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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문둔갑 인물열전(2) 학선 류래웅 |
지난호에 이어 이번호에서는 조선 영조대왕 시절 영의정에까지 올랐던 오천(梧川) 이종성(李宗城)의 운명을 분석하여 보자.
이종성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천(梧川). 이항복(李恒福)의 5세손이며, 이시술(李時術)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세필(李世弼)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이태좌(李台佐)이며, 어머니는 홍득우(洪得禹)의 딸이다. 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는 아버지의 누이의 아들 즉 고종 사촌 형이다.
1711년(숙종 37) 진사가 되고, 1727년(영조 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3일 만에 예문관 설서가 되었다. 이듬 해 경연(經筵)의 전경(典經)으로 시독관 박문수(朴文秀)와 함께 붕당 200년의 폐를 논하였다. 그 해 경상도 암행어사가 되어 민폐를 일소했으며, 이인좌(李麟佐)의 출가한 자매가 문경에 갇혀 있음을 보고 부당함을 상소해 석방하게 하였다.
그 뒤 부수찬·헌납·수찬·교리 등을 거쳐 1729년(영조 5) 불법 수령 적발의 사명을 띠고 다시 영남어사로 파견되었고, 함경남도에 이어 북도안집어사(北道按集御史)로 다녀와 응교가 되었다. 1731년(영조 7) 관서어사로 파견되어 양덕현감 남윤관(南胤寬)을 파직시키고, 개천군수 홍태평(洪泰平), 맹산현감 이희하(李喜夏), 황주목사 이성제(李誠躋)에게 포상할 것을 상소하였다.
1733년(영조 9) 승지·대사간·이조참의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고, 이듬 해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양역(良役)의 폐를 상소하였다. 1735년(영조 11) 다시 이조참의가 되어 화폐 사용의 편리함을 논하고, 이듬 해 탕평책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 관찰사·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
1738년(영조 14) 이조참판, 1741년(영조 17) 부사직, 1742년(영조 18) 충청도관찰사, 1744년(영조 20)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어 예조판서·형조판서·대사헌·개성부유수, 1749년(영조 25)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우빈객(右賓客), 1752년(영조 28)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53년(영조 29)에 평소 세자와 마찰을 빚었던 김상로(金尙魯) 등의 간계로 영의정을 사직하였다. 1753년 판중추부사을 거쳐 1757년(영조 33) 내의원봉상시도제조(內醫院奉常寺都提調) 때 인원대비(仁元大妃: 숙종계비 김씨)의 상을 당해 의례의구조(疑禮儀九條)와 종묘 혼전(魂殿)의 예의칠조를 올려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1758년(영조 34) 영중추부사가 되어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잘 보살폈다. 장조(莊祖)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저서로는 『오천집(梧川集)』이 있다. 시호는 효강(孝剛), 뒤에 문충(文忠)으로 개시(改諡)되었다. [한국의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2) 오천 李宗城(영의정)
乾命 1692년 11월 13일 酉시 壬申년 壬子월 戊午일 辛酉시 陰遁局 大雪 中元 7局 | 癸 十 辛 三 兄 ▴ 死 福 直 天 太 門 德 符 芮 陰 | 戊 五 丙 八 [世] 景 歸 九 天 軒 門 魂 天 柱 轅 | 己 二 年 癸 一 父 支 休 遊 九 天 太 門 魂 地 心 乙 |
丙 一 壬 二 孫 生 生 螣 天 天 門 氣 蛇 英 乙 | 四 庚 九 官 咸 池 | 丁 七 戊 六 父 驚 天 玄 天 天 門 醫 武 蓬 符 | |
辛 六 乙 七 孫 開 禍 太 天 招 門 害 陰 輔 搖 | 壬 三 月 丁 十 財 支 杜 絶 六 天 攝 門 體 合 冲 提 | 乙 八 己 五 財 傷 絶 白 天 靑 門 命 虎 任 龍 |
중궁에서 관이 四⦁九로 겸왕하였다. 이런 경우 제살이나 화살(化殺)이 되면 귀명(貴命)이 되고, 제살도 화살도 안되면 천명(賤命)이 된다.
이 기문국은 연지(年支 : 坤宮)에 부모수가 득령한 채로 世를 생하니 제대로 화살(化殺)이 되었다. 즉 <관인상생官印相生>국이 된 것이다.
