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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 249
시무여무종(始無如無終)
'이대로는 안 되겠어.
저놈의 검이 무엇을 갈구하는지 알지 못한다면 크게 낭패를 볼 거야.' 생각은 머리에 맡겨두고 몸을 살
짝 띄운 그녀가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콰르르! 둑이 무너지는가? 일시에 분출된 정혜란의 힘이 검을 빌어 힘차게 요동쳤다.
관전을 하던 흑의인도 적이 놀랐는지 입을 떡하니 벌릴 정 돈?강한 검세.
멈춰 있던 밀지의 검이 다시 움직였다.
파도처럼 맹렬한 그녀의 검과 뱀처럼 괴이한 밀지의 검은 누가 봐도 승패가 명확해 보였다.
쫘아악! 비단 폭이 가리가리 찧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펼쳐 낸 검세가 산산조각 났다.
독랄한 검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전한 기운으로 정혜란을 노려 들어갔다.
'이대로 끝날 줄 알았다면 ‥‥그대로 공기 중에 산화될 것만 같았던 그녀의 검세.
그러나 마냥 떨어지기만 하던 정혜란의 검이 어느 순칸 빙글 선회했다.
쿠르룽! 활화산처럼 솟구치는 검기.
아까의 검세보다 몇 배의 위력을 지닌 그녀의 검이 마냥 치고 올라오던 밀지의 검을 집어삼켰다.
'이 아가씨의 체면상 말이 아니 ‥‥‘ 츠츠츠‥‥‥.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이한 굴곡으로 다시 겪이는 밀지의 검날에 그녀가 일으킨 검기들이 아까처럼
가닥가닥 잘려 나갔다.
정혜란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상대의 검초는 어떠한 초식도 분쇄하고, 잘라냈으며, 궁극적으로 소멸시키는 악마의 초식이었으니까.
그녀의 창궁천추는 석 달 전의 깨달음보다 진일보한 상태.
그러나 속수무책이었다.
무거운 검식 가운데 당대의 최고라 자부할 만한 창궁천추라 하나 검식을 펼쳐 내는 건 어디까지나 사람
이고 인체의 움직임이 일정한 궤적을 그리지 않으면 초식도 위력을 잃음은 당연하다.
제대로만 펼쳐져도 한번 해볼 만한 싸움이련만.
그녀의 움직임은 완전한 위치에 도달하기 전 번번이 밀지의 검초에 가로막히고 있는지라 창궁천추 본연
의 위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이대로라면 검기만이 아니라 목숨까지 내줘야 할 상황.
그러나 정혜란의 검초 역시 완전한 변식을 밟은 것은 아니었다.
부우웅- 마지막 검초가 뜯겨 나가는 순간 그녀의 검이 직선으로 쪽 뻗었다.
화산의 노 고수들이 왔다면 분기탱천할 검초였지만, 이 순간의 찌르기는 그 어떤 변화보다 효과적인 것
이라 무변 속에 다변으로 정혜란을 무찔러 가던 밀지의 검식도 주춤해야만 했다.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내가 살고 나서 상대를 잡는다는 바둑의 오랜 격언처럼 돌연한 찌르기를 피할 방법은 오로지 검을 거두
고 비껴 서는 것이다.
'찌르기라니 ‥‥쓰게 웃으며 검을 거둔 밀지가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러자 장내를 뒤덮었던 사(死)의 기운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힘껏 찌른 검을 유연하게 회수하던 정혜란의 머리를 강하게 때리고 가는 무엇이 있었다.
'그래, 이 초식은!' 언젠가의 달, 달을 틈타 침입했던 낮선 무인들, 무인들을 조롱하던 묘령의 눈동자,
그리고 피, 피의 한가운데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우‥‥ 건?!' '이럴 수가‥‥‥‥
정혜란의 놀람은 흑의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밀지라고 자신을 밝힌 사내가 펼치는 검식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기원을 알 수 없었던 미지의 검식.
이제야 근원이 밝혀지는 건가? 검식의 정체를 파악한 순간 정혜란은 몇 달 전의 어느 밤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지금 우건과 이들의 관계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다.
