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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5일 연중 제24주일
제1독서 : 이사 50,5-9ㄴ
제2독서 : 야고 2,14-18
복 음 : 마르 8,27-35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전에 본당 신부로 있을 때, 봉성체하던 어느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이 할머니는 제가 방에 들어가면 곧바로 우셨습니다.
자기가 아직 할 일도 많은데 곧 죽을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할머니를 모시고 있던 며느리에게
병원에서 뭐라고 하냐고 물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나이 들어 어쩔 수 없으니 조금 불편한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친했던 친구, 가족들이 하나둘씩 떠나는 것을 보며
이 할머니는 죽음이 두려우신 것입니다.
할머니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건강에 좋다는 것은 모두 드시려고 했고,
다리가 불편해서 밖에는 못 나갔지만, 집에서 나름으로 열심히 운동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전과 다른 몸 상태이니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늘 걱정이었습니다.
이 걱정이 결코 할머니의 건강을 좋게 만들지는 않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에 대한 걱정과 죽음에 대한 걱정을
단번에 끊어내지 않으면, 평생 아무 일도 못 할 겁니다.
그런 일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세요. 뭐든 올 테면 오라지요.
몸뚱이가 우리를 조롱하는 일이 이리 빈번한데,
우린들 한두 번쯤 놈들을 조롱하지 말란 법 있습니까?
한평생을 잘 싸우고 살려면 이 원수부터 정복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멋진 성녀의 말씀입니다.
사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인데도
걱정과 두려움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할 일이 그다지 많은데 겨우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당신 신원에 관한 질문,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 등을 말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이 좋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은 없었지요.
그 답을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 역시 정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그리스도, 메시아의 모습을 당시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쟁에서 승리하여 로마인들을 몰아내는 개선장군으로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승리의 개선장군인 예수님은 끝까지 살아 남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이제껏 거짓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실현될 말씀입니다.
그래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걱정, 두려움 등은 모두 사람의 일만 생각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희망과 기쁨만을 떠올리게 합니다.
과연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도 우리는 길을 걷습니다. “나그네 설움”이라는 ‘옛 노래’가 떠오릅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그러나 우리는 정처 없이 걷는 발걸음이 아니죠!
우리는 분명 그분과 함께 동행하여 걷고 있으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걸으니까요!
오늘 <복음>은 바로 길을 동행하여 걸으면서 스승이 제자들에게
“스승을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이 가는 길’과 ‘참된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더구나 이 가르침은 스승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죽음의 행진을 막 시작하면서 말씀하고 계시기에,
그 간절함이 배여 있는 가르침입니다.
순교성월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제1 독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들려준 ‘주님의 종의 노래’로,
메시아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이들에게 뺨을 내주고,
모욕과 수모를 받으면서도 얼굴을 가리지 않을 것이나,
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고 전합니다.
<제2 독서>는 그분을 믿는 이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녀야 할
‘믿음의 실천’에 대한 야고보 사도의 권고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미리 준비시키시는 장면인데,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수난예고’와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 받아야 할 고난’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에 대한
군중들의 여론을 물으신 다음, 제자들에게 시험문제를 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 그러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베드로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알려주는 ‘그리스도’는 황당하리만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마르 8,32)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마르 8,31-32)
여기에서, 우리는 “반드시”(Dei)라는 말과
‘명백히’(parresia)라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길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로,
‘명백히’(parresia)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반드시”라는 단어는 세 가지 뜻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의무와 책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고난과 배척을 겪고 죽임을 당하시는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괜찮은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사랑의 의무이며 책임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하겠다는 뜻을 나타내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배척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는 일을 ‘반드시’ 실현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는 아버지의 뜻에 절대 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가짐,
곧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반드시’ 해내고 말리라는 투철한 사명감과 각오를 말해줍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명백히’(parresia)라는 단어는 공관복음에서 유일하게 여기에서만 한 번 쓰인 단어로,
‘자유를 가지고 용기 있게 그리고 분명하게’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는 어렴풋이 알아듣거나 대충 알아들어서는 안 되는
그야말로 명백하게 알아들어야 할 내용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 길은 우리가 ‘명백히’ 알고 분명하게 따라가야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길은 대체 어떤 길인가?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곧 <첫째>는 한두 가지나 혹은 몇 가지의 고난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둘째>는 단지 배척과 거부를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이요,
<셋째>는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걸어야 하는 길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길임을 밝혀줍니다.
곧 스스로 만들어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묵묵히 수행해 가는 길인 것입니다.
