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
('오늘의 책' 발행)에서 발췌한 글들
* 보통 일반인의 경우라면, 극단적으로 행복한 운명을 향유하지 못할 바에야 극단적으로 불
행한 운명에 빠져들지도 말아야겠다는 것이 공통적인 소망으로 되어있다.
* 체념적 운명론은 언제나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공포감을 가져다 준다. 석가는 生, 老,
病, 死를 인생의 4고(四苦)로 꼽으면서 중생이라면 누구나 이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물론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욕망의 단절’을 들고, 도(道)를 닦아 생사의
윤회를 초월하는 열반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죽었고 지
금까지도 어느 누가 생(生)과 사(死)를 초극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못내 억울하고, 게다
가 적반하장 격으로 세상에 내보내준 은혜(다시 말해서 낳아준 은혜)를 고마워하라고 들입
다 강조해대는 효(孝) 사상이 얄밉기도 하다.
* 우리는 우리를 이 세상에 내보낸 부모(또는 섭리)에 대해 일체의 원한도 감사도 지니지 말
아야 한다. 그리고 우연히 태어난 삶에 대한 원한을, 우리의 노력에 의해 필연적인 삶, 행복
한 삶으로 이끄는데 따른 즐거움으로 바꾸도록 애써야 한다.
그러면 출생 그 자체는 이미 고통이 아닌 것이다.
* 나 역시 죽음이 두렵기는 마찬가지지만,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은 이렇다.
즉, 인간의 죽음이나 개나 소의 죽음이나 별다를 게 없지 않나 하는 것이다.
동물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토록 태연히 무관심할 수 있는 인간이,
유독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만 그토록 현학적이고 철학적인 담론들을 생산해낸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역겹고 혐오스럽다.
* 하지만 이런저런 자잘한 풍파들을 겪다보니 그때마다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특히 합리적 지성의 수준이 낮은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 종교란 결국 인간이 갖는 「궁극적 관심」이나 「궁극적 공포」에 대한 안쓰러운
해결책이나 자위책에 지나지 않는다.
* 예수가 처녀에게서 나왔든 석가가 어머니 옆구리에서 나왔든, 그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 것을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고구려의 동명성왕이나 신라의 박혁거세가
알을 깨고 나온 것 역시 액면 그대로 믿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종교적 신화나 사실을 상징적 총체성의 시각에서 바라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짜 핵심을 끄집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진짜 체념 뒤에 찾아오는 행복」은 그것의 외형이 기독교든 불교든 또는
여타의 사탕발림식 인생론이든, 인간의 진보적 운명개척 의지에 쐐기를 박는다는
점에서 득보다는 실이 많은 자위책에 불과한 것이다.
* 최후의 심판이나 휴거(携擧)같은 것은 주로 예수의 제자 요한이 썼다는
『요한계시록』에나오는 것이다. 허황스런 이야기이다.
* 프랑스의 카톨릭 사학자 에르네스트 르낭은 『예수의 생애』라는 책에서,
예수의 부활은 몇몇 제자, 특히 막달라 마리아 등 열성 여신도들의
소망적 사고가 만들어낸 환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조심스레 결론 내리고 있다.
* 예수는 우선 하느님의 정체를 「사랑의 하느님」으로 바꿔놓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부자지간으로 설정함으로써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게 다져나가려고 했다.
사실 예수가 곧 신이라고 하는 삼위일체설은 신약성서 어디를 봐도 찾아볼 수 없다.
예수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아들이므로 마음만 제대로 먹으면 누구나 하느님의
절대적 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불행에 빠져들게 되는 것은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 탓이오」를 모든 세상사에 적용시켜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사람들은 점점 더
죄의식 상태에 빠져들어 원래 없었던 고통이라도 새로 만들어내고 싶은 무의식적 충동을
느끼게 되기 쉽다.
그러니까 모든 게「내 탓이오」라고 보기 보다는 「안되면 조상 탓, 잘되면 내 탓」이 더 맞고,
궁극적으로 보면 모든 게 「하느님 탓」인 것이다.