연지궁에 부모수가 자리를 잡으면 十에 九는 부모의 혜택이 크다. 아버지가 좌의정이었으니 그 아버지 찬스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世궁의 <戊加丙>은 <청룡회수靑龍回首>라 칭하는 대길격이다. 고로 관로가 순풍에 돛 달 듯 순조로웠다.
단, 五⦁十土 財궁에 절명과 절체가 세트로 붙고 천충 백호등의 살성이 임하여 2번이나 처를 잃는 비운을 겪었고, 3번이나 결혼을 했음에도 불고하고 자식을 못 둔 것은 시간 辛金에 死門이 있고 시지에도 자녀 생산에 도움 될 만한 것이 없었던 이유다. 9시 방향 진궁의 孫수에 생문과 생기가 있어 혹 천한 신분의 여종에게서는 자식을 두었을 것도 같은데,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서 단언은 못하겠다.
시 辛酉 | 일 戊午 | 월 壬子 | 년 壬申 | 65 己未 | 55 戊午 | 45 丁巳 | 35 丙辰 | 25 乙卯 | 15 甲寅 | 5 癸丑 |
[명리해설]
일간 戊土가 겨울에 태어나서 金과 水가 강하고 일주 土를 돕는 오행은 적어 매우 신약이다. 혹시 종재격을 의심하여 볼 정도이지만, 陽 일간이고 좌하에 양인(陽刃) 午火가 있어 종격은 면했다. 용신은 당연히 午火다.
乙卯의 대운은 다오행인 水와 용신인 火가 포태법상으로 패사(敗死)라 별 발전이 없었다. 丙辰의 운에서 다소 기복을 겪지만 발전이 시작되어 丁巳 戊午에 관직이 높았다.
태어난 생시는 자손의 유무와 길흉을 보는 위(位)인데 辛酉 상관(傷官)이 있어 자손복은 없다. 운세의 상세한 길흉은 연보의 기록을 보면서 연구하는 것이 좋겠다.
연보(年譜)
1692 壬申 11월 13일,酉시. 外家인 여주(驪州) 이호(梨湖)에서 태어나다.
甲寅운
15세 | 1706 丙戌 | 12월, 尹趾完의 손녀인 坡平尹氏와 혼인하다. |
16세 | 1707 丁亥 | 5월, 부인 尹氏의 상을 당하다. |
19세 | 1710 庚寅 | 11월, 徐文裕의 딸인 達城徐氏와 혼인하다. |
20세 | 1711 辛卯 | 2월, 진사시에 합격하다. |
乙卯운
27세 | 1718 戊戌 | 12월, 조부 文敬公 이세필(李世弼)의 상을 당하다. |
31세 | 1722 壬寅 | 7월, 모친상을 당하다. |
丙辰운
36세 | 1727 丁未 | 윤3월, 增廣 別試 丙科에 합격하다. ○ 7월, 겸설서가 되 다. ○ 12월, 弘文錄에 선발되다. |
37세 | 1728 戊申 | 1월, 都堂錄에 선발되다. ○ 4월, 암행어사로 嶺南에 가 다. ○ 7월, 홍문관 저작이 되다. ○ 9월, 復命하고, 親病 을 이유로 呈告하여 체직되다. ○ 설서, 홍문관 박사가 되 다. ○ 10월, 부수찬 겸 시강원사서, 東學敎授가 되다. ○ 12월, 부교리, 헌납, 겸사서가 되다. |
38세 | 1729 己酉 | 1월, 부수찬이 되다. ○ 2월, 겸문학, 교리, 西學敎授가 되 다. ○ 李亮臣, 尹得和의 공척으로 사직소를 올리다. ○ 4 월, 병조 좌랑, 京畿 都事에 제수되다. ○ 5월, 부교리, 겸 문학, 中學敎授에 제수되다. ○ 7월, 이조 좌랑, 교리에 제수되다. ○ 災變으로 특별히 咸鏡南道 慰諭安集御史에 차출되어 각읍의 재상을 입은 상황과 三水, 甲山의 形止 를 장계로 아뢰다. ○ 11월, 시강원 필선, 부응교가 되다. |
39세 | 1730 庚戌 | 교리, 동학교수, 응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소명을 어 겨 파직되다. ○ 3월, 北路 監賑御史가 되다. ○ 定平 都 連浦 경작에 대해 논하고, 賑政 이후 量田의 시행, 白徵의 폐단, 還穀의 감면 등을 청하다. ○ 8월, 安城 郡守가 되 다. ○ 11월, 부응교가 되어 소대에 참여하다. 朔射에 불 참하여 파직되다. |
