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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4일 토요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제1독서 : 민수 21,4ㄴ-9 & 필리피 2,6-11
복 음 : 요한 3,13-17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는 지인들과 함께 어느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낯선 자매님 한 분이 지인 중의 한 분을 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하십니다.
지인은 갑작스러운 인사에 깜짝 놀란 뒤에, 잠시 밖으로 나가서 대화를 나누시더군요.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돌아오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희 본당 신자인데요. 되게 잘 살아요. 그런데 요즘 냉담 중이세요.”
혼란이 왔습니다. ‘냉담 중인데 왜 잘 산다고 말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잘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지인의 기준은 부자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 자매님은 큰 부자인가 봅니다.
건물도 몇 채 가지고 있고, 지금 하는 사업도 잘 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자면 잘 사는 것일까요?
현재 냉담 중이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없는 형편도 아닌 것 같습니다.
남편과의 관계가 아주 안 좋아서 이혼을 이야기하고 있고,
자녀들도 각종 문제를 일으켜서 복잡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세상 안에서 부자라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되게 잘 살아요.”
돈, 명예, 권력이 잘 사는 기준이 되는 세상입니다.
돈, 명예, 권력이 세상의 꼭대기에 높이 세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들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들을 아무리 높여도
주님의 뜻에 맞게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들어 올려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에 못 박혀 들어 올려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어 올려지신 것은 우리처럼 자기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춰서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들어 올리려는 삶만 산다면 결코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기준, 즉 사랑의 기준으로 들어 올리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 희생, 봉사, 나눔 등으로만 진정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모습을 가지고서 잘 산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있는 모든 이가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저 사람, 되게 잘 살아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십자가’에서 세 가지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첫째,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선 ‘죄인임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할 때라야 진정한 의미에서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임을 인정하기보다 의인임을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지는 일은 억울하고 원망스런 일이 되고 맙니다.
부당한 처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오히려 십자가를 피하고 도피하고 있는 것이라 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먼저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용서해야 할 존재’이기에 앞서, ‘용서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비록 죄가 없다 할지라도, 죄인이라서가 아니라
‘죄 없음에도 죄를 뒤집어쓸 줄을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해받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받고, 곡해받고, 누명 쓰는 일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바로 그러한 그를 ‘용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를 ‘위하여’ 자신이 뒤집어써 주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가 구원되기를 ‘위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일’입니다.
둘째, ‘십자가’는 ‘죽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남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죽음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남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일이요,
남보다 자신을 앞세우는 일이 아니라 물러나는 일입니다.
승리하는 일이 아니라 패배당하는 일이요,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변두리로 밀려나는 일이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하게 당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는, 틀려서가 아니라 옳으면서도 지는 일이요, 힘 있으면서도 눌리는 일입니다.
셋째, ‘십자가’는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곳’입니다.
그것을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가 잘되기를 바라며 하는 일이요,
그가 구원되기를 희망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일이요,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그분을 향하여 자신을 바치는 봉헌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승리요, 구원이 됩니다.
곧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죽이고 진정으로 참 생명으로 살아납니다.
여기에 한 가지 의미를 제 자신이 덧붙여 본다면,
‘십자가’는 ‘벌어지는 일을 수락하는 일’이라고 여겨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는 우리의 삶은 그 어떤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집니다.
내가 만들지 않아도, 아니, 만들지 않은 일들이 마구 벌어져 다그쳐옵니다.
오히려 만들고 조작하고 계획했던 일들은 무색하리만큼 우리를 비켜 갑니다.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를 휩싸고 돕니다.
이제 그것들을 ‘사랑으로’ 마주하고 끌어안고 응답하는 일이 제게는 ‘십자가’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서> 58장 7절에 나오는 ‘성소 식별’의 기준에 대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무력함이지만, 구원을 이루는 전능함이 됩니다.
낮아짐으로써 진정 높아지고, 패배이지만 사랑의 승리가 됩니다.
지면서도 쳐부수고, 승리의 깃발이 되고, 영광의 월계관이 됩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표상이요,
완전한 승리의 표상이요, 현양이며 영광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우리 삶의 의미가 되고, 우리 삶을 전환시키는 혁명이 됩니다.
