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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6일 월요일(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1코린 11,17-26.33
복 음 : 루카 7,1-1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백성에게 들려주시던 말씀들을
모두 마치신 다음,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다.
2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3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다.
4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하며 간곡히 청하였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5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6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7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8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9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0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에서는 이방인을 위한 최초의 이적을 베푸시는 장면입니다.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있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지 설교를 마치시고 가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을 때,
병든 노예를 위한 백인대장의 청을 전하는
유다인 원로들의 말을 듣고 백인대장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백인대장의 친구들이 와서 백인대장의 말을 이렇게 전합니다.
“주님, ~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루카 7,6-8)
이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군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는' 이방인임을 알았으며,
또한 자신이 군사력을 지닌 백인대장이지만 왕에게 속해 있듯이,
'상관 밑에 매인 사람', 자신이 누구에 속해 있는지를 철저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깨달음, 곧 자신의 부족과 한계와 무능함과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 존재인가를 깨달은 데서,
한편으로는 ‘겸손’이,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이 흘러나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 ‘밑에 매인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에게 매여 있고 ‘속해 있는 종을 소중하게 여길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이 속한 분께서 자신을 소중히 여기실 것에 대한 믿음을 가졌고,
무엇보다도 그분의 말씀에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청한 것은 오로지 한 마디의 '말씀' 뿐이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7)
그는 말씀의 권능을 믿었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시어 은총을 입은’ 성모님처럼 ‘은총’을 입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백인대장’에게서 배웁니다.
우리의 무능과 나약함을!
그리고 주님께 속해 있는 존재임을!
그러나 그분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존재임을!
그러기에 우리 또한 주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이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함을!
그리고 주님의 말씀의 권능을 믿고 의탁해야 함을!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루카 7,7)
주님!
당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소서!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게 하소서!
머리 위에 계시되 누르지 않으시는 분, 당신을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소유하시되 속박하지 않으시는 분,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
반영억 라파엘 신부
“저는 기도를 잘 하지 않습니다.
믿음도 부족합니다.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됩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도를 하는 대로 들어 주신다면 매달려 보겠는데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일에나 성당을 찾는
발바닥 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하고 말씀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저를 두고 하는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성무일도를 바치는 것에 급급해하는 자신을 보면서
기도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행함으로써
하느님을 체험하라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루의 끝맺음에 서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 하나 못하고 후회하며 부끄러워합니다.
‘내일은 잘해야지’하고 결심하고서는 아무 의식도 없이 또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러고서도 굳센 믿음의 소유자가 되길 바라고 있으니 뻔뻔합니다.
민수기 14장 28절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간절한 청은 물론, 불평불만 하면서 뱉어버린 말도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투덜대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내가 원하고 바라는 때가 아니라
당신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에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 이루어 주실 수도 있고, 내일 이루어 주실 수도 있으며
내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에 이루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저 믿고 때를 기다리며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은 자기 종이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께
‘저는 제집에 주님을 모실 자격도 없고,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청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지만(마태13,58),
믿음으로 준비된 사람에게는 당신 말씀의 능력이 살아났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하고
자신을 낮추는 그곳에서 큰 힘을 만났습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할 일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성체를 모실 때에도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하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은 늘 작용합니다.
다만 내가 믿음으로 준비되지 못한 탓으로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연민의 정신과 사랑의 정신으로,
때로는 그자가 믿든지 말든지 일방적으로 기적적인 역사를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 신앙이 합쳐질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재창조 역사가 일어납니다”(김정원신부).
그러니 열린 마음과 겸손으로 그분의 능력을 믿고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하는 바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대로 얻게 될 것입니다.
열매는 행동하는 데서 맛보게 됩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1988년 5월에 저는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했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복학하기 전까지 예비자 교리를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중, 고등학생 반을 맡아서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12월에 세례식이 있었습니다.
학생 중의 한 명은 취직이 되었고, 첫 월급을 타는 날 제게 저녁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5시에 ‘대학다방’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저는 약속을 잊어버리고 친구들과 천마산으로 등산을 갔습니다.