그저 그날의 검식을 떠올리면 된다.
일섬류(一閃流) 일명수(一命收)의 궤적을‥‥‥ “놀랍군.
정파의 굳은 검식에서 이런 발상이 가능하다니.
정말 놀라워.”
별로 놀라지 않은 얼굴로 밀지가 중얼거렸다.
크게 압도했다고 보긴 어렵지만 아무튼 선기를 취했거늘 막판 변수 때문에 물러섰으니 속이 상한 모양
이었다.
"나 역시 당신의 검식 때문에 놀라고 있어요.
물론 놀랐겠지.
그는 그녀의 대답을 통상적인 경악과 어떤 경의쯤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검식은 일정 수준에 이른 검사라면 누구라도 충격을 받을 만한 것이었으니까.
여태까지 이 검식 앞에서 목숨을 부지한 무인은 전무했다.
강호를 찌렁찌렁 울리는 당대 최고수라도 결코 피해내지 못했다.
오늘도 그 전통은 이어질 거다.
‘그런데 우건의 것과는 뭔가 다른데‥‥’ 정혜란의 아미가 살포시 찡그러졌다.
츙! 츙! 그걸 당혹감으로 받아들인 밀지가 수증의 검을 몇 차례 휘두르는 것으로 재개전(再開戰)을 알
렸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꽁수에 가?
楮?변칙으로 물러섰지만 이번에는 어림없다.
승리를 확신한 그의 눈은 벌써 흑의인의 동태를 쫓고 있었다.
“흠‥‥‥.”
칼이 부르는 파공성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준비하고 있던 정혜란이었다.
친절은 고맙지만 그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행동이었다.
"다행이야.
" 문득 터져 나온 정혜란의 한마디.
“‥‥‥?
" 무슨 말일까.
당해내지 못한다는 중압감에 살짝 맛이 가버린 걸까?
"당신의 검식은 비록 마귀의 속삭임처럼 고요하고, 무저갱에서 울려퍼지는 탄식처럼 종잡을 수 없지만,
한 가지는 아니군요.“
"음?“
"같은 초식을 사용하더라도 시전자의 성품에 따라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는 건지‥‥ 아무튼 그 저주의
검식을 이 자리에서 봉해 버리겠어요.
"이 자리에서 봉한다고?“ 정혜란의 말에 밀지가 광소를 터뜨렸다.
지금까지 겨우겨우 버틴 주제에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댈까.
"자신감을 따라 검이 움직여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생은 무상한 것이고, 검 또한 무심하게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 문사 차림은 그저 멋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는 듯 시구와도 같은 말로 정혜란을 조롱한 밀지는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올 테면 오라는 식인가?
"난 사양이라는 걸 모르지.
" 남자처럼 털털하게 웃은 그녀가 칼을 내렸다가 들어 올리며 둥실 떠올라 아까처럼 창궁천추의 심득을
이용한 중검식을 펼쳤다.
다를 바가 전혀 없지 않은가?
"훗
" 허장성세에 속을 밀지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의 공격은 그에게 깨달라고 부탁하는 격일 뿐.
츠츠츠‥‥‥ 다시 장내를 내리누르는 사의 그림자.
때론 독사처럼 때론 비단처럼 부드럽고도 귀기로운 검세가 정혜란을 옥죄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라면 결과는 뻔하다.
"답답한!
" 흑의인이 등에 걸려 있던 검을 잡아 뺐다.
비록 젊은 처자의 검식이 천하에 으뜸갈 만한 위력을 가졌다고 해도 완전히 펼쳐지지 않으면 무용지물
이다.
뭔가 다른 공세를 기대했는데.
밀지의 검초는 흑의인이 알고 있는 것과 동일하지만 그 숙련도나 이해의 측면에서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이제야 저 검초가 지닌 본래의 위력을 알게 되었을 정도니까 여태까지 그는 저 귀검식의 껍데기만 보고
있었던 거다.
그것으로도 충분히 전율스러웠기에 딸의 마지막 호신책으로 수련케하면서도 거짓말까지 해가며 사용의
자제를 당부했었다 '실수였다!' 그냥 자신이 맞설 것을.