40세 | 1731 辛亥 | 1월, 특명으로 關西御史에 차임되어 精抄軍의 減布를 청 하다. ○ 8월, 부응교가 되어 「聖學輯要」를 講하다. ○ 11월, 경기도 流民安集使로 다녀오다. |
41세 | 1732 壬子 | 5월, 교리가 되다. |
42세 | 1733 癸丑 | 6월, 형조 참의, 동부승지, 우승지가 되다. ○ 7월, 대사간 , 호조 참의가 되다. ○ 10월, 묘당의 추천으로 이조 참의 가 되어 승문원 부제조에 차임되다. ○ 11월, 대사성에 제수 되었으나 파직되다. |
43세 | 1734 甲寅 | 2월, 대사성, 우승지가 되다. ○ 4월, 부제학이 되어 「近 思錄」을 강하다. ○ 7월, 비국 당상, 승문원 부제조가 되 다. ○ 8월, 次對에서 良役의 變通에 대해 논의하다. 12 條의 時務箚를 올리다. ○ 9월, 이조 참의가 되다. 軍米 節目을 완성하다. |
44세 | 1735 乙卯 | 이전에 朴弼載를 구원하는 소차를 올린 일로 金尙魯의 반 박을 받자 상소하여 인혐하다. ○ 4월, 洪啓裕의 疏斥을 받고 呈告하다. ○ 윤4월,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전랑 尹汲과의 갈등으로 사직하다. ○ 5월, 비국 당상에 차임 되고, 병조 참지가 되다. ○ 11월, 다시 이조 참의가 되다 ○ 12월, 錢法의 변통에 대해 의논하다. 銓衡에 黨人만을 천거했다는 閔亨洙의 상소로 사직소를 올리니, 특명으로 파직되다. |
丁巳운
45세 | 1736 丙辰 | 2월, 비국 당상에 차임되다. ○ 3월, 부친 忠定公을 모시고 熙政堂에 입시하여 宣醞을 받다. 대사간이 되다. ○ 5월, 호조 참의가 되다. ○ 6월, 병조 참의가 되다. ○ 9월, 京畿 觀察使가 되다. |
46세 | 1737 丁巳 | 7월, 예문관 제학, 병조 참판에 제수되다. ○ 8월, 동지의금부사가 되다. 尹汲을 공척하는 소를 올려 삭직되다. ○ 9월, 도승지 겸 동지경연사, 전생서제조가 되다. 곧 특교로 본직에서 체직되고 비국 유사당상이 되다. ○ 윤9월, 승문원 제조, 동지의금부사, 공조 참판이 되다. |
47세 | 1738 戊午 | 1월, 대사성에 제수되었다가 곧 부제학으로 이배되다. ○ 3월, 趙迪命, 金尙迪 등과 壽親稧를 맺어 어버이를 모시고 掌樂院에서 잔치를 열다. ○ 掛書 사건으로 궐외에서 대명하다. ○ 6월, 호조 참판이 되다. ○ 8월, 이조 참판, 동지경연사가 되다. ○ 10월, 한성 우윤, 형조 참판이 되다. |
48세 | 1739 己未 | 2월, 愼妃의 복위를 논하다. 부친상을 당하다. ○ 10월, 成有烈이 장악원에서 壽親宴을 벌였던 일에 대해 탄핵하다 성 밖으로 나가 대명하다. |
50세 | 1741 辛酉 | 5월,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다. ○ 7월, 우부빈객이 되다. ○ 8월,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다. ○ 9월, 한성 좌윤, 예문 제학, 平安道 觀察使가 되다. 請對하여 大訓의 수정을 청하니, 이로 인해 金在魯의 논척을 받다. ○ 11월, 호조 참판에 제수되다. |
51세 | 1742 壬戌 | 3월, 도총부 부총관이 되다. ○ 4월, 忠淸道 觀察使가 되다. ○ 5월, 從弟 李宗白의 長子 李敬倫을 양자로 삼다. 부인 徐氏의 상을 당하다. |