오후에 약속이 생각난 저는 부랴부랴 약속 장소로 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시간은 10시가 넘었고, 다방 문도 닫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기에 연락할 수는 없었지만, 혹시나 하고, 다방 문을 열었습니다.
다방 한구석에 저를 기다리던 학생이 있었습니다. 학생은 제가 올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저를 끝까지 믿고 기다려준 학생에게 고맙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4년 뒤에 저는 그 친구가 근무하던 자동차 대리점에서 승용차를 샀습니다.
저를 믿고 끝까지 기다려주었던 친구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값싼 믿음과 진정한 믿음입니다.
값싼 믿음은 하느님과 거래하려는 믿음입니다.
마치 하느님을 자판기처럼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에 따라서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믿음마저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의 뜻대로 하느님이 변하기를 원하는 믿음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바라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성공과 권력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입니다.
신앙이 본래 지닌 깊이와 진지함을 잃어버린 형태의 믿음이 값싼 믿음입니다.
이는 은혜를 값싸게 만들고, 회개나 변화 없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으려 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값싼 믿음은 죄의 진정한 회개 없이 쉽게 용서받으려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값싼 믿음은 예수님의 희생과 십자가의 고난을 가볍게 여기고,
희생 없이 은혜만을 바라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값싼 믿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무시하고,
자신의 삶에서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배반한 유다의 믿음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의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주어지는 상황까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는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니 그리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아이를 갖게 될 상황까지 받아들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마리아가 받아들였던 상황은 약혼한 요셉에게 파혼당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받아들였던 상황은 어쩌면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마리아는 ‘성모 마리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3번이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예수님의 얼굴에는 피와 땀이 흘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고난의 잔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외롭게 죽어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었던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고난과 십자가를 받아들였던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신앙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삶을 변화시키는 깊은 헌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은 참된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아픈 종을 보았고, 주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미 이런 모습만으로도 주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백인대장은 주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주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그렇습니다. 참된 믿음은 신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모든 이들에게서 오늘 것입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로마의 백인대장이 자기 종을 고쳐 주십사고 청한다.
그 종은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 병은 예수님만이 고쳐 주실 수 있는 병이다.
종은 치명적인 욕정으로 병들었거나
세속의 노예로 묶여 주님께서 깨끗하게 해주고 계시다.
유대인들은 백인대장을 칭찬하고 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주실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4-5절)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백인대장의 집으로 가신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사람을 보내어,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주십시오.”(6-7절)
이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감탄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9절)
백인대장의 이 말은
“저는 주님을 제집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의로움의 태양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습니다.
한 줄기 작은 빛살도 어둠을 물리치듯이
이 병도 주님의 한 말씀으로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유다인의 원로들과 그 친구들에게
모두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이 없다고 꾸짖고 계시다.
백인대장의 믿음은 이방 민족들에게서는 첫 번째의 신앙인이라는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 참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11) 말씀하셨다.
백인대장은 스스로 자격이 없는 자라고 고백함으로써
합당한 사람으로 바뀌고 있으며,
그의 종이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면
국적을 불문하고 구원하시는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다.
백인대장이 주님께 자기 종을 위해 간청한 이 말은
우리가 미사 중에 성체를 영하기 전의 기도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한 이방인의 예수님께 간청한 말이, 기도가 되었다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고
우리도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그러한 신앙고백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가톨릭이 살길은 최대한 많이 베푸는 일인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그는 자신이 지배하던 민족을 사랑해서 회당까지 지어 주고 자기 하인을 위해
그 민족의 한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고 치유를 청합니다.
