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삼류무사 245 떠나는 사람들 크게 만족스러운 대화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던 자리였다, 적어도 북궁단야에게 는. 그래서일까. 평소보다 길어진 술자리는 그만큼의 취기로 이 얼음장 같은 청년의 마음을 녹였고, 이성 또한 조금은 무디게 했다. 아무리 그래도 북궁단야는 북궁단야였다. 새벽녘이 다 되어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가 탁자를 짚으며 던진 한마디는, 그의 성격을 약여하게 보여주 고도 남음이 있었으니까. "봉황루에도 객방이 있던가‥‥‥‥“ "아니, 난데없이 객방타령은 무슨‥‥?” 하던 장추삼이 그의 의도를 말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마도 저 칼 같은 사내는 동료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싫은가 보다. 하긴, 자기가 마신 술 하나도 이겨내지 못하고 추태를 부리는 사람만큼 한심한 군상도 없으니까. 객방 문을 열자마자 침상으로 맹렬히 돌진하는 북궁단야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부러웠지만 집에서 기다 리고 계실 부친을 생각해서 장추삼은 발길을 돌렸다.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는 잠자리. 북금단야에게 지금의 이 순간은 적설산장을 나선 이후 가장 편안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속된 말로 잘 삶아진 감자처럼 푹 퍼져 있었으니. 하운이 방문을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얼 시진이고, 하루 종일이고 늘어졌을 거다. 쿵쿵쿵! “으, 으음.....” "북궁 형, 북궁 형, 계시오?“ '아....‘ 늘 듣기 좋은 음성이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리 반갑지 않은지. "들어오시구려‥‥‥‥” 들어선 하운에게 산발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을 마시는 북궁단야가 어떻게 보였을까. 아무튼 놀랐음은 틀림없다. "어?! " "왜 그러시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신경 쓰지 마시오. " 이러면 더 신경 쓰인다. 이런 경우, 북궁단야의 행동 양식상 계속 추궁하거나 말로 채근하지 않는다. 그저 굳은 표정으로 대상을 묵묵히 응시할 뿐이다. 그리고 효라는 만점이다. "별거 아닌데‥‥‥‥ 그래도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토설만이 이 자리의 안녕에 기여할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파악한 하운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의자에 앉 았다. "음, 그러니까, 그게· " 하 형답지 않게 뭐 하는 거요, 라고 다그치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마주 앉는 편을 택한 북궁단야가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 목말라서 말이 나오지 않느냐는 표현. "그냥 우스개니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시오. 말았소?“ 뭐가 이리도 거창한 건지. “그러니까, 음‥‥ 방골 전의 북궁 형은 꼭 머리 긴 장 형 같았소. 장형도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은 그렇게 머리를 풀어헤치고 물을 마신다오. " 허탈.... "보시오! 별거 아니라고 했잖소! " 진짜 별거 아니었다. 그런데 살짝 기분이 나쁘다. "하필 그 친구를‥‥‥‥“ 하고 입을 열던 북궁단야가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도가에 몸담고 있는 하운에게 술은 이질적인 물건이다. 거기다 그의 앞에서 숙취의 갈증을 토로한 남자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오? 여기야 그 친구에게 물어서 알았다고 치겠지만. " "아, 그렇군. " 손뼉을 친 하운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소리 없이 그의 장포가 부풀어 올랐다. '지청술(地廳術)?‘ 말 그대로 지청술은 땅의 울림을 빌어 작은 소리를 잡아내는 내가공부다 주로 적을 추정(追縱)할 때 쓰이는 수법인데 공력이 높아지면 천리 밖의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까지 잡아내는 경지 에 이른다고 전해지는데 이를 일컬어 천리지청술(千里地廳術)이라 부른다. 물론 하운의 공부가 위의 경지에? 沮?이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반경 일 장 내의 소리는 들을 정도는 된다. "대체 무슨 말이기에?“ 북궁단야의 눈에 배어 있던 잠과 취기가 꼭 달아났다. 그렇게 잠시 동안 주위를 경계한 하운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다탁에 밀착시키며 입을 열었다. "본산(本山)에 다녀오려 하오. " "본산이라면‥‥‥“ 하운에게 본산은 물론 화산을 일컬음이다. 본래 본산이라고 하면 불가에서 관할 구역에 딸려 있는 여러 관할 절들을 통괄하는 사찰을 부르는 말인 데, 도가의 하운도 뭉뚱그려 같은 표현을 한 것이다. "무슨 기별이라도 온 거요? " “그런 건 아니지만... 많은 일이 있었잖소. 대사형으로서의 도리가 아니었지. " 운명을 달리한 백무량을 말하나 보다. "그렇군,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소. " "알고 있소. 그래서 더 가봐야겠소. " 알고 있으면서 그래서 가야 한다? 단순한 귀향이 아니라는 의미. 아마도 하운에게는 북궁단야가 짐작하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을 터였다. 현 무림에 관련된 무엇이. 북궁단야는 궁금했지만 묻지 않고 웃음으로 화답했다. 말을 하려 들었다면 질문 없이 말해 줄 사람이요, 밝히지 않을 일이라면 절대로 입을 열지 않을 사람이 바로 하 樗甄? 지켜주어야 할 것이라면 반드시 지켜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우애가 아닐까. 그리고 감추고 싶은 것이라면 억지로 들추지 않는 것도. "부디 편안한 길이 되길 바라오. " 하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담백한 북궁단야의 응대가 마음에 들었지만, 마치 먼 길이라도 떠나 는 사람처럼 대하는 그의 말투가 왠지 우스웠다. "북궁 형, 그 말은 무슨 땅 끝 오지(臭地)로 떠나는 사람에게나 보낼 얘기라오! " 둘이 마주 보고 호탕하게 웃었다. “음?” 이제 보니 하운의 손에 작은 행낭이 들려져 있었다. '어디 간다고 미리 떠들 사람이 아니지.' "그럼‥‥‥‥“ 일어선 하운이 손을 들어 보이고 빙글 몸을 돌리다 문득 멈춰 섰다. "청빈로를‥‥ 부탁하오 ‥‥‥‥“ 뭔가 말하려다 그만둔 북궁단야의 귀에 하운의 음성이 연속적으로 꽂혔다. 평소의 여유롭고 넉넉했던 그의 태도와는 달리 알 수 없는 걱정을 품은. "장형의 말대로라면 흑월회가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보일 거요. 아니, 이미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또한 무림맹 측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고. " 그들의 무림행이 파생한 결과는 그리 간단치만은 않을 터였다. 이제 무림맹에서도 모종의 조치를 감행하도록 만든 경향마저 있으니까. 어제 장추삼과도 그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기에 별로 새롭지는 않았다. 이건 누구나가 예측 가능할 정도로 평이한 전개였으니까. "진정으로 의아한 갓은 ‥‥‥‥” 그의 등판에서 미세한 전율을 느꼈다면 잠과 취기 때문일까. "무려 칠 년이 넘도록 그들을 방치해야만 했던 소림과 아미, 그리고 무림맹의 행보요. 아무리 그들이 꼬리를 밟히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칠년이란 시간 동안 정파도 아닌 패도의 조직이 하남 땅을 꽉 밝고 있던 걸 용인했다. 조금이라도 정파의 속내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흔들 일이오. 대체 왜‥‥‥‥“ 배금성은 저녁상을 물리고도 한참이 지난 늦디늦은 밤에 찾아왔다. "자고 있었냐?“ "별로...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 술 생각이 나서 들른 건 아닐 테고” "음....“장추삼의 말에 단단한 체구의 청년은 그만큼이나 굳은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소 별로 말이 없던 그였지만 오늘의 침묵은 왠지 깊은 울림으로 장추삼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말았다. 