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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3일 금요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1코린 9,16-19.22ㄴ-27
복 음 : 루카 6,39-42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곤충을 세 부분으로 나누면, 머리, 가슴, 배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세 부분을 나누면 어떻게 될까요?
정답은 ‘죽-는-다’라고 하네요.
사람은 곤충과 달리 몸을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곤충은 몸통이 분절되어 있어서 나뉘어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곤충과 분명히 다릅니다.
종종 사람을 곤충에 비유해서 말하기도 하지만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동물은 같을까요? 역시 다릅니다.
특히 생각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갖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과 사람은 같을까요? 이 역시 답은 ‘다르다’입니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다는 것, 이 점만 봐도 사람 역시 서로 다른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고귀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년필의 필기감이 좋아서 글 쓸 때는 만년필을 이용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년필에 관심이 많습니다.
종종 스페셜 에디션 만년필이 나옵니다.
그 가격은 어떨까요?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로 비쌉니다.
왜냐하면 한정판 만년필은 많이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딱 한 자루만 만든다면 어떨까요?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갈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스페셜 에디션입니다.
그것도 딱 하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귀한 존재로 우리 각자를 만드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자기 고유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남들처럼만 살려고 합니다.
고유함은 떨어지고 자기 값어치도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고유함은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에서 나옵니다.
사랑하지 않고 남들처럼 자기 욕심만 채워나간다면 나의 가치는 떨어질 뿐입니다.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사랑으로 나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 가치를 더 높여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사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모범을 보였으니, 우리도 따라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고귀함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예수님 시대에는 종교 지도자들이 그런 모습을 갖췄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삶을 살았지,
결코 하느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위선적이고, 그러면서 자기들만 옳다는 것을 힘주어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말씀처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남의 눈에 있는 티, 곧 단점을 찾으려는 사람은
남의 고귀함과 고유함을 보지 못합니다.
사랑으로 가치를 올려주시는 예수님과 정반대에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고유함과 고귀함을 서로 올릴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할 때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는
말씀에 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그런데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무엇일까?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심판한다는 것은
그것을 그렇게 심판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 틀’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관점, 태도,
사고방식의 틀(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이나 편견 등
고정관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형제의 눈에서 ‘티’를 바라보게 하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그런데 우리 눈의 ‘들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곧 ‘보여주는 대로’, ‘들려주는 대로’를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곧 사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복음정신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으로(호의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를 ‘위하여’(ùπερ), 그가 잘되기를 바라고
구원되기를 위하여 ‘호의와 자애’(헤세드)로 받아들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비추어주는 빛’으로 보는 일입니다. 결국, 빛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호의로)으로 보는 일’, 곧 ‘빛으로 보는 일’이 ‘들보’를 몰아냅니다.
곧 ‘용서하는 일’, ‘사랑하는 일’이
우리 눈의 ‘들보’를 빼내고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결국, 심판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것을 넘어, 그것을 “호의로 보는 것,
곧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부어주신 은총이요 빛입니다.
결국, ‘들보’를 몰아내는 이는 내가 아니라,
빛이요 사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너나 잘해, 내 걱정 하지 마!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살아가면서 말은 청산유수인데 삶이 뒷받침되지 못하여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자신의 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도 남의 작은 허물만 보고는 나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서 대접받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방귀뀐 놈이 성낸다.’라는 말을 합니다.
남의 잘못은 잘 찾아내고 자기 잘못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문제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다른 사람의 추한 모습을 말하러 다니는 큰 험담꾼은 악마”라고 하시며
“험담은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나쁜 전염병”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지극히 하찮은 잘못은 크게 보이지만
자신의 잘못은 대단히 중대한 것일지라도 작게 보이는 것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내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6,42).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너나 잘해, 내 걱정 하지 마!,‘ ’너나 잘해, 잘난 체 하지 마!’하는 노랫말도 있습니다.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 속으로는 그런 감정을 갖게 되나 봅니다.