이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 사랑’이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 6,14)
오늘, ‘십자가’를 드높여
이 고귀한 ‘그리스도의 구원’과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
주님!
당신은 패배하셨지만, 악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죽으셨지만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나셨고,
추락하셨지만 드높이 들어 올려지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내려갈 줄을 알게 하소서!
하여, 당신과 함께 올라가게 하소서!
하여, 제 안에 숨겨져 있는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8-9).
쳐다본 사람과 ‘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지 않은 사람과의 운명은 분명히 다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 방법을 알려주었으면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6,24).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고 하셨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니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았듯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가 아니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라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곳곳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고 또 몸에도 지니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일깨우고 십자가를 지겠다는
고백을 못 한다면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십자가가 점점 더 화려해지고 상품화되는 현실에서
나를 정화하고 성숙시키는 은총의 십자가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승리를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에 앞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십자가는 내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그분은 분명히 나를 부활시켜줄 것입니다”(성녀 벨라뎃다).
힘겹고 고달픈 십자가의 길이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미리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사랑을 봐야 합니다.
많은 경우 ‘왜 나만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 고 하소연합니다.
왜 나는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감당해야 하느냐고 투덜댑니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 속에서 십자가는 더 무거워 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는 언제나 첫발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가 됩니다.
첫발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성 요한 비안네).
사람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는 다르지만, 모두가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난이 십자가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큰 부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녀, 남편, 아내, 동료가, 공동체의 일원, 장상이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격, 언어의 습관, 주변의 환경이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다듬고, 겸손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마침내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게 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게 해 주십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피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십자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어디서 오는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하는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교과서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구원의 도구임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에 사랑의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특별히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에는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구리 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았듯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 수 있게 해 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샤워기의 밸브가 헛돌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밸브에 틈이 벌어졌습니다.
틈이 벌어졌으니 조이는 힘이 약해졌고, 그래서 헛돌았습니다.
더 벌어지기 전에 새로운 밸브를 구매해서 교체했습니다.
새롭게 밸브를 교체하니 잘 열리고 잠겼습니다.
요즘은 자동차도 자동차의 상태를 화면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엔진오일의 교체 시기도 알려주고, 타이어 압력 상태도 알려주고,
자동차의 건강 상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교구에서 1년에 한 번은 ‘건강검진’을 하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위내시경과 장내시경도 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성모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했는데, 미국에 와서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내년에 한국 가면 건강검진을 한번 받아보려고 합니다.
건강검진의 목적은 혹시 모를 몸의 이상을 점검하는 겁니다.
이상이 있다면 더 나빠지기 전에 조처하는 겁니다.
이상이 없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음 일 년을 기다리는 겁니다.
신앙인은 ‘양심 성찰’을 통하여 신앙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는 정해진 시간에 하는지, 선행은 하고 있는지, 영적 독서는 하고 있는지,
말씀은 가까이하고 있는지, 미사 참례는 잘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40일 전에 있었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과 함께 묵상하면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타볼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을 대표하는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거룩하게 빛났고, 예수님의 옷도 하얗게 빛났습니다.
하늘에서 '이는 내 마음에 드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여기에 천막 3개를 만들겠습니다.
하나는 주님, 다른 두 개는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만들겠습니다.'
베드로는 거룩한 변모의 의미가 영광과 기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율법학자와 대사제들에게 끌려가서 고난을 받아야 한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없는 영광을 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하느님의 영광은 사람의 일을 통해서는 성취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십자가는 구원과 부활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미사의 정점인 성찬의 전례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신앙의 신비여!” 교우들은 사제의 선포에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며 부활을 굳게 믿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영원히 경배받으소서.”
십자가의 길 기도에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정점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씨 뿌리지 않고 열매 맺으려는 욕심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사막의 신기루일 뿐입니다.
십자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십자가의 수직면은 하느님과 사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수평면은 사람과 사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사람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십자가 현양축일을 지내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조욱현 토마 신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발견되었다.
황제는 이를 기념하여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옆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를 경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9월 14일에 지내는 것은 이날 십자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 때문에 하느님과 모세에게 반항한다.
하느님은 불 뱀으로 그들을 벌하시고,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게 하신다.
