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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생 신화를 꿈꾸며 - 대전 시티즌 이성운
과거 이성운의 축구 인생은 쓸쓸했다. 단 한 번도 주목 받은 적이 없었고, 그의 주 무대는 2군 리그였다. 그에게 찾아온 단 한 번의 기회도 해이해진 마음으로 날려 버렸다. 이성운은 그저 그런 평범한 선수 중 하나였다.
2006년 말 이성운은 경찰청을 제대하며 사회로 복귀했다. 30살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새 출발을 해야 했다. 그동안 해 놓은 것이 없기에, 그의 앞날은 어둡기만 했다.
딱 1년이 지난 지금. 이성운의 모습에서 과거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먼저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국가대표급 선수로 성장하지 않았지만, 대전에서 꼭 필요한 선수가 되었다. 2군 리그와도 이별을 했다. 또한 성실한 선수로 팬들의 기억 속에 자리를 잡으며,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팬들의 사랑도 받고 있다.
10월의 마지막 날 저녁 7시 대전 시티즌 숙소에서 이성운을 만났다. 어느 해보다 뜻 깊은 한 해를 보낸 이성운이기에, 힘들었던 시절의 이야기도 웃으며 이야기했다. 오히려 좋은 추억으로 간직한 모습이었다.
주목받지 못했던 시절
"축구는 우연히 하게 되었어요. 축구를 정말 잘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축구부에 들어가는데, 그 친구 따라 같이 들어갔어요. 어렸을 때 공부보다는 축구가 더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초·중학교 시절에는 축구를 정말 못했어요. 제가 마땅히 뛸 자리가 없을 정도였죠. 윙으로 뛰었는데요. 윙이라는 역할을 잘해서 맡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감도 없었어요. 중학교 때까지 경기에 나가는 것이 싫었죠. 차라리 꾸지람을 듣는 게 낳았어요."
부산 낙성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한 이성운. 어린 시절 이성운에게 축구는 꿈이 아닌 놀이였다. 그래서 축구에 대한 욕심도 남들보다 적었고, 노력 역시 부족했다. 이성운이 축구 선수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변화가 필요했다.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야 했고, 굳은 마음가짐도 필요했다.
"앞에서 말한 친구가 중학교 시절까지 부산에서 제일 잘했던 친구였어요. 고등학교 입학하고 나서 그 친구와 비교를 많이 당했어요. '그 친구는 저만큼 잘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못하니?'라는 말을 자주 들었죠. 이 말을 너무 자주 들으니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그 친구를 따라 잡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정말 열심히 운동을 했어요. (그 친구 분은 아직도 축구를 하고 있나요?) 안타깝게도 그 친구는 운동을 오래 못했어요. 지금은 영국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고 있죠.
축구 기술로는 그 친구를 따라 잡을 수 없었어요.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것은 뛰는 거였죠. 정말 악착같이 뛰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체력하나는 타고난 것 같아요.
그 때부터 중앙 미드필더를 보았어요. 저에게 맞는 포지션을 찾았죠. 거의 모든 경기를 뛰었습니다. 자신감도 찾았고, 실력도 늘었어요. 특히 고등학교 2~3학년 때 제 실력이 가장 많이 늘었던 것 같아요."
1997년 이성운은 경기대학교에 입학했다. 경기대학교에서 보낸 4년은 특별했다. 축구 하나로 행복했고, 감독의 무한한 믿음아래 자신의 꿈을 키워갈 수 있었다.
"당시 박대제 감독님이 경기대학교를 맡으셨어요. 진학을 앞둔 시기에 감독님이 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나만 믿고 올 수 없냐?'고 말씀해주셨어요. 인간적으로 말씀해주시는 것이 좋았어요. 그래서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기대학교에 가게 되었죠. 전력이 좋은 학교에 가서 후보 생활을 하는 것보다 실력은 조금 떨어지지만 제가 뛸 수 있는 학교로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습니다. 좋은 선택이었죠.
