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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영국 BBC가 생방송으로 공개한 단 하나의 실험 때문입니다. 같은 저녁 같은 1.2km 정체 구간 구급차 통과 시간이 도쿄는 4분 30초 서울은 단 1분 40초였습니다. 교과서를 자처하던 일본이 제자라 불러온 한국에게 2.7배 차이로 완패한 겁니다. 일본 구급 시스템을 34년간 설계한 시위관은 조작이라며 반발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거듭될수록 무너진 것은 영상이에요. 일본의 자존심이었습니다. 방송 말미 그가 150개국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남긴 한 마디 일에서 한국을 따라잡을 수 없었구나. 그 충격적인 전말을 지금 공개합니다. 시작하기 전 구독과 좋아요. 그리고 대한민국 파이팅 댓글로 한국을 응원해 주세요. 영국 런던 BBC 방송센터 제일스튜디오가 발칵 지켰습니다. 한국 특집 다큐멘터리 녹화가 한창이던 저녁이었습니다. 방청석을 가득 메운 350명의 관객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몇몇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몇몇은 옆 사람의 팔을 붙잡은 채 대형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진행자는 준비했던 말을 잊지 못하고 스크린을 돌아봤고 통역 부스 안에 통역사들조차 헤드셋을 쥔 채 굳어 있었습니다. 크림 속 영상의 길이는 단 47초였습니다. 그 47초 동안 서울의 왕복 10차로를 가득 메운 500 여 대의 차량이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밀려나듯 좌우로 갈라지고 있었습니다. 편집도 없고 배경 음악도 없고 내레이션조차 없는 영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화려한 영화보다 강렬했습니다. 영상이 끝난 직후 스튜디오에는 박수도 환호도 터지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중계 카메라 한 대가 방청석이 아닌 패널석을 천천히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화면에 잡힌 것은 새하얗게 질린 60살 남짓의 동양인 남자였습니다. 남자는 펜을 쥔 오른손을 가늘게 떨고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번들거리고 있었습니다. 국제 무대에서 30년 넘게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다고 자부하던 얼굴이 그날은 종이창처럼 하얗게 굳어 있었죠. 그 남자가 바로 저였습니다. 훗날 2 47초짜리 영상은 공개 72시간 만에 조회수 8000만 회를 넘기며 전 세계를 뒤흔들게 됩니다. 하지만 먼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날 밤철을 완전히 무너뜨린 것은 그 영상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충격은 그로부터 두 시간 뒤에 찾아왔습니다. 제작진이 조용히 준비해 두었던 또 하나의 영상 그것이 스크린에 떠오르는 순간 일본 구급 행정 34년의 자부심과 아버지의 인생이 같은 자리에서 동시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지금부터 그날 밤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들려 드리려 합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구독과 좋아요를 눌러 주시면 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끝까지 전해드리는데 큰 힘이 됩니다. 저는 탁하기 노부입니다. 오래 61살이고 2년 전까지 일본 총무성 소방청에서 구급 행정 심의관으로 일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일본 구급 시스템의 설계자라고 불렀습니다. 겉으로는 과분한 호칭이라며 손을 저었지만 속으로는 당연한 평가라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 오만이 어떤 대가로 돌아왔는지 이제부터 보시게 될 겁니다. 이야기는 몇 주 전 도쿄 세 가까이 있는 제 서재로 날아든. 메일 한 통에서 시작됩니다. 발신이는 영국 BBC 다큐멘터리 제작팀이었습니다. 제목은 이랬습니다. 한국 특집 다큐멘터리 출연 요청에 건 저는 안경을 고쳐 쓰고 본문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습니다. 한국의 시민 의식과 응급 시스템을 조명하는 대형 특집을 제작 중이며 아시아 응급 행정의 최고 권위자인 제가 전문가 패널로 참여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기획안 첫 장에 적힌 문장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한국의 시민 의식은 세계의 새로운 기준인가. 저는 그 문장을 읽고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서재에 혼자 있었는데도 웃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새로운 기준이라니요. 제 눈에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습니다. 기준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적어도 그때의 저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거절할 생각으로 답장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자판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때문입니다. 내가 빠진 자리에서 이 방송이 만들어지면 세계는 검증되지 않은 찬사를 그대로 믿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저울의 반대편에 서야 한다. 그리고 그 역할에 나보다 적합한 사람은 지구상에 없다. 저는 답장의 첫 문장을 지우고 다시 썼습니다. 출연을 수락합니다. 서제문이 열리더니 아내가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여보 무슨 좋은 일 있어요? 혼자 웃는 소리가 거실까지 들려요. 런던에서 초청장이 왔어. BBC라는 군 한국 특집이라는데. 아무래도 내가 가서 정리를 좀 해줘야겠어. 아내는 잠 시절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문을 닫았습니다. 그때 아내의 표정이 어딘가 복잡했다는 것을 저는 한참 뒤에야 깨달았습니다. 일주일 뒤 담당 프로듀서와 통화가 잡혔습니다. 젊고 예의 바른 목소리에 남자였습니다. 선생님께서 균형을 잡아 주시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균형이라면 제 전문입니다. 걱정 마시 십시오. 저는 34년 동안 숫자만 보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숫자에는 국적이 없습니다. 전화를 끊고 저는 서재 책장을 올려다봤습니다. 그곳에는 제가 만든 구급 운영 매뉴얼 계정판 9 권이 나란히 꽂혀 있었습니다. 저 책들이 저의 증거였고 저희 훈장이었고 저희 무기였습니다. 그때 저는 몰랐습니다. 균형을 잡으러 떠난 사람이 저울채로 부서져 돌아오게 될 줄은 말입니다. 그날 밤 제가 왜 그렇게까지 무너졌는지 이해하시려면 먼저 제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부터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저는 27배의 소방청에 들어갔습니다. 첫 부임지에서 선배들을 따라 구급차에 동승하던 겨울 새벽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침정지 신고했습니다. 차가운 공기 사이로 무전기 잡음이 튀었고 차 안에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습니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며 선배 구급대원이 저를 돌아보고 소리쳤습니다. 탁하기 잘 들어도 침상 굉장히 멈춘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4분이야. 4분 안에 우리 손이 닿으면 살고 닿지 못하면 떠나는 거다. 그날 그 환자는 살았습니다. 현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던 가족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하지만 같은 달 다른 골목에서는 구급차가 5분 늦게 도착했고 한 사람이 떠났습니다. 겨우 1분 차이였습니다. 저는 그 1분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죠. 그래서 저는 현장이 아니라 행정을 택했습니다. 한 명을 살리는 손보다 만 명을 살리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34년 동안 저는 그 일만 했습니다. 전국 구급대의 출동 절차 무전 규칙 교차로 통과 요령 차량 배치 기준까지 제 손을 거치지 않은 규정이 없었습니다. 현장 대원들은 그 매뉴얼을 제 이름을 따서 탁하기 매뉴얼이라고 불렀습니다. 아홉 차례의 계정을 전부 제가 총괄했고 국제 응급 의료 컨퍼런스에서 기조 연설만 17번을 했습니다. 퇴임하던 해에는 총리 표창을 받았습니다. 퇴임식 날 후배들이 낡은 매뉴얼 초판본을 들고와 사인을 받겠다고 줄을 섰습니다. 저는 그날 인생에서 가장 크게 웃었습니다. 저에게 도쿄의 구급 시스템은 시계였습니다. 초침 하나 톱니 하나까지 제가 직접 조립한 시계 그리고 저는 그 시계가 세계에서 가장 정확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한국에 대한 제 생각도 바로 그 믿음 위에 서 있었습니다. 30년 전 서울시 공무원 연수단이 도쿄에 왔습니다. 저는 그들 앞에서 사흘 동안 강의를 했습니다. 그들은 성실했습니다. 제 매뉴얼을 한 줄 한 줄 받아 적었고 질문은 밤늦게까지 이어졌습니다. 저는 그들이 싫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특했습니다. 다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교과서고 그들은 학생이다. 몇 달 뒤 담내 초청을 받아 서울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 편견의 대못을 박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퇴근 시간에 서울 도심이었습니다. 매연 냄새가 코를 찌르는 교차로 한복판에 구급차 한 대가 갇혀 있었습니다. 차이렌이 울리고 있었 있었지만 앞차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경적과 사이렌이 뒤엉켜 올렸고 김이 서린 차창 너머로 구급차는 제자리에서 몇 분을 흘려보냈습니다. 