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일 선생님의 귀천 소식에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선생님이 원주교구 기획위원으로 활동하신 것을 간략히 추적해 보았습니다. 그분의 품 안에서 그분의 온 창조계와 함께 깊은 평화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는 평신도 사목 일꾼들과 함께 교구 사목을 수행하였다. 당시 교구 사목 방향을 기획하고 실행해 가는 데 참여한 평신도들로 지학순 주교의 평생 동반자였던 장일순과 교구 기획실장 김영주, 그리고 사상과 현장을 이어주는 비전을 언어화하는 역할을 한 김지하를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김지하는 1965년경부터 장일순과 교감하면서 당시 열리고 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1971년 초부터 원주교구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1971년 10월 5일부터 7일까지 원주문화방송 사건을 계기로 부정부패 척결 시위가 끝날 때까지를 그의 일차 합류기로 볼 수 있다. 그는 1971년 10월 15일에 박정희 독재 정권이 위수령을 발표하고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하자 원주교구 관할 지역이었던 탄광촌으로 피해서 이곳에서 금관의 예수를 썼다. 1972년 <창조> 4월호에 “비어”를 발표한 후에 4월 12일에 체포되어 반공법으로 입건되었는데, 폐결핵을 앓고 있던 그는 기소유예 판결을 받고 마산 가포에 있는 국립결핵요양원에 형식적으로는 요양하고 실질적으로는 연금 상태에서 지냈다.
1972년 8월 18일부터 20일 새벽까지 3일 동안 태풍 베티의 영향으로 남한강 일대에 홍수가 발생하였다. 20일까지 서울에 452.4mm, 수원에 461.8mm의 비가 내렸다. 남한강 상류지역에 있는 충북 단양 지역에서는 434mm의 폭우가 쏟아졌고, 여주 지역에는 700㎜의 비가 내렸다. 그 영향으로 남한강이 범람하여 19일 새벽 여주읍 하리 소양천 제방이 붕괴되어 이 지역 일대의 65%가 물에 잠기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원주교구는 독일 미제레올에서 재정 지원을 받아서 수해를 입은 지역 사회를 동반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된다. 이것이 1972년 말부터 준비하여 1973년부터 전개한 원주교구 재해대책위원회 활동으로 나타난다. 김지하는 이 위원회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다시 원주교구 기획위원 활동을 이어가면서 이차 활동기에 들어간다. 그는 1973년 3월 지학순 주교가 원주교구 차원에서 사목교서인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와 “사목세부지침,” 그리고 “청년회 활동에 관하여”와 “크리스찬 문화 운동에 관하여”를 제시하는 데 필요한 기초 작업을 수행한다. 이 활동은 김지하가 1974년 4월에 민청학련 사건 배후 조종자로 지명되자 다시 도피 생활을 시작하면서 끝나게 된다.
김지하는 4월 25일에 흑산도에서 체포되어서 7월 13일에 비상보통군법회의 1심 판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1975년 2월 15일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다음달 13일에 다시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80년 12월 12일에 석방되기까지 5년 9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김지하는 석방된 이후 다시 원주교구 기획위원으로 활동하면서 3차 합류기에 들어갔다. 그는 재해대책위원회에서 1979년에 사회개발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활동을 이어가던 사목 일꾼들과 함께 농민들과 광부들, 원주 교구 지역 빈민들의 삶의 실상을 익히면서 자신이 감옥에서 체험한 생명 비전을 공유하고 육화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농민 광부 어민들과 도시 빈민들의 삶의 실상에 대한 이해와 이들을 동반해 온 사목 일꾼들과 토론 과정에서, 그리고 민중들과 사목 일꾼들을 위한 교육을 시도하면서(흰그늘의 길 2, 278-9) 깨달은 것들을 기초로 언어화한 것이 “생명적 세계관의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다. 김영주 실장은 1983년 11월에 사회사업국 사회개발부로 개편되면서 1966년부터 17년 동안 몸담았던 원주교구청을 떠나는데(“나의 회고록 '생명·협동운동으로 꽃 피운 무위당 정신 - 김영주 편 최종회'”: 무위당사람들 69(2020) 참조), 김지하도 1984년 4월에 원주교구 기획위원직에서 물러났다. 1984년 4월 30일에 열린 사회개발위원회 47차 월례회의 회의록에 의하면, 김영일은 4월에 사표를 낸 상태였고 최기식 신부가 5월 중에 사표를 수리할 계획임을 밝혔다. 박재일은 1985년 12월 3일에 열린 66차 월례회의를 마지막으로 참석하고, 이경국과 김상범은 1986년 1월 6일에 열린 67차 월례회의를 마지막으로 직무에서 떠났다. 1986년 3월에 박재일, 이경국, 김상범이 물러난다.