그가 종교는 다를지라도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하신 이유를 잘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하늘로 오르는 한 마리의 새라면,
믿음과 희망은 사랑이라는 몸통을 띄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랑이 위로 오르려는 의지가 있을수록
믿음과 희망 또한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한탄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 사랑의 의지를 찾아볼 수 있겠느냐는 뜻도 됩니다.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은 왕비로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에 질투를 느낀 이들은 남편 루트비히를 설득하여 그녀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남편도 아내를 사랑하기는 하였지만,
어느 날 관료들과 함께 그녀가 옷에 무언가 숨기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루트비히는 국고를 탕진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어쩔 수 없이 엘리사벳에게 옷에 무엇을 숨기고 나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옷을 열었을 때
그 안에서는 한겨울이었음에도 장미가 한가득 들어있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은 이렇게 기적을 부르고
기적은 그 당사자와 주위에 있는 이들의 믿음을 증가시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성녀가 하루는 문둥병자를 궁궐에 들였습니다.
이것을 본 시어머니가 아들에게
며느리가 궁궐을 병으로 물들게 만들려고 한다고 일러바쳤습니다.
루트비히는 또 어쩔 수 없이 침대를 뒤져야 했습니다.
아내 엘리사벳이 간병하는 침대를 열어젖히자,
그 안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인간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루트비히도 이제 가난한 이들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이제 둘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병원도 세우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과연 사랑에 대한 의지엔 언제나 희망과 믿음의 두 날개가 달립니다.
알렉시스 카렐은 혈관을 꿰매는 기술로 노벨 의학상을 받은 저명한 의사입니다.
그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통에 신앙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02년, 카렐 박사의 친구인 한 의사가
리옹에서 루르드로 가는 기차로 이송되는
환자를 돌보는 일을 돕도록 그를 초대했습니다.
그는 우정과 아픈 사람을 돕는 일을 거부할 수 없어서 기차에 탑승합니다.
그는 기차에서 급성 결핵성 복막염과 큰 딱딱한 덩어리가 있는
상당한 복부 팽창을 앓고 있는 마리 바이를 만납니다.
마리 바이는 반쯤 의식이 있었지만, 카렐은 루르드에 도착한 후,
아니면 그 전에 그녀가 매우 빨리 죽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기차에 탄 다른 의사들도 이 진단에 동의했습니다.
기차가 루르드에 도착했을 때, 마리는 동굴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세 개의 물병이 그녀의 팽창한 복부에 쏟아졌습니다.
첫 번째 부은 후, 그녀는 뜨거운 통증을 느꼈습니다.
두 번째 부은 후, 통증이 완화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부은 후, 그녀는 기분 좋은 감각을 경험했습니다.
그녀의 배가 평평해지기 시작했고,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캐럴은 마리(다른 의사들과 함께) 뒤에 서서,
그녀의 복부에 물이 부어지는 동안 메모를 적었습니다.
“엄청나게 팽창하고 딱딱한 복부가 평평해지기 시작했고,
30분 이내에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몸에서 분비물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리는 침대에 앉아 저녁을 먹고(토하지 않고),
스스로 침대에서 일어나 다음 날 옷을 입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기차를 타고, 딱딱한 벤치에 앉아,
상쾌한 기분으로 리옹에 도착했습니다.
캐럴은 여전히 그녀의 심리적, 신체적 상태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4개월 동안 정신과 의사와 의사의 모니터링을 요청했습니다.
병이 나은 후 마리는 자선 자매회에 입회하여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았고,
약 35년을 더 살아 1937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카렐 박사는 노벨 의학상 수상자임에도
종교와 과학이 상반되지 않고 보완한다고 말해 의학과 과학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의 믿음은 아픈 사람을 돕겠다는 작은 봉사의 마음에서 다시 불붙여졌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려고 합시다.
믿음과 희망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사랑의 의지가 전부입니다.
더 너그럽고 관대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과 세상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신앙인이 아님에도 넉넉하고 따뜻한 가슴으로 이웃을 보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 뵐 때마다 밀려오는 큰 부끄러움에 가슴을 치게 됩니다.
반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늘 부담이요 민폐로 각인된 사람도 있습니다.
매일 말씀을 듣고, 규칙적인 성사 생활과 기도 안에 살아가는
저희 같은 사제나 수도자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스마트폰으로 전화가 걸려 옵니다.