52세 | 1743 癸亥 | 魯岡書院을 배알하고 鄕飮酒禮를 행하다. 明齋 尹拯의 禮書를 간행하다. ○ 7월, 부제학, 빙고 제조에 제수되다. 부인 沈氏와 혼인하다. ○ 8월, 대사헌으로 이배되다. ○ 9월, 한성좌윤 겸 우부빈객이 되다. ○ 10월, 資憲大夫로 오르고 공조 판서가 되다. 형조 판서로 이배되다. |
53세 | 1744 甲子 | 1월, 상소하여 형조 판서에서 체차된 뒤 이조 판서가 되다. ○ 2월, 동지성균관사, 종묘 제조가 되다. ○ 3월, 李天輔의 소척을 당하다. ○ 4월, 이조 판서에서 체직되고 예조 판서가 되다. ○ 6월, 續大典纂修廳과 續五禮儀增修廳 당상이 되다. ○ 8월, 正憲大夫로 오르다. |
54세 | 1745 乙丑 | 1월, 형조 판서가 되다. ○ 4월, 平安道 觀察使가 되다. ○ 8월, 도내 남북을 순시하며 山城의 형세를 살펴본 뒤 關防에 대한 장계를 올리다. |
戊午운
55세 | 1746 丙寅 | 2월, 공조 판서, 비국 당상이 되다. ○ 윤3월, 예문 제학, 교서관 제조가 되다. ○ 9월, 함경도 관찰사가 되다. |
56세 | 1747 丁卯 | 2월, 도내의 남북을 순시하고 5월에 감영으로 돌아와 關北事宜疏狀을 올리다. ○ 8월, 북방의 軍制를 개정한 절목을 장계로 올리다. |
57세 | 1748 戊辰 | 4월, 대사헌이 되자 李光佐, 趙泰億의 관작추탈을 반대하 고 李光佐와는 師弟의 의리가 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 고 長湍으로 돌아가니, 黨論이 발하여 宋德中, 尹學東등이 遠竄하기를 청하다. |
58세 | 1749 己巳 | 1월,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金善行의 공격을 받고 상 소하여 사직하다. ○ 2월, 정언 朴相德의 논척을 받고 小 朝에게 上書한 뒤 하향하다. |
59세 | 1750 庚午 | 지경연, 빈객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上書하여 사직하다. ○ 6월, 상서하여 戶錢의 시행에 반대하고, 良役變通에 대해 논하다. ○ 開城 留守가 되었다가 守禦使, 南漢 留守로 이 배되다. |
60세 | 1751 辛未 | 1월, 수찬 李惟秀의 書로 인해 상서하여 사직하다. ○윤 5월, 다시 비국 당상이 되었으나 吳瓚, 鄭漢奎 등의 논 핵을 받자 상서하고 還鄕하다. |
61세 | 1752 壬申 | 6월, 左議政으로 탁배되자 상서하여 사직하다. ○ 10월, 영의정이 되다. 洪準海의 무함을 받자 사직하고 그날로 出城하다. ○ 12월, 傳禪의 명이 내리자 극력 만류하여 세자를 보호하다. |
62세 | 1753 癸酉 | 1월, 李惟秀의 무함을 받고 江郊로 나가다. 이후 金尙魯 등이 동궁을 위해(危害)하려는 것을 막으며 龍山에 머물 다가 淑儀文氏가 翁主를 출산하자 상서하고 하향하다. 이후 47차례나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5월, 체직되어 판중추부사가 되다. |
63세 | 1754 甲戌 | 1월, 昭寧園의 추숭을 반대한 李熙運 疏의 張本人으로 몰려 放歸田里되다. ○ 3월, 판중추부사가 되다. |
64세 | 1755 乙亥 | 3월, 상소하여 무진년 李光佐를 옹호한 것에 대해 自訟 하다. 逆獄이 일어나자 삭탈관작, 문외 출송되다. ○ 4 월, 석방되어 판중추부사가 되다. ○ 5월, 正刑당한 역적 尹惠의 首級을 친람하지 말 것을 청하여, 忠州에 중도부 처되다. ○ 판중추부사에 서용되었으나 사은하지 않다. 申致雲의 供招에 이름이 거론되어 대명하다. ○ 9월, 군자 감 도제조가 되다. |
己未운
65세 | 1756 丙子 | 12월, 親鞫에 참여하다. |
66세 | 1757 丁丑 | 仁元王后가 승하하자 喪禮에 대해 헌의하다. ○ 상차하여 약원 도제조와 태상시 제조를 사직하다. |