구리 뱀의 모습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을 미리 보여 주는 것이었다.
민수 21,4-9의 구리 뱀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리게 하는 표지였다.
이것이 후에는 우상이 되어 히즈키야 때 다 없애 버렸다.
복음의 “들린다.”라는 말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뜻이며(요한 8,28; 12,32),
하늘의 영광으로 올려졌다는 뜻(사도 2,33; 5,31; 필립 2,9)으로 이중적인 영광의 의미이다.
우리에게도 이 십자가가 없으면 아무런 면류관이 없다.
예수께서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 모든 인간이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
십자가를 통한 세상의 구원 업적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업적이다.
이 사랑의 업적은 인간이 그 아들을 믿고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이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예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그분만이 하느님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다. 이제 그분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우리의 생명, 영혼, 운명 전체를 맡기고
그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게 되면 구원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분은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그분 안에 가지고 오신 구원의 은총까지도 거절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구원을 거절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고
그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결과, 멸망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매 순간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였다가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회개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이제 우리도 언제나 나약한 의지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으나,
항상 높이 들리신, 즉 십자가와 영광으로 들려지신
주님께로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지고 가는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진정 부활을 체험하며 나 자신이 새로이 태어나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의 완성
즉 구원과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을 닮는 것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늘 살면서 십자가의 신비를 더 깊이 체험하며
구원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현양하면서 살지 않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는 현양하면서 살지는 않는.
이것이 오늘, 이 축일을 지내며 묵상하고 제가 여러분과 나누려는 주제입니다.
이런 묵상을 하게 된 것은 어제의 일이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요즘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한 교구 신부님과 프란치스칸 영성을 공부하는데
어제는 프란치스코에 대한 그 신부님의 감탄에 저도 같이 감탄을 연발하면서
뭔가 허무함이랄까 공허함이랄까 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대단한데 나는 뭘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그러고 보니 저는 이렇게 저를 위안하며 살아왔습니다.
나는 프란치스코를 사랑한다.
나는 프란치스코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비록 앞줄에서 프란치스코를 따르진 못할지라도 따르고 있다.
사실 이렇게라도 프란치스코를 따른다면 이것만으로도 훌륭합니다.
적어도 악마를 따르지 않고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은 참 묘하다고 할까 교묘하다고 할까.
저의 겸손이기도 하지만 합리화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어떤 때는 겸손으로 기울다가 어떤 때는 합리화로 기운다는 말이고,
그래서 이런 것이 인간이지, 하다가도 이래선 안 되지, 하곤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를 높이 찬양하면서도 잘 따르지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길은 주님만 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따라가긴 하지만 따라갈 수 있는 만큼만 간다.
이런 식입니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를 현양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임을 현양합니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승리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으시다면 그것이 패배이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헛수고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명백한 승리입니다.
어떻게 죽음으로 죽음을 이깁니까?
제 생각에 치달으면 이깁니다.
죽음 끝까지 가면 이깁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깁니다.
둘째로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임을 현양합니다.
십자가의 그 큰 고통을 능력으로 견딜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그 큰 고통은 사랑으로만 견딜 수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의 그 큰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곧 사랑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라야 참사랑이고,
참사랑이라야 고통 가운데서도 사랑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묵상하고 거룩한 십자가를 현양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이마에 깊이 새겨져 있는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십자가라는 화두로 묵상을 해봅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 없는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꿈꾸지만,
우리네 인간 현실 안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각자 등에는 저마다의 십자가 하나씩 짊어지고
때로 헐떡이며, 때로 용기를 내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십자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이마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우리네 삶에서 기쁨과 슬픔, 고통과 행복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
돌아보니 행복과 불행이 끝도 없이 교차해 온 나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도 영광과 승리로 가득했던 출애굽은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즉시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척박한 사막과 기약 없는 대규모 공동체 생활, 배고픔과 갈증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 21,5)
보십시오. 우리네 지상 인생 여정은 그 누구든 어쩔 수 없습니다.
결핍과 고통 투성이입니다. 근원적 갈증과 배고픔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너그러운 마음이요, 고개를 들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관대함입니다.