이제‥‥ 이별이라는 걸. "떠나는 거냐?“ ” .....! " "뭘 놀라? 네 녀석의 이마에 나 간다오~ 하고 딱 붙어 있구먼. " 허, 하는 얼굴로 장추삼을 바라보던 배금성의 입가에 기분 좋은 선이 하나 그려졌다. 사람들은 모른다. 이 심통맞고 유쾌한 사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얼마나 섬세한지. "아무들 너란 녀석은.....“ "안타, 나란 인간이 얼마나 멋있는지. " 물론 바보이기도 하지만. "좋겠다. " "캬하하하! " 그의 멍청한 광소를 마주 보며 배금성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물끄러미 친구를 응시했다. 아니, 친구의 모든 것을 담으려는 것처럼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렇게 장추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이래? 똥무게 잡지 마라! 전혀 멋있지 않단 말이야! " "아니‥‥‥‥“ "뭐가 아니냐! 내가 조금 멋져 보이니까 질투 나서 그러는 거지? 속 좁은 놈, 그리 부러우면 너도 멋지 게 사는 법을 배우라고. " 실없는 말을 나누기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쉽지만 그건 사실이니까. "술 한 잔 못 나누고 떠나는 게 너무도 아쉽다. " '오늘만 날이냐? 다시는 못 볼 사이도 아닌데 웬 궁상이야?' 말은 담담하게 했지만 친구의 갑작스런 작별 인사는 장추삼에게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목소리가 켰을지도 모른다. 그 마음이 전달되었을까. 배금성 역시 다소 들뜬 음성으로 화답을 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아직 살날이 산 날보다야 많은 우리들이지. " "당연하지! 내가 언제 틀린 적이 있었냐? 안 그래, 친구?” 그 말을 끝으로 두 친구는 잠시 입을 닫았다. 뭔가 어색했다. 뭐랄까.... 한 이 할 정도가 모자랐다. 그러나 서로 그걸 찾을 방법이 없었다. 가려낼 시간도 없었지만 가려내기엔 둘의 마음이 너무 격해 있었다. "그, 저‥‥‥‥“ "상황이 그리 몰고 가네. 있고 싶어도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다. " 어떻게든 말문을 터보려던 장추삼을 대신해서 배금성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흘려보내기엔 너무도 소중한 시간이다. 그런데 흘러가는 시간은 왜 같은 빛깔일까. 아주 조금만 달리 보였으면 하는데. 왜 시간은 담아둘 수 없는 걸까. "그리도 안 좋은 거냐? 상황이란 게 말이다. " 처음으로 장추삼의 표정이 굳어졌다. 현재와 다소 비껴 서 있는 친구조차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청빈로. 아니면 친구 역시 이번 일의 주체, 혹은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건가. 뭐든 간아.... "그럼 가라. 잡을 수도 없는 일일 테고, 잡아서도 안 될 일로 보인다. " 젠장이다. "추삼아‥‥‥‥ "음?“ “..........” "뭐야? 불렀으면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너답지 않게 왜 이래?“ "아, 아니..... " "안이고 밖이고, 말을 해라. 싱겁기는. " 장추삼의 핀잔에 배금성이 목을 벅벅 긁다가 마지못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꺼낸 말이 하도 평이한지라 언뜻 뱉기가 어려웠다. "부디.... 몸‥‥ 조심해라. " 뚫어지게 그의 입을 보던 장추삼이 픽 하고 웃어버렸다. 뭐라고 대답해 주어야 할까? "물론이지! 감히 누가 이 장추삼이에게 껄떡거리겠어? 그런 걱정은 꽁꽁 붙들‥‥‥‥“ 가슴을 탕탕 치며 껄껄거리던 그의 말은 배금성이 침착한 한마디 에 의해 잘렸다. 마무리 괴성이니 뭐니 해도 친구는 그저 친구일 뿐이다. 친구는 소중하니까. "장난이 아니야. " "지금 네가 장난하는 걸로 보여?” '게게 한 말이 아니다. 이 조그만 청번로에 불어오는 바람 말이야. 그저 장난같은 미풍이 아니다. 엄청난 태풍일 거야. 그에 쫓겨 몸을 피하는 겁쟁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우습지만‥‥‥‥‘ 번적! "넌 겁쟁이가 아니야! " "뭐?“ 장추삼의 서슬에 배금성이 깜짝 놀렸다. "년 겁쟁이 같은 게 아니라고! 다만 도래하지 않은 때를 기다려 피하는 거지. " "뭘 안다고‥‥‥“ 고개를 모로 꼬는 배금성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장추삼은 무던히도 참았 다. 그래, 오늘이니까. "코웃음? 벌써 두 번째지만 날이 날이니만큼 내가 특별히 봐주도록 하지. 임마, 내가 비록 너에 대해 많은 걸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네가 처한 상황이 뭘 어 떻게 이끄는지 정도는 짐작해. " "눈치 하면 장추삼, 장추삼하면 눈치라는 거 벌써 잊어버렸냐?“ 방금 전까지의 기세는 다 어디로 갔을 까. 금세 바보로 복귀한 장추삼의 대소에 배금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뭘 바란 걸까, 이 바보 친구에게. "잘나셨어. " "캬하하하! 이를 말이냐! 캬카! " "강호행 한 번에 이름만 얻은 게 아니라 아주 머리까지 똑똑해지셨구먼?“ "원래 똑똑했어! " 쓸데없는 말을 할 사이가 없다고 수도 없이 다짐했건만 배금성은 바보 친구가 쳐놓은 그물에 빠져 계 속 맞장구를 쳐야만 했다. 시간이 없는데. "그것참, 십수년이 넘도록 같이 지내면서 왜 그걸 몰랐을까? 단 한명도 우리 괴성 장추삼 대협이 똑똑 하다고는 생각하지 많았으니. 청빈로 사람들 모두가 눈이 어떻게라도 된 건가?“ 그리고.... "그런 건 감춰야 하는 법이거든. 너무 잘남을 보이면 나중아‥‥‥” 이 사랑하는 친구의....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은 왜 있을까나?“ 쓸데없는 말이라면..... 언제까지나...... "어이구! 천하에 이름이 드높으신 괴성 장추삼 대협께서 열이 받으셨으니 힘없고 불쌍한 대장장이는 이 제 죽었구나아~ " 언제까지나 듣고 싶다 ‥‥ "놀아라, 아주. " "하하핫! " "히유~ 그나저나 별이 빌어먹게도 초롱거리는구먼. " "그러게 말이야. 떠나보내기 싫은 밤이다. 철을 두드리는 감촉처럼 시리도록 푸른 밤이야. " "넌 어쩔 도리 없는 철쟁인가 보다. 어떻게 이 시점에서도 철타령이냐?“ "그런가? 아하핫! " 그때 두 사람을 가로지르는 또 다른 음성이 작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렇지요? 이렇게 아름다운 밤에,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이별에 술 한 잔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너무 적적하지 않겠어요?“ "어라? 정 소저?“ "음?“ 넉넉한 웃음으로 둘의 가운데에 선 정혜란이 손 하나마다 든 호리병을 그들에게 나눠주었다. 달달하면서도 시큼한 향기.... "오! 이건! " "좋은 술이군. " "머루주예요. 아쉽더라도 그것 한 병씩으로 날려 버리세요. " 이런 과일주라면 특별히 안주가 필요 없을 터였다. 다시 말해 판을 별이고 앉아서 술잔을 나누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추억은 그 자리에서도 향기로 남겠지만, 회한은 묵혀두면 홀로 썩어 들어간대요. 그러니...... " 망연히 달을 바라보던 그녀가 둘에게 얼굴을 돌려 싱긋 웃어주었다. "이 술 한 병으로 모조리 데려가세요. 추억이든, 회한이든. " 정혜란의 배려에 다시 한 번 감탄이 나을 판이었지만 둘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런 생각도 하지 못했 다. 사실은 내가 먹으려고 남겨둔 건데, 하며 꿍얼거리던 그녀가 둘의 어색한 표정을 보고 혓바닥을 쪽 내 밀며 제 머리를 특 쳤다. "이런, 이런, 눈치도 없이 아직도 머뭇거리다니! 자자, 불청객은 빠질 테니 두 분 죽마고우께서는 석별 의 정을 유감없이 나누세요. " "아니, 저기‥‥‥‥“ 뭔가 미안해서 장추삼이 손짓을 했으나 및어지게 하품하는 정혜란의 능청에 곧 입을 닫아야 했다. "아아, 졸려. 역시 식순이의 싫은 고달픈 법이야. 아침밥은 아무나~ 하아나아~ 반~찬은 아무나~ 하나아~ " 애교스런 노래로 퇴장하는 그녀의 뒷모습에 두 친구는 잠시 잊었던 여유를 되찾았다. "정말로 고마운 처자로군 " "암, 최고지. 그저 성격만 좋은 게 아니라니까. 음식 솜씨 또한 일류라고. " "무공마저 절정이니 그야말로 금상첨화로군. " "짜식,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하지만 잊어라. 마음에 둔 사람이 있나 보더라. " 문득 배금성의 눈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 그런 감정 자체를 잊은 지 오래다. " '얼레?‘ "내겐 사치야. " 괜한 농지거리에 본전도 못 찾았다. 