67세 | 1758 戊寅 | 3월, 부친의 문집을 增修하다. ○ 8월, 영중추부사가 되다 . 세자가 석고대죄하자 明政殿에 입시하여 大朝와 小朝가 일체임을 진달하며 세자 보호에 힘쓰니 엄한 교지를 받고 파직되다. ○ 9월, 다시 영중추부사에 서용되다. |
68세 | 1759 己卯 | 68세 1월 12일, 會洞에서 졸하다. ○ 3월 25일, 豐德 鵲 谷에 장사 지내다. |
乾命 1692년생 11월 13일 酉시 1707년 신수국 丁亥년 辛亥월 辛酉일 丁酉시 陰遁 小雪 下元 2局 | 癸 二 丙 二 父 景 絶 太 天 天 門 命 陰 心 符 | 己 七 行年 庚 七 父 景 禍 螣 天 天 門 害 蛇 蓬 乙 | 辛 四 戊 十 兄 開 生 直 天 咸 門 氣 符 任 池 |
壬 三 乙 一 財 休 遊 六 天 靑 門 魂 合 柱 龍 | 六 反吟局 丁 八 官 ▴ 招 搖 | 乙 九 壬 五 [世] 死 絶 九 天 攝 門 體 天 冲 提 | |
戊 八 辛 六 財 驚 歸 白 天 太 門 魂 虎 芮 乙 | 庚 五 己 九 孫 傷 天 玄 天 太 門 醫 武 英 陰 | 丙 十 年 癸 四 孫 月 支 生 福 九 天 軒 門 德 地 輔 轅 |
• 16세(丁亥年)의 신수국.
현대에서는 중학생밖에 안되는 나이지만, 조선 시절에는 조혼하던 시절이라 15세에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불과 반년도 안 되어 상처를 하였다. (최연소 홀아비?)
도대체 어떤 운이길레 어린 나이에 <상처喪妻>를 하였을까?
우선 일간이 팔간궁(八艮宮) 즉 7시~8시 방향에 앉았는데, 그곳이 財궁이다. 즉 아내에 관한 사건이 일어나는 해다. 일년 신수국이 <반음국反吟局>과 <총공總空>이 되어 흉조의 해라 상처의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乾命 1692년생 11월 13일 酉시 1742년 신수국 壬戌년 壬子월 戊辰일 辛酉시 陰遁局 大雪 上元 4局 | 壬 十 戊 三 [世] 驚 福 玄 天 招 門 德 戊 英 搖 | 庚 五 壬 八 兄 死 歸 白 天 太 門 魂 虎 芮 陰 | 丁 二 庚 一 父 生 遊 六 天 靑 門 魂 合 柱 龍 |
戊 一 己 二 孫 傷 生 九 天 天 門 氣 地 輔 符 | 四 乙 九 鬼 軒 轅 | 丙 七 丁 六 父 開 天 太 天 太 門 醫 陰 心 乙 | |
己 六 癸 七 孫 休 禍 九 天 天 門 害 天 冲 乙 | 癸 三 月 辛 十 財 支 ▴ 景 絶 直 天 咸 門 體 符 任 池 | 辛 八 年 丙 五 財 支 行年 杜 絶 螣 天 攝 門 命 蛇 蓬 提 |
⦁51세(壬戌년) 신수국.
일간이 가정을 나타내는 世궁에 임하고 또한 행년까지 財에 임하니 처에 관한 사건이 발생하는 연도가 된다.
財궁에 절명과 절체가 세트로 붙어 아내의 건강과 수명에 해롭다. 원명이 상처의 국인데 신수국까지 흉을 더하니 부인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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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용상관격에 영의정 까지 올랐다고 하니 의아합니다.
특히 병진 정사대운에 인수가 극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벼슬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 의아한데,
혹시 명조가 잘못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