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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는?”
장추삼의 옆에 꼭 붙어 앉아있는 정화진을 보고 흑의인이 물었다. 청년 둘
과 아이 하나, 분명 일반적인 동행은 아닐 것이다.
“이 녀석이요?”
장추삼이 아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짓궂게 웃었다.
“아들을 삼을까, 제자를 삼을까, 고민 중이오. 뭐, 이도저도 안 되면 지
맘대로 살게 놔두려고 합니다. 어차피 제가 살 인생 제몫이니까.”
하며 정화진과의 만남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역시...”
“예?”
뜻 모를 흑의인의 독백에 장추삼이 반문을 했지만 그는 그저 쓴 술을 털어
넣을 뿐이었다.
‘됨됨이야 어쨌든 간에 이 아이는 천성이 무골이다. 거기다 눈망울까지 깊
으니 어찌 기재감이라 아니할 수 있을까? 놀랍군... 저 나이에 사람의 외면
뿐 아니라 내면에 숨겨진 자질까지 파악하는 눈을 가졌다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까운 청년이다.
“휴우우~”
꼬리가 무척이나 긴 탄식.
오십 줄이 넘은 남자가, 그것도 뭐 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의 입에
서 나온 한숨이기에 두 청년은 어떤 이질적인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무슨 문제라도...”
“사람이 살면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한, 둘이겠는가 만은 자식농사처
럼 힘든 일도 없네, 그려.”
말 해놓고 보니 청자들이 아직 장가도 가지 않은 총각들인지라 멀거니 둘을
보던 흑의인이 콧김을 한번 뿜고 빈 술잔에 술을 부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해요.”
딱 부러진 대답. 의외로 그의 말에 동조한 건 장추삼이었다.
“이런 말하긴 쑥스럽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끔찍한 미래가 뭔지 아시오?”
“ ? ”
흑의인이 눈으로 재촉을 하자 장추삼이 바보처럼 혀를 쭉 내밀었다.
“바로 나 같은 자식 놈을 낳아서 기르는 거요.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일거야
! 비극이지! 어쩔 때보면 우리부친이 너무도 존경스럽다오. 어떻게 나 같은
놈을 여태까지 보살피셨는지.”
농담이라고 하기엔 뭔가 와 닿는 얘기.
“소싯적에 부모님의 속을 안 뒤집은 자식이 어디 있겠나? 삶이란 게 다 그
런 거라네... 어릴 적의 실수가 어른이 되어 사무치고, 그때가 되면 이미
돌이킬 수는 없는... 그나마 용서를 구할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편이지.
아직 부모님이 생존해계신 듯하니 이제라도 잘해 드리게나.”
“늘 생각은 하고 있는데... 잘 안 되네요.”
“후후...”
거짓 없는 그의 미소가 마음에 들어 또 한잔을 털어 넣고는 흑의인이 자신
의 잔을 내밀었다.
“받게.”
“어...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술잔은 절대로 돌리지 말자는 주의라...”
“아버지 같은 사람이 주는 잔이니 그냥 받아.”
“아버지가 아니라 황제가 와도 싫은 건 싫은 거요. 그리고... 이 술버릇은
우리 부친께서 심어주신 건데 무슨 말이오?”
“그, 그런가?”
본전도 찾지 못하고 흑의인 들었던 잔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고집이 쎄 보
이기는 했지만 이정도로 주관이 뚜렷한 놈인지는 미처 몰랐던지라 더 이상
권할 수가 없다.
“꽤 엄하신가보군, 자네 부친은.”
“엄하지 않으신 부친이 어디 있겠소? 그래서 어릴 적엔 반항도 많이 했다
오. 그래봐야 서로의 가슴에 상처만 아로새기는 것을.”
“허허...”
천방지축으로 행동하면서도 가슴속 깊숙한 곳에는 여린 정이 살아 숨쉬는
청년이다. 자신의 아들과 뭔가 다르면서도 공통점을 발견하여 흑의인이 고
소를 지었다.
‘내면의 잔정을 외피의 무뚝뚝함으로 감추는 우리 아들 녀석이나, 마음속
의 여린 심성을 돌출적인 행동으로 가리는 저 녀석이나...’