삶이 풍요롭지 못할 때, 하는 말이나 행동은 헛소리요, 위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합니다. 삶의 모범보다 더 큰 말은 없습니다.
어미 게와 아기 게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어미 게가 아기 게의 걷는 모습을 보니 걷는 보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미게가 말합니다.
“제발 옆으로 걷지 마라. 의젓하게 똑바로 걸어라.”
그러자 아기 게가 말합니다.
“네, 엄마. 그러면 엄마가 걷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어미게는 “그래. 따라서 하렴”하고 걷는데 자꾸 옆으로, 옆으로 걷습니다.
아기 게가 뒤따라 옆으로, 옆으로 걸었습니다.
교훈을 늘어놓기 전에 자신부터 똑바로 살고, 똑바로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라고 하며 가슴을 펑펑 칩니다.
입으로가 아니라 온몸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용서를 할 수 있고 화해를 이루며 화목해지고 행복해집니다.
남 탓하지 않는 하루의 삶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끝맺음 역시 주님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노력한 만큼 잘살게 되고
사랑하는 만큼 아름다워지며 가슴을 여는 만큼 풍족해집니다.
주님께 마음을 열고 나 자신을 바꾸고
쇄신시키는 일부터 시작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어떻게 하면 제 눈의 들보를 빼낼 수 있을까요?”
“우선 네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여라.”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안에 빛이 있으면 밖이 빛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안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안을 소중하게 만들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들 때문에
공동체가 분열되고, 갈등이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들 중에
‘시기, 질투, 분노, 원망, 탐욕, 나태, 식탐’과 같은 것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소금은 등잔을 밝히는 기름과 같습니다.
먼저 소금이 되지 않으면 빛이 되기 어렵습니다.
소금이 음식의 맛을 내고, 소금이 음식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소금이 녹아 형체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희생과 헌신이 없는 빛은 참된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사제 집무실을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지금 집무실은 부주임 신부님과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집무실에 화장실, 샤워실, 싱크대가 있습니다.
10명 이상이 회의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지만, 조금 넓고 큰 편입니다.
부주임 신부님과 작은 방으로 집무실을 옮기면
20명 이상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될 것이라고 합니다.
부주임 신부님과 작은 방으로 옮겼습니다. 옮기면서 좋은 점이 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청년들과 모임을 가지면 자리를 비켜 주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저를 찾아오는 교우가 있으면 부주임 신부님도 불편했을 터인데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이번에 자리를 옮기면서 3가지 좋은 점이 생겼습니다.
교우들은 편하게 모일 수 있는 다목적 모임방이 생겨서 좋습니다.
사제들은 아늑한 집무실이 생겨서 좋습니다.
방을 옮기면서 불필요한 것들을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마음을 바꾸면 행동도 바꿀 수 있습니다.
‘자존심, 권위, 귀찮음’과 같은 것들이 마음에 있으면 합리적이고, 합당한 선택이 어렵습니다.
집무실을 옮기면서 예전에 만났던 구청장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한 달에 한 번 구청에서 근무하는 교우들을 위한 미사엘 갔습니다.
구청장이 새로 바뀌면서 구청장의 집무실에서 차를 마셨습니다.
전임 구청장은 집무실이 무척 컸습니다.
구청의 현안과 미래를 보여주는 공간이 있었고, 널찍한 회의실이 있었고,
구청장과 차를 마실 수 있는 집무실이 있었습니다.
신임 구청장은 집무실을 확 줄였습니다.
거의 사용하지 않던 ‘전시 공간, 회의실’을 개방하여 직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전에는 두 개의 방을 지나야 구청장을 만날 수 있었는데
바뀌면서 문 하나만 지나면 구청장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구청장은 구민들의 의견을 경청하였고, 직원들과 원활하게 소통하였습니다.
구청에는 시설관리 공단이 있었습니다.
구청에서 관리하는 공원, 운동장, 체육시설이 있었습니다.