그했다면 이렇게 허무한 패배는 당하지 않았을지도.
그래도 어느 정도 익숙한 검초였기에 일단 맞닥뜨렸다면 해볼 만 했을지도 몰랐다.
그에게도 비장의 한 수는 있었으니까.
허나 늦어버렸다.
정당한 생사결에 끼어들 만큼 비겁할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하면서 흑의인은 쥔 검에 가만히 공력을 불어
넣었다.
똑같은 전개, 똑같은 검초 애써 일으킨 그녀의 검세는 이제 종잇장처럼 갈가리 찢어질 터였다.
그때‥‥‥‥ 순간적으로 정혜란의 검이 빛을 발했다.
검강일까? 그런 경지에 이르기엔 그녀의 깨달음이 아직은 일천하다.
그렇다면 뭘까? 주지하다시피 화산 무인들의 꿈은 암향부동화의 개화에 있다.
정혜란도 예외는 아니어서 늘 꽃봉오리만 보면 그 생각에 취하곤 했다.
꽃봉오리를 보면 화산이 생각나고, 여러 사형제가 떠올랐으며, 먼저가신 이 사숙조를 대하는 것만 같아
슬프면서도 좋았다.
끝내 봉오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그녀의 지양점, 치무환검존‥‥ 그러던 어느 날 혼자서 대충 점심을
때우고 이름 모를 들꽃을 멀거니 바라보던 그녀에게 약간 갈라진 상태의 꽃봉오리가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잠시 생각해 보니 뭔가 재미있는 발상이 떠올라 정혜란이 꽃봉오리 옆
에 쭈그리고 앉아 상념에 잠겼다.
꽃봉오리를 피우는 일이 그녀가 할 일이라면 꽃은 언제부터 꽃으로불릴까? 봉오리가 완전히 펴진 상태?
그렇다면 완전히 펴진 상태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걸까? 수명을 다 누리고 시들어 꽃잎이 떨어지기 직
전? 아니면 지금처럼 막 봉오리가 벌어진 상태? 봉오리가 이 정도로 작게 벌어진 걸 과연 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대체 꽃은 언제부터가 꽃일까?“ 알 수 없는 감흥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던 그녀에게 어떤
영상이 겹쳐졌다.
그리고 그녀는 당분간 이 일을 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섣부른 접근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판단했기에.
언젠가, 언젠가 사고의 둑에 상념의 해일이 몰아쳐 제방을 타 넘고 쓰러뜨릴 때, 그때 비로소 정립될
무리라고 보였기에 그리고 자금 ‥‥ 지금이 바로 그때인가? 머리를 꽉 채웠던 상념의 고리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차근차근 연결되고 있었다.
그에 따라 그녀의 검이 물고기처럼 퍼득거렸다.
"타앗!
" 짧은 기합성이 정혜란의 입을 타고 흐르자 무조건적인 강함을 추구하던 그녀의 검이 흡사 바람 빠진
고무처럼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느닷없는 변화.
중검에서 환검으로의 변환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다.
그녀의 검세는 마치 칡넝쿨처럼 그의 검초를 타고 흘렀다.
이건 아니다.
이런 전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밀지의 검은 기본적으로 상대를 따라붙어 차근차근 갉아먹는 것이 특징인데 이번에는 역으로 그렇게 당
할 판이다.
"으아아!
" 경호성을 지르며 크게 검을 휘두르는 그의 앞에 여전한 기세로 정혜란의 검초가 채근하고 있었다.
'좋다! 네가 내 흉내를 내보겠다는 건데.' 밀지의 얼굴이 밀랍처럼 굳어졌다.
츠츠츠 ‥‥ 그의 검이 크게 호선을 그리다 떨어져 내렸다.
사이함은 여전했으며 거기에 기세까지 더해지니 밀지의 검세는 그야말로 만부막적(萬夫莫敵)의 힘으로
장내를 휩쓸었다.
'다급해지는가.' 힘과 사이함·.