의탁과 신뢰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당하면서도 자유로이 흔연히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에게 이러한 내용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사실, 그들도 당시의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광스럽게 개선하는 ‘왕’ 메시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천부당만부당한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또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사실에 당혹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서서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바로 전에 “복 받은 이”(마태 16,17; “너는 행복하다.”)로 칭찬받던 베드로는
이제 “사탄”이라고 호되게 꾸지람을 듣습니다.
사실, 그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관련된 하느님의 계획에 맞섰던 것입니다.
사막에서의 유혹자처럼, 그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위해 마련해 놓은 계획과는 다른,
사람들의 방식으로 구원자가 되라고 반박한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사람의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마르 8,34)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그것을 통해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아멘.
주님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며 구원하십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주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있음을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8,27)하고 물으셨습니다.
바깥 떠도는 소리,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1) 세례자 요한. 2)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3) 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여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얘기는 그것으로 하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소신과 확신에 찬 대답을 원하시는 것이지요.
나의 신앙과 다른 사람의 신앙은 확실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1). 그리스어로는 ‘구세주’ ‘구원자’라는 뜻인데
2).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3).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란 말이 ‘구세주’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
메시아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후에는 쇠퇴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고 왕족, 사제, 백성들이 바빌론 유배를 당하게 됩니다.
약 50년 후 유배가 끝나자,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국가를 재건하지만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주변 강대국의 속박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세주를 보내주시어 선택받은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를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1).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어떤 이들은
2). 사제와 같은 인물로
3).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임금, 사제, 예언자는 머리에 기름을 부어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 부음 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장차 하느님이 보내주실 메시아를
1). 다윗이나 솔로몬처럼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강력하길 원했고,
2). 사제처럼 율법에 충실하며
3). 예언자들처럼 죄인을 단죄하는 인물로 상상했습니다.
그래서
1). 이 메시아가 압제 세력인 로마인들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2). 원수를 철저히 응징하며
3). 율법을 어기는 죄인을 엄하게 벌주기를 고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원수의 죽음이 아니라 회개를 원하시며
죄인에게는 처벌보다는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법은 지배가 아니라 봉사였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진리(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요한17,17)를 줄기차게 선포하였고,
그 진리의 이름으로 그 진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습니다.
유다인들이 사용하던 메시아 칭호는 예수님의 사명을 올바로 표현하기에는 불충분하고
그래서 오해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 구세주이시지만 권력을 휘두르는 군주적 메시아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스스로 고난까지 감수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세상은 이기적인 야망의 논리로 살아가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사랑으로 대응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의 삶을 본받고 더 큰 희생과 사랑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의 물음은
결국 너희에게 있어서 내가 어떤 존재냐? 고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나를 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분 손에 들려 있으니, 연필을 사용하고 안 하고는 그분 뜻에 달려 있습니다.
혹 부러져도 그분께서 필요하다면 깎아 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내 뜻을 관철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나를 맞추는 삶이 신앙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내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고백하는 가운데 주님과 일치를 이루길 희망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소크라테스나 석가모니, 공자와 같은 위대한 성현 중 한 분으로 생각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잊고 훌륭한 분으로만 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내가 힘들고, 지치고, 의기소침해 있을 때, 길을 잃고 방황할 때, 난제에 봉착해 있을 때도
여전히 주님은 나의 ‘그리스도’ ‘구세주’ 이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나를 살리시는 분, 나의 주인으로 확실하게 모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동행하시면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말과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같은 뜻을 되풀이 강조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기의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라는 울타리에 갇혀있지 말고 더 크고 위대한 그리스도께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 상황 안에서도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자신을 버린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숭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집자실지(執者失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움켜잡는 자는 그것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움켜잡았기 때문에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명예도 그렇고 재물도, 목숨도 그렇습니다. 잡으면 잃습니다. 잃기 전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상에 소유하지 않은 물건을 도둑맞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세주라면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비우면 비울수록 주님으로 가득 채워지고 충만해질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구역 모임에서 ‘복음 나누기’를 하였습니다.
그날 복음은 ‘생명의 빵’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피와 내 몸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몸과 피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과 성공을 원했습니다.
현실에서의 행복과 즐거움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른 가치와 다른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썩어 없어질 육체를 위해서 살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영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인데, 저희가 어디로 떠나겠습니까?”
구역 모임에 참석한 교우들은 성경 말씀 중에 마음에 와닿은 구절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공동체의 나눔을 통해서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저는 그날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저는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게 천주교는 손에 있는 ‘지문’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고유한 지문이 있듯이, 천주교는 제게 운명처럼 주어졌습니다.
친척들은 세례명을 불렀고, 주일은 당연히 성당 가는 날이었고,
기일에는 연도를 바치고,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편안하듯이, 사람은 공기를 마셔야 숨을 쉬듯이
천주교는 제게 물과 같고 공기와 같았습니다.