경기대학교에서 보낸 4년은 좋은 추억 중 하나예요. 감독님 믿음에 행복했죠. 마음도 편했고요. 또한 내가 최고라는 생각을 가지며 자신감도 키웠습니다."
2001년 이성운은 경기 대학교를 졸업했다. 다음 무대는 K-리그였다. 당시 K-리그는 지금과 같이 드래프트를 통해 신인 선수를 선발했다. 이성운이 K-리그 무대를 뛰기 위해서는 반드시 드래프트에서 자신의 이름이 거명되어야 했다.
"4학년때 드래프트를 넣었는데, 저의 이름이 거명되지 않았어요. 그날 밤 학교 앞에서 박동규감독님이 '정말 미안하다. 너 같은 제자 책임도 못 지는구나...'고 말씀하시면서, 우시는 거예요. 저도 같이 울었어요. 그날 밤은 정말 잊을 수 없죠. 이어 감독님이 '이 한 번 꽉 깨물고 열심히 해보자.'고 말씀해주셨어요. 기회가 있으니, 항상 준비하자는 거였죠.
얼마 지나지 않아 테스트를 받으러 성남에 갔어요. 테스트를 받는 선수들끼리 동계 훈련을 했어요. 처음에는 나약한 생각을 가졌지만, 훈련이 거듭될수록 마음이 강해졌어요. 그 덕분에 연습생으로 성남에 입단할 수 있었죠. 5명이 뽑혔는데, 그 중 한 명이 저였습니다."
소중한 2군 리그의 경험
우여곡절 끝에 이성운은 연습생으로 성남에 입단했다. 밑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넘어서야 하는 산도 많았고, 겪어야 되는 어려움도 많았다. 그렇다고 좌절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당시 이성운은 이제 K-리그에 첫 발을 디딘 신인이었다. 천천히 2군에서 시작해도 늦지 않을 나이였다.
"당시 성남의 멤버가 정말 좋았어요. 1군과 2군 모두 최고였죠. 그래서 한동안 2군 시합에 출전할 수 없었습니다. 경기를 뛰지 못하면서, 마음이 나태해졌어요. 그 때 나태해진 마음을 잡아주신 분이 바로 안익수 코치님이세요. 못 해서 못 뛰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회를 못 잡았다고 하시면서, 곧 기회를 주신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들은 뒤. 2주 정도 시간이 흘렀어요. 당시 안양 LG(現 FC 서울) 2군과의 경기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안익수 코치님이 몸 상태를 물으시는 거예요. 전 항상 준비되어 있다고 말했죠.
그 경기에 선발 출장했어요. 저에게 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열심히 뛰었죠. 그 경기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 활약을 계기로 다음 날 1군에 올라갈 수 있었죠. "
이성운은 안익수 코치와의 만남을 통해 정신적으로 성숙될 수 있었다. 안익수 코치의 호된 가르침은 이성운을 좀 더 강하게 만들었고, 지금까지 K-리그에서 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1군에 올라간 것은 실수 아닌 실수였어요. 2~3주 동안 1군에 있으면서, 정신 상태가 흐트러졌어요. 현실에 안주했거든요. 이후에도 1군과 2군을 오가며 운동했어요. 1군에서 오랫동안 있지 못했던 것은 마음가짐이 강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높은 꿈을 꾸지 못했죠.
2군에 내려갈 때마다 저를 호되게 야단치신 분은 바로 안익수 코치님입니다. 좀 더 높은 꿈을 꾸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한다고요. 더 높은 꿈을 향해 뛰라고 항상 잡아주셨어요. 그 때 그런 말이 없었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운동을 못 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의 제 포지션인 수비형 미드필더를 가르쳐 주셨어요. 축구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가르쳐주셨어요. 인생을 살아가는 법도 배웠고, 프로에서 어떻게 해야 되는 지도 배웠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은 가르침을 주신 분이 바로 안익수 코치님이예요. 가장 고마운 분이죠."