충분히 위력적이고, 충분히 무서운 무엇을 담고 있었지만 그녀는 방관자의 눈으로 그의 검세를 지켜보
다 검기가 목전에 이르자 크게 손을 떨쳤다.
꽃(花)이 꽃이려는 이유는 단지 생존을 위함이다.
꽃이 진정으로 꽃일 때는 향기를 풍기는 시점이 아니라 벌레와 교감을 나눌 때이리라.
인간의 눈과 의지로 재단되어진 꽃, 그 의미는 어차피 피상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봉오리든, 만개했
든‥‥.
꽃이라 인식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꽃이 될 것이다.
기준 자체가 부르는 사람에 달려 있으니.
봉오리든, 만개했든‥‥‥.
꽃은 어차피 마음속에 있으니 그 형태가 무에 중요할까.
스르륵 천천히 움직이던 그녀의 검이 그만큼 느린 궤적으로 다가오는 밀지의 검세와 어우러졋다.
검과 검이 만나고,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부딪치고, 깨달음과 깨달음이 충돌하여 둔(鈍)으로 가장한 절
대의 다변(多變) 초식들이 하나둘 풀려 나가?
?시작했다.
실타래처럼.
'질 수 없다!' 충혈된 눈으로 바삐 손을 놀리는 밀지와 달리 정혜란의 눈은 철저히 침전되어 있었다.
무엇이 그리 당신을 재촉하는가.
무엇이 그리 당신을 몰아붙이는가.
초식이란 마음에서 비롯된 심득을 옮기는 과정이거늘.
초식이란 마음에서 비롯된 그림을 허공에 그려내는 작업이거늘.
어찌 형태가 정해졌으며, 어찌 시작이 있고, 어찌 끝이 있을까.
초식이란 무게에 마음이 짓눌렸다면‥‥.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없다.' 스르륵‥‥ 폭포를 거스르는 연어처럼 힘차면서도 생동감있게 차 오른
그녀의 검이 밀지의 마지막 검초를 타고 넘어 그의 몸까지 훓고 지나갔다.
"컥 !
" 눈을 뜬 그대로 자신의 하복부를 바라보던 밀지가 한줄기 울혈을 토하며 고꾸라졌다.
“ 오오!”
극적인 반전이다.
젊은 처자는 놀랍게도 두 번째의 겨룸부터 전혀 다른 초식으로 밀지를 상대했으며 그 시도는 보기 좋게
성공했다.
그녀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단순히 극적인 깨달음?우연도 우연 나름이지, 딱 그 순간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
리가 따르는 가정이다.
그럼 뭘까? 처음부터 이 초식을 사용했더라면 손쉬운 승리를 낚았을 텐데.
변화를 끝내고 검을 갈무리하는 그녀에게 급히 물었지만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원론적인 정혜란의 대답
에 어쩐지 맥이 빠져 흑의 括?입맛을 다셨다.
"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대부분의 변화는 무거움을 이겨내지 못하는 게 상례이고 제가 전
개했던 초식은 중검 가운데에서도 능히 수위를 다툴 만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밀지라는 사내의 초식은 변환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경지였고, 제 검초가 파훼당한 거지요.
그래서 부득불 초식을 바꾼 거예요.
" 그 정도는 검로를 밟는 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얘기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소저는 처음부터 두 번째의 변초를 펼칠 수 있었다는 말이로군?'
"아뇨, 처음 전개해 본 거예요.
" 멍‥‥‥ 그렇다면 정말로 극적인 깨달음이라는 건가?
"아뇨, 그건 무리죠.
"
"그게 무슨 말인가! 펼쳐 본 적도 없었다면서 그리도 자연스레 초식을 이동시켰다니? 중검을 쓰다 환검
으로 변환하기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닌가?'
"중검이니, 환검이니· .
.
" 쓰게 웃은 그녀가 여전히 멍해 있는 흑의인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귀찮은 중년이다.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펼쳐 본 적이 없다고 해서 알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아저씨는 정말로 구제 불능의 바보라는 거,
알고 있죠?' '으윽!' 그렇다.
정곡이다.
아는 걸 모두 행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렇지만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게 있다.