친구의 마음은 그대로 장추삼에게 투영되어 답답한 그 무엇으로 소용돌이처럼 맴돌았다.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나. 무슨 말로 친구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장추삼은 가만히 있기로 했다. 이왕 뱉은 말이니 주워 담지도 못할뿐더러 담을 생각도 없었으니까. 이런 대화도 나누지 못한다면 친구도 아닐 테니까. 친구라면 그의 마음을 대충이나마 이해할 테니까. "마시자! " "그래! " 술병을 입에 박아 넣고 지그시 눈을 감자 주마등처럼 옛 추억들이 떠올라 장추삼의 어깨가 부르르 떨 렸다. 유년기의 치? ?어린 장난들, 청년기의 만용, 그리고 옛 사랑.... 언제나 함께했던 세 명의 친구. 조명산, 그리고 하대보와는 달리 늘 무게 추를 잡아주던 배금성. 그래서 든든했고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어려웠던 친구. 그리고 기출과 귀향 ‥‥ 모든 게 변치 않았건만 단 하나, 그저 과묵해 보였던 친구의 등에 지워진 짐 의 무게, 그걸 엿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 '해서는 안되는 거라 생각했어‥‥‘ 느닷없이 별 하나가 급히 지상으로 하강하나 싶었다. 그렇게 배금성 이 흘린 눈물 한줄기는 장추삼의 몸과 마음을 적셔주었다. "우냐?“ "눈병 났다. " "그렇겠지. " 희미하게 웃던 장추삼이 마시던 술병을 바로 세우고 배금성의 호리병도 낚아챘다. "뭐야? 설마 머루주 한 병 가지고 생색을 내려는 건 아닐 테고. " "바보냐‥‥‥‥“ 양손에 병을 하나씩 든 장추삼이 팔을 올려 달을 향했다 뭔가 사이비 종교의 의식 같았지만 배금성은 가만히 그의 동작을 지켜주었다. 엉뚱하긴 해도 정발 바보 친구는 아니니까. 그리고 터져 나온 황당 그 자체의 웅변. "다른 건 젖혀두고라도 지금 이 시간 이 공간만큼은 이 장추삼이와 멍청한 친구 배금성이가 산다! 대 가? 내 사전에 그런 거 없다! 그런고 로 시간과 공간을 이 술병에 담아 전부 마셔 버릴 테니 우리의 말 에 불만있는 놈은 지금 즉시 나서라! " 나서라, 나서라 ‥‥‥ 그의 말은 정말로 산신령과도 한판 해보겠다는 듯 산과 하늘을 울리고 청빈로 를 감싸 안았다. 그렇게 떠돌던 메아리가 배금성의 가슴 에 사뿐히 내려맞았을 때 과묵한 청년은 두 주먹을 불끈 쥐어야만 했다.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밀리 어던가에 귀를 기울이던 장추삼이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자 씨익 웃으며 병 하나를 배금성에게 내밀었다. "역시 내 구역이라니까. 자자, 마셔라. 산신령도 깨갱한 모앙... 안받고 뭐 해?' "유치하기는..... " "뭐야, 또 우는 거야?“ "눈병 났다고 했지! " "어련하겠냐‥‥“ 떠나면서 배금성은 주려던 것을 전달하기는 했지만 꼭 하고팠던 말은 꺼내지 못했다. 삼류무사 246 미행(尾行) 흑의인이 다시 청빈로에 모습을 드러낸 건 정혜란에게 봉변을 당하고 일주일이 지난 후의 새벽이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나흘 전에도 한번 다녀갔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맡겨둔 칼을 찾기 위해서였으니, 오늘 과 같이 본래의 목적을 가진 방문은 아님을 뜻한다. "혼자 오기를 잘했지. " 만약 서른도 안 된 처자에게 쫓겨 이런 모습으로 암약하는 모습을 세가 사람들이 봤다면. '으으‥‥‥‥.‘ 변명이고 나발이고 화병에 그대로 혼절했을 거다. 차라리 이대로 망나니에게 홀린 땅의 손목을 부여잡고 그놈의 집구석으로 쳐들어가고픈 마음이 굴뚝같 았지만 그는 일단 참기로 했다. 그 이유가 딸의 인격을 존중하려는 인본주의에서 비롯되었거나, 확실한 물증을 잡아서 빼도 박도 못하 게 하려는 치밀함에서 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요즘 것들이란!' 억지로 밀어붙이는 가정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수도 없이 생각했고 그 결과에 관해 나름대로 예리하게 분석하고 종합해 보았다. 그 결과·. 어떤 쪽으로 가정해 보아도 안 좋은 결과만 도출될 뿐이었다. 딸내미의 성격상 잡힌 대로 끌려갈 리도 만무하거니와 억지로, 힘으로 데려가 봐야 건달 놈하고 꿍짝이 맞아서 별의별 헛소리를 늘어놓을게 뻔하다. 이런 경우 그가 취할 행동은 몇 가지 없다. "둘 다 단매에 쳐 죽이거나, 아니면 내가 그 자리에서 자진하는 도리밖에! " 새벽녘이었기에 그의 음울한 독백을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말은 이리하면서도 흑의인의 진짜 속내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후욱~ " 답답한 마음에 터져 나온 한숨. 허나 새벽 공기는 이질적인 따스함을 용인하지 않고 자신들과의 동화를 시도했기에 그의 자취는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완연한 가을이야.' 곧 겨울이 올 것이다, 천산의 하늘이 가장 높아진다는 빙제(氷帝)의 계절이. 역설적으로 성격 급한 흑의인이 가장 좋아하는 절기가. 그때까지는 뭐든 일을 끝마치고 싶다. 역시 이런 번잡한 거리와는 맞지 않는 그였으니까 되도록이면 두 남매도 데리고 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 련만 파팍! 그 놈광이의 집 어귀에 다다를 무렵 감상에 젖어 있던 흑의인의 귀가 쫑긋해졌다 '파공성 (破초聲)?‘ 공기를 깨뜨리는 소리는 이 세상에 무수히 존재한다. 그러나 위와 같이 물체의 움직임에 의해서 파공의 소리가 일어나는 경우는 단 한가지.'사람?’팟! 오른 발로 살짝 지면을 차올리자 흑의인의 신형이 둥실 떠올라 커다란 나무 위로 안착했다. 전설상의 어기충소까지는 아니지만 그야말로 훌륭한 경신술이었다. '이놈의 동네는 어째 이 모양이냐! 부엌데기 처녀가 상승검도를 익히고 있질 않나, 새벽에 돌아다니는 놈들이 경신술을 사용하질 않나!-푸념은 머리에서만 맴돌았다. 흑의인의 수는 의외로 많았으며 일행 가운데 둘 이상은 꽤나 고강한 무예의 소지자였으니까. 흑의인이 놀랄 사이도 없이 의문의 무인들은 장추삼의 집을 스쳐 그대로 내달았다. '이것 봐라?‘ 호기심을 버리라고 자식들에게 신신당부했건만 정작 본인은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따라나서니, 역시 언행일치(言行一致)들을 주사한 이가 또 있었다. 저거, 뭐래요?“ ” 얼레? 뭐다냐?“ 새벽 운동 나온 장추삼과 정혜란에게 정체 모를 인물들의 움직임이 감지된 것은 어찌 면 지극히 당연했다. 똥개도 제 집에선 열은 먹고 들어간다는데 그들의 앞마당을 가로지르고 있으니 어찌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까. 힐끔 서로를 바라본 그들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지면을 박찼다. 물론 살며시. 그렇게 시작한 추적이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장추삼의 표정이 서서히 변해갔다. "왜 그래요? " ” 잠간만!“ 확실하지 않은 얘기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장추삼이 정혜란의 문을 막았다. 그렇지만 그저께의 일이 떠오름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우연으로 치부하기에 너무도 절묘한 일이. 척!척! 열심히 달리던 암행인들이 청빈로에서 외떨어진 어떤 장소에 안착했다. 그리고 뒤따르던 장추삼의 얼굴에 가는 힘줄이 아로새겨졌다. "여기는 이틀 전에 찾아왔던 그분의 대장간?“ ” 왜 아니겠어? 금성이의 철장포다. 그저께 밤이 찾아와서 야반도주처럼 떠나는 걸 이해해 달라던 그 녀석의 집이지.“아직도 배금성과의 이별에 마음이 편치 많은 그였다. 비록 앞에서는 근사하게 보내주었지만 추억 하나하나가 사라지는 걸 보면서도 힘없이 손만 흔들어야 하 는 심정을 그 누가 알까. 그런 견지에서 이름 모를 저들은 매우 불쾌하다. "어디. 무슨 수작을 부리나 한번 보자.” 자연히 시선 자체가 삐딱했고. “이런. 철장포로 들어가는군요. 그분의 식솔은 아니겠지요?” “떠난 지 며칠이나 자났다고 다시 와? 내 친구는 그리 허술하지 않아.” 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철장포로 스며들었다. 잠시 동태를 살피던 정혜란이 장추삼을 바라보았지만 전음을 날리지는 않았다. '이렇게 하나하나 떠나가는구나.'오지 않으려 했다. 친구의 초상이 어느 정도 지워지기 전까지는 대장간 근처에도 발을 듣지 않겠노라고 마음먹었었다. 멍하니 대장간을 바라보던 그의 입에서 잠꼬대와도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어색해…….” “예?” "전혀 덮지 않아. 그래서‥‥ 어색해, " 이곳에서는 늘 이글이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불을 무서워하지 않는 장한들이 힘껏 망치를 내려치며 싱그러운 소리를 만들어 냈다. 