저 안에 환자가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저는 호텔로 돌아와 수첩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도시는 아직 멀었 최소 30년 그날의 수첩을 저는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줄은 그대로 제약설이 되었습니다. 이후 30년 동안 저는 세계 어느 강연장에서든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슬라이드 첫 장은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첫째 한국의 응급 시스템은 일본의 이식품이다. 설계도가 우리 것인데 학생이 교사를 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둘째 네. 한국의 질서는 시민의 마음이 아니라 감시가 만든 것이다. 한국은 CCTV 밀도가 세계 최상위권인 나라다. 삿거리마다 달린 카메라와 벌금 고지서가 질서를 강제할 뿐이다. 3째 한국인의 결집은 냄비다. 빨리 끓고 빨리 식는다. 위기 때 반짝 뭉치는 것은 성숙이 아니라 흥분이다. 질서는 유행이 아니라 세월이다. 최소 3세대 100년이 필요하다. 그 백년을 걸어온 나라는 아시아에서 일본뿐이다. 이것이 제 34년의 결론이었고 저는 이 결론으로 박수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의 이야기를 이해하시려면 꼭 아셔야 할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제 딸 유희입니다. 유희는 올해 29입니다. 심장 초음파를 연구하는 연구원이고 3년 전부터 서울의 한대학병원 연구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를 닮아 고집이 셌습니다. 하필이면 왜 서울이냐고 물었을 때 네. 딸은 짧게 대답했습니다. 아빠가 모르는 서울이 있어요. 저는 그 말을 젊은 A 측이라고 웃어 넘겼습니다. 이상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딸은 유독 제 앞에서 서울 이야기를 아꼈습니다. 명절에 만나도 연구 이야기 날씨 이야기뿐이었죠. 마치 서울이라는 단어를 꺼내면 안 되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웠습니다. 3년 전에는 검사 때문에 병원에 며칠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필 저는 제네바에서 기조 연설을 앞두고 있던 때였습니다. 지금이라도 갈까 하고 물었더니 딸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별일 아니에요. 간단한 검사예요. 오지 마세요. 저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믿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무대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그 선택이 어떤 의미였는지? 저는 런던의 스튜디오에서 무릎이 꺾이고 나서야 알게 됩니다. 런던으로 떠나기 전날 밤 딸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빠 BBC 나가신다면서요. 엄마한테 들었어요. 그래 그래. 한국 특집이라더구나. 아빠가 가서 균형을 좀 잡아주고 오마 수확이 넘어가. 잠시 조용해졌습니다. 참 초쯤이었을 겁니다. 그 3초가 이상하리만큼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딸이 말했습니다. 아빠 방송에서는 직접 보지 않은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예가 아빠를 뭘로 보고 그러니 구급이라면 이 세상에서 아빠보다 잘하는 사람이 없어 알아요. 아빠가 제일 잘 아시죠. 그래서 더 무서운 거예요. 다른 몸조심히 다녀오시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저는 한동안 어두운 거실에 서서 휴대전화 화면만 내려다봤습니다. 그래서 더 무섭다니 그게 무슨 뜻인지 그때의 저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저는 한 해다에서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열두 시간의 비행 내내 저는 서류 봉투 하나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겉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한국 특집 대응 논점 봉투 안에는 30년치의 통계와 그래프 그리고 그날 서울의 교차로에서 적었던 낡은 수첩이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완벽하게 무장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몰랐습니다. 제가 씻고 가는 무기들이 견우게 될 최후의 관역이 다름 아닌 저 자신이 될 줄은 말입니다. 런던은 비었습니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제피 하늘에서 가는 비가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방송센터에 도착해 출연자. 대기실 문을 여는 순간 저는 낯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기름을 발라 뒤로 넘긴 머리 번들거리는 미소 남자는 소파의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가 저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습니다. 탁하기 선생님 아니십니까? 영광입니다. 사이토 루지라고 합니다. 사이토 류지 이름은 알고 있었습니다. 48살의 시사평론가 방송에서 한국을 조롱하는 것은으로 유명세를 얻은 인물이었죠. 그는 테이블 위에 자신의 책을 표지가 보이도록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습니다. 제목은 이랬습니다. 한국이라는 거품 오늘 우리 둘이 한 팀입니다. 제대로 균형을 잡아봅시다. 선생님 균형이라면 저 혼자로도 충분합니다만 점잖은 말씀은 학회에서나 하시고요. 방송은 전쟁입니다. 시청자들은 한국이 무너지는 그림을 원해요. 저는 그 그림을 그려주고 돈을 받는 사람이고요. 그는 낄낄 웃으며 구석에 앉아 있던 남자를 가리켰습니다. 안경을 쓴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노트북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까딱했습니다. 이쪽은 오카베 영상 감정 전문가입니다. 어떤 영상이든 30분이면 조작 흔적을 찾아냅니다. 오늘 비비씨가 무슨 영상을 틀든? 이 친구가 그 자리에서 해부해 드릴 겁니다. 오카베가 내민 명함에는 디지털 영상 감정 컨설턴트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명함 땀을 받아들며 어딘가 개운치 않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사실을 검증하겠다는 사람이 결론을 먼저 정해 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녹화 시작 전 복도 정수기 앞에서 물을 마시고 있을 때였습니다. 기둥 뒤에서 낮게 깔린 사이토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국장님 염려 놓으십시오. 한국 특집 완전히 웃음거리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광고 편성거는 약속하신 대로 부탁드립니다. 명치가 서늘해졌습니다. 그의 뒤에는 방송사 편성국장이 있었고 이 무대는 그에게 거래였던 겁니다. 저는 속으로 선을 그었습니다.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 나는 혐오를 파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저 자신을 다독였습니다. 하지만 두 시간 뒤 카메라 앞에서 저는 깨닫게 됩니다. 그와 저 사이의 거리가 제 생각만큼 멀지 않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350명의 방청객 이렇게 만들어 내는 열기가 후기 쳐 왔습니다. 6대의 카메라. 머리 위로 쏟아지는 조명 각국에서 온 얼굴들 귀에 꽂은 통역 수신기에서 잡음이 한번 지직거리고는 이내 잠잠해졌습니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었지만. 저는 그것을 긴장이 아니라 사냥을 앞둔 설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대 중앙에는 은발의 진행자가 서 있었습니다. 올리버 그랜트 방송 경력 30년에 베테랑이었습니다. 그가 카메라를 향해 첫 마디를 던졌습니다. 오늘 밤 우리는 한 나라의 도로에서 출발해. 그 나라의 신장까지 들어가 보려 합니다. 이 방송은 150개국에 방영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는 아시아에서 두 분의 전문가를 모셨습니다. 첫 질문은 저에게 왔습니다. 한국의 응급 시스템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물음이었죠. 저는 준비해 온 문장을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꺼냈습니다. 한국의 구급 시스템은 훌륭합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 시스템의 설계도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말씀드려야겠군요. 30년 전 서울의 공무원들은 도쿄에 와서 우리의 매뉴얼을 배워 갔습니다. 학생이 성실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학생이 교사를 넘어서는 일은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방청석 어딘가에서 낮은 술렁임이 이렇습니다. 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질서는 유행이 아니라 세월입니다. 최소 3세대 100년이 걸리는 일이지요. 일본은 그 세월을 걸어왔습니다. 한국은 아직 걷는 중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한국의 도로가 그나마 굴러가는 이유는 시민의 마음이 아니라 사거리마다 달린 카메라와 벌금 고지서 때문입니다. 감시가 만든 질서를 시민 의식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앞줄에 앉아 있던 젊은 동양인 여성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몇몇 방청객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만족스러웠습니다. 불편한 진실일수록 반 빨리 따르는 법이니까요. 그때 사이토가 기다렸다는 듯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타카기 선생은 학자시라 참 점상케 말씀하시는군요. 저는 장사꾼이라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한국의 질서요? 