이때 장추삼이 급하게 한잔을 마시고 술잔을 흑의인의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냥... 따라주시오. 이 정도 선에서 타협합시다. 사실 한번에 술잔을 안
비우는 성격인데 이번만 예외로 할 게요.”
“그럴까? 하하하!”
기분 좋게 술을 따라주던 흑의인이 문득 장추삼을 보고는 다시 한숨을 내쉬
었다.
“아, 참... 술맛 떨어지게 왜 자꾸 그래요? 대체 뭔 일이 있는 거요? 지독
히도 말 안 듣는 자식 때문에 그러나본데 어디에서 뭘 해먹고 사는지 일러
주시오. 그 친구, 아주 눈물을 쏙 빼놓을 테니.”
“딸내미야...”
“엥?”
호기롭게 나섰던 장추삼이 그대로 꼬리를 말았다. 여자라면 무슨 일이든 사
양이다.
“다 큰 딸내미란 말일세. 이건 사내자식이면 두들겨 패서라도 말을 듣게
하겠는데 망아지만한 여식에게 손을 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고
저대로 뒀다가는 아주 망가지게 생겼고... 정말 환장을 할 일일세!”
“대협을 닮았다면 눈이 부시리만치 아름답겠군요.”
역시 하운. 바로 접대용 화답을 날렸다.
“예쁘지, 정말로 예쁘다네...”
흑의인의 음성은 비감함이라는 강물에 푹 담궜다가 꺼내놓은 듯했다.
“그리도 아름다운 소저가 중원에 발을 딛는다면 무림에 또 한 차례... 어?”
선하게 웃으며 열심히 말을 하던 하운이 장추삼의 어이없어하는 얼굴에 눈
을 껌뻑였다.
“왜 그러시오?”
“내가 그 뒷말을 해 볼까? 또 한 차례 파문이 일 것이고, 무림삼화도 빛을
잃고 어쩌고...”
“오, 어떻게 알았소? 놀랍구려! 이젠 불가의 대능력(大能力)이라는 타심통
까지 가능한 거요?”
정말로 놀라는 하운의 반응에 머리를 벅벅 긁던 장추삼이 힘없이 중얼거렸
다.
“아냐... 내가 괜히 끼어들었나봐. 그냥 하던 말이나 마저 하라고...”
“내가 하고픈 말을 그게 다였소.”
공연히 바보가 되어버린 장추삼이 흑의인을 쓱 쳐다보다니 눈을 가늘게 뜨
고 따지듯 물었다.
“혹시... 남자라면 발톱의 때만큼으로도 치지 않았던 여식께서 어쩐 일인
지 웬 놈팽이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뭐 그런 한심한 말을 하려던 것은 아니
겠지요?”
순간 굳었던 흑의인이 박수를 치며 그의 손을 잡았다.
“정말로 대단해! 어찌 내가 하려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자네, 정말로 타심통이라도 가능한 건가!”
‘미치겠네...’
감탄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중청(中靑)의 시선에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고는 방임적인 자세로 장추삼이 히죽 웃었다.
상상은 자유라지 않은가?
그런데 정말 답답한 것이 흑의중년은 그렇다 쳐도 어제의 대화를 말끔하게
잊어버린 하운의 무신경함에는 두 손,두 발을 다 들 지경이다.
“그렇다네. 저 소협의 말대로야...”
하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저 소협이라는 말은...’
우습지만 흑의인은 장추삼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객잔에서 분
명 들었으나 싸움에 취해있던 그였기에 이름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때도 ‘이보게’였고 지금도 ‘저 소협’이다.
‘하긴, 굳이 통성명을 할 처지가 아니라면 묻지도 않는데 이름을 밝히는
것도 우습겠구나.’
편하게 생각하고 하운이 흑의인의 다음 말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지루해
서 거의 안달이 난 장추삼과는 달리.
“하도 눈이 높아 시집보내는 게 일 일거라 고심하던 아비에게 이런 식으로
배신감을 줘도 되는가! 고작해서 백수건달 놈에게 시집보내기위해 여태까
지 금이야, 옥이야, 기른 게 아니란 말일세...”
