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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京畿高等學校 제56회 同期會 원문보기 글쓴이: 愚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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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아직도 국가정보원을 정치권력기관으로 여기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이런 의혹제기 자체가 불가능하다. 선진국 정보기관은 모두 철두철미한 국가안보 전문 정보기관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 사회는 아직도 국정원을 국가안보를 위해 전념하는 프로페셔널한 정보기관으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대통령이 자신의 측근을 책임자로 보내 국정 전반에 걸쳐 보좌를 받는 정치권력기관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우리나라 정보기관의 역사도 50년이 넘었다. 그런데 아직도 이처럼 프로 정보기관의 위상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국정원의 형편이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그 1차적 요인은 역대 대통령들이 대체로 정보기관을 정무적으로 오용(誤用)했기 때문이다.
‘권력기관’이라는 遺産의 시작
모두 다 아는 대로 우리나라 정보기관은 애당초 권력기관으로 출발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1년 6월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를 창설할 당시의 시대적 과제는 수천년 지속되어 왔던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동시에 열세(劣勢) 상황에 놓여 있던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해 내는 일이었다. 박 대통령은 당시 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시대적 과제에 대처하는 데 있어 중앙정보부(중정)를 주요 도구로 사용했다. 경제발전에 장애가 되는 요소를 제압하는 강제적 수단으로, 또 북한의 집요한 도발과 체제도전에 대응하는 주된 방위수단으로 중정을 동원했다. 당시 국가안보의 개념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포괄적 개념이었다. 국정의 모든 분야에 걸쳐 북한체제보다 우위에 서는 것, 그 자체를 국가안보의 과제로 인식하던 시기였다. 때문에 당시 중정은 국정 전반에 걸쳐 무소불위로 간여하는 정치기관이었으며 동시에 권력기관이었다.
정보기관의 잃어버린 15년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기획부’로, 그리고 다시 ‘국가정보원’으로 개칭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정보기관의 탈정치화를 위한 노력도 꾸준히 이루어졌다. 그 결과 정보기관이 국내정치에 직접 개입했던 과거 관행은 상당 부분 사라졌고 인권침해 사례도 이제는 그다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권력기관이라는 과거 중정의 부정적 유산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민주화시대의 대통령들도 여전히 ‘국정 해결사’ 역할을 정보기관에 요구했기 때문이다.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 일반에서도 ‘정보기관은 으레 그런 일 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했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의 출범은 국정원에 새로운 차원의 위기를 불러왔다. 특히 햇볕정책은 정보기관으로서의 국정원의 정체성에 치명타를 가했다. 갑자기 북한이 더 이상 ‘안보 위협’이 아닌 ‘포용의 대상’이 된 것이다. 대북 정보활동이 주눅 드는 상황이 되었고 그동안 힘들게 쌓아 왔던 정보 자산도 다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었다. 간첩을 잡을 필요도 없어졌다. 국정원은 졸지에 집중해야 할 정보목표를 상실하고 방향감각을 상실한 어정쩡한 기관으로 전락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 이런 추세는 더욱 강화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공론화하는 데 앞장서기까지 했다.
‘원칙 있는 대북정책’을 내세우면서 등장한 이명박 정부는 처음 기대와는 달리 국정원을 또 다른 실망으로 몰아넣었다. 국정원의 정보 전문성을 크게 훼손한 인사(人事)를 지속적으로 시행했던 것이다. 그 결과 국정원은 정보 전문성이 없어도 아무나 해도 되는 아마추어 기관으로 추락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비전문가형 인사들은 국정원 보직을 ‘거쳐 가는 경력’으로 여긴다. 말하자면 뜨내기다. 정보업무는 이를 천직으로 여기는 집요함이 요구되는 특별한 작업이다. 비전문가에게서 이런 투철한 직업의식을 기대하긴 어렵다. 더구나 직원들의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킨다. 어느날 갑자기 정보 문외한이 상관으로 부임하여 아는 체를 할 경우, 오랫동안 정보기관에서 정보업무에 전념해 온 직원들에겐 자괴감이 생기게 마련이다. 당연히 일할 의욕이 없어진다. 이처럼 김대중 정부로부터 이명박 정부에 이르는 15년은 국정원이 퇴행을 거듭한 상실의 시대였다.