그녀가 펼친 두 번째의 검결은 그저 머리 속에 넣어두었다가 펼칠 만한 수준의 검학이 아니었다.
검초의 시작과 끝 자체를 초월하는(始無如無終) 극상승의 검초였으니까.
또한 이것을 펼쳐 낸 정혜란도 십팔 년 전의 태양광무존이 위의 경지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사숙조에
게 패했었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사형이 이르지 못했던 경지의 완성형을 보며 유명을 달리한 밀지이기에 마지막은 그리 쓸쓸하지 않았을
지도.
"그나저나 망설임이 없는 칼질이로군.
"
"왜, 여자답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가요?'
"아, 아니, 뭐‥‥‥‥ 단번에 속내를 들켜 당황한 흑의인이 허둥거렀다.
강호의 여걸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가운데 일 순위를 꼽으라면 분명 '여자가‥.', 또는 '여자답지‥
‥.' 따위로 시작되는 모든 대화라니까.
그래서 미안한데 정작 당사자는 상관하지 않았다.
한두 번 들어본 말도 아니고, 정혜란을 처음 대하는 남자라면 그녀의 손속에 놀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
다.
한술 더 떠 정혜란은 그를 안심시키기까지 했다.
나이만 비슷했다면 어깨라도 두드릴 기세였으니 흑의인으로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하도 자주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판인데요, 뭘.
남자가 되어가지고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래요?'
"아‥‥ 아하하아‥‥
"이상하게 웃지 마요.
진짜로 변태 같으니까.
" 뚝.
"사람 베는 게 유쾌할 리는 없지만 어찌겠어요? 강호의 여자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인 것
을.
" 문득 우건이 생각났다
"밀지라는 남자‥‥ .
내가 아니라면 자기 검에 베일 사람이었어요.
그는 이미 초식에 몸과 혼을 송두리째 지배당하고 있었으니까.
"
"으음‥‥ 단순히 고강하기만 한 아가씨가 아니다.
그녀는 나이에 맞지 않는 깨달음과 여유를 지닌, 말 그대로 진정한 강호인이었다.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는 순간에만 멈추는 검식, 다른 말로 그의 승리 뒤에는 반드시 시체가 남을 거라
는 거지요.
그는 결코 멈추지 않을테니까 아니, 멈출 수 없을 테니까.
"
"그 얘기는?'
"이해없이 소화해 버린 검식이기에 몸으로 시전하고는 있지만 통제는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누군지 모르지만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
"음? 무슨 말인가?“ 검을 허리에 갈무리하고 장추삼이 위치한 쪽으로 몸을 돌리며 그녀가 나지막이 중
얼거렸다.
"검식의 이해가 전무한 이에게 검초를 박아 넣은 사람 말이에요.
정말로 무서운 사람이 아니겠어요?' 한편 장추삼과 광목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육탄전을 벌이고 있었
다.
허나 남은 손을 마치 공성포(攻城砲)처럼 내뻗으며 빠르게 움직이는 목표를 노리는 광목의 한 방.
이에 뒤질세라 물 흐르듯 유려한 움직임으로 쉴 사이 없이 틈새를 노리는 장추삼의 보법.
창과 방패(矛盾)의 첨예한 대결 구도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싸움이었다.
외관상으로는 ‥‥.
에라!' 팡! 한달음에 광목의 턱밑까지 치고 들어갔던 장추삼이 이번에도 나무기둥처럼 우람한 광목의
발을 피하기 위해 산무영으로 몸을 틀었다.
기다렸다는 듯 다시 날아드는 권력.
'제기랄!' 맞상대할 수도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정말 괜찮게 어우러질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장추삼의 공세는 뭔가 맥 빠진 것이었다.
"글쎄, 다음에 하자니까 그러네!
"
"목숨을 구걸 받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는 아니다.
어서 와라!
" 어서 오긴 개뿔이‥‥ 광목의 눈가에 걸려 끝?
沮?버티고 있는 눈물만 아니었더라면 서너번은 제대로 진격해 들어갔을 거다.