본당의 날을 맞이해서 교우들이 체육대회를 하고,
야외미사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청에서 운영하는 운동장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구청에서는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고, 본당의 날 행사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늘 환한 웃음으로 구민들을 만났던 구청장이 생각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사목 표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실 때 빵과 포도주를 나눠 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서 내어 줄 나의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해서 흘릴 나의 피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너의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내어라,
다음에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높은 관직에 있을수록 더욱 몸가짐을 조심했다고 합니다.
가족들 또한 아버지의 관직에 누가 되지 않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에 머물러서는 하느님께로 나가기 어렵습니다.
먼저 나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빛나고,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 무궁히 빛나리라.”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조욱현 토마 신부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의 제자들은 정확하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눈먼 이를 이끄는 눈먼 이가 되지 않아야 한다.
무지의 어둠에 묻혀있는 자가 똑같이 어둠에 묻혀있는 자를 진리로 이끌 수 없다.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위험한 일인지 말씀하셨다.
남을 심판하려는 마음조차 먹지 말라고,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잘못들과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길에서
먼저 나 자신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다음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을 바로 잡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는 어느 한 사람 완전한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비판하며, 그 비판이 도를 지나서 냉혹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일은 우리 신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그
리스도의 말씀을 항상 접하고 생활한다고 자부하고 있는 신자들 가운데도
남보다 자신이 잘났다는 우월감과 색안경을 통해서 남을 쳐다보고 비판함으로써
남의 결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잡아내어 몰아세우는 일들이 있다.
내가 그보다 무엇이 잘났기 때문에 충고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실수할 수 있으며,
상대방의 처지가 될 수도 있고 그보다 더 나쁜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상대에게는 엄격한 위선적인 것보다,
자신에게 더 엄격하고 상대에게는 관대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은 모든 인류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께로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개개인은 모두 사회 스승의 표양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 표양은 예수께서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간음하다 들킨 여인(요한 8,1-11)을 용서하신 것,
또 일흔일곱 번 용서하라(마태 18,21-22) 하신 말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이 모범들은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
오늘 복음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이래로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
우리가 사회에 표양을 보여야 할 본분이 있으므로 관대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대하고 엄격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다스리라고 하신다.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듯이,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 이웃을 대함으로써
진정으로 형제적 사랑 안에 하나가 되는 삶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며
기쁘게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자기 눈을 보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생각에 형제 눈의 티는 보고 내 눈의 들보를 못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작은 것은 보고 큰 것은 못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더 크고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남의 눈은 보고 내 눈은 안 보는 겁니다.
어제 자기 행복을 점검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했습니다만
자기 눈을 점검치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라는 말입니다.
이상하게도 저는 안경을 자주 부서트리고, 잃어버리고,
안 쓰고 다니고 닦지 않은 채로 다닙니다.
그래서 가끔 안경을 쓰지 않은 채 집을 나서 불편하고,
안경에 먼지나 기름이 껴서 불편한데도 그냥 다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육신의 눈을 점검하지 않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그저 불편함일 뿐입니다.
진짜 큰 문제는 다른 것이라는 말이고 그것은
내가 어떤 식으로 남이나 세상을 보는지 그것입니다.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이런 식으로 보면 대상을 그대로 보지 못하겠지요.
색안경을 쓰고 보면 다 그 색깔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 밖에도 욕심의 눈으로 보는 것,
교만의 눈으로 보는 것이 있고,
호감과 비호감의 눈으로 보는 것이 있지요.
욕심의 눈으로 보면 욕심내는 것밖에는 보지 못하고,
교만의 눈으로 보면 보이는 것이 없어 아예 못 보고,
호감의 눈으로 보면 그의 모든 것을 좋게만 보고
비호감의 눈으로 보면 그의 모든 것을 나쁘게 보지요.
어쨌거나 진짜 문제는 내 눈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과 의사가 남의 눈은 보고 고쳐주면서
자기 눈은 보지 않아 못 보게 되는 것과 같지요.