처연한 넋두리. 그때 장추삼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끼어들었다.
“만나나보고 하는 소리요?”
“음?”
“그 백수라는 작자, 만나서 말이나 한번 나눠봤냐고요?”
“뭐한다고 만나!”
흑의인이 사자처럼 으르릉거렸다.
“아니, 만나야지! 만나서 반쯤 죽여 놓고 포기시켜야지! 제까짓 게 어딜!”
“뭐... 내 일은 아니지만...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그렇게 매도한다
는 게 좀 웃기는 걸?”
“그걸 말이라고!”
벌떡 일어서는 흑의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장추삼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어제도 한 소리지만...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천하제일미라고 했소. 뭐,
아저씨가 아저씨 딸내미를 끔찍이 위한다는 건 알겠는데... 바꿔 말한다면
그 백수인가 뭔가 하는 작자도 한 가정의 아들이고, 그래서 그 집에서는 금
이야, 옥이야, 대접받을 거란 말이오. 어차피 피차일반이란 거지. 그러니
보지도 않은 이를 그렇게 씹어대는 건 영 보기 안 좋소.”
“보나마나 뻔하다니까!”
가슴을 탕탕치는 흑의인을 넌지시 바라보던 그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알아서 하라니까요? 내 일 아니니 내가 열 낼 이유는 없소. 그저 그렇다
는 거요. 참견안할 테니 그 작자를 반쯤 죽이든, 완전히 골로 보내든, 아저
씨 맘대로 해요. 하지만 지금은 기분 좋게 마시는 자리니까 그것 가지고 열
내지 마요. 가뜩이나 싱숭생숭하구먼.”
“흐음...”
할 말이 없다. 괜히 울적해져서 어린 청년들에게 못 보일 행동을 벌였다.
“이거 실례가 많았네. 내가 좀 욱하는 데가 있거든.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아직까지 그 성격을 고치지 못했지 뭔가?”
하고 장추삼들을 바라보던 흑의인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이 친구...”
“본인이 말한 대로 낮술엔 약한가봅니다. 술자리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사
람이 아닌데... 하긴 걱정거리도 있고 하니까 더 빨리 취했는지도 모르겠군
요.”
꼬닥꼬닥 조는 장추삼을 보며 하운이 머리를 긁었다. 이제 술이 좀 받기 시
작한 흑의인이 입맛을 다셨지만 대작할 이가 뻗었으니 별 다른 도리가 없었
다.
“객방 하나 잡아서 좀 재우게. 많이 피곤했나보군.”
“예... 오늘 실례가 많았습니다. 대접만 받고 이것 죄송스러워서...”
공손히 포권하는 하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흑의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충분히 재미있었고 충분히 흥미로운 대화였다. 요 며칠간의 적적함이 확 달
아나는 주석(酒席)이었기에 날카로웠던 - 사실 청빈로에 와서 하루라도 편
안한 날이 없었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말이다 - 그의 기분도 많이
누그러든 상태였다.
하운에게 업혀 이층 객방으로 오르는 장추삼을 눈으로 배웅하며 흑의인이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아무도 들리지 않게.
“한번 만나는 볼까나...”
삼류무사-240
***
역시 낯 술은 쥐약이다. 아니, 쥐약보다 더 무서운 위력을 가진 마물이다.
어쩌자고 낯에 술을 퍼서 이 고생이란 건가.
‘내가 미쳤지.’
벌컥벌컥 냉수를 들이키며 장추삼이 충혈 된 눈을 희빈덕거렸다.
“그러게...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하면 꼭 문제가 생기는 거요.”
하운의 이죽거림에도 대꾸할 힘이 없어서 그저 손사레만 치며 이마를 부여
잡는 그의 모습은 처절 그 자체를 넘어 비참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숨을 몰아쉬던 장추삼이 실실 웃고 있는 하운이 얄미웠는지 새우 눈
으로 그를 노려보다 문득 정화진을 붙잡았다.
“자고로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남자가 있는 법이지. 알고 있느냐?”