카메라가 켜지면 시작되고 카메라가 꺼지면 끝나는 연극입니다. 남의 것을 베껴서 큰 나라가 이제는 시민의 시까지 베끼는 척을 하는 겁니다. 오늘 BBC가 준비했다는 영상도 보나. 만화 세금으로 만든 관광 홍보물이겠지요. 여러분 박수 칠 준비들 되셨습니까? 그는 방청석을 향해 손가락질까지 해 가며 웃었습니다. 곳곳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습니다. 뒷줄의 한 노신사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가 옆 사람의 만류에 도로 앉았습니다. 저는 사이토에 천박함이 거슬렸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순간까지도 그의 결론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진행자 그랜트가 손을 들어 장래를 진정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두 분의 확신 잘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편성표에 없는 영상을 하나 보여 드리겠습니다. 객석이 용성그렇습니다. 부조 정실 유리창 너머로 제작진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고 무대 옆의 진행 요원은 진행표를 앞뒤로 넘기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대본에 없는 순서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영상은 저희 촬영팀이 계획하고 찍은 것이 아닙니다. 설 전 서울 상공 150 m에서 도시의 야경을 촬영하던 드론에 우연히 걸려든 장면입니다. 이 47초를 확인한 우리 촬영 감독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25년 방송 인생에서 이런 장면은 처음 본다고요. 차이토가 오카베에게 눈짓을 보냈습니다. 오카베는 노트북을 열고 손가락을 풀었습니다. 조작의 증거를 찾아낼 준비를 하는 것이었죠. 저는 팔짱을 낀 채 등받이에 몸을 기댔습니다. 무엇이 나오든 반박할 준비는 끝나 있었습니다. 30년치의 숫자가 제 서류 가방 안에 있었으니까요. 조명이 어두워졌습니다. 크림 위로 서울의 전역이 떠올랐습니다. 퇴근길에 왕복 10차로 붉은 미등이 강물처럼 이어진 도로였습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대도시의 정체 풍경이었죠. 저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습니다. 이런 것을 보여주려고 그 요란을 떨었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47초 뒤 350명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저는 그 47초를 아마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제 34년이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이 정확히 그 47초였으니까요. 크린 오른쪽 아래의 작은 자막이 떠 있었습니다. 서울 저녁 7시 무렵 드론은 도시의 야경을 찍고 있었습니다. 화면 가득 붉은 미등의 강물이 흐르고 있었죠. 왕복 10차로가 완전히 잠긴 퇴근길 정체였습니다. 저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세계 어느 대도시에나 있는 풍경이라고 말입니다. 그때 스피커에서 희미한 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차이렌이었습니다. 화면 아래쪽 끝에 구급차 한 대가 나타났습니다. 500 여 대의 차량이 벽처럼 들어찬 도로 한복판이었습니다. 저는 30년 전 서울의 교차로를 떠올렸습니다. 저 차는 갇힐 것이다. 제 경험이 제약설이 제 수첩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제 눈을 의심하게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구급차와 가장 가까운 차의 브레이크 등이 오른쪽으로 꺾였습니다. 그러자 그 앞에 차가 또 그 앞에 차가 마치 도미노처럼 연이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왼쪽 차선의 차들은 왼쪽으로 오른쪽 차선의 차들은 오른쪽으로 붉은 브레이크 등이 파도처럼 번져 나갔죠. 도로 한가운데에는 굳게 뻗은 빈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거대한 지퍼를 여는 것 같았습니다. 구급차는 속도를 거의 줄이지 않고 그 길을 통과했습니다. 차일은 소리가 화면 위쪽으로 멀어지자 갈라졌던 차들은 물이 닫히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입니다. 화면 구석의 시계가 멈췄습니다. 47초 500여 대가 길을 열고 한 생명을 통과시키고 다시 닫는데 걸린 시간의 전부였습니다. 스튜디오에는 몇 초간 완전한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방청석 어딘가에서 박수 소리가 한번 울렸습니다. 두 번 새 세 번 그 소리는 순식간에 번져나갔고 350명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제일 스튜디오가 발칵 뒤집힌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손에 쥐고 있던 팬이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침장이 이상한 박자로 뛰고 있었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 땀이 흘렀습니다.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문장만 맴돌았습니다. 어 이건 뭐지? 하지만 저는 34년을 숫자와 싸워 온 사람입니다. 충격은 충격이고 검증은 검증 입니다. 저는 떨어진 팬을 주어들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때 옆자리에 사이토가 벌떡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박수 치기 전에 물어봐야 할 게 있지 않습니까? 이 영상 누가 찍었고 누가 편집했습니까? 요즘 기술이면 이런 영상은 하룻밤에 만듭니다. 방청석의 박 박수가 잦아들었습니다. 사이토는 기다렸다는 듯 오카베를 무대 위로 불러 올렸습니다. 오카베는 노트북을 안고 종종걸음으로 올라와 진행자 옆에 보조 화면에 영상을 띄웠습니다. 영상 감정 전문가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확인해야 할 것은 세 가지입니다. 프레임 보관의 흔적 그림자 방향의 일치 여부 그리고 원본 존재 여부입니다. 원본 없이는 어떤 영상도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 순간 안 됐습니다. 그렇지 조작이라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저는 팔짱을 끼고 오카베이 분석을 지켜봤습니다. 입니다. 하지만 진행자 그랜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표정이었죠. 좋은 지적입니다. 저희도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으니까요. 단스 씨 나와 주시죠. 무대 옆에서 백발이 성성한 남자가 걸어 나왔습니다. BBC 영상 기술 책임자 그레이엄 반스 방송 기술 경력 31년의 배테랑이었습니다. 그는 큼직한 서류 봉투와 검은 메모리 카드 하나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날 드론이 촬영한 무편집 원본입니다. 총 4시간 분량이고 문제의 장면은 2시간 40분 지점에 있습니다. 촬영 직후 카드는 봉인되었고 외부 검증 기관 두 곳에 감정을 의뢰했습니다. 드론의 비행 기록 위성 시각 동기화 기록 그리고 같은 시각 서울의 교통 방송 녹음까지 전부 여기 있습니다. 차이렌이 울린 시각과 교통 방송이 해당 구간 정체를 언급한 시각이 초단위로 일치합니다. 그랜트가 오카베를 물어봤습니다. 오카베 씨 원본을 드리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직접 확인해 주시죠? 시간은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스튜디오의 모든 시선이 오카베의 노트북으로 쏠렸습니다. 오카베는 15분 동안 말없이 화면을 들여다봤습니다. 확대하고 되감고 프레임을 한 장씩 넘겼습니다. 저는 그 15분 동안 목이 타들어갔습니다. 조작이어야 했습니다. 조작이 아니라면 제 30년이 흔들리기 시작하니까요. 이윽고 오카베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안경을 고쳐쓰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차이토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습니다. 원본입니다. 조작의 흔적이 없습니다. 스튜디오가 다시 술렁했습니다. 차이토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습니다. 이봐 오카베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오카베는 노트북을 조용히 덮으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영상을 감정하는 사람이지.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영상은 진짜입니다. 방청석에서 이번에는 웃음 섞인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차이토가 데려온 카리 사이토를 뵌 셈이었으니까요. 차이토는 이를 갈며 자리로 돌아갔고 저는 그 광경을 보며 이상한 한기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직 카드가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손을 들고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훌륭한 영상입니다. 인정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랜트 씨 저는 34년 동안 이 일을 해온 사람으로서 한 가지를 압니다. 한 번의 아름다운 장면은 우연입니다. 우연은 감동을 줄 수는 있어도 시스템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장면을 다른 날 다른 도시에서 다시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저는 그 질문이 결정타라고 생각했습니다. 재현할 수 없다면 우연이고 우연이라면 제약설은 무사하니까요. 그랜트가 저를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다시 금요한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타카기 선생님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희 제작진도 처음에는 선생님과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랜트는 무대를 천천히 걸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이건 우연이다. 