하루해가 저물어 술 한 잔이 고픈 장추삼이 괜히 대장간을 어슬렁 거릴라 치면 듬직한 친구 배금성이 웃통을 벗어 젖히고 비 오듯 흐르는 땀을 강인한 팔뚝으로 훔쳐 내다, 멀찍이 떨어져서 헥헥거리는 그 를 보고 껄껄 웃곤 했다. ‥‥그런 시절이 분명 존재하는 모든 일들은 즐거운 회상이 될지언정 결코 현실이라는 이름 아래 되살 아날 수는 없는 법이다 흑의인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또한 황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며칠 전에 방문해서 칼을 찾았던 철장포였기에 암행인의 방문은 이 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온기가 없다.' 대저 철장포에 불이 꺼지는 법은 없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폭풍후가 치나 철장포의 화로에는 뜨거운 화염이 일렁여야 한다. 만약 그것이 꺼졌을 경우라면 단 하나, 철장포가 문을 닫았다는 거다. 그런데 불과 나흘 전만 해도 생기있게 숨을 쉬던 이곳이 왜 이렇게 변했다는 건가. 또한 이런 새벽에 암행인은 뭐고. '정말로 웃기는 동네야.' 그러나 일단은 관망하기로 했다. 관망 이외에 할 것도 없었지만. 나설 명분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나서야 할 이유 자체가 없었으니까.'장~가가. " "보고 있어, " “대체 뭐 하고들 있는 걸까요? 설마 이런 새벽에 터를 보러 온 사람들은 아닐 테고 이해하기 어렵네 요 대답 없이 장추삼은 그들의 행동을 관찰했다. 아무리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도 동트기 전에 집터를 보러 올 리는 없다. 거기다 복면까지 뒤집어쓰고 경신술을 발휘했다면? 이건 갈데없이 힘의 논리로 뭔가를 해결해 보려는 집딘들이 주로 사용하는 행동 방식이다. 그런데 지금 저들이 보이는 행위는 또 뭔가? 집을 샅샅이 뒤지는 것까진 그렇다고 치자. 가재도구 하나하나에 보이는 관심도 일견 넘어갈 수 있다. ” 이곳 경물이 그림으로 그려내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고 말하기 어렵잖아요? " 한쪽에서 대장간의 내부를 정밀한 필체로 담아내고 있는 두 사내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단지 대장간을 그리고 싶어서? 커다란 덩치의 사내와 작고 호리호리한, 그래서 같은 복면을 했다지만 다른 암행인들과 차이가 나는 두 사내는 빠른 속도로 붓을 놀렀다. 그런데 대장간 그리는 데 이런 수선을 떨 필요가 있을까? 중원 천지에 널린 게 대장간이거늘. 그렇다면 한순간에 느낌이 팍, 꽂혀서? 느닷없이 발동한 화상(畵想)에 절로 붓이 움직인 경우 …전부 헛소리다. 어떤 미친 무인이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들고 다니겠는가, 철필(鐵筆)을 주 무기로 쓰는 강호인이라도 붓 한 자루 들고 다니는 게 고작이지. 이들은 처음부터 이럴 요량으로 잠입했다는 거다. 그런데 대장간을 그려서 뭐에 쓰려고? '금성, 너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냐.' 장추삼의 착잡한 심정은 아랑곳없이 이들은 부지런히도 배금성의 철장포를 해체해 갔다. 그러나 단 한 마디의 의견 교환조차 없었으니 이들이 얼마나 잘 훈련된 무인들인가를 알게 해주었다. 부지런히 대장간을 그려가던 두 사내가 안쪽-배금성이 기거하던 집~으로 들어가고 장내를 내려다보던 장추삼이 문득 고개를 돌렀다. "어라, 장 가가?' "가자. 더 있을 이유가 없잖아. " 정혜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의 그라면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최소 다섯 사람의 암행인에게 별을 보여주었을 텐데. 그렇지만 그녀는 모른다, 지금 장추삼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저 허울뿐인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누가 뭐라고 해도 당당한 나의 동무라고 자신할 수 있었는데, 정말로 그랬는데. 비록 친구라고 불러 마지않던 너를 진실로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무엇을 위해 달려왔으며 어떤 가치로 땀을 흘리는지 생각해 봤을까, 아니면 애써 외면했던 걸까.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아야…·. 적어도 지금은 나서지 않으려고 해. 그것이 네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 같아서 내가 장추삼이듯 너는 배금성이니까. 배금성의 세계는 배금성의 이름으로 지켜야 할 테니까. 그게 내가 아는 너었으니까. 안 그래, 친구? 대답없는 질문으로 마음을 추스른 그가 정혜란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호기심은 여기까지가 좋다. 그 이상이 되면 관여가 된다. 관여는 잠시 발을 담근 정도의 의미 이상을 가지게 되고 그건 바로 친구의 일을 떠맡겠다는 거다. 내 친구는 그리 허약하지 않아 아니면 부탁이라도 했겠지 심유한 눈으로 장추삼을 보던 정혜란이 입술 을 한번 물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말대로다. 친구는 어디까지나 친구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모든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 만약 그런 이가 있다면 몽상가임에 틀럼없다. 친구는 꿈이 아니다. 엄연한 실체다. 그렇게 떠나려던 그들이었는데 느릿느첫 철장포로 걸어오는 사내의 등장은 의외였고, 그레서 한순간 발 길이 멈칫했다. “어라? 저분은? "아는 분이세요?“ 몇 차례 뵙지 않았다지만 금성이의 백부님을 몰라볼 리가 없잖아?” 가슴 한복판을 찢어낸 옷을 입은 이 사내는 배금성에게 철화정련의 진도를 묻던 중노인이었다. 장추삼으로는 알 도리가 없는 일이었지만. 단지 분위기있는 중년인 정도로 추억되었던 배금성의 백부. 유년기를 함께 보냈던 친구들이라고는 하나 배금성은 나머지 셋과 달리 열한 살, 정확히 말해 십칠 년 전에 이곳으로 이주한 터였다. 한참 엇나갈 때의 장추삼이 이방인 소년을 그대로 넘겼을 리는 만무한 일. 이들의 첫 대면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으나 배금성이 지닌 묘한 무게감에 장추삼도 곧 호의를 품게 되었 고 둘은 서로를 인정하게 되었던 거다. 그런데 이제 보니‥‥ '처음부터였다는 건가.' 놀람과 씁쓸함의 교차. 장추삼의 얼굴에 알기 어려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흑의인은 조금 다른 이유로 놀랐다 '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대단한 청력을 자랑하는 그일진대 유감 스럽게도 허술해 보이는 중 노인의 기척을 전혀 잡아내지 못했다. '어이가 없어서‥‥‘ 이따위 동네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저 별 볼일 없는 번화가 정도인데 부엌데기 는 절정의 검수요, 야행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경공으로 돌아다닌다. 그뿐인가, 새벽 산책 나온 초로의 사내가 자신의 귀마저 속일 만큼의 움직임이라? 허탈했다. 기고만장이 뭔가를 보여주던 그의 콧대는 빌어먹을 건달 놈의 동네에 들어서면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 고, 이제 남은 건 처량한 호기심이 전부라니 '좋아!' 오기가 생긴다, 이 젠장맞을 동네가 어디까지 자 신을 놀라게 할지.이제는 그날 백수 놈이 천하를 울리는 삼성의 일인과 자웅을 결할 고수라고 해도 놀 라지 않을 것만 같았다. 생선 머리를 따는 어물전 상인의 손에서 매화검법이 술술 풀려 나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다. 차력 시범을 보이는 떠돌이들이 백보 신권으로 치고, 금종조로 받아낸다고 해도 그냥 넘어갈 판이다. 동네 주먹패들이 오행검진으로 상대를 압박하고, 둘러싸인 녀석이 달마삼검으로 적들을 응징한다고 해 도…·. 아, 이건 좀 무리다. 아무튼! 웬만한 일로는 이제 그를 놀라게 할 순 없다! 왜! 여긴 이상한 동네니까! 그러니까 갈 데까지 가보잔 말이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식순이 처녀에게 하도 당해서 기가 죽어 있긴 하지만 산장의 식구 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도 한성격 한다는 사실을! '더 해봐! 더!' 흑의인이 이런 요상한 전의를 불태 우고 있을 때 중노인은 천천히 거리를 가로질러 철장포 앞에 섰다. "뭐 하시는 분들인가?' 낮고 묵직한 음성. 평범한 체구와 달리 목소리에 힘이 있었으며 또렷했고, 무엇보다 여유가 넘쳐흘렀다. 파팍! 순간적으로 암행인들이 흩어겼다. 모습을 감추거나 하는 행등이 아니라 그를 포위한 형국. 숨 한 번 뱉기 전에 이러한 동작을 이루어냄은 역시 고도의 수련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뉘시오! " 앞쪽에 위치한 복면인이 한 발 나섰다. 