천주교라는 신앙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천주교라는 신앙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인이 한국말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저는 천주교라는 신앙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회의를 느낀 적이 없습니다.
형제 중의 한 명은 사제가 되기를 바라셨던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저는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사무엘이 형제 중에 다윗을 선택한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형제 중에 저를 선택하셨습니다.
“가브리엘 너도 나를 떠나겠느냐?”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1982년에 104명이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어떤 친구는 신학교의 규칙과 기숙사 생활 따르지 못해서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어떤 친구는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사제의 길을 따르지 못해서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어떤 친구는 신학과 철학이 어려워서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40여 명은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말씀’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이 좋았습니다.
신학교에서 주는 음식이 좋았습니다.
신학교의 도서관도 좋았고, 나의 책상이 있는 것도 좋았습니다.
신학과 철학이 어려웠지만, 사고의 깊이와 폭이 넓어져서 좋았습니다.
방학 때는 본당에서 지냈습니다. 주일학교의 일을 도와주고, 성당의 일도 도와주며 지냈습니다.
몸은 자유로웠지만 그만큼 피곤했습니다. 개학이 되어 신학교로 복귀하면 몸도, 마음도 편했습니다.
33년 사제 생활을 하면서 “가브리엘아! 너도 나를 떠나겠느냐?”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처음 10년은 ‘질풍노도’와 같이 지냈습니다.
예비자 교리, 성경공부를 하였고, 청년 단체를 맡았습니다.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청년 레지오, 청년연합회와 함께하였습니다.
아쉬운 점은 영적인 동반자가 되어야 했는데, 친교와 나눔의 동반자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다음 10년은 ‘영신수련’과 함께하였습니다.
저는 2001년부터 영신수련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매주 금요일, 신학교에서 영신수련 지도 사제 모임이 있었습니다.
저는 왕복 200킬로가 넘는 거리를 매주 다녔습니다.
영신수련은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신학생이 서품 받기 위해서는 30일 동안 영신수련의 프로그램에 따라서 피정해야 합니다.
영적인 부족함을 느꼈던 저는 영신수련 지도 사제 모임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 23항 ‘원리와 기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걸 택할 수 있다.”
영신수련은 제가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동반자가 되어주었습니다.
“가브리엘아! 너도 나를 떠나겠느냐?”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저도 베드로 사도처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주시는데 제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구세주 그리스도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행동으로 고백합시다.
자기 목숨을 버릴 때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확신하며,
그리스도의 말씀과 모범을 따라 살아가기로 다짐합시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조욱현 토마 신부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그분과 내가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되는 때에도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를 보면 그렇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힘없고 지친 자들을 위해 영과 예언을 받으신 야훼의 종으로 나타난다(이사 50,4).
그에게 온순과 겸손과 순명을 주시고(이사 50,5; 참조: 필립 2,8),
모든 것을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따르게 하셨다.
그리하여 모든 고통을 당하게 하신다.
때리고, 수염을 뽑으며 침 뱉음과 수치를 당한다(이사 50,6).
그러나 그는 주님 앞에 단 하나의 도움이 있음을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기 나름대로 느낀 점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물으신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질문일 수 있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절) 답한다.
하느님께 축성된 분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실 분으로 보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정치적인 결정적 실현을 기대하고 있다(사도 1,6).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뜻으로 메시아를 알아듣지 않도록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어떤 착각도 하지 않게 하려고
첫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말씀을 하신다(31-32절).
여기서 제자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반응이 나타난다.
베드로의 모습이 그렇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메시아의 힘없는 무기력한 메시아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죽는 메시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베드로의 모습은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모습이다.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는 것인데
그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 사탄의 일이며, 원수의 일이고 고소하는 자들의 일이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33절) 호통을 치신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
사막에서 사탄이 놀라운 메시아적 기적들을 행하도록 했던 것이나,
십자가 아래에서도 그 옆에 있던 이들이
세 번이나 십자가의 고통으로부터 내려오라고 했던 것처럼
베드로의 발언을 사탄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라고 책망하고 계시다(33절).
그리고 이어서 충실한 제자의 모습을 말씀하신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끊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자신의 십자가를 매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즉, 자기의 존재를 그분과 복음 때문에 잃어야 한다는 것이다(34-35절 참조).
그렇지 않으면 헛되이 망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을 구원하게 되며, 단지 인간적인 의지는 은총이 함께 하지 않으면
확실한 죽음만이 있을 뿐임을 말씀하시고 계시다.