운이 좋았던 47초다. 그래서 저희는 촬영팀을 다시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서울이 아니라 부산과 대전과 광주로요. 2주 동안 실제 구급 출동 현장을 동행 취재했습니다. 크린의 새로운 영상들이 차례로 떠올랐습니다. 첫 번째는 부산이었습니다. 바닷가를 낀 왕복 8차로 서울과 똑같은 붉은 파도가 일었고 길이 열렸습니다. 화면 구석의 시계는 52초를 가리켰습니다. 두 번째는 대전이었습니다. 41초 세 번째는 광주였습니다. 49초 도시가 바뀌어도 유일이 바뀌어도 날씨가 바뀌어도 장면은 같았습니다. 차이렌이 울리면 브레이크 등이 파도를 만들고 파도는 길이 되었습니다. 방청석에서는 영상이 하나 끝날 때마다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저는 메모지에 세 개의 숫자를 적었습니다. 52 40일 49점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지만 저는 아직 무너질 수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두 번째 카드가 있었으니까요. 그랜트 씨 훌륭합니다. 재현성까지 확인하셨군요. 하지만 저는 오늘 방송 첫머리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한국은 CCTV 밀도가 세계 최상위권인 나라입니다. 사거리마다 카메라가 있고 신고의 비 있고 벌금이 있습니다. 지켜보는 눈이 있으니 움직이는 겁니다. 저 운전자들이 양보한 것은 마음이 아니라 계산일 수 있습니다. 방청석 일부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그 순간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시 사회라는 프레임은 제 강연에서 30년 동안 단 한 번도 반박당한 적이 없는 논리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랜트는 이번 이번에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그 반박이 역시 저희가 예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 영상을 준비했습니다. 조명이 다시 어두워졌습니다. 트린에 떠오른 것은 화려한 도심이 아니었습니다. 지방 소도시에 한적한 사거리 가로 등 몇 개가 전부인 어두운 밤거리였습니다. 화면 구석의 시각은 새벽 2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사거리에는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습니다. 신호등은 빨간 불이었습니다. 좌우를 아무리 둘러봐도 오가는 차는 없었습니다.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차는 텅 빈 사거리에서 신호가 바뀔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새벽에 왕복 사찰로에 드문드문 있던 차들이 낮에 서울과 똑같이 약속이나 한듯 하길로 비켜섰습니다. 지켜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어둠과 사이렌과 낯선 이의 생명뿐이었습니다. 원장님 정말 임플란트가. 20만원대에 가능한 게 맞나요? 네 맞습니다. 불필요한 추가금 없이 20만원대에 정품 맞춤형 임플란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가격이 낮으면 경험이 적은 원장님이 치료하시는 건 아닌가요? 아닙니다. 저희는 원장 전담 치료는 물론 당일 심리까지 가능합니다. 비용도 분납이 가능해서 초기 부담을 줄였습니다. 치료 후에 관리받을 때 또 추가 비용 들지는 않나요? 저희는 치료 결과에 자신 있기 때문에 시술 후 10년간 무상 AS 제도를 운영하며 끝까지 책임집니다. 전화 상담 무료로 진행하고 계시는데 신청은 어떻게 하나요? 아래 링크를 클릭해서 성함과 연락처만 남겨 주시면 상담 전화 드리고 있습니다. 꼭 치료 안 받으셔도 되니 비교 견적이라도 꼭 안내받아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과잉 진료에 당하지 않습니다. 타카기 선생님 감시가 만든 질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쭙겠습니다. 새벽 2시 17분 아무도 없는 저 사거리에서. 저 운전자는 대체 누구의 눈을 의식하고 있는 겁니까? 저는 입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30년 동안 단 한 번도 막힌 적 없던 제 혀가 350명 앞에서 처음으로 굳어버린 겁니다.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방청석의 웅성거림이 커졌습니다. 그때 방청석 압출의 전문가석에서 한 남자가 손을 들었습니다. 각진 안경에 회색 재킷을 입은 50대 남자였습니다.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뮌헨 공과대학에서 온 마르쿠스 베버라고 합니다. 27년째 도시 교통 흐름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랜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배번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저는 오늘 중립적인 검증자로 초청받았습니다. 그래서 냉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지난 17년 동안 전 세계 40개가 넘는 도시의 교통 데이터를 시뮬레이션해 왔습니다. 제 모델에는 변하지 않는 상수가 하나 있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입니다. 정체 상황에서 운전자는 자기 손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이것은 국적과 무관한 인간이라는 종의 기본값입니다. 그는 스크린을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방금 그 영상들은 제 모델로 재현이 되지 않습니다. 500대가 사전 신호도 없이 평균 일 분 안에 협력 대응을 만드는 것은 제 27년 칠 데이터 안에 존재하지 않는 현상입니다. 솔직히 고백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학자로서 흥분되고 동시에 조금 두렵습니다. 제가 세운 상수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니까요. 방청석에서 낮은 탄성이 흘렀습니다. 저는 배벌을 알고 있었습니다. 국제 학회에서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지독하리만치 깐깐한 데이터주의자였습니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두렵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저는 처음 봤습니다. 입니다. 사이토가 코웃음을 치며 끼어들었습니다. 새벽에 차가 몇 대나 있다고 호들갑입니까? 표본이 작으면 통계가 아니라 일화일 뿐이지요. 방 청석에 공기가 싸늘해졌습니다. 뒷줄에서 누군가 들으라는 듯 말했습니다. 그럼 낮에 500대는 표본이 크지 않느냐고요? 웃음이 터졌고 사이토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저는 그 소란 속에서 혼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대단한데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 문장이 자꾸 머릿속을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직 마지막 보로가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심호흡을 하고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배버 박사의 말씀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좋습니다. 한국의 도로가 훌륭하다는 것 오늘 처음으로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훌륭함에도 등급이 있는 법입니다. 세계에는 이미 완성된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도쿄입니다. 도쿄의 구급 시스템은 제가 34년 동안 초침까지 조립한 시계입니다. 같은 조건에서 비교한다면 저는 도쿄가 이긴다는데 제 이름을 걸겠습니다. 저는 그 말을 뱉는 순간까지도 몰랐습니다. 제가 방금 제 손으로 제 무덤의 첫 삽을 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랜트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름을 걸겠다고 하셨습니까? 마침 잘 됐군요. 선생님 사실 저희는 그 실험을 이미 마쳤습니다. 침상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이미 마쳤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저희 도쿄 지국과 서울 지구기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같은 요일 같은 저녁 6시 30분 양쪽 모두 왕복 8차로 길이 1.2km의 정체 구간 양쪽 모두 실제 응급 출동에 동행했습니다. 연출은 없습니다. 카메라는 그저 뒤따라갔을 뿐입니다. 저는 마른 침을 삼켰습니다. 조건은 공정했습니다. 아니 공정하다 못해 제가 설계했어도 저렇게 있을 조건이었습니다. 도망칠 곳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먼저 도쿄입니다. 크린에 익숙한 거리가 떠올랐습니다. 저녁에 도쿄 제 인생이 녹아 있는 도시 구급차의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도쿄의 운전자들은 훌륭했습니다. 그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규정대로 움직였습니다. 왼쪽 차선은 왼쪽으로 붙으려 했고 오른쪽 차선은 오른쪽으로 붙으려 했습니다. 제가 만든 매뉴얼 17 페이지에 적힌 그대로였습니다. 하지만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앞차가 움직일 공간을 뒤차가 내주지 못했고 뒷차가 내줄 공간을 그 뒤차가 막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비키려 했지만 모두가 반박자씩 늦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사이 구급차는 차들의 바다에 갇힌 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전진했습니다. 차이렌 소리가 비명처럼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화면 구석에 시계가 멈췄을 때 숫자는 이름 그렇습니다. 4분 30초 1.2km를 지나는 데 4분 30초 저는 그 숫자를 보는 순간 신입 시절 선배가 외치던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습니다. 