경거망동하기 어려운 것이,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 치더라도 이들 가운데 중노인의 접근을 눈치챈 이 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쓸데없는 호기심처럼 위험한 것도 없다는 걸 안다면 갈 길이나 재촉하시오! " 대답없이 대장간 내부를 휘휘 둘러보던 중노인이 문득 한숨을 쉬었다. "당분간은 안전하리라 믿었거늘, 벌써 찾아냈다는 건가. " “……!” 그 말은 이 대장간과의 관계를 암시하는지라 복면인들의 눈빛에 차가운 살광이 깔렸다 그러나 증노인 은 더없이 태연했다. "비록 주인이 없다지만 손이 주가 될 수는 없는 법. 어서들 떠나시게. " 움철. 뒷짐 진 채로 동네 아이들 훈계하는 어른마냥 한가로이 뱉은 말인데 그 속에 담긴 뜻은 절대로 편안한 것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음츠러들었지만 흑의인들은 곧 정신을 차렸다. 말 한마디에 지고 들어갈 정도로 얕은 수행을 쌓지 않았고, 말 한마디로 물러설 거라면 애당초 칼을 잡 지도 않았을 터였다. "축객령(逐善令)에 얼어붙을 우리로 보였다면 뭔가 착각한 거요. " 그들의 반발에 중노인이 허허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어찌겠다는 건가? " "귀하나 갈 길을 가라는 거요. "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말을 늘이던 중노인이 문득 한숨을 쉬었다. 피를 저어하는 건 아니다. 무림의 율법과도 같은 일이고, 그 정도를 각오하지 않았다떤 애초부터 무학에 뜻을 두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곳만큼은 지키고 싶다. 이곳에서 만큼은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 이곳은 그의 하나밖에 없는 제자의 모든 것이자 그 자신의 모든 것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지켜야겠다, 비록 피를 보더라도. "정그렇다면……. " 중노인이 뒷짐 진 손을 느렷느릿 풀며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는 일이지. "우웅 --손을 푼 것뿐인데 중노인의 주위로 무서운 기세가 일어섰다. 달그락, 달그락, 미처 가져가지 못했던 집기들이 그의 기세에 춤을 추기 시작했다 기세가 깊어지자 대 장간 바닥에 깔려 있던 모래들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후음!“ 뒤로 물러서며 짧은 기합으로 전의를 가다듬은 복면인들이 허리춤에서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엔 경악이 배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저 정도의 고수를 만나다니!' 쉬운 일일 거라 했다. 그저 빈집에 방문해서 주위를 감찰하는 게 전부었으니까. 그런데 저런 고수와의 조우라니‥‥ 그것도 새벽에 말이다. 복면인들의 코에서 더운 김이 쏟아졌다. 주위의 온도 때문이었을까? 두 손을 가슴께로 들어 올리던 중노인이 손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며 한마디 던졌다. "흑월회에서 왔는가?” 그들의 눈이 커지는 것에 질문자의 마음은 더없이 착잡해겼다. 예상은 했지만 정작 결과가 그와 같음에 답랄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렇군 ‥‥‥“ 그래서 피하라고 했다. 이것을 염려해서. 언제까지나 숨어 있을 수는 없을 거라고, 결국은 꼬리가 밟힐 거라 걱정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을 터었다. '다행이야‥‥‥‥” 과연 다행일까. 그건 누구도 모를 일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래, 이 시점에서 누구인지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 그저 단순한, 어디서나 나올 법한 문답무용(f:3答無用)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였기에 복면인들은 증노 인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한마디가 어떤 상처를 가진 단어들의 나열인지 그들은 결코 알 도리가 없었으니까. 마지막 통첩, 대화의 존재 가치는 애당초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들의 대치는 어느 한쪽의 무한 양보로 풀릴 성질의 것이었다. "연제나 ‥‥‥‥“ ” ‥‥‥‥?“ 계속해서 웅얼거리는 중노인을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선공을 하기는 뭐하고 해서 복면인들 은 그의 독백을 무시하면서 차분히 진영을 짰다. 그리고 그들의 귀에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언제나 너희에게 실망만을 안겨주는구나. 정말로 미안하다‥‥‥‥” 누구에게 한 말일까. 중노인의 절실한 사과는 적어도 복면인들을 향하지 않음은 분명했다. 평소라면 한 번쯤은 되새길 법도 한데 중노인이 뿜어내는 위험한 기도는 복면인들을 다그쳐 그런 사고 를 불가능하게 했다. 그들의 오감은 오직 음습한 죽음의 촉감만을 잡아내고 있었으니까. 휘이잉… 급박하게 몰아치던 공기가 갑자기 쪽 빨려 들어가듯 사라겼다 숨막히던 대치에 어떤 변화가 생긴 걸까. 우뚝. 들어 올렸던 중노인의 손이 중단전 부근에서 딱 멈추고 위험을 느낀 복면인들이 분분히 흩어졌다. 그때, "그만! " 벼락같은 외침과 함께 두 명의 복면인이 대장간 안쪽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은 제론할 여지 없이 철장포를 그리던 크고 작은 두 사내였다. "그만두시오! " 처음의 우렁찬 음성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 전에 다소 새된 음성이 뒤따랐다. 아마도 몸집이 작은 사내의 제자였으리라. 스르륵. 장심으로 집결시켰던 공력을 천천히 와해시키며 두 사내의 등장을 바라보던 중노인의 눈에서 문득 기묘 한 빛이 흘렸다. '무서운 사내다!' 정혜란과 흑의인은 동시에 같은 감탄을 터뜨렀다, 물른 마음속으로. 대저 공력을 모으는 건 강호인의 기초다. 그것을 발출하는 방법은 친차만별이지만 역시 기초라고 하겠다. 그러나 끌어올린 공력을 분출하지 않고 그대로 해소시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 醮? 모인 공력은 마음속으로 품은 생각과 달리 맥을 따라 흐르는 이질적인 기운이기에, 사용하지 않고 다시 몸 안으로 거두어들인다는 건 그만큼의 무리가 뒤따르는 행등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한 인물이라면 적어도 자신의 신체를 마음먹은 대로 통제할 수 있 ?사람이라는 얘긴데 ‥‥현 무럼에 이러한 고수가 몇이나 있을까! 중노인은 가타부타없이 두 사내를 응시했다. 워낙 굳은 표정이기에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는 없었지만 침묵이 주는 무게만큼은 절실히 와 닿았다. 그래서였을까. 그중 덩치 큰 사내가 한 발 나서서 주위의 복면인들을 한번 둘러보고 공력을 돋우어 일갈했다. "불필요한 다툼은 자제하라 일렀거늘! 너희는 내 말을 뭘로 알이들은 거냐! " 커다란 체구처럼 목소리 또한 위맹하였기에 웬만한 담량의 잠정이라면 그대로 얼어버릴 듯한 한마디 이다. 과연 복면인들은 급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자가 어떤 말도 없이 난입한 터라 ·. . " "시끄럽다! 그래도 변명을 하는 게냐! " 사실 복면인들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임무에 충실했다. 아니, 나름대로가 아니라 최선이었다. 물론 일반인들과의 충돌은 최대한 자제하라는 행동 수칙이 없는 건아니다. 그렇다고 정체 불명의 인물이 다가서는데 그대로 방치하라는 건가? 아니면 그의 손에 얌전히 죽어주라 는 건가? 무엇보다… 공력의 수발이 가능한 인물을 어찌 일반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러나 대꾸는 하 지 않았다. 어차피 책임자는 저들이고, 어떤 복안이 있기에 말렀으리라 생각되었기에. "철수하라. " “예?‘ 덩치 큰 사내의 명령을 거역할 생각은 없지만 복면인들로는 이번 명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중노인이 아무리 고수라 해도 겁을 먹었다는 건가? 저들이? "철수하란 말이다. 이렇게 떼거지로 모여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겠나? 얻고자 하는 것은 다 얻었으니 어서 자리 를 떠라. " 그래도 복면인들은 쉽게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설마 우리가 걱정되어 이러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 말과는 달리 정작 두 사내는 나머지 복면인들과 등을 돌리고 있었다. 