이런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인데,
돌아보는 것도 보는 것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지 않으냐?"(6,39)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는
포르투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주제 사라마구가 쓴 장편 소설의 제목입니다.
사라마구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6,39)의 말씀에서
이 소설의 모티브를 얻었나 봅니다. 그러기에 서문에는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당신이 볼 수 있다면, 주시하라. 만약 당신이 주시할 수 있다면, 관찰하라.”
그러기에 이 소설이 표면적으로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눈이 멀었고, 오직 당신만 볼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책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눈이 먼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볼 수 있는 사람이 오직 나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의 끝부분을 인용합니다.
『난 우리가 눈이 먼 게 아니라, 이미 눈이 멀었다고 생각한다.
눈이 멀었지만, 보고 있는. 볼 수 있는 눈이 먼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보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또한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루카 6,39)라는 구절을 들어,
“인도하는 사람은 눈이 멀어서는 안 되며, 앞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즉 현명하게 이끌기 위해 지혜가 필요한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해가 될 위험이 있다.”하고 말했습니다.
우리와 우리를 믿고 따르는 이들, 곧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무지와 편협의 어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고,
타인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향한 질책이며
어둠에서 빛으로, 무지에서 자각으로 초대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는 것은,
결국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자가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자를 이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라마구는 「눈먼 자들의 도시」란 소설의 후속 편의 제목을
「눈뜬 자들의 도시」라고 지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을 다른 시선에서 파악하기 위해,
독일의 극작가이자 연극 배우인 마르틴 발트샤이트(Martin Baltscheit)가 발표한
「다섯 명의 과학자와 코끼리」라는 어린이 창작동화를 소개합니다.
이 동화책은 진실 앞에서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꼬집고 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볕 좋은 날, 눈먼 다섯 명의 과학자들이 햇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때 코끼리 한 마리가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갑자기 커다란 그늘이 생겨 당황한 과학자들은,
저마다의 경험과 지식을 동원해 그것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했습니다.
먼저 코끼리 코를 만진 한 과학자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것은 소방차 호스”라고 말했습니다.
발을 만진 과학자는 “떡갈나무”라고 주장했습니다.
꼬리를 만진 과학자는 “화장실 솔”이라고 외쳤습니다.
다른 과학자들도 각각 코끼리의 등과 귀를 만지더니
“산 같다”, “양탄자 같다”하며 서로 다른 주장을 했습니다.
그들이 저마다 자신의 말이 옳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 코끼리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때 서커스 단장이 숨을 헐떡이며 과학자들에게 다가와 물었습니다.
“혹시 덩치는 산만하고 귀는 양탄자 같고, 다리는 나무줄기 같고,
꼬리는 화장실 솔 같고, 코는 소방차 호스같이 생긴, 코끼리가 지나갔나요?”
과학자들은 잠시 동작을 멈추더니 모두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아니요. 코끼리는 이리로 지나가지 않았소.”』
그들은 모두 여전히,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다섯 명의 눈먼 과학자들은 자신들을 가리고 있던
커다란 그림자가 무엇이냐, 는 진실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중심의 입장에서만 사물을 판단했고,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심지어 서커스 단장이 자신들이 찾고 있던 진실
즉 코끼리라는 정답을 알려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다와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느냐?, 라고
말씀하신 바를 제대로 알아들으셨는지요.
이 두 말씀에서 눈먼 이와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한 사람은 바로 우리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부저소정저釜底笑鼎底 가마솥이 노구솥을 보고 검다고 비웃는다.’는 속담처럼,
자신의 허물이 큰 것은 모르고 남의 작은 결점을 들춰내어 비웃는 사람이 널렸습니다.
눈먼 이는 단지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종교인 중에도, 정치인 중에도 많고 많습니다.