* 인간은 죄인이 아니라 누구나 다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연히
시시콜콜한 일에까지 무조건 회개해가며 자책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 하지만 예수의 이러한 메시지는 수구사상에 젖은 당시의 기득권 지식인들에게 전혀 먹혀
들지 못했고, 그의 어이없는 죽음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과 인품은 많은 민중들을 감복시켜 그의 죽음을
구약시대부터 내려온 속죄양의 상징과 결부시키게 했고,
그 결과 대속(代贖)의 교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그가 다시금 부활한 뒤 하늘 나라로 승천했을 것이라는 제자들의 순박한 믿음은,
「하늘나라」의 의미를 예수가 그토록 애타게 바랐던 지상 위에 펼쳐지는
하늘나라가 아닌, 저 세상 어딘가에 영적으로 존재하는
「선택받은 자들만의 이상향」으로 뒤바꿔버렸다.
*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포이에르바흐는 『기독교의 본질』이란 책에서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단언했다.
인간은 「상상력」과 「욕망」그리고 「이기심」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욕구하고 있지만 도저히 실현시킬 수 없는
여러가지 이상들을 「신」이라는 존재를 통하여 구현시켜
도움과 위안을 받으려고 한다.
신이란 결국 인간의 욕망이 상상 속에서 상징적 존재로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이며,
환상을 통해서라도 실현시켜 보고자 애쓰는 인간 욕망의 부산물이란 얘기다.
* 왜 기도가 솔직해야 하는가.
신이 솔직하길 원해서가 아니라 기도가 갖는 자기 최면 효과 때문이다.
즉 자기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은 정곡을 꿰는 속담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정직한 욕망의 씨를 심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한 운명을 창조해 낼 수 있다.
* 참된 기도는 하느님에 대한 「아부」로서가 아니라
「솔직하게 떼쓰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우리가 처한 현실은 어둡고 괴롭지만 끈질긴 희망을 갖고 기도하는 한
이 땅 위엔 언젠가 반드시 정의와 평등, 그리고 구체적 사랑의 즐거움과 행복이 물결치는
「하늘나라」가 이룩되리란 것을 그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갔다.
* 이성을 통해 육체를 콘트롤하기보다는 육체를 통해 이성을 콘트롤하는 편이
훨씬 더 효과적일 뿐더러, 그런 방법에 의해서만 몸과 마음의 균등한 행복이
이루어질 수 있고 운명의 극복 또한 가능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 평상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성적 쾌락 자체가 죄악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사라가 현실 속의 인물이라 해도 그녀가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상
법으로 처벌할 수 없거늘, 하물며 허구적 소설 속의 인물임에랴.
살인사건을 그린 소설의 작자는 왜 잡아가지 않는지 정말 궁금하다.
* 평상심이란 결국 잘 먹고 잘 살며 잘 사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신적 이데올로기보다는 육체적 본성에 더 충실할 수 있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 유교는 원래 처세철학에 치중하여 거기에 다시 정치철학을 가미한 철학체계이다.
* 그렇지만 바로 이러한 점이 『논어』의 장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서서히 깨달아가게 된다.
우주의 본질을 알아보려고 발버둥쳐 봤댔자 결국 헛수고로 끝나기 쉽고,
인생의 순간순간을 대충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철학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공자가 『논어』첫머리에서 말한 「자잘하고 조그마한 기쁨들」에
눈을 돌리게 된다. 즉 마음을 통할 수 있는 진실한 벗과의 교제,
책을 통해 인생의 지혜를 깨쳐보려고 애쓰는 탐구의 자세,
그리고 지나친 출세나 명예를 바라지 않고 그저 묵묵히 내실을 다져나가는 겸양의 정신,
이런 것들이 결국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준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 우리나라의 경우도 그래서, 고매한 인격을 인정받은 조선조의 풍류시인들은 모두 다
지배계급에 속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송강 정철이 그랬고 고산 윤선도가 그랬다.
윤선도(尹善道)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에서 어부들의 작업광경을
서정미 넘치게 읊고 있는데, 그가직접 나서서 그들의 노동에 동참한 것은 아니고
다만 바라보며 즐겼을 뿐이다. 그는 보길도로 귀양을 가서도
백성들을 동원하여 큰 정원을 만들어 놓고 거드름떨며 노닐었다.