먼저 가라는 의중이 담긴 행동이 아니겠는가. "으음‥‥‥‥” 가장 먼저 나섰던 복면인이 낮은 침음성을 흘렸다. 이대로 가야 할까? 아니면 모시고 가야 할까? 그러나 곧 그들은 두 사내의 무위를 생각해야 했다. 공력을 통제하는 모습 하나만으로 절정의 기량을 보여준 중노인이지만, 그래서 꺼려지지만, 그들이 아 는 두 사내는 정말이지 무서운 인물들이었다. 현 무림에서 그들을 능가할 고수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개개인으로도 천하를 울릴 그들일진대 둘이라면? "그럼 속하들은 이만! " 처 냉? 그의 선행(先行)에 따라 나머지 복면인들도 일제히 포권을 하고 자리를 떳다. 그때까지 중노인은 어떤 행동이나 말도 벹지 않았다. 복면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문을 막듯 서 있던 두 사내가 서로의 얼굴, 더 정확히 말해 서로의 얼굴에 덧씌워져 있는 복면을 바라 보았다. 꿀꺽. 문득 커다란 사내가 어울리지 않게도 침을 삼켰다. 긴장을 한 것일까, 중노인의 일수(-手)를 보고? 그게 아니라한‥‥‥. 뭔가 석연치 않기는 작은 체구의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도 어깨를 조금씩 떨고 있었는데 평소의 그라면 어림도 없는 모습이었다. "뭘 어찌자는 거지?' 이상한 건 태연스레 말을 늘어놓는 중노인도 매한가지. 담담함을 유지하려고 애쓰지만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의 움직임은 숨기지 못했다. 흔들- 시리도록 찬 새벽바람에 중노인의 가슴팍에 매달린 실밥들이 가늘게 흔들렸다. 손으로 잡아 찢은 듯 거친 형태로 떨어져 나간 옷감의 흔적. 어쩐지 음산해 보일 법도 한데 그곳에 시선을 둔 두 사내의 눈망울엔 왠지 모를 감정이 어렸다. "어쩌자는‥‥‥‥.“ 그때 두 사내가 천천히 복면을 벗었다. 그리고 침묵. 복면을 벗은 사내들도, 그를 바라보는 중노인도 마치 망부석처럼 서로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알아‥‥‥‥.“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뭔가 웅얼거렸다. "알아…·. 보시겠습니까?” 멍청하게 둘을 응시하던 중노인의 입이 어느 순간 꿈결처럼 열렀다. "십팔 년이 아니라 백팔십 년이 흘러도 어찌‥‥‥‥.“ 격동에 말을 잇지 못하던 중노인이 한숨을 한 번 내쉬고 겨우 말을 이었다.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한마디. "나의 사제들아 ‥‥‥.“ 부르르. 온몸을 떨던 두 사내가 그대로 무릎을 끊었다. "대사형을 못난 사제들이 이제야 뵈오! " 그 말속에 담긴 원망과 회한, 그리고 질책, 그리고, 그라고‥‥. "이 못난 사형은 감히 읍을 받을 자격이 없다! " 끝내 중노인이 눈물을 흘렸다. "대사형! " "우우욱! " 머리를 땅에 박고 처절한 눈물을 뿌리는 두 사내의 얼굴에서도 그들이 살아온 어떤 날보다 많은 감정 이 교차되기를 반복했다. 얼마 만의 만남인가? 고작 십팔 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 세월동안 그리고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했 던 서로의 초상과 책망. 그런데‥‥ '이 감정은 뭐란 말안가…….“ 웬일인지 중노인은 그들 곁으로 가 ?못했다. 미안해서? 그렇다면 좋으련만……. ” 왜‥‥‥.“ 울먹이는 목소리로 덩치 큰 사내, 광목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하아‥‥‥‥.” 긴 탄식을 회한의 무엇으로 받아들인 걸까? 광목의 목소리에 한층 더 힘이 들어갔다. "왜였습니까! " 격동하는 두 사제는 모른다, 한때 그들의 대사형이었던 자가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안하게도·… 대꾸없이 뒷짐을 지고 닿을 수 없는 먼 곳을 응시하는 중노인의 목젖이 침없이 뛰놀았 다. "왜였습니까! " 미안하게도, 내 마음은 이미 식어버린 차와 같구나. 극적인 만남이련만 중노인은 별로 감격스럽지 않았다. 둘에게 달려가서 어깨를 안아주거나, 저간의 안부를 묻는, 그런 통상적인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이 만남을 지켜보는 방관자처럼 그렇게 서 있을 뿐이었다. '불과 이십여 년도 안 흘렀건만 ‥‥‥‘ 이런 자신을 질책해야 하나, 아니면 긴 세월 속에 이들과의 추억은 모조리 용해된 걸까. 사람이란 이렇게 간사한 동물이라는 건가. 시간이란... 처음부터 인간의 편이 아닐지도. "왜였습니까! " 반복되는 질문. 그렇지만 어떻게 얘기해 줘야 할까. 뭐라고 대답을 해야만 할까. 아니, 대답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을 "용서를 구할 생각은 없다. 용서를 구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 "왜였느냐 말입니다 " "욱욱! " 가는 체구의 사내, 밀지(密芝)는 여전히 울고만 있었다. 광목의 외침에 배인 슬픔도, 대사형의 사과에 담긴 아픔도, 모두 그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그것이 중요할까..... "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의 계획에서 대사형은 열외의 대상일 뿐이니까. 그랄 과연 그렇게 간단히 잘라 말해도 좋은 걸까? "난 배신자다. 어떤 변명으로도 그걸 정당화할 수는 없다. 정당화될 수도 없고. " "그런 말씀 마십시오! " 우뚝. 광목이 떨쳐 일어나자 작은 산 하나가 불쑥 솟아 오른 느낌이었다. 그래서 중노인은 기뻤다. '모두 잘 커주었구나.' 또한 서글프기도 했다. 어차피 그가 없더라도 그들은 잘 켰다. 그가 없더라도 그들의 이상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그가 없다고 해서 바뀐 건 없었다. 단 하나도! “그런 말은 단신으로 무림을 송두리째 뒤엎어 버린 대사형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 "난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육사제(六師弟) " 그 ?말에 멍청히 서 있던 광목이 툴툴거렸다. "천하에 태양광무존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이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겠소! " 태양광무존! 무림의 수많은 고수를 굽어보는 위대한 다섯 인물 가운데 하나. 오존삼공으로 대변되는 강호의 거대한 여덟 이름에서 그의 시무시종을 그 누가 잊으랴! 단신으로 구파 의 절대무공들을 연파하던 시절 그의 명호는 찬란한 별이었다. 비록 치무환검존에게 가로막혔으나 그것이 태양광무존의 이름에 누가 되진 않았다. 당시의 광무존은 당년의 환검존을 뛰어넘었으니까. 그렇기에 더욱 찬란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환검존과의 일전 후 테양광무존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광무존이 이렇게 증적을 감출 것이라고 예상한 이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이런 대장간에서 무려 십팔 년이나 암약하고 있었을 줄은 또 누가 상상했을까! "태양광무존! " 소스라치게 놀란 정혜란이 급히 옆을 돌아보았다. “난 충분히 더 놀라고 있어. " 이제야 뭔가 맞아 들어간다. 배금성의 백부, 즉 태양광무존이 왜 가슴팍을 찢었는지, 그리고 찢겨 나간 음감에 어떤 문양이 그려져 있었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다. 흑월회의 수장이 십장생에 존재하지 않는 달 문양을 징표로 삼는 이유 역시도. 삼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의 공백, 그 시간 동안 십장생이란 단체가 단 한 차례의 발호도 없었다고 여겼지만 실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천하를 깜짝 놀라게 했으며 그것이 목표였다면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 태양광무존이라는 이름은 충분히 충격적이니까.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태양광무존은 치무환검존에게 석패를 한 후 그가 속해 있던 단체, 십장생에 서 이탈하여 호북으로 몸을 숨겼다. 그의 갑작스런 실종은 십장생의 행보를 더디게 했고, 그 기간 동안 태양광무존은 배금성을 키웠던 것이 다. 그래도.... '뭔가 부족해.....'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 뭔가 보이기 시작하지만 아직은 명확하지 않았다. 광목의 비웃음에 태양광무존이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도 힘이 없어서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듯한 웃음을. "난 이미 태양광무존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런 이름은 찢긴 옷감처럼 덧없이 사라졌다. " "하하! 