'왜 나보다 일찍 끝낸 거냐고~' 숨을 고른 두 사내가 엉켜서 두어 차례 손을 나누었다 싶었는데 문제
의 비명이 들려왔다.
말할 것도 없이 소리의 주인은 밀지였고, 울림만으로 그의 상태를 충분히 짐작할 정도였기에 잠깐 손을
멈췄던 광목의 눈에 옅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이때부터 장추삼으로는 재미적은 싸움이 되어버렸고 광목의 입장에서는 절박한 무엇으로 임하는 계기가
되었던 거다.
"동정이 아니라니까! 배가 고파서, 힘이 다 빠져서 그러니 제발 타협 좀 합시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겠소!
"
"장난치나!
" 으르릉 거리며 광목이 또다시 주먹을 난사했다.
평정심을 잃어 정확도가 바닥인 권력을 물 찬 제비 같은 장추삼이 얻어맞아 줄 리는 만무한 노릇.
쾅! 쾅! 쾅! 애꿎은 나무들만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광목의 손에 넘어간 그것들의 개수는 벌써 열을 헤아리고 있었으니 그가 얼마나 흥분해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팔 하나가 부자연스러운 상태라면 권각가의 입장에서 놓고 볼 때 거의 사 분지 일의 전력을 떼어놓고
싸우는 것과 같다.
당연히 선공은 무리, 밀고 들어오는 적을 되받아치는 전법을 위주로 싸워야 할 상황이다.
어설픈 공격 또한 절대 금물.
두 팔이 성한 경우라면 몰라도 위의 경우라면 한 번의 헛손질로 파생되는 공백이 너무 크다.
상대를 압도하는 보법이라도 지녔다면 또 모르지만.
처음의 격돌만으로 장추삼의 보법을 견식한 광목이 그런 바보 같은 도박을 감행할 리가 없었다.
몸 가눔 하나는 이 사형과 맞먹는 실력자의 앞에서 무슨 보법인가.
그래서 공성포처럼 제자리를 지키며 이리저리 권력을 쏟아내는 참인데 얄밉게도 상대는 스치는 시늉조
차 해주지 않았다.
건달 시절부터 안 맞고 많이 때리자는 주의를 견지해 온 장추삼이다.
이토록 어설픈 공격에 몸을 맡길 리가 없지 많은가.
그래도 광목은 무던히 권력을 내뿜었다.
떨어지려는 눈물을 대신하려는 걸까.
"좀 그냥 가시오! 이게 무슨 놈의 싸움이야!
"
"건방진 소릴랑 집어치워라!
" '미치겠네, 진짜!' 성난 황소 같은 그를 잠재우려면 방법은 오로지 하나.
단숨에 제압하는 도리밖에 없다.
그러려면 전력을 기울인 공격만으로 가능할 터였고, 그 결과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남달리 넓은 아량으로 이러는 건 아니다.
찝찝하게 낚은 승리가 싫다는 거다.
적어도 기학의 사형이라는 사람에게만은.
"나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니까! 정말로 동정 따위의 하품 나는 감상 같은 게 아니니까 오늘은 제발
그만두자고!
"
"사정은 뭔 놈의 사정! 생사결에 임한 자에게 사정 따위는 없다!
" 맞지 않을 자신은 있었지만 기약 없는 회피는 정말이지 사람을 지치게 한다.
입에서 단내 나게 뛰어다니랴, 중간중간 설득하랴, 장추삼의 입장에서 오늘의 싸움은 어떤 악전고투보
다 피곤한 것이었다.
"아~ 씨! 그렇게 말을 해도 알아먹지 못하는 거요? 이렇게 보여도 내 나름대로의 긍지는 있다니까!
" 우뚝.
광풍 같았던 권력이 순식간에 잦아들고 팔을 치켜든 상태 그대로 입술을 실룩거리던 광목이 땅이 꺼져
라, 한숨을 뱉었다.
"긍지‥‥ 그래, 긍지라고 했나?“
"자네 말이 옳다.
이건 싸움이 아니지.
자살과 다름이 없는 행동이지.
어찌 이런 걸 비무나 생사결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 여전히 장추삼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이 기회다.