그래서 당시 백성들에겐 서울서 귀양온 선비들이 원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지은 시 가를 감상하며 즐긴다는 것은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 개천이라야 용 난다.
*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려면, 부모의 학벌이나 지위가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자식에게 아무 것도 훈계하지 말아야 한다.
더러운 개천에서 미꾸라지가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고,
소독된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자식을 키울 때는 지극히 야(野)하고 지극히 「무식」하게 키워야 한다.
* 「역설적 의도(paradoxial intention)」란 역경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거꾸로 생각하여 밀고 나가라는 말인데,
제일 좋은 예를 불면증의 치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잠을 자려고 애쓰면 더 잠을 잘 수 없게 되고,
잠을 안 자려고 애쓰면 저절로 피곤에 겨워 잠이 오게 된다.
* 마음이 가난한 자, 즉 욕심이 없는 자가 오히려 복을 받으며,
공즉시색(空卽是色), 곧 마음을 비워놓아 욕심이 없어져야
재물(色)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 이것은 죽은 뒤에나 천당이나 극락에 가보자는
현실도피적 가르침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있는 동안에
「복」을 받을 수 있는 실천원리였다. 이충무공의「필생즉사(必生則死) 필사즉생(必死則生)」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 빅터 프랭클은 우리가 고난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과 친숙해지는 것,
즉 그것의 존재에 공포를 느끼지 않고 그것을 가까이 하려는 태도가 오히려
고난을 없애주는 유일한 방도라고 말하고 있다.
고난은 또한 인생의 의미를 찾는 데 도움을 준다. 인생은 마라톤이자
한편의 드라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의「완성도」를 가지고 따져야지 부분을 가지고
그 성패를 따질 수는 없다.
* 유태인이었던 빅터 프랭클은 나치정권에 의해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어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그의 유명한 저서『죽음의 수용소에서』인데,
이것은 주문왕(周文王)이 장기간의 옥살이 끝에 역(易)의 기초를 구상할 수 있었다는
사실과 유사하다 하겠다.
* 인간이 기독교사상에서처럼 영혼의 정화를 통해서 의미를 찾든, 실제적인 부나 안락 등의
쾌락을 통해서 의미를 찾든, 찾는다는 사실 자체는 마찬가지다.
*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주역』에 관심을 가져 지금까지 책장이 닳도록 주역을 들여다보았고,
천 번도 넘게 역점(易占)을 쳐보았다. 그렇지만 요즘엔 거의 점을 치지 않는다.
점보다는 스스로의 판단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우리는「지금」내가 갖고 있는 느낌과 본성, 그리고 욕구에 의지하여 하루하루를
그저 땜질해나가듯 무심히 살아가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이럴 때도「역설적 의도」의 효과는 역시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역설적 의도는 일체의 이성적 계산이나 도덕적 당위(裏)?를 초월하는 태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한마디로 말해 현재적 욕구에 정직하되「길게 보고」살며「두고 보자」정신으로 나가자는 것이다.
「두고 보자」정신은 절대로 복수의 정신이 아니다.
시류를 초월해 주변의 유행사조에 연연해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가는 정신이 바로
「두고 보자」정신이요, 천진난만한 솔직성과 직관력을
지닌 천재(天才)의 정신인 것이다.
* 또『데카메론』에 나오는 얘기처럼 색(色)을 탐한 승려는 그 정직성을 인정받아
오히려 천당에 가고, 색을 절제한 승려는 위선죄에 걸려 지옥에 빠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 이른 바「성적 표현물」에 대한 신경증적 알레르기 증세에서 벗어나 무원칙하고
간헐적인 본때 보이기식 규제를 풀고 마음대로 실컷 보라고 권장하면,
오히려 음성적 호기심이 없어지고 색광(色狂)들조차 시들해져서
성범죄가 훨씬 줄어들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고질병인 수구적 봉건윤리와 이중적 위선성,
그리고 권위주의적 폐쇠성의 척결이 덤으로 따라올 것이다.
아니, 덤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진짜 핵심이자 목표다.
