은 피하거나 방어는 하겠지만
제가 살기 위해서 그를 죽이지는 못할 것 같고 그래서 제가 죽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경우 제게 아들이 있는데 아들이 저를 죽이려고 하면
제가 살기 위해 그 아들을 제가 죽일 수 있을까요?
생면부지의 사람도 죽이지 못하는데 제가 제 아들을?
아들을 살인자 만들지 않기 위해 온몸으로 막을지라도
나 살기 위해 아들을 죽이지 못할 것이고 칼로 찌른 아들 보며
경찰이 오기 전에 어서 도망가라고 현장에서 피하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제가 저 살기 위해 아들을 죽인다면
저는 아버지도 아니고 저의 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본래 원수이기 때문에 원수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들도 원수가 되고
사랑이 있으면 원수도 원수가 아니고 아들이 됩니다.
제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지만 옛날에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지요.
여의도 광장이 있을 때 한 젊은이가 차를 광장으로 몰아
그곳에 놀러 왔던 여러 사람을 죽게 했는데
손녀를 잃은 할머니가 교도소에 있는 그 젊은이를 찾아가
용서해 주고, 세례도 주고 마침내 아들로 삼기까지 했지요.
그래서 다시 말합니다.
본래 원수가 있어서 그가 내게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사랑이 없어서 그가 내게 원수가 되고,
사랑이 없으면 없을수록 내게는 원수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고,
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 불행 선언과 연결하면
사랑 없는 사람이 불행하고 원수도 많은 법입니다.
왜냐면 원수란 그가 나를 불행하게 만들기에 원수인데
앞서 봤듯이 내게 사랑이 없을 때 그는 원수가 되고
그로 인해 내가 불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넘치면 원수는 없고 행복합니다.
왼뺨 맞을 때 오른뺨도 맞아줄 수 있는 사람이
뺨 한 대로 원수가 되고 불행해지겠습니까?
한 대도 안 맞으려는 사람 그래서 말 한마디에 존재가 휘청일 정도로
타격이 큰사람이 말 한마디에도 불행해지고 때린 그는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원수 탓,
불행 탓,
너에게 돌리지 않고 나에게 돌려야겠습니다.
천상적 사랑, 참사랑을 요구하시는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너무나 억울하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사람들 먼저 떠나보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몸 담고 있는 피정 센터를 찾은 분들 가운데
참으로 많은 분들이 그런 사연 한 보따리를 안고 오십니다.
그를 떠나보낸 이후 내 삶이 내 삶이 아닌 그분들 바라보며
너무 환하게 웃고 다녀도 안 되겠구나,
너무 행복한 표정 지어도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가 없는 이 세상, 더 이상 의미가 없는 분들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를 불시에 떠나보내고 난 후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분들,
차라리 내가 그를 대신해서 먼저 갔으면 하는 마음에,
밥 숫가락 뜨는 것조차 송구스런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게 한 그 웬수는 또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요?
참으로 풀리지 않는 숙제입니다.
복음의 가르침,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으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대목을 접할 때마다
화딱지가 하늘 끝까지 솟구치니 참으로 큰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말씀은
너무나 기가 막힌 말씀이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막막할 정도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고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원수는 보통 어떤 사람을 두고 원수라고 합니까?
국어 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나 자기 집에 해를 입혀 원한이 맺히게 된 사람.’
결국 원수는 나를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트린 사람,
잘 나가던 내 인생을 끝장나게 만든 사람,
내 가정을 산산조각나게 만든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사랑하라니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적당한 선에서의 양보,
너그러운 관용, 신사다움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적극적인 천상적 사랑, 참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결국 바보처럼 살라는 말씀,
이 세상에 살아가지만, 이 세상을 초월하라는 말씀,
더 이상 이 세상 것들에 대해 기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넘어서야 가능합니다.
자아를 완전히 초월해야만 가능합니다.
협소한 인간적 관점, 인간의 시선을 벗어나
하느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마음을 지닐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적당히 한걸음이 아니라
크게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인간을 넘어 하느님처럼 되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인성을 극복하고 신성을 획득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요원해 보이겠지만 언젠가 세월이 좀 더 흐르고,
우리의 시야가 좀 더 광대해지고,
우리 안에서 신성이 점점 성장해 가는 어느 순간,
불가능해 보이던 예수님의 권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현실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가 인간이지만
우리 인간 안에 하느님의 성령께서 힘차게 활동하실 때,
우리 인간은 비루함에서 위대함으로
이기적 성향에서 이타적 성향으로,
인간적 사랑에서 신적 사랑으로 나아가
마침내 기꺼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날,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그날,
우리 삶 안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황금률을 뛰어넘어
박상대 마르코 신부
루카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평지설교는
어제 복음의 행복선언(20-23절)과 불행선언(24-26절)에 이어
오늘은 원수사랑과 보복금지(27-36절), 형제에 대한 판단 금지(37-42)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은 분명 제자들만을 향하여 선포된 말씀이다.(20절)
오늘 복음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선포된다.
이는 곧 당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주위에 모여있던 모든 사람들뿐 아니라
오늘 성서를 통하여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들까지 포함된다.
루카복음의 평지설교(6,20-49)는 마태오복음의 산상설교(5-7장)와
내용상 상통하는 대목이지만, 산상설교처럼 조직적이고 구체적이지는 못하다.
게다가 분량도 매우 적다.
특히 마태오는 5장에서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대비시켜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타 품지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가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6개의 대당명제를 조작적으로 說破하고 있는 반면,
루카는 모든 것을 “원수를 사랑하라.”(27절)는 단 한마디로 요약하고,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열거하고 있다.
원수의 미음에는 친절로, 저주는 축복으로, 박해에는 기도로 대하라는 것이다.
누가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을 대어주고,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고,
달라는 대로 주고, 뺏긴 것을 돌려받으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원수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그 저변에 깔고 있다.
따라서 사랑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해 주는”(31절)
황금률에서 시작되는 것이다.(마태 7,12 참조)
즉, 남을 비판하지 않으면 비판받지 않을 것이고,
단죄하지 않으면 단죄받지 않을 것이고, 남을 용서하면 용서받고,
남에게 주면 받는다는 지국히 간결하고 당연한 황금률에서 시작된다는 말이다.(37-38절)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단지 황금률에 머물지 않는다.
평지설교의 결론이자 핵심은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는 것이다.
이는 마태오복음이 전하는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5,48)는 요구와도 같은 것이며,
요한 복음이 전하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13,34)는
새 계명과도 같은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로움과 완전함,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은
모두가 원수까지도 예외없이 사랑하는 무조건적이고
끊임없는 하느님의 아가페 사랑에 기인한다.
따라서 우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황금률을 기반으로,
당신의 모상을 닮았다(창세 1,26)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겸손하게 배울 때,
비로소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며 박해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누가 내 이웃이며, 누가 내 원수인가?”라는 질문에 머물러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결코 깨달을 수 없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원수도 그가 원수이기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참으로 영원하시다.
그러나 우리는 황금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남이 나에게서 무엇을 바라는지 상관없이 행동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어느 누가 감히 나서서 오늘 복음의 구구절절 사랑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그저 고개를 떨어뜨리고 숙연해지는 우리의 모습을 볼 뿐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