원주교구 사회개발위원회 보고서 “생명적 세계관의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 태동된 상황을 좀 더 보자면, 박재일과 김상범 등 사회개발위원회 활동가 상담원들은 1981년에 때의 표지를 읽고 응답하는 사목 일꾼들로서 자연 생태와 사회 생태를 통합한 형태로 자신들의 활동 비전을 마련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들은 재해대책위원회 활동 초기부터 원주교구 지역 내 농민들과 광부들과 어민들과 도시 빈민들의 삶의 현장에서 이들의 농사와 노동의 실태를 확인하고 이들을 교육하면서 깨달은 것들을 서로 공유해 가는 학습과 회의를 지속해 갔는데,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재해대책위원회-사회개발위원회 관계자들과 활동가 상담원들은 회의 자료들을 남겼고, 정인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 두 위원회의 활동 관련 자료들과 회의 자료들이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 사료실에 보존되어서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에 갇혔던 김영일이 1980년 12월 12일에 석방되어 다시 이들과 합류하게 되었던 것인데, 이후 그는 원주교구 기획위원으로서 이들과 함께 토론해 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 작업에 참여한다(흰그늘의 길 2, 278-9). 이들 가운데 장일순과 김영일, 박재일 등은 원주 밖의 정호경, 제정구 등과 뜻을 모아 원주교구 교육센터에서 “생명사상 세미나”를 기획하여 공부를 이어 갔는데, 이런 작업들 역시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을 형성하는 데 한 기초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론된다(좁쌀 한 알, 35와 흰 그늘의 길 3, 학고재, 2003, 51 참조).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 복사본은 김상범과 정인재가 갖고 있던 자료 가운데 김상범에게 받은 자료로, 이것은 이들이 2009년에 무위당기념관에 전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김상범과 정인재에 의하면, 이 자료는 사회개발위원회 사목 일꾼들로서 활동하던 주체들과 김지하가 농민과 어민과 광부들과 도시 빈민들을 동반하는 과정에서 모아진 경험들을 기초로 김지하가 초고를 쓴 것을 사목 일꾼들이 함께 나누면서 여기에 응답한 것들을 통합해 갔다. 사회개발위원회 활동가들, 곧 그들 식으로 표현하자면 “상담원들”과 장일순은 김영일이 초안을 마련한 것을 함께 검토하여 수정 작업들을 거치면서, 원주교구 사회개발위원회 활동 지침으로 숙성시켰다. 이 자료가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형태로 꼴지어진 것은 1982년 전반기인 것으로 보인다.
원주교구 지역 농민들의 삶의 현장과 이 현장에 대한 상담원들의 깊은 감수성을 김영일이 창조적으로 통합해서 생성시킨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원주교구 현장 사목 비전 자료에는 1973년에 출범한 원주교구 재해대책위원회 민중 동반 10년의 여정이 담겨 있다. 이 사목 보고서는 원주교구 지역 농민들과 사목 일꾼 상담가들과 장일순과 김영일 등의 연대를 통해서 결실을 이룬 20세기 말에 제시된 21세기를 위한 민중 동반 비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영일은 원주교구를 떠나기 전 1983년 8월 8-10일 “현장 지도자 연수”에서 “협동적 생존”을 강의하는데, 이때 이경국은 “신협, 소협 현황과 전망”을 주제로, 그리고 이창복은 “노동현실”을 주제로 강의하고, 장일순이 특강(주제 미상)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3년 8월 25-27일 20차 농촌청소년견학교육(충렬사)에서도 김지하는 “전통문화와 협동적 생존”을 주제로 강의하였다(원주교구 교육보고서 1983년 자료 참조).
김영일은 1985년에 남녘땅 뱃노래를 출판하면서, 이 비전 가운데 성경과 연결된 생명 비전과 가톨릭적인 언어들을 거의 생략한 형태로 축소시켜서 “삶의 새로운 이해와 협동적 삶의 실천-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새 세상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실었다(남녘땅 뱃노래, 두레, 1985, 85-106). 김영일이 여기에 발표한 원고 형태는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의미 변환을 발생시키고 있다.
두 사례만 보자면, 그는 사회개발위원회 비전 원고에 있는 “그러면 생명이란 무엇인가? 빛, 말씀, 진리, 길, 밀알, 사랑이다”라는 진술을 생략한다. 생명을 “빛, 말씀, 진리, 길, 밀알, 사랑”과 연결짓는 전통은 요한 복음서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요한 복음서 14장 6절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한다. 요한 복음서는 이 예수를 “말씀”이요 “생명”이요 “빛”으로 고지한다(요한 1, 1-14). 요한 복음서와 원주 지역 생명사상의 상관성은 장일순의 생명사상에서 요한 복음서 비전이 갖는 역할과도 연결되어 있다. 요한 복음 10장 38절, 14장 10절과 20절, 17장 21-26절 등에 나타나는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는 서로 내재 상태, 서로 시(侍) 상태에 대한 깨달음이 장일순의 생명 사상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따로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비전 원고에 의하면, 원주 지역 생명운동의 한 결정적 원천이 그리스도교의 요한 복음서라는 것을 말하는데, 현재까지 원주지역의 생명운동이나 무위당 장일순의 생명사상과 관련해서 요한 복음과의 상관성에 관해서 진술하는 경우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또 다른 하나는 김영일이 “말씀”을 “말”로 전환시켜 놓은 데서 나타난다. 이것은 단순한 것 같지만 단순하지 않은 결과를 발생시킨다. 말은 우리의 일, 세계 내 존재들의 일이고, 말씀은 우리나 세계 내의 규모로는 설명되지 않는 궁극 존재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해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말에 충실한 것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 일이다. 그런데 말이 말씀에 닿지 않을 때, 그 말이 뿌리를 잃고 흔들리기 쉬워지는데, 말씀을 앞세워서 말이 행세를 하는 것 못지 않게 말이 말들에 갇힐 때 발생하는 폭력과 상처가 얼마나 깊을 수 있는가를 김지하의 후기 말들에서 볼 수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하느님 안에 자신이 있고 자신 안에 이 하느님이 계시다는 일체 인식을 민중 안에 육화시켜 주셨다. 존재하는 누구나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한 것은 모든 존재, 특히 모든 가난한 사람들, 모든 민중이 하느님께 자기 존재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계시한 것인데, 이 단순한 진리를 장일순은 위에서 말한 요한 복음의 한 핵심 사상,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에서 읽은 것이고, 바로 이런 토대 위에서 그는 이것을 알면 협동조합 운동을 알게 된다고 말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알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복되다. 모든 민중이 모든 시민이 이 진리를 자기 것으로 삼고 살 수 있는 그 날을 그리면서 김지하, 그의 안식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