“두 종류요?”
귀여운 눈망울을 굴리며 정화진이 되묻자 장추삼이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두 종류의 사람! 하나는 숙취의 고통을 아는 남자고, 다른 하나는
그걸 모르는 남자지.”
“그건...”
“다른 말로 바꿔보자면 술 한 잔을 즐길 줄 아는 남자와 술의 참맛도 모르
고 밋밋하게 인생을 꾸려가는 남자를 얘기하는 거다.”
부드럽던 하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를 슬쩍 쳐다본 장추삼이 입
꼬리를 비틀며 얘기를 이어갔다.
“생각해봐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술 한 잔도 기울이지 못한다면 어찌 인생
의 참맛을 알 것이며, 어찌 삶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논하겠냐? 특히나
사.내.대.장.부.라면 말이다!”
사내대장부에 강력한 힘을 실어서 그가 말을 맺자 가만히 듣고 있던 하운이
차 한 잔을 따라 마셨다.
“인생의 참맛과 희노애락을 논하면서 꼭 술을 앞에 놔야할 필요는 없단다.
가슴을 적셔줄 차 한 잔과 한마디 말을 나누지 않더라도 마음과 마음이 저
절로 잇닿는, 그런 벗이 함께한다면 무엇이 부럽겠느냐?”
그리고 하운이 눈을 감고 다향을 음미했다.
‘제, 젠장!’
완패다. 누가 봐도 하운의 말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일 터였다. 언제 저리도
말빨이 늘었다는 건가.
하운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정화진의 반응이 아니더라도 패배를
직감한 장추삼이기에 괜히 콧방귀를 힘차게 날리는 것으로 상황을 모면하
려 했다.
“맞아요. 객잔에서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가 술을 드신 분들이
에요. 들어오실 때는 점잖으셨던 분들도 한 병, 두 병... 쌓여가면서 점점
난폭해지시더라고요.”
“그래, 객잔에서 수많은 이를 겪어본 네가 더 잘 알겠구나.”
하며 승리의 미소를 짓는 하운이 너무도 얄미웠지만 여기서 더 반항해봐야
본전까지 다 까먹을까봐 조용히 방바닥을 긁으며 장추삼이 피죽피죽 웃었다.
이 미소, 웬만한 으름장보다 무서운 위력으로 하운의 가슴에 팍팍 꽂혔다.
이런 인간형은 차라리 방방 뛰며 열 내는 편이 덜 무서운 법이다.
저 심통의 머리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자자, 대충 쉬었으면 일어납시다! 언제까지 이렇게 허송세월을 보낼 거요
?”
무서운가보구먼, 하형...
“어서 준비합시다! 화진아, 너는 장형의 짐을 챙기도록 하여라. 아직 장형
의 노독이 덜 풀린 듯 하구나.”
노독은 무슨, 술독이라며?
아무튼 하운의 말이 맞기에 주섬주섬 짐을 챙기던 하장추삼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참, 그 아저씨는? 옆방에 있나?”
“하하... 이제 그분 생각이 난 게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나갈 일이 있
다고 하셨소. 인사는 대신한다면서 가셨으니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다음 기회는 무슨? 그 양반 이름도 모른다니까? 만날 일도 없어 보이는데
다음이 어디 있어?”
짐을 챙겨든 하운이 방문을 열며 장추삼들에게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사람 인연이란 게 그리 간단치만은 않소. 언제 어떤 모양새로 또 마주칠
지 누가 알겠소? 모름지기 사람 일은 어떤 식으로, 어떻게 풀려갈지 아무도
예측하기 힘든 법이라오.”
“누가 도사 아니랄까봐... 아무튼 지금 그딴 거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다
고. 에휴~ 술 깨고 나니 또 고민되네, 젠장.”
방문을 나서며 투덜거리는 장추삼의 어깨를 두드리며 하운이 빙긋 웃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하잖소? 그, 왜... 장형이 잘 하는 것 있지
않소?”
“내가 잘 하는 거?”
그게 뭔데. 하며 묻는 장추삼을 앞서며 하운이 아이의 어깨에 걸린 짐을 벗
겨서 들었다.