정보서비스는 국민이 소비자가 아니다
이와 같은 국정원의 퇴행 추세는 반드시 반전되어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출범은 국정원이 좋은 정보기관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계기다. 그러나 15년에 걸쳐 쌓인 나쁜 관행과 풍토를 제거하고 제대로 된 정보기관을 만드는 과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낡은 집을 새로 고치는 것이 새 집을 짓는 것보다 때로는 어렵다. 박근혜 정부가 직면한 국정원 혁신의 도전은 그래서 간단치 않은 작업이다. 국가정보 업무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바탕을 둔 대통령의 지속적 관심과 현명한 리더십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
국가정보기관은 대통령이 국가보위 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2개의 장치 중 하나다. 즉 대통령은 국군통수권을 통해 국군을 지휘하는 것과 국가정보기관의 보좌를 받는 것, 2개의 장치를 통해 국가보위 책무를 수행한다.
국가정보원의 영어 표기는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다. 즉 국가정보(National Intelligence)를 전문적으로 다루어 이를 서비스하는 기관이란 의미다. 미국 정보기관도 이 ‘국가정보’ 즉 National Intelligence를 부서 이름에 사용하고 있다. 2001년 9·11사태를 겪은 후 미국이 신설한 정보부서의 이름은 DNI, 즉 Director, National Intelligence다.
그렇다면 ‘국가정보’의 개념은 무엇인가? 정부는 정치·경제·사회·복지 등 국정 전분야에 걸쳐 정책을 수립한다. 당연히 정보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 정책수립에 필요한 정보는 국가정보가 아니다. 국가정보란 국가 안위(安危) 정보를 말한다. 국가정보는 다른 일반정보와 달리 스파이, 도청 등 특수방법을 사용해서 확보해 나간다. 그래서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라고 국가정보 기관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기원전 6세기 손자(孫子)는 《손자병법》 용간(用間)편에 국가정보 업무의 본질을 이렇게 썼다. <先知者 不可取於鬼神, 不可象於事, 不可驗於度, 必取於人 知敵之情者也(선지자 불가취어귀신 불가상어사 불가험어도 필취어인 지적지정자야).> 대략 풀이하자면 ‘국가정보는 귀신이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다. 유추하거나 계산을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정보는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알아내야만 하는 것이다’라는 뜻이겠다.
국가정보는 서비스의 대상과 방법에 있어서도 일반정보의 경우와 다르다.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에 표기된 ‘서비스’란 기본적으로 국가안보의 궁극적 책임자인 대통령에 대한 정보제공 서비스를 의미한다. 이를 정보용어로 소비자(consumer)라 부른다. 정보 소비자에는 물론 대통령을 보좌하는 국가안보부서 책임자와 관계자도 포함된다. 이와 같이 정보기관의 정보서비스는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북정보의 한계상황은 프로만이 돌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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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CIA부장을 지낸 월터 베델 스미스. |
이것이 국가정보 업무의 본질이고 운영의 기본이다. 국정원의 혁신은 이와 같은 정보업무의 본질과 기본에 대한 철저한 재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업무의 초점은 당연히 국가안보 사안에 맞추어지고, 이를 파고드는 업무 집중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현 시점에서 무엇이 국가안위를 위협하는가, 그리고 우선순위는 어떻게 되는가를 설정한 후, 이를 감당할 직원을 집중적으로 양성해서 현장에 투입해야 한다. 이 일만 해도 벅차다. 대통령을 돕는 일반정책 분야의 일을 국가정보기관이 담당할 여유가 없다. 그래야 정상이다. 이것이 안보에 전념하는 진정한 프로 정보기관의 모습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의 최대 국가안보 위협요소는 북한이다. 따라서 국정원의 정보업무는 대북 정보업무가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전 정보역량을 마땅히 대북정보에 모아야 한다. 그렇게 해도 대북정보는 어렵다. 북한은 인류 첩보사상 최악의 정보 타깃(target)이다.