발신자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뒷골이 당겨옵니다.
이걸 지금 받아야 해, 말아야 해, 망설입니다.
혹시라도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대상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늘 나를 돌아보고 또 돌아볼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 백인대장은
정통 신앙을 자랑하는 유다인들로부터 멸시받고 무시당하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행동, 언어와 믿음은 얼마나 탁월한 것이었던지
예수님으로부터 극찬을 받습니다.
열두 사도들도 받지 못하던 칭찬을 그가 받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마음에 쏙 든 이유가 무엇일까 묵상해 봅니다.
그는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의 치유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물건처럼 매매가 되고 있던 노예의 치유를 청하고 있습니다.
이것 하나만 봐도 백인대장의 따뜻하고 너그러운 품성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욱 예수님을 감탄하게 만든 것이 있었는데, 백인대장의 겸손한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치유를 위해 걸어가고 계실 때, 그는 친구들을 보내어,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보십시오. 백인대장이 얼마나 말을 예쁘게 하는지?
예수님을 향한 강한 믿음뿐만 아니라
지극히 겸손한 태도까지 겸비했으니, 극찬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보아하니 백인대장은 이미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완벽한 그리스도교 신자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 죽어가는 자신의 노예를
반드시 치유시켜 주실 능력을 지닌 분임을 확신한 강한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세례받은 세월이 길다 해서 절대 신앙의 깊이가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사제나 수도자의 옷이 결코 예수님의 칭찬을 불러오는
표시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언제나 겸손하게 주님께 청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청이 나를 위한 것보다는 고통받는 이웃을 위한 청이 되어야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의 건설 같은 큰 것이어야겠습니다.
더 너그럽고 관대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과 세상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주님의 만찬과 자기 만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임이 이익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를 아주 따끔하게 야단칩니다.
코린토 교회가 분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코린토 교회는 아주 분열적인 교회입니다.
오늘은 11장의 말씀인데 3장에서도 바오로는 코린토의 분열을 꾸짖었지요.
바오로파니, 아폴로파니, 하며 교회가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차원에서 분열을 꾸짖고 있습니다.
3장이 파당적인 분열이라면 11장은 그런 분열이 아니라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일방적으로 소외시킨 분열입니다.
부자들은 먹을 것을 많이 가져와 자기들끼리 배부르게 먹고,
가난한 이들은 아무것도 가져온 것 없어 굶주리고 있었지요.
교회 안에서마저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소외시킨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난한 이들을 부자들이 업신여긴 것입니까?
재물이 없다고 사람을 업신 여긴 곧 ’없이 여긴‘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들과 함께 있는 데도 없는 사람인 양 여긴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난한 이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든 것입니까?
그렇다면 세속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런 공동체를 교회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행위는 가난한 이를 부끄럽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라고까지 바오로 사도는 꾸짖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사실 주님께서는 최후 심판 비유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한 것이 당신께 한 것이라고 하심으로
가난한 이들을 당신과 동일화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코린토 교회가 더 꾸지람 들어야 할 것은
자기의 만찬으로 주님의 만찬을 모독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현재 우리 번역에서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라고 된 것을 직역하면
‘식사 때 자기 만찬’이라는 뜻이고 따라서
주님의 만찬을 해야 할 공동체가 자기 만찬을 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만찬은 자기 집에서 먹어야 하고,
부자들의 만찬은 자기들끼리 먹어야 할 것을
굳이, 교회 공동체 집회에서 함으로써 주님의 만찬 곧 성찬례를 모독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과 피를 같이 나누어 모시는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자기가 싸 온 자기의 빵과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이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겉으론 그렇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자기 만찬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같이 나누어 먹는다는 의식 없이 먹는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식사하고 싫어하는 사람하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찬례를 하면서 여전히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 사랑과 나눔에서 그를 배제하고 있다면 같이 주님의 만찬을 했어도
실은 자기 만찬을 한 것입니다.