한국 사회에서 성에 대한 담론이 가능하게 하고 성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해야만,
우리는 개방적 사고와 창조적 상상력에 바탕한 참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 특히 상상력이나 창의력이 발달한 천재적 조숙아들은 규범적 간섭이나
규제를 못 견뎌하는 게 보통이다.
* 정치적, 문화적으로 후진된 사회일수록 도덕만능주의의 경향이 강하고
육체보다 정신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 경제적 선진국으로 갈수록 이혼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생의 목적에서 성적 쾌락추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적 쾌락추구의 면에서만 볼 때 가족적 연대감의 형성과 자식 기르기 위주의
기존의 결혼제도는 짜증나는 권태감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특히 여자 쪽에서 볼 때 여간 밑지는 장사가 아니다.
* 혼전에 죽어라고 순결을 지킨다고 해서 꼭「순결한 사람」
(아니면 촌스런 사람)이라고 할 수 없고, 혼전에 프리섹스를 한다고 해서
「방탕한 사람」(아니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다.
즉, 모든 것이 다 「각자 선택」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 다만 반드시 강조되어야 할 것은 결혼과 성을 일치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노처녀, 노총각이라고 해서 꼭 성에 굶주릴 필요는 없다.
독신주의를 고수한다는 것은 성의 자유를 만끽하겠다는 의도로 이해돼야지
성적 결벽증과 관계지워져서는 안된다.
* 또한 무분별한 이혼의 남발을 막기 위해 혼전에 시험적 동거기간을 거친다거나하는 식으로
보다 신중한 결혼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만약 결혼을 단행하더라도 최소한 2년 정도는 아이를 낳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혹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자식이 없을 경우 후유증이 훨씬 적어지기 때문이다.
* 자식에 대한 극진한 모성애를 갖고 있으면서도 남편을 보살피는 일이나
한 남편만을 고정적인 성적 대상으로 삼는 일엔 염증을 내는「당당한 미혼모형」이 그것이다.
남자의 경우엔 이런 형이 없다고 보는데, 그 까닭은 원래 동물계의 경우
수컷은 사정(射精)의 목적을 이루고 나면 곧 짝에게서 도망가
새로운 짝을 구하는 것이 보통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 모든 여성은 당연히 모성애를 갖고 있어야 하고 결혼을 통해서 낳은 아기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편견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적인 편견이 한 인간의 운명을 출생 이전부터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 나는 성윤리적 과도기에 처해있는 한국에서는 혼전의 성애형태로 구강성희가
가장 무난하다고 본다. 그리고 결혼 이후에도 구강성희를 자유롭게 즐길 수만 있다면,
우리나라 부부들이 흔히 갖고 있는 성적 권태증이나 강박증
(특히 남성을 옭죄는 정력부족에 대한 공포)은 한결 감소될 수 있다고 본다.
* 타고난 미모에 의한 단아한 고전미보다 인공적으로 가꾼 섹시하고 그로테스크한 개성미가
현대미의 특징이라면, 미국의 육상선수 그리피스 조이너가 손톱을 유난히 길게 기르고
거기에 알록달록한 칠을 하여 세인들의 눈을 끌었던 것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 동성애 문제는 음양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이성애만을 추구하는
보통사람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현실이 현실이니만큼 그것을 죄악으로 보거나 변태로 볼 수는 없다고 본다.
굳이 동성애가 늘어나는 원인을 추리해 보자면,
결국 인간의 창조적 상상력이 무한하여 계속 별스러운 쾌락을 추구한 나머지
도달하게 된 특이한 애정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성에게는 용감하고 정력적인 남성상만을,
여성에게는 복종적이고 부드러운 여성상만을 강요해왔기 때문에
빚어진 반동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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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너무잘읽고 갑니다..머리속에 다넣고싶은데...용량이적어서 안다라 주네요.ㅎ.ㅎ
마음속 깊은곳을 흔들어 깨우는 좋은글이군요, 폭 넓고 깊은 사고(사회성)와 철학이 그리고 종교적 접근까지 구구절절 가슴으로 닮고 갑니다, 책방을 들려 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