당시 성남은 2001년부터 2003년까지 K-리그 챔피언 자리를 차지하며, 팀 역사상 2번째로 3연패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그야말로 당시 성남은 K-리그 최강자였다. 반면 이성운은 성남만큼 화려한 업적을 세우지 못했다. 주로 교체 선수로 출전하며, 2003년 10경기 출장이 그의 최고 기록이었다.
"성남과 대전은 팀 자체가 다르지만, 성남에서 성공 못하면, 대전에서도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무리 성남의 전력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꼭 성남에서 성공하고 싶었어요, 성공하기 위해 노력했죠.
결과적으로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잡지 못했던 것은 능력의 한계였던 것 같아요.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했는데요. 잘 안 되더라고요. 벽에 부딪칠 때마다 능력의 한계를 느꼈죠.
비록 실패했지만 성남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프로 생활을 어떻게 해야 되는 지도 알았고, 마음가짐의 중요성도 배웠죠. 배움을 얻은 소중한 실패였습니다. 쓴 약이 몸에 좋다고 하잖아요. 성남에서의 경험은 저에게 쓴 약이었죠. "
결국 이성운은 2004년 4경기 출전을 마지막으로 성남과 잠시 이별을 고하고,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2005년 경찰청에 입대했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경찰청.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작이었고, 성장을 위한 가장 큰 도약대였다.
"경기대학교 스승님이었던 박대제 감독님이 경찰청을 맡고 계셨어요. 저를 잘 아시는 감독님 밑에서 운동을 했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어요. 그리고 생각할 시간도 많아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죠. 성남에서 했던 실수를 거울삼아 다시 일어서려고 했어요.
경찰청에서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했어요. 좋은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 활약이 대전으로 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였죠. 경찰청 시절 펼쳤던 활약을 최윤겸 감독님이 좋게 보신 것 같아요."
이성운은 2001년 성남 입단 이후 6년 간 주로 2군 리그에서 뛰었다. 2군 리그에서 자신의 꿈을 키울 수 있었고, 기량을 키울 수 있었다. 그래서 어느 누구보다 2군 리그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가능성 있는 어린 선수들이 발전할 수 있는 무대가 바로 2군 리그입니다. 기초라고 생각해요. 2군 출신들이 올라가서 잘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장)학영(성남)이 같은 경우에도 저와 같이 연습생으로 출발해서, 2군 리그를 거쳐 K-리그 최고의 왼쪽 윙백이 되었잖아요. 그만큼 2군 리그는 중요하죠."
새로운 시작과 함께한 대전
2006년 말 이성운은 경찰청을 제대하며, 성남으로 돌아왔다. 이성운의 상황은 입대 전과 변하지 않았다. 성남은 여전히 강팀이었고, 챔피언이었다. 김두현-김상식-손대호로 이어지는 미드필더 진영은 너무나 강했다.
"1월 4일이 성남의 동계 훈련 소집일 이었어요. 그런데 1월 3일 차상광 코치님에게 전화가 왔어요. 대전으로 갈 생각이 없냐고 물으셨어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좋은 기회였어요. 나이도 많은데, 다시 돌아가서 어린 선수들과 경쟁한다는 것도 부담스러웠어요. 내심 다른 팀에 가서 새로운 마음으로 운동하고 싶었고요."
동계 훈련을 앞두고 이성운은 성남의 노란색 유니폼을 벗고, 대전의 자주색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어느 때보다 강해진 마음은 그를 더 강하게 키웠고, 기회도 빨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대전에 오면서 세운 목표가 있습니다. 운동하는 날이 길게 남지 않았지만,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정말 열심히 해서 남들이 올라선 만큼 올라서자는 것이었어요.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 하고 싶지도 않았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기 출장이 필요했습니다. 그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어요. 전지훈련 기간 동안 가진 연습 경기에서 제가 주전 팀에서 뛰기 시작했거든요."