심장이 멈춘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사 분이라던 그 목소리가 말입니다. 다음은 서울입니다. 두 번째 영상이 시작됐습니다. 똑같은 저녁 똑같은 정책 똑같은 사일은 하지만 첫 브레이크 등이 꺾이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파도는 사이렌보다 빨리 번졌습니다. 구급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길이 먼저 열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도로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심장에서 보낸 신호에 온몸의 혈관이 일제히 반응하는 것 같았습니다. 1분 40초 같은 1.2km였습니다. 도쿄의 1/3 수준 2.7배의 차이였습니다. 스튜디오는 조용했습니다. 아까와 같은 환호성은 없었습니다. 대신 훨씬 무거운 것이 공기 중에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숫자 앞에서 이름을 걸겠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말입니다. 저는 물컵을 집어들었습니다. 손이 떨려서 물이 조금 흘렀습니다. 귀에 꽂은 통역 수신기의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머릿속에서는 변명이 될 만한 것들이 필사적으로 떠올랐다가 하나씩 무너졌습니다. 도로 폭이 달랐나? 아니 같은 팔차로였다. 차량 수가 달랐나? 화면 속 도쿄가 오히려 조금 한산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다른가? 그때 사이토가 소리쳤습니다. 조작입니다. 도쿄 영상을 일부러 느리게 편집한 게 분명합니다. 아니면 도쿄에서 제일 막히는 최악의 구간만 골랐거나 그랜트는 대답 대신 화면에 자료 한 장을 띄웠습니다. 양쪽 구간에 도로 채워 시간대별 교통량 차로 수 신호 체계 그리고 도쿄 구간을 추천한 것이 다름 아닌 일본 단지 코디네이터였다는 기록까지. 차이토는 자료를 노려보다가 입을 다물었습니다. 오카베는 이번에는 아예 노트북을 열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그 순간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화 대신 다른 것이 올라왔습니다. 그것은 질문이었습니다. 34년 동안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던져본 적 없는 질문 도쿄의 운전자들은 제 매뉴얼대로 움직였습니다. 완벽하게요. 그런데도 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서울의 저 길은 대체 무엇이 연 것인가? 매뉴얼은 길을 여는 법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장을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그 문장이 처음으로 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바로 그때였습니다. 저는 그 문장이 무서워서 황급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바로 그때 방청석 가운데쯤에서 한 남자가 일어났습니다. 검은 뿔테 안경의 동향인이었습니다. 발언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베이징에서 온디나우라고 합니다. 국제부 기자로 12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스튜디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습니다. 사이토에 눈이 반짝였습니다. 아마 지원군이 왔다고 생각했겠지요. 솔직히 말하면 저도 비슷한 기대를 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방청석에 한국 특집을 비판적으로 취재할 생각으로 앉았습니다. 제 노트에는 반박 질문이 12개나 적혀 있습니다. 그는 손에 든 수첩을 들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기자 생활 12년 동안 지켜온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눈으로 본 것을 부정하는 기사는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베이징에서 태어나 상하이에서 일했고 세계 30개 도시를 취재했습니다. 단언합니다. 저는 저 장면을 제 조국에서도 제가 가본 그 어떤 도시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방청석이 크게 술렁였습니다. 차이토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며 외쳤습니다. 당신 중국인이 왜 한국 편을 듭니까? 리나오는 사이토를 잠시 바라보더니 아주 답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한국 편이 아닙니다. 사실의 편입니다.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사이토 씨 당신의 직업병 같군요. 스튜디오가 웃음과 박수로 뒤덮였습니다. 사이토는 뭐라고 더 외치려 했지만 야유에 묻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웃지 못했습니다. 경쟁국의 기자까지 인정하는 광경 앞에서 제 안에 무언가가 소리를 내며 금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보다 낫다고 정말로 저는 그 문장을 참아 끝까지 발음하지 못한 채 남은 마지막 카드를 더듬고 있었습니다. 그래 도로는 도로일 뿐이다. 운전 문화가 훌륭하다고 해서 그것이 시민 의식 전체는 아니다. 위기의 순간 진짜 사람의 밑바닥이 드러나는 순간은 따로 있다. 저는 그 카드가 저를 지켜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 카드가 저를 완전히 끝장낼 줄은 모르고 말입니다. 저는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프로페에 힘을 주어야 했습니다. 인정합니다. 한국의 도로는 제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오늘 제가 배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랜트 씨 운전은 결국 습관입니다. 습관과 시민 의식은 다릅니다. 진짜 시민 의식은 도로 위가 아니라 예고 없는 위기의 순간에 드러납니다.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졌을 때 내 재산이 걸렸을 때 내 피와 시간이 필요할 때 그때도 한국인들이 저 47초처럼 움직인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그날 밤 제가 던진 마지막 창이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랜트는 그 창마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타카기 선생님 오늘 밤 선생님은 계속 저희가 준비한 질문을 대신 던져 주고 계십니다. 좋습니다. 위기의 순간을 보여 드리죠. 세계의 영상입니다. 첫 번째 영상은 지하철역 CCTV였습니다 출근 인파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아침이었습니다. 화면 한가운데 홍대에서 커다란 배낭을 맨 외국인 관광객이 갑자기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저는 반사적으로 시계를 봤습니다. 직업병이었습니다. 침정지라면 지금부터 4분입니다. 쓰러진 지 삼 초 만에 첫 번째 시민이 달려왔습니다. 넥타이를 맨 젊은 남자였습니다. 그는 어깨를 두드려 의식을 확인하더니 곧바로 가슴 압박을 시작했습니다. 5초 뒤 두 번째 시민이 무릎을 꿇으며 전화를 귀에 댔고 세 번째 시민은 어딘가를 향해 전력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네 번째 시민은 몰려드는 인파를 양팔로 막아 공간을 확보했고 다섯 번째 시민은 쓰러진 이의 일행으로 보이는 여성을 붙잡고 무언가를 계속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통역 자막이 떴습니다. 괜찮아요. 지금 구급차 오고 있어요. 이 나라 사람들은 이런 거 정말 잘해요. 그리고 여섯 번째 시민 아까 뛰어갔던 세 번째 시민이 자동심장 충격기를 안고 돌아왔습니다. 쓰러져 진지 정확히 4분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기계 음성이 울리고 충격이 가해지고 잠시 뒤 남자의 손가락이 움직였습니다. 역사 전체에 박수가 터지는 것으로 영상은 끝났습니다. 그랜트가 말했습니다 이 여섯 명은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차전에 훈련을 함께 받은 적도 없습니다. 사고 후 저희가 6명을 전부 찾아내 인터뷰했는데 6명 모두 같은 말을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걸 했을 뿐이라고요? 방청석 전문가석에서 한 여성이 손을 들었습니다. 짧은 금발에 흰 재킷 그랜트가 소개했습니다. 미국 존스 오킨스 대학병원의 응급의학 교수 레이첼 콜먼이었습니다. 저는 응급실에서 21년을 보냈습니다. 방금 영상에서 여러분이 보신 것은 기적이 아니라 완벽에 가까운 초기 대응 체계입니다. 역할 분담 압박의 리듬 충격기 도착 시간 훈련된 의료진 팀도 저 수준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지나가던 시민입니다. 그녀는 태블릿을 들어 숫자를 보여줬습니다. 데이터로 말씀드리죠. 한국의 일반 시민 심폐소생술 시행률은 지난 10여 년 사이 세 배 넘게 뛰었고 서울의 병원 박 신정지 생존율은 세계 주요 도시 가운데 최상위권입니다. 이것은 우연히 착한 사람 여섯 명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회 전체가 조용히 오랫동안 준비해 왔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영상이 시작됐습니다. 좁은 골목 한 밤에 주택가 화재였습니다. 골목 양쪽에 불법 주차된 차들이 소방차의 진입로를 막고 있었습니다. 저는 숨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 소방이 공통으로 겪는 악몽 같은 상황입니다. 도쿄에서도 이 문제로 골든타임을 놓친 사례를 저는 수없이 보고받았습니다. 한국의 소방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차체로 주차 차량들을 그대로 밀어붙이며 전진했습니다. 차이드 미러가 부러지고 범퍼가 찌그러지고 경보음이 밤거리에 올렸습니다. 그렇게 12대의 차를 밀어내고 소방차는 화재 현장에 도착했고 2층에서 노부부가 구조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다음입니다. 그랜트의 목소리가 낮아졌습니다. 파손된 차량은 정확히 12 되었습니다. 저희 취재진은 12명의 차주를 전원 찾아가 물었습니다. 소방서에 배상을 청구하실 겁니까? 청구 건수가 몇 건이었는지 아십니까? 