가끔 기가 막힌 이웃을 만납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꼬인 인생이 다 있는지? 저런 상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무리 둘러봐도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분들 앞에 뭐라 위로의 말을 드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면, 주님께 매달리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뭔가 상황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삶은 여전히 거기서 거긴 분들 앞에 그저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잘 되기만을 바라시는 분이요 우리를 축복하는 하느님이라 믿었는데,
삶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요, 십자가 투성이인 우리네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게는 하나의 큰 숙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답을 가르쳐 주시더군요.
우리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만사형통, 승승장구, 지속적인 현세 축복을 외치는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의 지상에서의 삶 전체를 통해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추종의 대상인 예수님부터
고난의 인간, 배척당하는 인간, 십자가 죽음을 넘어서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운명을 타고 나셨음을 스스로 밝히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의 운명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분처럼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고, 때로 배척을 받고,
때로 죽음과도 같은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부활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교는 고통과 십자가 없는 부활을 절대로 외쳐서는 안 됩니다.
희생과 시련은 거부하고 달콤함과 안락함만을 보장하는 교회여서도 안 됩니다.
우리에게 매일 다가오는 고통과 십자가를 소중히 여기며
고통과 십자가에 담긴 가치와 의미를 지속적으로 찾아 나가는 것이 정말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왕이면 져야 할 십자가라면 기꺼이, 관대하게 지고 갈 때 생기는 한 가지 특별한 현상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가볍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십자가가 십자가가 아니라 기쁨이요 은총이요 축복으로 변화되는 느낌입니다.
오늘은 큰 십자성호를 긋자.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상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연 십자가와 십자고상이다.
그래서 오늘은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와 성공회가
세상과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고 해방시키신 그리스도께서
매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우러러 경축하는 날이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4세기경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335년 9월 1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고,
그다음 날인 14일에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가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십자가’를 무덤성당 안에 걸어 현양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한 데서
오늘 축일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무덤성당은 곧 부활성당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무덤 안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기 때문이다.
나중에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성 십자가는 약탈당하게 되는데,
628년 동로마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이를 다시 찾아와
본래의 자리에 안치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추가되었다.
교황 세르지우스 1세(687-701)에 이르러
이 축일은 전체 교회가 기념하는 축일로 자리 잡게 된다.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걸맞게
전례 복음은 요한 사가의 ‘십자가 신학’을 잘 보여 준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요한 3,1-21) 중에서 발췌된 내용이다.
니고데모의 호감에서 출발한 예수님과의 대화는
어느새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自己啓示的 가르침으로 반전되었다.
이는 곧 요한 복음사가의 편집 의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니고데모와 행한 대화의 연속으로 보기는 어렵다.
즉 예수의 역사적 發說이라기 보다는
요한 복음사가의 독자적 성찰의 결과로 후에 편집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으니(13절),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란 그 누구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至高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사람이 되셨고,
영광중에 다시 높이 들려올려 진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보여 주신 까닭에
세상은 물과 영으로 다시금 태어나, 멸망을 피하고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받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느님께 불순종의 대가로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기둥에 달아 놓은 구리뱀을 본 사람은 치유를 받았다.(민수 21장)
여기서 구리뱀은 신약의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에 비유된다.
그러나 불뱀에게 물린 사람들을 실제로 치유한 것은, 뱀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이다.
바로 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제 십자가에 높이 달려있는 것이다.
십자가 자체가 세상에 구원과 생명을 주기보다는
십자가에 높이 달려 못 박혀 돌아가신 사람의 아들,
즉 하느님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16절)
이 말씀은 모든 복음서와 성서 말씀의 요약이며, 결론이다
요한은 자신의 서간에서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1요한 4,9-16)
세상의 구원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게 되는 動機는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방법으로 하느님은 ‘외 아들을 보내 주시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낸 목적은
곧,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자기 외아들까지 보내어 세상을 구원하려는 動機(motivation)이다.
그 동기가 바로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심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 십자가’ 위에서 성취된 것이다.
한때는 노예나 흉악범을 처단하던 형틀 십자가!
십자가는 이제 우리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은 왼손을 가슴에 얹고 오른손으로 이마에서 가슴으로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로
‘큰’ 십자성호를 그으며 십자가에 묻혀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자. 아멘.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