야고보 사도는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그 신앙이 요구하는 행위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강하게 말하고 있다.
믿음만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야고보 2,14).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형제를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야고보 2,15-16).
진정 이 믿음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로 살아있지 않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보 2,17).
“만일 믿음이 자비를 통해 실천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아무것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갈라 5,6; 참조: 에페 6,25; 1테살 1,3).
믿음은 하느님의 거룩한 은총이다.
이 은총이 나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항상 현실과 일치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믿음은 외적인 환경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영적인 행위와 태도를 통해서 가장 확실하게 입증된다.
우리 신앙인들도 복음에 충실하다면, 형제애를 통하여
불의와 불평등으로 가득 찬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켜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좋은 말만 늘어놓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더 나아가 믿음의 행동을 이루어나가야 한다.
믿음은 결코 자신의 이기주의 바람막이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편하지 못한 생활환경에서도 믿음을 실천적으로 실현해 나가야 한다.
이 믿음이 십자가 위에서 입증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베드로가 가이사리아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한 것이나,
또는 궁핍한 형제들에게 위로의 말만 해주는 것과 같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위로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우리의 생활을 통해 때로는 육체적으로도 함께 짊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신앙의 구체적인 실현을 살아가는 용기와 은총을 주님께 청하여야 하겠다.
한쪽 발은 주님께로, 다른 한쪽 발은 세상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남아있는 삶을 예수님과 함께 보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수제자 베드로 사도의 신앙 여정이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영광스럽게도 베드로는 사도단의 대표이자 수제자로 발탁됩니다.
스승님과 밀착 동행하다 보니, 메시아로서의 그분의 신원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장엄하게 신앙 고백을 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
그로 인해 예수님으로부터 극찬도 받고 지지도 받고,
마침내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손에 쥐게 됩니다. 한 마디로 승승장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두 발은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한쪽 발은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영적인 세계로 건너갔지만,
다른 한쪽 발은 아직도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세상 한가운데 남아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베드로의 성소 여정은 흔들리는 작은 배 한 척 같았습니다.
우왕좌왕, 좌충우돌이 반복되었습니다.
장엄하게 스승임을 따라나섰지만, 아직도 베드로 안에는 인간적 야심들과 미성숙,
다양한 결핍과 긴가민가하는 망설임이 남아있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각자의 신앙 여정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결핍은 스승님께서 조만간 겪으실
수난 여정과 십자가 죽음을 거부함으로 인한 결핍이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마르 8,32)
그 결과 베드로는 스승님으로부터 결코 들어서는 안 될,
정말이지 충격적이고 모욕적인 지탄을 받게 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그 숱한 인간적 약점과 미성숙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예수님과 끝까지 동행하게 된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는 그 많은 결핍을 상쇄하고도 남을 덕행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지속적인 겸손의 덕이었습니다.
참담하고 부끄러웠지만, 마지막 순간,
베드로에게는 다시 한번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자비를 청할 줄 아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그분께서 운명으로 주신 십자가를
기쁘게 껴안을 수 있는 사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탄의 정체 : 중요한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누구를 위한 십자가냐.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로 믿느냐고 제자들에게 먼저 물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혹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왜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계속 묻고 계신 것일까요?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왕, 예언자, 사제의 역할을 하라고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대답을 들으시고 당신의 ‘수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의 죽임을 당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는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꾸짖으십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가 사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먼저 물으시는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사탄은 잘못된 대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먼저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부터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50년째 동물 사료를 먹으며 산속에서 숨어 사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무서운 부모 때문에 도망쳐서 산에서 숨어 삽니다.
그런데 누구에겐가는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부모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산에서 내려와도 되는데
여전히 자기 욕구에 봉사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누구에겐가 속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관계도 없습니다.
혼인을 하려고 해도 상대를 위해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게 있고
자녀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고 친구를 만날 때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누구를 위한 십자가냐는 것입니다.
관계는 무엇을 지향할까요? 결국 행복과 안녕을 지향합니다.
그렇다면 천황이 내린 사케 한 잔씩을 마시고 비행기를 몰고 자살하던
카미카제는 무엇을 기대하고 그런 십자가를 지는 것일까요?
천황이 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존재에게 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질 때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나에게 생명을 준 부모를 위해 십자가를 지면 자녀가 되고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부모의 유산을 받을 수 있습니다.
1997년 허난성, 당시 나이 50의 노총각 장 솽치씨는
폐지를 주워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겨울 짚 더미 속에 버려져 있던 4개월 된 여자아이를 발견합니다.
자신은 굶어가며 아이를 키웠지만, 사춘기가 된 백기는 아빠를 원망했고
아빠는 그때마다 몰래 눈물을 훔쳤습니다.