컨테이너 박스에 비유될 정도로 철저히 고립된 북한의 국가운영 체제는 접근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정보업무의 기술 측면에서 보면 보통 스파이 포섭 공작의 요소로 4가지를 든다. 영어로 MICE로 표현되는 요소다. 즉, 돈(Money), 이념(Ideology), 타협(Compromise), 자만심(Ego)을 말한다. 이론적으로는 북한주민들에게도 이 요소들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주민에 대한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그 어떤 공작기법도 다 소용 없는 일이다. 북한내 우리의 인적정보 자산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정일의 사망을 실시간으로 파악지도 못했고, 또 북한 미사일 발사 시점도 놓친 정보무능을 탓하는 질타의 소리가 높다. 결과만을 놓고 보면 정보 실패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질책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러한 당연한 비판 속에서도 대북한 정보운영의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대한 냉철한 이해도 필요하다. 북한 내부정세를 속속들이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망의 구축은 정보기관의 드림(dream)이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나라 정보기관도 그처럼 완벽한 정보망을 가질 수는 없다. 대북 정보활동은 끊임없이 돌을 산 위로 밀어올리는 시지프스의 신화와 같은 끝없는 도전의 여정이다. 실패와 좌절을 거듭해서 대북정보의 한계를 뼈저리게 인식해야 이를 실질적으로 돌파하는 상상력이 가능해진다. 때문에 정보업무는 아무나 맡을 수 없고 오랜 경험을 지닌 진정한 프로만이 감당할 수가 있다. 정보운영의 기본상식이다.
“나는 실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비밀정보 활동은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들이 해야 할 일임을 깨달았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역대 책임자 중 가장 훌륭했던 부장으로 평가되는 제4대 부장 월터 베델 스미스 장군이 맥아더 장군의 후임으로 주한유엔군 총사령관에 부임한 리지웨이 장군에게 쓴 편지 내용이다. 1950년대 CIA 초기에는 참담한 공작실패가 많았다. 그중에는 CIA가 조직한 북한 침투공작 사례도 포함되어 있다. CIA가 부산 영도에서 훈련시켜 북한에 침투시킨 한국인은 성과(成果)도 없이 거의 다 궤멸했다. 질(質)보다 양(量)을 중시하여 일주일도 채 훈련시키지 않고 북한에 공수한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부장으로 취임한 스미스 부장이 의욕만 앞선 경험 없는 CIA 요원들에 의해 자행된 이런 불필요한 희생을 보고 한탄한 편지다. 60년 전에 쓰인 편지지만 정보운영의 가장 기초적 원칙을 극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국내정보와 해외정보는 본질적으로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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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기술》의 저자 헨리 크럼프톤. |
국정원 혁신이란 바로 이 편지에 제시된 프로가 일을 맡아야 한다는 정보기관 운영의 기본원칙을 국정원 운영에 실질적으로 적용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국정원의 정보 전문성을 존중해 주는 것, 정보 프로를 육성하고 우대해 주는 것, 정보업무 본질에 입각해서 국정원을 운영하는 것, 그래서 결론적으로 국정원을 진정한 프로 정보기관으로 만드는 것, 바로 이것이 박근혜 정부가 추진할 국정원 혁신의 요체이며 방향이고 과제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첫 번째 조치는 바른 국정원 인사다. 국정원장의 인선기준이 정치적 보은이나 측근이 되는 과거 패턴을 되풀이해서는 혁신을 기대할 수 없다. 정보업무에 대한 이해를 중요한 인사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국정원 근무 경력이 자동적으로 정보업무를 제대로 이해하는 정보 프로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국정원 업무분야는 다양하다. 뿐만 아니라 15년의 파행적 운영을 겪으면서 제대로 된 정보전문가의 인재 풀이 크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물론 대통령의 신뢰도 중요한 인사기준이 되어야 한다. 대통령이 국정원 정보서비스의 궁극적인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제문제에 대한 이해도도 고려 요소가 되어야 한다. 국정원은 세계 정보기관 네트워크의 중요 멤버다. 국정원장은 이 네트워크를 활용, 외국 정보기관과 정보협력을 추진하여 정보역량을 확충해야 하는 책무를 지니고 있다. 대통령은 위의 자격요건을 갖춘 국정원 출신 인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훌륭한 인사를 국정원장으로 선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무차장의 인사는 내부승진의 관행을 반드시 확립해 나가야 한다.