이렇듯 자신의 허물이나 무지의 어둠, 눈멂을 아는 게 깨달음의 시작이며 진리로 이끌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지 말고
“주님 어둠에서 빛으로,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십시오.”라고 간청합시다.
그때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6,40)라고
말씀하신 바를 알게 될 것입니다.
현대인의 이기적 십 죄종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형제에 대한 비판과 선입견을 금지하는 가르침으로
어제 복음의 마지막 부분(37-38절)과 연결된다.
‘남으로부터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31절)는
황금률의 범주 안에서 이미 언급되었다.
오늘 복음은 남을 비판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3개의 아주 짧은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주는 대로 받는다는 지극히 당연한 원리는 현세에서 행하는 만큼
내세에서 보상받을 것이라는 종말론적 동태보상률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비유를 들어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심으로써
종말론적 인과율을 지금 현재의 상황에 적용시키신다.
즉 현재의 시점에서 행하는 하나의 원인은
반드시 현세 안에서 원인에 따른 결과가 밝혀진다는 것이다.
이 관점으로 오늘 복음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는 소경이 소경의 길잡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과는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39절)
마태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소경에 국한시켜 비유하였지만
루카는 이를 보편적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둘째는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제자가 스승으로부터 배울 것을 다 배웠다 하더라도
스승을 능가할 수 없고 스승만큼만 될 수 있다는 것이다.(40절)
참으로 의미심장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제자들 중 누구도
하느님께서 이들에게 요구하는 그 이상으로 요구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자비로운 분이시라면 제자들도 그만큼이면 된다.
그러나 분에 넘치거나 인색해서는 안 된다.
그분께서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셨다면, 제자들도 그만큼까지 요구받는다.
그 이상은 아니다.
셋째는 타인의 눈 속에 있는 티와 자신의 눈 속에 들보의 비유이다.
자기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타인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내주기는커녕 제대로 볼 수도 없다.(42절)
자신이 허물을 지닌 채 타인의 허물을 論한다면 위선자가 된다.
만약 어떤 허물도 없는 자라면 그는 타인의 허물을 탓할 그런 소인배는 아닐 것이다.
우리 인간의 日常은 오늘 비유 말씀과 크게 다르다.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무자비한 사람들이 우리가 아닌가?
자신이 소경이면서도 소경의 길잡이가 되려 하고,
스승보다 더 나은 제자가 되려고 안간힘을 다 쓰며,
자신이 비록 허물을 가졌다 하더라도 남의 허물을 탓하는 우리들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처지가 용이하지 않다고 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善意의 비판과 판단,
부단한 노력과 용기는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不義에 대한 최종적인 응징은 하느님의 몫이다.
자기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남에게는 꼼꼼하게 무자비한
현대인들의 ‘이기적 10죄동’이란 글이 있어 소개하겠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하면 스캔들이고,
내가하면 창조적 권고이고, 남이하면 거짓말이고,
내가 침묵하면 그만큼 생각이 깊은 것이고, 남이 침묵하면 원래 생각이 없는 것이고,
4. 내가 화를 내면 그만큼 소신이 뚜렷한 것이고, 남이 화를 내면 그릇이 작은 것이고,
5. 내가 자리를 비우면 바쁜 만큼 유능한 것이고, 남이 자리를 비우면 또 어디서 노는 것이고,
6. 내가 통화 중이면 업무상 긴급한 것이고, 남이 통화 중이면 사적인 일이 너무 많은 것이고,
7. 내가 아프면 아픈 만큼 쉬어야 하고, 남이 아프면 기본적인 체력마저 의심스러운 것이고,
8. 내가 가족사진을 걸어놓으면 가정의 화목이 자랑스러운 것이고,
남이 가족사진을 걸어놓으면 직장에서도 집 생각만 하는 것이고,
9. 내가 회의 중이면 남은 잠깐 기다려야 하고, 남이 회의 중이면 나는 잠깐 만나야 하고,
10. 내가 약속을 어기면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것이고,
남이 약속을 어기면 사람이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