전반기 동안 이성운은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했다. 로테이션 하에서 주기적인 경기 출장 기회를 잡았다. 이성운은 좋은 활약을 펼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자신이 세워둔 목표와는 거리가 있었다. 특히 떨어진 자신감이 문제였다.
"개막전이었던 수원과의 경기에서 선발로 뛰었어요. 경기 내용은 나쁘지 않았지만, 팀은 졌어요. 지고난 뒤 '내가 뛰어서 팀이 진거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스로 죄책감이 들었죠. 그러면서 자신감도 떨어졌죠. 시즌 초반 정해둔 목표와도 멀어지는 것 같았죠. 무엇보다도 감독님 믿음에 보답하지 못한 것이 너무 죄송했어요.
심적으로 힘들었어요. 더군다나 나이가 많아서 후배들에게 고민을 털어낼 수 없잖아요. 이 때 여자 친구의 도움이 컸어요. 힘들다고 말은 안 했지만, 옆에서 묵묵히 도와주었죠. 여자 친구의 도움으로 힘을 내기 시작했어요. 이대로 좌절할 수 없잖아요. 더욱 열심히 했죠.
특히 자신감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요. 자신감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바로 한 발 더 뛰는 것이죠. 경기장과 훈련장에서 최선을 다해 뛰었어요."
희망을 찾은 2007년 후반기
지난 7월 대전의 4대 감독으로 부임한 김호 감독은 취임식 이후 바로 청평 전지훈련을 가지며 흐트러진 대전의 전력을 가다듬었다. 이성운은 다시 한 번 치열한 주전 경쟁에 들어간 것이다. 다시 한 번 강해져야 했다.
"청평 전지훈련을 떠나기 전에 '여기서 못 살아남는다면, 은퇴해야겠다.'라는 굳은 다짐을 했어요.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많아서 다른 팀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정말 이 악물고 뛰었습니다.
그리고 전지훈련 기간 동안 감독님이 상대에게 절대 지지 말고, 투쟁심을 가지라고 했어요. 그 두 가지는 제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것을 가지기 위해 열심히 뛰었죠."
이성운은 노력으로 자신에게 알맞은 포지션을 찾았다. 바로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이성운은 후반기 거의 모든 경기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하며,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특히 이성운의 엄청난 활동량은 대전의 새로운 엔진이었다. 이성운의 엄청난 활동량으로 대전의 공격진은 수비의 부담을 덜고, 공격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대전의 골 결정력은 매우 높아지며, 매 경기 많은 골을 터트렸다. 덩달아 대전의 성적도 상승 곡선을 그리며, 5연승과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남겼다. 두 기록 모두 팀 역사상 최초였다.
이에 팬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팬들은 이성운을 AC밀란 소속으로 세계적인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하나인 가투소를 보는 것 같다며 칭찬하기에 바빴다.
"공격수들이 수비에 신경 쓰지 않고 공격에만 전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제 임무잖아요. 만약 제가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면, 후반기 내내 뛸 수 없었겠죠.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주전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정말 열심히 뛰었어요.
플레이오프도 처음에는 희망은 있었지만, 확률이 낮았잖아요. 연승을 기록하면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팀 전체의 자신감이었죠. 수원 전을 앞두고도 팀원 전체가 진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이기고 올라간다는 생각뿐이었죠.
몇몇 팬들이 저를 가투소를 닮았다고 말해 주세요. 가투소의 플레이는 활동량이 많고, 투박하잖아요. 저도 그런 면이 있고요. 세계적인 선수와 비교해주신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죠. 하지만 저는 그런 이미지를 벗어나고 싶어요. 제가 가진 장점을 유지하고, 단점을 보완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가지고 싶어요."