“씨익 한번 웃고, 머리 긁는 것 말이오. 그거면 만사 해결일 듯하니 그 초
식을 써보시구려.”
“그럴까?”
씨익 웃으며 장추삼이 머리를 긁었다.
“바로 그거요! 하하핫!”
어깨를 나란히 하며 객잔을 나서는 둘의 머리 위로 푸른 달님이 아련한 미
소를 보냈다.
새로운 것에의 기대와 막연한 두려움으로 눈망울을 굴리는 아이와 새로운
세상에 서서히 지쳐가는 두 청년을 감싸 안아줄 넉넉함으로 .
***
그는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원래부터 진중했던 그였지만 오늘의 일은 너무
도 중요한 사안이었고, 또 어느 누구와의 의견조율 없이 행하는 일이었기에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이랬던 거다...’
일의 성패는 하늘이 내리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또 그만한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본적도 없는 돌출변수에 의해 첫 고배를 마시며 세상은 실력
과 자신감만으로 풀어내지 못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번 어긋난 단추는 밑으로 갈수록 더 어긋나는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의 반복적인 이어짐으로 그들의 행보는 갈수록 더
뎌졌고, 종내 더 이상의 전진이 불가능해질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침묵...
그들의 위대한 이름은 여전한 외면으로 처음처럼의 차디찬 고독 속에 스스
로를 침전시키고 있었다.
바라지도 않았다. 만약 일말의 기대라도 있었다면 이만큼의 일을 진행시키
지도 못했을 거다.
그렇지만...
사람인 이상 어쩔 수없이 바라보게 된다. 아니, 쭉 바라봤다. 앞으로도 그
럴 것이고.
“바라는 보겠지만, 그것을 전부로 삼지는 않겠다. 내 말을 알겠느냐?”
“하지만 사형, 그래도 한번쯤은 의견을 구해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해서...”
먼 하늘을 바라보던 운조가 녹미랑의 간곡한 부탁에 으스러져라 주먹을 쥐
었다.
“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길 바라느냐? 아니,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가야
할까? 난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이런 내가 잘못된 걸까? 만약 그렇다면 이
우매한 사형을 납득시켜다오!”
녹미랑으로는 도저히 할 말이 없었다. 어쩌면 사형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
각에 고개를 들지 못했고, 이런 생각조차 품어보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에
더욱 힘이 빠졌다.
그래도 이건 너무나 큰 모험이다.
“사형에게 제가 감히 뭐라고 하겠어요. 그저... 오사형이나 육사형께서도
움직인다고 하셨으니 그때까지 만이라도 기다리셨다가 함께 하심이...”
‘사매...’
왜 저 깊디, 깊은 속내를 모를까?
왜 저 시리도록 애틋한 마음을 모를까?
왜...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떨쳐 일어서야만 할까?
왜...
“사매... 우리가 비록 한 사람을 바라보며 하나의 뜻으로 뭉쳐 한 가지 목
표를 향해 뛰고는 있지만 결코 하나가 될 수는 없어. 그런 사제나, 사형들
을 탓할 생각은 없다. 탓할 수도 없고.”
이런 나 자신이나 탓해야 할지도 모르지, 하며 쿡쿡 웃던 그가 자조적인 눈
을 거두고 녹미랑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렇기에 홀로 가는 거야. 우리가 하나일 수 없듯, 우리의 방식도 결코
같지 않다. 만약 우리에게 좀 더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움직임이 있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는 흐르지 않았을 거다. 사람이 여럿인데 어찌 일하는 방식
이 하나만 존재하겠으며, 그 하나가 절대적이란 보장 또한 어디에 있겠느냐?”
“방식의 차이...”
“그래, 방식의 차이 말이다. 앉아서 생각을 정리한 연후에 일을 진행시키
는 것이 편한 이도 있겠고, 일단 저지르고 추후의 상항을 대처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어떻게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겠는가 말이다!”
사실 그들은 여러 차례 기회를 잡았었는지 모른다. 또는 단 한번도 기회를
잡지 못했었는지도 모른다.