두 번째로는 국내정보와 해외정보(대북) 운영 패러다임의 변화다.
국정원은 국내정보 분야와 해외 및 대북정보 분야 통합 운영하고 있다. 통합운영 체제를 유지하는 국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가 유일하다. 다른 선진국들은 국내와 해외분야를 별도의 독립된 정보기관으로 분리 운영하고 있다. 국내와 해외(대북정보 포함)는 전혀 다른 정보 장르다. 국내에서 작동하는 안보 위해요소를 제압하는 방첩과 공안기능, 즉 ‘방패’의 역할이 국내정보 부서의 주기능이다. 반면 해외부서는 국가정보를 수집하고 외부에서 발원되는 위해요소를 선제적으로 제압하는 ‘창(槍)’의 역할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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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기술》. |
2001년 9·11사태 이후 초기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휘했던 전 CIA 대(對)테러센터장(長) 헨리 크럼프톤은 그의 자서전 《정보의 기술(The Art of Intelligence)》에서 자신이 연방수사국(FBI)에 1년간 파견되어 근무한 경험을 다음 요지로 기술했다. <FBI는 style="PADDING-BOTTOM: 0px; PADDING-TOP: 0px; PADDING-LEFT: 0px; MARGIN: 0px; PADDING-RIGHT: 0px" 생각한다.="" 것만="" 기소할="" 신속히="" 수사하여="" 빨리="" 여건을="" 그="" fbi는="" 반면="" 구상한다.="" 수집을="" 정보="" 많은="" 더="" 활용하여="" 이를="" 포착하면="" 정보여건을="" cia는="" 다르다.="" 문화가="" 방식과="" 정보운영="" cia와는="">
국정원도 이처럼 업무성향과 접근방법이 상이한 국내부서와 해외부서를 통합 운영하는 방식을 선진국형(型)으로 변모시킬 때가 되었다. 이질적 두 분야의 분리 운영 조치는 당연히 각 분야별 전문성 향상으로 이어진다. 동시에 과거 중정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권력기관 이미지를 벗을 수 있는 계기도 된다. 또한 국정원을 명실공히 프로 정보기관으로 만들려는 정부의 강력한 정치적 의지가 과시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현 시점에서 당장 국정원을 해체하여 다른 나라처럼 2개의 독립기관으로 따로 만드는 것은 적절치 않다. 현재의 통합운영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실제 운영만 그렇게 하는 방안이 보다 적절하다. 이를 위해 국내정보 담당 차장과 해외(북한포함) 담당 차장은 사실상 독립지휘관의 위상으로 격상시켜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담당분야를 전문적으로 지휘하게 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국정원장과의 관계는 법무장관과 검찰총장과의 관계처럼 느슨한 상하관계로 재설정될 수 있고, 국정원장은 두 차장 간 필요시 업무협조를 보장해 나가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방안의 세부 시행방안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연구시 특히 국내정보 분야가 다루어야 할 사안과 방법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 집중해야 할 업무내용, 다른 방첩부서와의 관계, 정부부처 출입관행 등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여 ‘권력기관’이라는 오해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방안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는 국가정보 판단능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방안 강구다.
< 차기 한국정부는 21세기 들어 가장 어려운 대외환경에 직면할 것이다.> 외교안보연구원이 지난해 12월 27일 발간한 2013-2017년 중기 정세전망 보고서의 결론이다. 외교안보 위기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정세라는 판단인 것이다. 이에 대비하여 국가의 종합정보판단 능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방안 강구가 시급하다. 이를 위해 국정원장 직속으로 국가 종합 정보판단실(가칭) 신설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국가수준의 안보문제 싱크탱크(think-tank)가 부재한 실정이다. 학계나 각 정부부처별로 싱크탱크는 산재해 있지만 이들의 지혜를 흡수 융합하여 국가정책에 반영하는 제도적 장치는 없다.