그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습니다. 영건입니다.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몇몇 차주는 찌그러진 자기 차 사진을 올리며 이렇게 썼습니다. 제 차가 도움이 됐다니 영광입니다. 사람부터 살려야죠. 사이토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그 차 주인들이 전부 바보란 말입니까? 자기 재산이 부서졌는데 그 순간 방청석에서 그날 밤 가장 큰 야유가 터져 나왔습니다. 앞줄에 백발 노부인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사이토를 향해 뚜박뚜박 말했습니다. 젊은이 차는 고치면 되지만 사람은 고치지 못한다오. 그걸 모르는 쪽이 바보 아니겠소 박수가 터졌습니다. 차이톤은 얼굴이 벌개진 채 주저 앉았습니다. 세 번째 영상은 어느 병원의 새벽이었습니다. 휠계혈액형의 임산부가 응급 수술을 앞두고 있었고 병원의 혈액이 바닥난 상황이었습니다. 병원이 새벽 4시에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화면은 40분 뒤에 병원 전문을 비쳤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잠옷 위에 외투만 걸친 사람 택시에서 뛰어내리는 사람 오토바이를 세워 두고 헬멧도 벗지 않은 채 뛰어오는 사람 새벽 4시 40분 병원 앞에 늘어선 줄은 217명이었습니다. 간호사의 인터뷰 자막이 떴습니다. 필요한 것은 몇 명뿐이었는데 217명이 오셨어요. 돌아가시라고 말씀드리는데 저희가 다 울었습니다. 산모와 아기는 모두 무사했습니다. 영상이 끝났을 때 저는 제 상태를 정확히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했습니다. 세계 최고 아니야. 그 문장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이번에는 지우지 못했습니다. 목구멍 안 이쪽이 뜨거웠고 눈시울이 이상하게 무거웠습니다. 34년 만에 처음 겪는 증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아주 뜬금없이 서울에 있는 딸의 얼굴이 스쳤습니다. 유희도 저런 새벽의 병은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그 생각이 어떤 문에 손잡이였는지 그 문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때의 저는 까맣게 몰랐습니다. 객석의 열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저는 천천히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반박을 하려고 잡은 마이크인데 입에서 나온 것은 반박이 아니라 반쯤은 절규에 가까운 질문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많은 것을 봤습니다. 도로를 받고 지하철역을 받고 새벽의 병원 앞을 봤습니다. 좋습니다 전부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목소리가 흔들리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습니다. 이것은 대체 어디서 온 겁니까? 뿌리 없이 잘하는 나무는 없습니다. 저는 평생 말해 왔습니다. 질서에는 100년이 필요하다고 3세대의 세월이 필요하다고. 그런데 그 세월 없이 이런 것이 가능하다면 그렇다면 제 34년은 제약설은 대체 무엇이었단 말입니까? 스튜디오가 조용해졌습니다. 그랜트는 한동안 저를 바라보다가 처음으로 미소 없이 입을 열었습니다. 선생님 그 질문에 답하려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크린의 흑백 사진이 떠올랐습니다. 폐허였습니다. 무너진 건물 끊어진 다리 제더미 위에 맨발로 서 있는 아이들 70여 년 전 전쟁 직후에 한국이었습니다. 당시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 인당 소득은 세계 최하위권이었고 도시의 대부분이 잿더미였습니다. 선생님 30년 전 도쿄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던 서울의 공무원들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들이 도쿄에서 배워간 것은 매뉴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선생님이 가르치지 않은 것 어쩌면 가르칠 수 없는 것이었죠. 화면이 바뀌었습니다. 낡은 흑백 필름 속에서 수십 명의 농민들이 한 집에 지붕을 함께 얹고 있었습니다. 한국에는 품앗이라는 오래된 문화가 있습니다. 오늘 내가 너희 눈에 물을 대면 내일 너는 나의 지붕을 고친다. 돈이 없던 시절 이들은 서로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며 살아남았습니다. 계약서도 없고 이자도 없습니다. 장부는 단 하나 서로의 기억뿐이었죠.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이 나라 사람들은 책이 아니라 굶주림으로 배웠습니다. 그랜트는 저를 바라봤습니다. 선생님의 학설은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질서에는 정말 100년이 필요한지도 모르죠. 다만 선생님은 세월을 달력으로만 세셨던 겁니다. 어떤 나라는 100년치의 세월을 전쟁과 가난 속에서 압축해서. 저 47초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손을 잡아야 했던 세월이 도로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뿐입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무릎 위에 올려둔 서류 봉투가 갑자기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30년치의 통계와 그래프가 든 봉투였는데 말입니다. 그랜트가 화면을 전환했습니다. 참고로 이 특집의 예고편과 함께 공개된 그 47초 영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퍼지고 있습니다. 공개 이른 2시간 만에 조회수 8000만 회를 넘었고 댓글이 40만 개 달렸습니다. 몇 개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뉴욕의 한 소방관은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20년 차 소방관이다. 이 영상을 우리 소방서 교육 자료로 쓰게 해 달라. 상파울루에 간호사는 이렇게 썼습니다. 영상을 보고 울었다. 저 도로 위에 모든 사람이 우리 동료다. 방청석 여기저기서 훌쩍 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로 그때부터 였습니다. 다들 단단히 숙고 계신 겁니다. 사이토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고 넥타이는 반쯤 풀려 있었습니다. 편집에 마법입니다. 감성팔이라고요. 저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제가 책으로 다 폭로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원래가 그가 한 민족 전체를 모욕하는 단어를 내뱉으려는 순간 방청석에서 그날 밤 가장 거대한 야유가 터져 나왔고 그랜트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습니다. 차이토 씨 여기는 BBC입니다 발언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제 손이 마이크를 잡고 있었습니다. 사이토 씨 그만하시죠? 스튜디오의 모든 시선이 저에게 쏠렸습니다. 사이토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저를 돌아봤습니다. 탁하기. 선생님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겁니까? 우리는 같은 일본인 아닙니까? 같은 일본인이니까 하는 말입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입니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이 말만은 서서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오늘 밤 제 34년 학설이 눈앞에서 흔들리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학자에게 그것이 어떤 고통인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는 증거와 싸웠습니다. 당신은 아닙니다. 당신은 증거가 아니라 사람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파는 것은 학설이 아니라 혐오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과 같은 패널석에 앉아 있는 것이 오늘 처음으로 부끄럽습니다. 한순간에 정적 뒤에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날 밤 처음으로 저를 향한 박수였습니다. 앞줄에 그 젊은 동향인 여성이 녹화 초반 제 발언에 얼굴이 굳어 있던 바로 그 사람이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부끄러움과 후련함이 뒤섞인 평생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습니다. 차이톤은 주머니 속에서 계속 울리는 휴대전화를 꺼내 보더니 낯빛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그대로 자리에 무너지듯 앉아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장래가 가라앉자 그랜트가 제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습니다. 타카기 선생님 아까 물으셨죠? 네 34년은 대체 무엇이었느냐고?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상하리만치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 사실 저희 제작진은 이 특집을 준비하면서 시청자들이 보내온 블랙박스 영상 수백 개를 검토했습니다. 그 중에 저희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영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3년 전 서울의 어느 저녁에 찍힌 영상입니다. 3년 전 서울 그 두 단어가 나란히 놓이는 순간 심장의 이유도 모른 채 빠르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 영상은 선생님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조명이 꺼졌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도 몰랐습니다. 끄린에 떠오를 것이 무엇인지 3년 전 그 밤 제가 제네바의 무대 위에서 박수를 받고 있다. 바로 그 시각 서울의 도로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말입니다. 