단 하나. 기회가 있었든, 없었든 그들에겐 선택을 할 여지가 없었다는 건
분명하다. 주어진 사태가 아무리 유리하다고 해도 나서지 않았으니 어찌 결
과를 알 도리가 있을까?
“누구라도 한 사람이 치받고 나섰더라면... 아아, 그런 걸 바라면서 정작
한걸음도 나서지 못했으니 누구 탓하랴...”
냉정하고, 치밀한 만큼 사건의 추이를 판단 내리는데 놀라운 감각을 지닌
사람이 운조였다. 그래서 사형제들은 은연중에 그의 결정을 존중했고 그렇
게 흘러만 갔다.
만약 변수만 없었더라면 편안하게 흘러갔을지도.
‘어디서부터 깨져버린 걸까...’
그분에게로 화살을 돌리려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식으로 떠넘긴다면
안 걸려들 이가 없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을 가눌 길은 없다.
그분은 정말로 대단한 지략으로 세상과 맞서려 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만
약 그분의 계획대로 일이 흘러갔다면 전 무림의 판도는 완전히 변해있었을
거다.
그리고... 그들 사형제들도 없었을 것이고...
그분의 대의와, 그들의 존재.
어지러운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운조가 발악적으로 외쳤다.
“다시는 멈춰있지 않겠다! 그 어떤 사왕이 온다고 해도 내가 먼저 나설 것
이다!”
처연한 눈으로 그의 불타오르는 시선을 마주하던 녹미랑이 문득 아무렇게나
자란 들풀을 한 움큼 잡아 뽑아 코에 가져다 댔다.
함초롭게 풀 내음을 맡던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기다릴게요...”
“음?”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멍청하게 반문을 했던 운조가 곧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빙글 돌아섰다.
“내가... 답답하지?”
“아니오.”
“바보 같지?”
“아니오.”
“잘난 체하기 좋아하고, 무게만 잡고, 하지만 뭐 하나 제대로 이루어놓은
것도 없고... 무척이나 한심할 거야.”
“아니라고 했잖아요!”
버럭 소리를 지르고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녹미랑의 서슬에 깜짝 놀라 아
무런 말도 않던 운조가 곧 그녀를 따라 쪼그려 앉았다.
“그래서 고마운 거야...”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고개를 돌린 녹미랑의 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한심한 나라도 기다려준다고 말 해줄 이가 있다는 것이, 그 사람이
바로 사매라는 사실이 너무나 고마운 거야.”
“사형...”
녹미랑도 따라 웃었다.
“허... 울다 웃으면 엉덩이에 털이 난다고 했거늘. 사매는 원숭이가 부러
웠던 게로군?”
“이... 바보!”
“아까는 아니라더니 이제는 바보라고 하는구나? 헛헛... 이리도 줏대가 없
는 아가씨라니... 그럼 난 어떤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느냐?”
“바보! 바보! 바보!”
“아하하하핫!”
호탕한 운조의 대소가 녹미랑의 부드러운 미소를 감싸 안고 하늘가에 올라
춤을 출 듯 맴돌았다. 그렇게 행복해만 보이는 그들의 얼굴에는 어떤 근심
도 깃들 여지가 없었다.
“일은 사람이 하지만 결과는 하늘이 내린다고들 하지? 그렇지만 난 그 말
이 너무도 싫구나. 제아무리 높고도 푸르다는 하늘이지만 언제나 공평하지
만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거든.”
“하늘이 ㅘ연 우리의 손을 들어줄까요?”
“들어주겠지, 들어주지 않겠다고 한다면 내 직접 팔을 들어 하늘과 맞잡을
거다! 그러면 지도 어쩔 도리 없을 거 아니냐!”
“엉터리!”
“잘난 체는...”
“허... 아까는 아니라더니?”
“관둬욧!”
일상적으로 구름은 흘러가고 두 사람의 이야기도 느긋한 여유로 천천히 떠
돌았다. 그런데 낭랑한 미소 속에 간간히 번뜩이는 그의 눈빛은 결코 예사
롭지 않았다.
첫댓글 방식의 차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