대사형은 뭐든지 자신 마음대로 사고하시는구려! 그렇지 문득 광목이 아직도 무릎을 끓고 있는 밀지를 돌아보았다. 평소 쉴 사이 없이 입을 나불거리며 사형들을 열받게 하던 그였는데, 오늘의 밀지는 너무 조용했다. '하긴‥‥‥‥‘ 기학과 더불어 대사형에게 어리광을 가장 많이 부렸던 밀지다. 어찌면 그에게 대사형이란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어느 누가 대사형을 욕해도 침묵으로 일관했던 그였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벽을 두드리며 통곡하던 그 였다. 이런 마음을 대사형은 알까. "그렇지만 남겨진 우리는 뭐란 말이오! 태양광무존은 우리의 대사청인 것을! 그렇게 마음대로 떠나갈 만큼 우리가 싫어졌던 겁니까! " 순간 광무존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내가 싫어했던 거다. " "단 한 번의 패배 때문이라면‥‥‥‥“ "승패는 병가지상사라 했다. " 광목의 말을 자른 그가 나풀거리는 옷자락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박의 배움이 상대보다 말다면 의당 패하는 법이고, 그것이 순리일 거다. 무림에 뜻을 둔 강호인이라면 거역할 수 없는 일이지. 내게 무릎을 끓었던 이들도, 나를 꺾었던 환검존도 모두 무인이었다. 이길 만큼 이겼고 패할 이에게 패했다. 알고 있지 않느냐, 내가 강호행을 한 이유를. " 왜 모를까. 광목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아직도 그는 대시정이 왜 패했는지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태양광무존의 강호행은 그렇게 끝맺을 수 없는 거였다. 그러나 광목에게는 미흡했나 보다. 그는 대시정의 배반에 납득하기 어려운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 배경에는 대사형으로도 어쩔 도리가 없는 절대적인 진리가 가로막고 있었다. "비천무서는 완벽한 것이었소. " 쿵! 드디어 새어 나오는 비밀들. 과연 태양광무존은 이대혈서 가운데 하나라는 비천무서의 계승자였다. 구파의 근원적인 허점을 파훼한다는 비천무사.... 그래서 여타의 방파들은 그의 일수일검(一手一劍)을 받아내지 못했던 거였다. 광목의 자신에 찬 말에 광무존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십팔 년 전만 해도 그 역시 그렇게 믿었고, 진리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순간순간 와 닿는 이상의 고리는 그 기간 동안은 전부일지 모르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덧없는 허상과 도 같다는 것을. 하긴, 후회할 때면 이미 담근 발을 빼기 어렵겠지만. "나 역시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거침없었고. 그러나 이 세상에 완벽이란 없었다. 적어도 화산의 검수들에게는 절대로 깨지지 않으리라 믿었던, 이론상으로는 화산에 몸담은 이들의 상극 이라 여겼던 봉화검인(封華劍印). 그건 단지 이론이었을 뿐, 화산의 문인들은 우리의 신앙을 보기 좋게 깨뜨려 버렸다. " 말이 묘하다. 흥분한 광목이나 고개 숙인 밀지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장추삼은 어쩐지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 다. 태양광무존은 분명 치무환검존에게 패했다. 그래서 그의 행보는 막혔다. 그렇다면 '화산의 문인들‘ 이라는 포괄적인 주어를 사용할 것이 아니라 '치무환검존’ 이라는 단수 주 어를 사용해야만 한다. 그런데 태양광무존은 굳이 화산의 무인들이라는 표현을 썼다. 단지 화산에 대한 경외의 마음으로 이런 표현을 사용한 걸까. 십팔 년 전, 치무환검존과의 대결에 앞서 파봉화검인(破封華劍印)을 받아 든 테양광무존의 독백이 바로 그 해답이 아닐까? 이런 생각은 무공광인 치무환검존이 했을 리 없다. 자신의 부류에 그토록 애착을 가지고 있는 이라면 발상의 전환을 한 번 더 뒤집는 창조적 사고를 가지 고 있지 않다 본래의 의도는 이것저것 상관없다는 식으로 백무량과 한판 드잡이질을 하는 것이었거늘 ‥‥‥ "언젠가 이 사숙조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 문득 정혜란이 중얼거렸다 물어볼 사이도 없이 그녀는 어떤 회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태양광무존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그의 초월적인 무위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말이 어 떤 의미인지나 알고 있을까. 아니면 그것을 다 감당하겠다는 건가. 아니라면..... 자신의 정체에 관해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는 말일까. 하운에게 어떤 연질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 그걸 털어놓는 건 아마도 과거사에 얽힌 내막, 그리고 고인에 대한 추도가 복합된 상념 의 집합이 그녀의 입을 열게 한 것인가 보다. 그러나 무엇보다 장추삼이란 인간에 대한 신뢰가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대단한 무인이 왜 스러져 갔을지, 그 이유에 대해서 말이에요, 사숙조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죠. 완성이란 것의 다원성에 관해서. 완성에 이른 것과 완성되어야져야 했던 것의 차이를 말이에요.“ 스스로 완성에 이른 자와 완성을 강요 당한 자. 어려운 얘기다. 말은 알겠는데 그 속내에 담긴 뜻의 무게는 장추삼의 가슴 깊숙이 족적을 남기는지라 언뜻 생각으로 연 결시키지는 못하겠다. '뭐지.......‘ 찌푸려지는 인상만큼이나 복잡한 이야기들. 장추삼 일생일대의 난 제가 펼쳐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정혜란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은둔자들이 어떤 얘기를 주고받든 두 사형제 간의 얘기는 깊어만 갔다. "그럼 대사형께서는 비천무서를 무시하시겠다는 겁니까!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 역시 이상한 물음이다. 단지 비천무서라는 책에의 맹목적인 집착이 라면 이 정도로 하늘과도 같았던 대사형까지 무시하면서 버 티려 하지는 않을 테니까. 문득 섭섭해진 광무존이었지만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들에게 더 멀어진 쪽은 그였고, 그런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도 그였으니까. "원가를 착각하고 있구나. 비천무서는 단지 무리(간理)를 적어놓은 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람이 만들어놓고 풀어놓은 이야기에 어찌 허점이 없겠으며, 어찌 허물이 없겠느냐. " 그의 말을 듣던 광목이 털씩 주저앉았다. "변했구려. " 변했다는 말, 사람이라면 정말로 듣기 싫은 얘기 가운데 하나일 거다. "그런가‥‥‥‥“ 어쩌겠는가. 대답할 말은 없었다. 시간은 만물이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흘러가지만 그렇게 스쳐 가면서 알게 모르게 흔적을 남기기 마련 이다. "대사형...... "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밀지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유생건은 먼지와 흙으로 더럽혀졌고, 양볼 역시 눈물로 얼룩져 있었기에 광무존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들을 위해 흘릴 눈물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들에게 범을 손이 없었기에. "대사형이 저희를 버리셨다면, 아니, 스스로를 버리셨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여쭤보고 싶지만 들어봐야 상처만 남겠죠. 그리고 이제는 대사형과 갈 길이 다르다는 것도 압니다. " 어른스러운 기학과 달리 언제나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밀지였다. 장난이 심하고, 아무렇게나 말을 뱉는 경향이 있어서 늘 주의를 주었지만 혀를 쏘옥 내밀고 도망치던, 그렇게 쾌활했던 사제였다. 그리고 광목, 지금은 이렇게 큰 소리로 자신을 나무라고 있지만 언젠가의 저녁 무렵이면 막 배운 술을 이기지 못하고 이곳저곳에 냄새를 풍기다 혼쭐이 났었다. 책망을 들으면서도 늘어지게 하품을 해대 화를 내는 자신의 입에서 첫 웃음을 자아내게 했던, 그런 천 진한 사제였다. 둘의 이런 모습을 보노라니 문득 옛 추억이 그의 발길을 잡아 이끈다. 