크린의 거친 화질의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화면 구석에 작은 자막이 붙어 있었습니다. 시청자 제보 차량 블랙박스 3년 전 서울 저녁의 정체 구간이었습니다. 블랙박스 차량은 왕복 팔 차로의 한가운데에 갇혀 있었고 와이퍼가 느리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비가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잠시 뒤 화면 뒤쪽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 몇 번이나 봤던 그 장면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브레이크 등의 파도 갈라지는 차들 빗길 위에 곧게 열리는 길 저는 솔직히 그 순간까지도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또 하나의 훌륭한 사례 객관이 했습니다. 오늘 밤 저는 이미 충분히 두들겨 맞았고 이제는 몇 집까지 생겼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랜트가 입을 열었습니다. 이 구급차는 그날 저녁 강남의 한 사거리에서 환자를 태워 대학병원까지 13km를 달렸습니다. 퇴근길 최악의 정체였고 관제센터가 처음 계산한 예상 소요 시간은 20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걸린 시간은 9분이었습니다. 시민들이 길을 열어 준 덕분입니다. 방청석에서 감탄이 흘러나왔습니다. 저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13km를 구분해 훌륭한 기록이었습니다. 환자는 26살에 외국인 여성이었습니다. 퇴근길에 갑자기 쓰러졌고 급성 심근염으로 심장이 먹기 직전이었습니다. 의료진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5분만 늦었어도 장담할 수 없었다고요. 심장 26 외국인 3년 전 서울 단어 하나하나가 모처럼 박히기 시작했습니다. 팀장이 이유를 알기도 전에 먼저 빠르게 뛰었습니다. 손바닥에 식은 땀이 배어 나왔고. 저는 저도 모르게 물을 위에 서류 봉투를 움켜쥐었습니다. 설마 아니다. 서울에는 수많은 외국인이 산다 우연이다. 우연이어야 한다. 그랜트가 저를 바라봤습니다. 그 눈빛이 이상하리만치 조심스러웠습니다. 저희는 이 제보 영상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병원의 협조를 얻어 당시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환자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저희 제작진 전원이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스튜디오에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습니다. 환자의 이름은 탁하기 유의입니다. 세상의 소리가 사라졌습니다. 350명의 웅성거림도 통역 수신기의 잡음도 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물을 위해 서류 봉투가 바닥으로 미끄러져 그 안에서 저 30년 된 수첩이 굴러 나왔습니다. 이 도시는 아직 멀었다고 적어 두었던 바로 그 수첩이 스르르 떨어져습니다
유이, 제 딸, 3년 전 간단한 검사라고 했던, 별일 아니라고 했던, 오지 말라고 했던, 저는 일어서려 했습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참 십4년 동안 세계에 어떤 무대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두 다리가 그 순간 처음으로 저를 배신했습니다. 저는 반쯤 무너지듯 의자 팔걸이를 붙잡았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제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그것이었습니다. 목소리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갈라져 있었습니다. 유인은 제 딸은 그때 간단한 검사를 받았을 뿐입니다. 본인이 저에게 직접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랜트는 대답 대신 조용히 말했습니다. 따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도록 하겠습니다. 크린이 바뀌었습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젊은 여자가 병원 연구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3년 만에 조금 야윈 듯한 하지만 분명한 제 딸의 얼굴이었습니다. 유인은 카메라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몇 번이나 시선을 내렸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아빠 이 영상을 보고 계시다면 아마 많이 놀라셨을 거예요. 죄송해요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었어요. 아빠 얼굴을 보면서는 도저히 말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다른 물을 위해서 두 손을 몇 번 쥐었다. 폈습니다 3년 전 그날 저는 연구실에서 퇴근하던 길 일에 쓰러졌어요.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이대로 죽는 건가 하는 생각뿐이었어요. 아빠 저 그때 정말 무서웠어요. 가슴 한복판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두 주먹을 무릎 위에서 부들부들 떨며 화면만 바라봤습니다. 눈을 떠보니 구급차 아니었어요. 창밖으로 길이 보였는데. 아빠 저는 그 광경을 평생 잊지 못해요. 퇴근길에 꽉 막혀 있던 그 넓은 도로가 저를 위해서 갈라지고 있었어요. 얼굴도 모르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26살짜리 외국인 하나를 살리겠다고 일제히 핸들을 꺾고 있었어요. 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딸은 그곳을 닦지도 않고 말을 이었습니다. 병원에서 깨어난 다음 날 아빠한테 전화가 왔죠. 간단한 검사라고 거짓말했어요. 왜 그랬는지 아세요? 아빠가 걱정할까 봐서가 아니에요. 아빠 저는 무서웠어요. 아빠가 평생 낮춰보던 나라의 사람들이 아빠 딸을 살렸다 없다는 걸 알면 아빠의 34년이 무너질까 봐요. 저는 아빠의 세계를 지켜드리고 싶었어요. 엄마는 알고 계세요. 엄마한테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것도 저예요. 아내의 얼굴이 스쳤습니다. 런던 초청장을 받고 웃던 저를 바라보던 그 복잡했던 표정 안에는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이 방송이 저를 어디로 데려갈지를 말입니다. 아빠 제가 서울에 남은 이유를 모르셨죠. 아빠가 모르는 서울이 있다고 했잖아요. 이게 그 서울이에요. 그리고 아빠 아빠의 34년은 틀리지 않았어요. 심장이 멈춘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4분이라고. 어릴 때부터 귀에 못 시 박히게 말씀하셨잖아요. 맞아요. 그 사분이 저를 살렸어요. 다만 그 사분을 지켜준 건 매뉴얼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의 마음이었을 뿐이에요. 아빠의 학설은 틀린 게 아니라 절반이었던 거예요. 딸은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숙였습니다. 보고 싶어요. 아빠 방송 끝나면 서울로와 주세요. 아빠가 모르는 서울 이제 제가 보여드릴게요. 영상이 끝났습니다. 스튜디오 여기저기에서 훌쩍 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앞줄에 그 젊은 동향인 여성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고 백발의 노부인은 손수건을 꺼내 들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이 턱끝에서 뚝뚝 떨어져 무릎 위에 바지를 적혔습니다. 참 14년 만에 처음 흘리는 사람들 앞에서의 눈물이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하 이거 아주 각본이 훌륭하군요. 자이토였습니다. 그는 반쯤 풀린 넥타이를 늘어뜨린 채 비틀비틀 일어나 있었습니다. 눈물에 가족 상봉이라 BBC가 심파극까지 준비할 줄은 몰랐습니다. 여러분 정신 차리십시오. 이게 다 짜고 치는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방청석에서. 그날 밤 가장 크고 낮은 야유가 터져 나왔습니다. 분노라기보다 경멸에 가까운 소리였습니다. 하지만 42토를 무너뜨린 것은 야유가 아니었습니다. 한 분을 더 모시겠습니다. 그랜트의 말과 함께 무대 옆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습니다. 짙은 감색 구급대원 정보 단정하게 눌러 쓴 모자 서른 중반쯤에 한국인 남자였습니다. 그는 무대 중앙에 서서 먼저 방청석을 향해 그리고 저를 향해 깊이 깊이 허리를 숙였습니다. 서울에서 온 구급대원 박준서입니다. 3년 전 그날 유희씨를 병원으로 이송했던 사람입니다. 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이번에는 일어나셨습니다. 저 남자가 저 사람이 제 딸을 박준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날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12년 동안 수천 번 출동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관제에서 예상 도착 시간 이십 분이 찍혔을 때 저는 속으로 최악을 가고 있습니다. 환자는 심장이 먹기 직전이었고.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사거리를 지나는 순간 도로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대원들끼리는 그 광경을 이렇게 부릅니다. 길이 열리는 게 아니라 도시가 숨을 참아 주는 거라고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저를 바라봤습니다. 탁학이 선생님 따님이 구급차 안에서 의식을 잃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이 있습니다. 12년 동안들은 말 중에 잊히지 않는 말이라 오늘 꼭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스튜디오 전체가 숨을 죽였습니다. 아빠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가 슬퍼하시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아버지 걱정을 먼저 하는 따님이셨습니다. 선생님은 좋은 아버지십니다. 그런 딸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으니까요. 