하지만 백기가 상처받을까 봐 여전히 버려졌던 아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커가면서 아빠와 자기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을 한 백기는
결국 아빠가 버려졌던 자신을 거둬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백기는 도시로 나가 닥치는 대로 일합니다.
그리고 올해 스물넷이 된 백기는 놀랍게도
연 매출 190억에 달하는 한 회사의 CEO가 됩니다.
이제 백기는 74세가 된 아빠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빠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예 캠핑카를 사서 아빠와 함께 세계 일주를 하고 있습니다.
또 연애 한 번 못 하고 평생 혼자 산 아빠를 위해 결혼도 시켜드렸습니다.
[출처: ‘버려졌던 갓난아기의 보은... 노총각 아빠에게 일어난 기적’, 유튜브 채널, ‘엠빅뉴스’]
장 백기는 아버지를 위해 십자가를 집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져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딸이 되었고 고아였지만,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창조자이신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이 안에 속해있어야 사랑하는 존재가 됩니다. 사랑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자동차는 그것을 만든 인간에게 속해있어야 고쳐지고 새로 만들어집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인간을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합니다.
사람에게 속하지 말고 하느님께 속하기 위해
그분의 뜻을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사탄이 되지 않습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번 질문을 하십니다.
첫 질문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혹은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말한다고 답합니다.
이 답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사람들이 그분을 예언자라고 생각하였던 사실을 반영합니다.
두 번째의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초기 신앙인들이 그분에 대해 사용하던 것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기록한 「복음서」들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傳記와 같이 기록되었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考證된 사실만을 보도하는 현대의 전기가 아니고,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예수님에 대한 초기 제자들의 믿음이 가미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당신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이르시면서,
당신이 유대인 지도자들의 배척을 당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믿은 것은
그분이 죽고 부활하신 후의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베드로의 고백 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禁命을 전하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
곧 메시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强大國으로 만들어 주고,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인물입니다.
예수는 그런 예수, 곧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다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반박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배척당하고 무력하게 죽는 메시아는 있을 수 없다는
유대인들의 정서가 반영된 베드로의 말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격한 반응을 소개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죽음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아야 한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그 죽음을 하나의 敗北로만 보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受難史에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달아놓고,
유대교 대사제와 율사들은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냉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마르 15,32)
그들은 실패자로 죽어가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들의 승리를 뽐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인물은
하느님과 관련이 있을 수 없다는 그들의 생각이 반영된 말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이것이 초기 신앙인들이 깨달았던 바이고, 또한 그들이 실천한 바입니다.
십자가로 끝난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을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 부른 것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초기 신앙인들이 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시대 우대인들이 가졌던 메시아 像을 근본적으로 修正합니다.
유대인들이 상상하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강대국으로 만들어 주는 영광스런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은 사람들이 받는 유혹이라 지적합니다.
인류는 하느님을 말하면서 자기 욕망의 성취를 항상 꿈꾸었습니다.
인간을 성공시켜 주고, 부귀와 영화를 주는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인류는 비를 내려달라고 하늘에 빌고, 병들었을 때는
신에게 빌어서 병을 고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그리스도 신앙은 전혀 다른 하느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이용하여 내가 잘되겠다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배워서 그분의 일을 실천하겠다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자녀는 아버지로부터 전해진 생명을 삽니다.
아버지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였으면, 그 자녀도 자비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며 삽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쳐서 하느님으로부터
혜택을 얻는다는 유대교의 가르침을 거부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연장하여 상상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높은 사람이 정한 법을 지키고,
높은 사람에게 정성을 바쳐야 잘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베드로를 비난하셨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당연히 이 세상의 强者로 군림해야 한다는
베드로의 생각을 예수님이 극단적으로 거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그분의 죽음을 중심으로 발생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열어주는 존재입니다.
예수가 메시아인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의 세계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질서의 세계,
곧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소모하는 질서의 세계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세계입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가 발견하는 하느님은 强者도 아니고, 높은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가 보는 하느님의 일은 자기 스스로를 내어주고 베푸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 자비롭고 사랑하는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하느님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베푸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하느님은 사람들을 지켜보고, 심판하고, 벌주는 분이 아닙니다.
지켜보고 심판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닌 사람들,
곧 높고 강하다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신약성서」는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분,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1요한 4,10)
그 사랑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신약성서」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시작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잘 믿지 못합니다.
내가 사랑한 그만큼 상대방이 응답하여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불안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즉시 사랑을 취소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중히 생각한 나머지, 對價 없이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서 대가 없이 베풀고 사랑하는 길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과 같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배워야 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