주님의 만찬과 자기 만찬 가운데 나는 어떤 만찬을 하고 있습니까?
이방인에게서 한 수 배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께서는 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신 후
제자들 가운데서 12사도를 따로 선발하셨고(6,12-16),
산을 내려와 평지에 이르러 거기에 모여든
모든 병자들과 악령으로 고생하는 이들을 고쳐 주셨으며(7,17-19),
제자들을 포함한 그들 모두에게 황금률과
원수 사랑을 골자로 한 소위 평지설교(6,20-49)를 들려주셨다.
설교를 마치신 예수께서 오늘은 가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어떤 사람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이방인 백인대장의 놀라운 믿음에 감탄하시고,
중병으로 거의 죽게 된 그의 종을 고쳐 주셨다.
백인대장의 놀라운 믿음과 그의 종에 관한 치유 사화는
마태오복음과 요한복음에도 발견된다.(마태 8,5-13; 요한 4,43-54)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세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사건을 가지고 제각기 달리 서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오는 10가지 기적사화를 모아 놓은 기적사화집성문(8-9장) 안에서
두 번째 기적으로 이를 다루고 있으며,
요한은 자기 복음서의 첫 번째 기적 사건인 카나혼인잔치기적(2,1-12)에 이어
두 번째 기적으로 이를 전하고 있다.
요한은 고관이라 하는데 마태오와 루카의 백인대장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백인대장이라 함은 통상 로마제국의 군사편제에 따라
부하 100명을 거느리고 있는
상당히 중요한 임무와 역할을 행사하는 백부장을 뜻한다.
희랍어 성서 원문에는 서민 출신이 아닌 ‘왕국의 관리’로 표기되어 있다.
당대의 유명한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37?-100)는
“백부장이란 명령을 내리는 자로서, 지나치게 위험을 자처해서는 안 되고,
행동에 있어서 침착하고, 믿음직한 인물이어야 하며,
성급하게 전투에 뛰어들어서도 안 되고,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자신의 위치를 사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그 자격을 서술하고 있다.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은 게다가 자기 종까지 아끼고 사랑하는
자비심이 많은 사람으로 보인다.
루카는 이 백인대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여
회당까지 지어준 그런 사람이라고 덧붙였다.(5절)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이 백인대장을 로마군대의 고위 관리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헤로데 안티파스 군대의 이방인 백부장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이 기적사화를 행하신 예수님의 활동장소가
헤로데 안티파스의 관할 구역인 갈릴래아 지방의 가파르나움이기 때문이다.
세 복음서의 비교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마태오복음에는 백인대장이 직접 예수를 찾아와 종의 치유를 위한 자비를 청하고,
요한복음은 고관이 직접 와서 병으로 죽어가는
자기 아들의 치유를 청하고 있는 반면,
루카복음에는 백인대장이 먼저 유대인 원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종의 치유를 간청하게 한 점이다.
유대인 원로들은 백인대장이 회당까지 지어 줄 만큼
유대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예수의 도움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소개한다.
이에 도와 줄 마음을 먹은 예수께서 길을 가시는 도중에,
이번에는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시켜 예수님의 직접 枉臨의 수고로움을 사양하고
그저 치유의 한 말씀만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7절 참조)
이 기도문은 온 세상의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 중 영성체 예식 직전에
사제가 축성된 성체를 높이 들고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하는 외침에 응답하는 기도문이다.
이 기도문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우리 교회가 이방인의 믿음에서 한 수 배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의 고백인가?
오늘날 이 같은 믿음은
외교인에게서보다 우리에게서 먼저 발견되어야 하리라.
아울러 루카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자신이 늘 강조하는 기도의 다양함을 보여준다.
기도란 하느님께 직접 드릴 수도 있지만,
백인대장이 예수께 유대인 원로들과 친구들을 통하여 자신의 바람을 전해 드렸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 또는 성인이나 천사들을 통하여
轉求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우리도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고통받고 역경에 처해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