저는 그 자리에서 무너졌습니다. 두 무릎이 꺾였고 저는 패널솥 책상을 붙잡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61살의 남자가 150 끼고 미국의 카메라 앞에서 아이처럼 울고 있었습니다.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움 같은 것은 이미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그 와중에도 사이토는 마지막 발악을 했습니다. 저 구급대원도 섭외된 배우일지 누가 압니까? 박준서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이토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배우가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날 따님을 살린 것은 제가 아니라 길을 열어 준 500여 명의 시민들입니다. 그분들이 전부 배우였다는 말씀이십니까? 퇴근길에 서울 시민 500명을 매일 저녁 섭외할 수 있는 나라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세계가 배워야 할 나라겠군요. 방청석이 웃음과 박수로 뒤집었습니다. 사이토는 뭐라 대꾸하려다가 주머니에서 올리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습니다. 화면을 확인한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무대 옆 카메라 한 대가 그 화면을 그대로 잡았고 대형 스크린에 문자 한 줄이 떠올랐습니다. 사이토 씨 방송 잘 보고 있소 우리 채널과 논의하던 프로그램 건은 없던 일로 합시다. 다시는 연락하지 마시오. 그를 이 무대에 밀어넣었던 편성국장의 문자였습니다. 혐오를 주문했던 자가 혐오가 팔리지 않자 가장 먼저 손을 놓은 겁니다. 사이토는 휴대전화를 떨어뜨리듯 움켜쥐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도망치듯 스튜디오를 빠져나갔습니다. 아무도 그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장내가 가라앉자. 저는 눈물을 닦고 천천히 마이크 앞에 섰습니다. 해야 할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자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자리에 균형을 잡으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제 진짜 균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틀렸습니다. 350 형의 방청객 여러분 앞에서 그리고 150개국의 시청자 여러분 앞에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타카기 노부오의 34년 학설은 틀렸습니다. 저는 질서에 백 년이 필요하다고 말해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세월을 달력으로만 세는 오만한 학자였습니다. 어떤 나라는 그 세월을 전쟁과 군주림 속에서 서로의 손을 붙잡으며 압축해서 치러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저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낡은 수첩을 주워들었습니다. 30년 전 저는 서울의 교차로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도시는 아직 멀었다. 최소 30년 오늘 저는 그 아래의 한 주를 더 적으려 합니다. 정확히 30년이 걸렸다. 다만 멀었던 것은 서울이 아니라 나였다. 방 청석 곳곳에서 박수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직 남은 말이 있었습니다. 저는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봤습니다. 3년 전 그날 저녁 제 딸이 서울의 도로 위에서 죽음과 싸우던 바로 그 시각에 저는 제네바의 무대 위에서 박수를 받고 있었습니다. 한국식 질서의 한계에 대해 강연하면서 말입니다. 무대가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핑계로 저는 딸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그날 제 딸의 곁을 지켜준 것은 아버지인 제가 아니라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서울의 시민 500명이었습니다. 저는 카메라를 향해 그리고 그 너머에 어느 나라를 향해 천천히 허리를 숙였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깊은 절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제 딸을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유의아 저는 일본어가 아니라 서툰 한국어로 마지막 문장을 말했습니다. 이 말만은 그 나라의 말로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빠가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아빠가 서울로 갈게. 그 순간 350명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기립 박수는 5분 넘게 이어졌습니다. 박춘서가 다가와 저를 안아 주었고 저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다시 한번 울었습니다. 균형을 잡으러 왔던 저울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지요. 부서진 그 자리가 조금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방송이 나간 뒤 세상은 제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그 밤에 녹화 영상은 공개 일주일 만에 조회수 2억 회를 넘어섰습니다. 저희 사주 장면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수십만 개의 댓글이 달렸습니다. 저를 비난하는 댓글은 놀라울 만큼 적었습니다. 틀렸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는 댓글에 저는 오래도록 화면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귀국한 저는 가장 먼저 소방청을 찾아갔습니다. 34년을 근무하고 떠났던 그 건물에 이번에는 방문객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후배들 앞에 서류 하나를 내려놓았습니다. 서울 모델 도입 건의서 제안자 타카기 노부 건의서의 첫 장에는 이런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의 매뉴얼은 완벽하다. 그러나 완벽한 매뉴얼은 길을 여는 법을 가르칠 뿐 심장을 움직이지는 못한다. 이제 우리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을 배워야 한다. 그 교과서는 서울에 있다. 회의실이 술렁이었습니다. 제 매뉴얼에 사인을 받겠다고 줄을 서던 후배들이 그 매뉴얼을 만든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저는 평생 숫자와 싸워 온 사람이고 숫자는 이미 답을 내렸으니까요. 4분 30초와 1분 40초 그 차이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는 것은 학자가 아니라 겁쟁입니다. 제 책들은 절판을 요청했습니다. 출판사에는 계정판을 약속했습니다. 세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은 이미 정해두었습니다. 서울의 47초 그리고 지난달 도쿄의 젊은 구급대원 여섯 명이 서울로 연수를 떠났습니다. 30년 전 서울의 공무원들이 도쿄로 왔던 그 길을 정확히 반대하는 반대 방향으로 말입니다. 공항에서 그들을 배웅한 저는 이상한 뭉클함을 느꼈습니다. 배우러 왔던 나라가 가르치는 나라가 되기까지 세계가 최소 백 년이라 불렀던 그 길을 대한민국은 단 한 세대만에 걸어냈습니다.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서로의 지붕을 함께 얹어 주던 그 손으로 말입니다. 저는 지금 서울에 있습니다. 딸이 일하는 병원 근처 3년 전 그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이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딸과 함께 그 도로를 직접 걸었습니다. 그런데 신호를 기다리던 그때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숨을 멈추고 도로를 바라봤습니다. 브레이크 등의 파도가 잃었습니다. 길이 열렸습니다. 구급차가 지나갔고 도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닫혔습니다. 제 손목시계로 잰 시간은 40초가 조금 넘었습니다. 화면이 아니라 제 두 눈으로 처음 본 그 광경 앞에서 저는 또 한 번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따님 말없이 제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아빠 이게 아빠가 모르던 서울이에요. 아니 이제는 아는 서울이다. 여러분 저는 평생 시스템을 만든 사람입니다. 그래서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든 돈과 시간이 있으면 시스템은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의 사거리에서 신호를 지키는 마음 내 차가 부서져도 사람부터 살리라는 마음 낯선 이의 생명 앞에서 500명이 동시에 핸들을 꺾는 마음. 그것은 돈으로도 시간으로도 제 매뉴얼로도 만들 수 없습니다. 그것이 대한민국이 가진 진짜 힘입니다. 세계는 지금 그 47초를 배우기 위해 서울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행렬의 맨 앞에서 가장 오래 고개를 숙였던 사람으로서 증언합니다. 이 나라의 국민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을 가졌는지 아마 모르고 있을 겁니다. 매일의 일상이니까요. 하지만 그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지금 온 세계가 가장 부러워하는 기적입니다. 지금까지 34년간 한국을 낮춰 보던 일본 구급 심의관이 런던 BBC 스튜디오에서 겪은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그 47초의 기적은 사실 여러분의 평범한 일상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더 많은 분들이 알 수 있도록 이 이야기를 널리 공유해주세요 서로를 위해 열어 주는 길이 대한민국의 풍격을 만듭니다.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감동 새벽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