아무런 의심도 없었던 시절, 신념으로 똘똘 뭉쳤었던 어느 날을. 그리고 늘 그의 주위에서 해밝게 웃던 사제들. 그리고 지금의 자산‥‥‥ 언제가 더 행복한 걸까? 사실 광목부터는 노태상을 모른다. 그들 다섯 시정제가 손수 거두어 길렀기에 아래로의 다섯 아이는 노태상에 대한 추억 따위가 없다.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막연한 동경과 경외라면 또 모르지만. 그래서 아래 사제들에게 광무존은 그야말로 태양이었고, 그래서 그들의 신념에 반하는 그일지라도 아직 껏 잊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십팔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도, 그의 마음에 기간보다도 깊은 강이 드리워졌어도, 그들 다섯에게는 여전히 태양처럼 타오르고 있는 거다. "저희는 상관없습니다. 가는 길이 다르다고 해서 대사정의 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대사형께서 저희의 일을 가로막지도 않을 거라 믿습니다. 그러나 사형들은 달라요. " 다르겠지. 이 어린 사제들과 달리 그들은 확고한 신념으로 뭉쳐 있으니까. 그들은 자신과 같이 그분을 모셨던 입장이니까.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했으니까 그래서 배신의 아픔도 클 테니까. "누구를 탓할까. 내가 죄인인 것을‥‥‥“ "그런 말씀은 마세요. 대사형의 사과를 듣자고 이런 말을 꺼낸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일단은 피하세요. 지금은 사형들의 분노를 감당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사형들은 대사형께서 예전에 알던 그 모습이 아니니까요. " 그가 알지 못하는 사제들. 십팔 년은 그냥 흐르지 않았을 터. 그가 길러낸 청년의 손에 쥐어진 힘만큼이나 사제들이 이룬 성취도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일이 매듭지어지면 그때 뵈었으면 합니다. 저희 또한 지금의 대사형을 막아야 하는 입장이기에 다시 뵌다면 어떤 무례를 저지를지 모릅니다. 그럴 수야 없지 않습니까! " 이런 순간에도 걱정이라니. "고맙구나.... "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말에 광무존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제자는 완성되지 않았고, 그들이 감당해야 할 대상은 너무도 강대하니까. 그리고 그분에게 아직 칼을 들이댈 확신이 서지 않았으니까. "청을 거두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대사형께서 좋아하셨던 용정차라도 한잔 대접할 수 있기를‥‥‥‥ 벌떡 일어선 밀지가 광목의 어깨를 잡아챘다. 마지못한 듯 뭉기적거리며 일어선 광목이 장탄식을 터뜨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뭘 어쩌겠다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작별을 하는 것도 싫다. 하나 방법이 없다. '이게 최선인가‥‥‥‘ 털썩. "다시 뵐 수 있는 겁니까?' 무릎을 끓으며 광목이 처연한 얼굴이 되어 광무존을 올려다보았다. 경황 중이라 몰랐는데 이제 보니 의 사형은 몰라보리만큼 늙어 있었다. 주름 하나하나는 흘러간 세월에의 흔적일 테고, 패인 깊이보다 훨씬 깊은 아픔이 그의 가슴에 올올이 아로새겨져 있을 터였다. 강건했던 두 팔은 어떤지 측은하게 흔들거렸으며, 굳세디굳셌던 양어깨에 어느새 고독의 그림자가 살포 시 내려앉아 깃털을 고르고 있었다. '그렇구나 ‥‥‥‘ 대사형은 더 이상 신화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더욱 가? 楮滑嗤?더 더욱 다가서기 어려웠다. 대사정은 더 이상 십장생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더욱 이질적이었지만 더 더욱 다가서고 싶었다. 대사형은 더 이상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라도 함께 누렸던 그들의 추억을 빼앗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미적지근한 이별이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거다. 언젠가는 함께할 수도 있다는 기대가 있으니까. "내게 그런 기회가 주지길가‥‥‥ 뭔가 소리를 지르려던 광목이 입을 실룩거리다 이내 툴툴 웃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그 세월이 거역할 수 없는 무게가 되어 온 천하를 내리누른다고 해도 결 코 대사청에게만은 이런 소리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자꾸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하신다면 이대로는 한 발자국도 못 움직입니다! " 나름대로 으르릉거린 건데 왜 응석처럼 보일까. "이대로 안 움직이면? 안 가면 어철 거요?“ 느닷없이 끼어든 한마디에 광목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엔 늘 봐와서 이제는 지겨울 정도인 밀지의 뒤틀린 입술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왜? 듣지 못한 거요? 내참, 그래서 본 사제가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소. 귀 청소는 이틀에 한 번씩. 벌써 잊은 거라면 정말 심각하구려. " 머리는 청소가 안 되는데, 어쩌구 하며 빈정거리는 밀지를 노려보던 광목이 서서히 일어섰다. 그래도 밀지의 아죽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괜히 까불다가 경을 치지. 어느 안전(顔前)이라고 협박성 발연을 하는 건지. 쯧쯧‥‥‥‥ 그리고 광목이 어깨를 쪽 폈다. '이런, 이런!' 단지 일어선 것뿐인데 장내를 압박하는 무게감이라니! 역시 십팔 년은 그냥 흘러갔던 게 아니었다. 자랑스러우면서도 왠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광무존이었다. 그런데‥‥ "또 일어난다, 또. " 심드렁한 밀지의 반응은 또 원가. 이 정도의 기세라면 웬만한 고수급들이라도 입을 떼기 벅찰 정도이거늘. "네가 이 사형의 주먹맛을 보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게로구나. 오냐, 잘되었다! 오늘 대사형도 계시고 하니 아주 날을 잡자! " "그놈의 날은 일 년 열두 달 내내 잡는 거요? 이젠 대사를 좀 바꿀때도 됐구먼. " "이노~옴! " 쿠쿠쿠-- 두 손을 말아 쥐자광목의 전신에서 미증유의 힘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밀지는 여전히 談아서 빙글거리고 있었다. "그놈의 힘 자랑 좀 집어치우쇼. 상대는 나 죽여주쇼, 하고 가만히 있나“ 입씨름에, 기세에‥‥ 아무튼 물리적인 것만 빼면 뭐든지 등 원하면서도 둘의 얼굴엔 능청기가 넘쳐흘렀다. 저희가 말입니다, 이렇게 자랐어요, 대사형..... "허허....“ 둘의 아옹다옹을 보자니 어찐지 눈물이 나을 것만 같아서 괜히 고개를 돌린 광무론의 눈에 낡아빠진 망치 하나가 들어왔다. 너무 오래 써서 번들거리는 기름기와 수많은 마찰로 뭉뚝해진 머리. 그것을 힘차게 두드리던 청년의 미소. '역시‥‥ 너희와 나는 길이 다르구나.' 가치는 세월에 따라 흐른다. 아니, 애당초에 영고불변이란 없는 거다. 매 순간마다 최고라 여긴 그것이 문득 돌아보면 낙엽처럼 바스러지는 건 인간이 지닌 불완전성을 대변 하는 걸까. 투닥거리던 광목들도 대사형의 고즈넉한 상념을 눈치 했는지 조용히 시립했다 지난 시절은 돌릴 수 없 지만 다가올 세월까지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비록 지금의 대사형에겐 그들이 무가치할지 몰라도 언젠가의 하늘 아래서 다시 한 번 두 손 맞잡고 같 은 이상을 향할지 또 누가 알까. 이별은 단절이지만 별리는 약속이다. 재회의 기약(期約). "그럼 정말로 저희 갑니다. " "부디 보중하시길. " 전혀 가고 싶지 않은 얼굴로 말을 하는 그들이기에, 아직도 기대라. 손길을 드리운 사제들이기에 마음이 메어왔지만 광무존은 웃었다. 이 정도가 좋다. 이 선을 넘는다면 서로가 피곤해질 뿐이다. 미련 없는 별리는 이별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그래. 너희의 말‥‥ 명심하마. " 못내 뒤를 돌아보며 발길을 돌리는 사제들의 모습이 까만 점이 될 까지 광무존은 그렇게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미안했기에, 이것 말고는 더 해줄 무엇이 없었기에. 손은 흔들지 않으마. 흔들기엔 어떤지 안쓰러운 손짓이니까. 부르지 못하지만 내치지도 못하는 나약함이니까. 볼품없게 덜렁거린다면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니까. 이게 나의 최선이구나. |
첫댓글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