대전의 6강 플레이오프 상대는 바로 울산이었다. 파죽지세의 대전은 이번 기회를 통해 울산 징크스를 떨쳐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대전은 울산의 경험에 무릎을 꿇으며 거침없는 상승세를 마감했다. 울산과의 경기에서 대전 선수들은 몸이 굳어 있었다. 이성운도 마찬가지였다. 예전과 같은 활동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이상호, 알미르 등 울산의 2선 공격수들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다.
"부담이 컸어요. 지면 바로 끝이잖아요. 큰 경기라는 생각에 몸도 많이 굳었어요. 그래서 활동량이 어느 때보다 적었죠. 상대 공격도 효율적으로 막지 못 했어요. 결국 후반전에 교체되고 말았죠. 아쉬웠어요. 저 스스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플레이를 펼치지 못했어요. 그래서 더욱 아쉬웠던 것 같아요."
발전을 위한 2008년.
올 해 대전은 뜻 깊은 한 해를 보냈다.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하며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로 인해 떠났던 팬들도 다시 대전 월드컵 경기장을 찾았다. 이성운에게도 뜻 깊은 한 해였다. 그토록 꿈꾸던 1군 무대를 1년 내내 누비며, 새로운 희망을 찾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올해는 뿌듯한 한해였어요, 희망도 찾았고요. 잘하는 것보다 부족한 것이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죠. 운도 많이 작용한 것 같아요. 최윤겸 감독님도 저를 최우선으로 기용해주셨고, 김호 감독님도 저를 최우선으로 기용해주셨죠. 다른 좋은 선수들도 많은데요.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도 있어요. 김호 감독님의 복귀전이었던 FA컵 16강 부산과의 경기였죠. 그 경기에서 2대0으로 졌어요. 졌기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감독님께서 '졌어도 잘했다고. 신경 쓰지 말고 다음 경기 잘하면 된다고.'고 말씀하시면서 어깨를 툭툭 쳐주셨어요. 그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그 순간은 평생 못 잊을 거예요. 제가 김호 감독님을 만난 것은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좋은 선물이죠. 지금이 제일 행복해요."
이성운은 가능성과 희망을 발견한 동시에 반드시 풀어야 하는 숙제를 찾았다. 김호 감독은 이성운에 대해 발전할 것이 많은 선수라고 평하며, 이성운의 분발을 요구하기도 했다.
"감독님께서 '장점은 있는데,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단점을 고쳐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세요. 수비는 자신이 있는데, 공격은 자신이 없어요. 공격적인 부분에서 보완할 점이 너무 많아요. 감독님 지시상항도 바로 공격적인 부분이죠.
특히 게임완급조절 능력이 부족해요. 수비형 미드필더는 경기 흐름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능력이 가장 부족하죠. 만약 공격적인 부분만 개선된다면 180도 달라진 이성운의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올 겨울에 노력해서 반드시 보강해야죠."
다시 시작이다. 30살에서 새롭게 시작한 이성운은 31살이 되는 2008년에 더 높은 꿈을 향해 뛸 것이다.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발전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한 발자국 더 뛸 것이다. 더 큰 도약을 준비하는 이성운의 힘찬 각오를 들으면서 인터뷰를 마쳤다.
"무엇보다도 발전했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작년만큼은 아니네...'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요. 올 겨울 주전 경쟁에서 반드시 이겨서 후반기처럼 게임에 뛰고 싶어요. 물론 중심적인 역할은 못 할 거예요. 하지만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선수를 도와줄 수는 있을 거예요. 그 역할을 정말 잘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팬들에게 성실하고 투쟁심이 넘치는 선수로 기억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모습이 제가 제일 잘할 수 있는 모습이죠. 앞으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열심히 싸우려고요. 올해 팬들의 사랑에 고마움을 많이 느꼈어요. 그 사랑에 보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운동장에서 최선을 다해 뛰는 거죠."
K-리그 명예기자 김정현
첫댓글 이런선수들이 모여서 K리그를 이끌어가는 것일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