미국의 경우 국가정보실(National Intelligence Council)을 DNI 산하에 두고 국가의 종합정보판단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도 이를 벤치마킹하여 대통령의 최고 정보참모인 국정원장 산하에 국가종합정보판단실을 두고 외교안보 문제에 대한 최고 수준의 두뇌기능을 수행토록 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국가종합정보판단실은 정보기관 특유의 폐쇄적 조직이 아니라 사계 권위자를 영입하고 학계·언론계를 비롯해서 각계 전문가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는 열린 조직으로 운영되어 명실공히 국가 최고수준의 정보판단을 생산해 내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대외정보기관 ‘모사드’의 모토는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지만,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라는 성경 구절이다. 국가종합정보판단실 기능을 보강받은 국정원은 한반도의 평안, 즉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한 ‘국가지략센터’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남한의 정보전 열세를 극복할 대책 세워야
국정원의 혁신은 더 미룰 수 없는 한계상황에 와 있다. 이번 박근혜 정부에서 제대로 된 혁신을 하지 못하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현 한반도 상황은 유능한 국가정보기관의 치열한 운영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체제생존을 건 남북한 간 정보전은 6·25전쟁 이후 쉬지 않고 진행되어 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북한은 대남적화의 망상을 붙들고 있고, 이를 위해 공세적 정보전을 펴고 있다. 이 정보전에서 밀리면 우리의 국가안위는 그만큼 위태로워진다. 더구나 정보전 환경은 북한이 비대칭적으로 절대 유리하다.
한국사회는 북한 정보기관이 마음대로 휘젓고 활동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북한 정보기관의 황금어장 격인 종북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고 최근에는 국회에까지 진출할 정도로 정치적으로 득세했다. 반면 우리 국정원은 대북접근마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이러한 정보환경의 비대칭적 열세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비롯된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국정원은 정보전의 최일선을 담당하는 전사(戰士) 조직이다. 열세적 상황을 감안, 국정원은 더 철저히 준비된 프로 정보기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간의 정치적 상황은 국정원의 정보역량을 오히려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현재도 국가보안법 폐지 등 국정원을 흔드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국정원은 이 모든 불리한 조건과 환경을 돌파하고 나라의 안위를 지키는 소명에 더 충실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모사드와 신바드처럼 강한 조직으로 탈바꿈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보운영의 기본원칙을 오랫동안 충실히 지켜 나가는 프로세스를 통해 튼실한 조직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위에서 국정원 혁신을 위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그렇지만 국정원의 개혁이 몇 가지 아이디어를 가지고 졸속으로 접근할 사안은 아니다. 사계 전문가들의 지혜를 모아 혁신의 밑그림을 우선 설계하는 철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국정원은 과거 중정 시절의 운영체계를 그대로 유지해 오고 있다. 또 일부 운영관행도 그대로 남아 있고 권력기관 이미지도 여전하다.
이 구시대적 잔재를 털어버리고 훌륭한 정보기관이 되는 것은 시대 교체의 당위다. 이를 실현하는 1차적 책임은 물론 국정원 스스로의 몫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리더십이 더 결정적이다. 국가정보기관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궁극적 정보소비자인 대통령이 결정할 사안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정보업무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이를 제대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의지를 실천해 나갈 때만 정보기관의 진정한 발전은 가능해진다.
국가정보기관은 제1의 국가방위선이다(The First Line of Defense). 앞으로 범상치 않은 외교안보 격랑이 예고되고 있다. 그 중심부에는 북한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에 대비하여 튼튼한 안보 시스템을 서둘러 구축해야 한다. 국가 제1의 방위선인 국정원의 강화는 이 안보 시스템 구축을 위한 첫 번째 수순이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현명한 리더십으로 국정원이 국가안보의 핵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고 국민의 신뢰를 받는 훌륭한 정보기관으로 발전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병호 국가정보원장 후보자가 최근 출간된 정치·외교 전문지‘코리아폴리시’와 인터뷰하고 있다. /코리아폴리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