한마디 잘못 나가면 다시 시작할지 모르고, 그랬다간 정말 미칠지도 모른다.
"자네의 긍지란 어떤 건가“ '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당신이 기학의 사형이기 때문에? 쪽팔리게
이기는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서?
"글쎄‥‥.
괜히 거창한 말을 썼는데, 뭐 그냥 쉽게 말해서 오늘은 싸우기에 별로인 날이라는 거요.
" 뚱딴지 같은 대답인가? 굳은 표정으로 광목이 다시 주먹을 드는 순간 멍하니 서 있던 장추삼이 말을
이었다.
그답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로.
"타인에게는 아무 일도 아닐지 모르지만 한 사람의 죽음이 다른 이의 마음에 평생 동안 머무를 수도 있
소.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라면 마다할 생각은 없지만 같은 짐을 또다시 질 수야 없지 않겠소.
" 순간적으로 침묵이 장내에 내려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광목이 부러진 왼팔을 힘겹게 끌어 올려 오른 주먹을 감싸 쥐고 가슴께로 가져갔
다.
물론 포권이다.
"자고로 남자라면 나서고 물러설 때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오늘 창피하게도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내던지려 했던 우매한 인간을 일깨워 준 장추삼 소협에
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네.
" 관둬요, 하고 픽 웃어버리려 했으나 바들바들 떨리는 왼손의 진동이 서러워 그만 장추삼도 포권으로
화답했다.
"오늘 광목 대협과의 생사결은 부득이한사정으로 연기되었소.
안타까운 일이나 할 수 없으니 조만간 재개되길 바라는 것으로 섭섭함을 달래겠소.
"
"물론이네.
" 화르륵.
고개를 드는 광목의 전신에서 용암처럼 슷구치는 기운은 전의 같은 원초적인 감정과 무관한 인간으로서
의 자존(自尊)적 의지일 것이다.
고개를 돌려 흑의인을 돌아보았을 때도, 사제를 베어버린 정혜란을 마주 대했을 때도 그의 몸가짐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사제의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일 때, 잠깐 몸이 흔들린 것 같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신형을 바로 한 광
목이 오른손으로 사제를 끌어 올렸다.
그렇게 광목은 떠났다.
그 흔한 복수의 다짐도 남겨놓지 않은 채 유명을 달리한 사제를 둘러메고 터덜터덜 산을 내려갔다.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세 사람은 아무런 말없이 서 있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몰랐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갔군.
"
"갔네요.
"
"끝났으니 우리도 갑시다.
" 동시에 터진 말.
어휘는 제각기 달랐으나 의미 면에서는 비슷했다.
그만큼 광목이 남기고 간 족적은 아련한 무엇으로 자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정혜란과 장추삼이 늦었다고 구시렁거리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데 뒤따르던 흑의인이 손짓으로 그들
을 부르려다 이내 관두었다.
누구 말마따나 오늘은 날이 별로인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만 언질을 주었다.
"조만간 한잔하세 !
"
"아주 이 동네에 눌러 살 거요?“
"설마‥ 허허허!
" 왕삼(王三) 노인에게 오늘의 일진은 억세게도 더러웠다.
"제기랄 거‥‥“ 본래 노름 운이 좋았던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처참하지는 않았
다고 자부한다.
"병신 같은 국천이 자식 때문에!
" 마국천의 얼굴이 떠오르자 왕삼의 두 손이 절로 떨렸다.
하지만 언급된 마국천으로서는 대단히 억울할 만도 한 것이 그는 왕삼에게 도박을 하라고 한 적도 없거
니와 그럴 위치도 아니었다.
아무리 뒷골목 패거리고 나이 먹은 왕초라지만 대가리는 대가리고 쫄따구는 쫄따구다.
어찌 수하로서 대장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겠는가!
"그 자식, 그 멍청하고 띨띨한 바보 녀석!
" 자꾸 마국천 쪽으로 책임을 전가시키는 데는 물론 이유가 있었다.
왕삼의 나이, 올해로 벌써 육십 하고도 여섯.
밖에서야 나이도 잊고 젊은 녀석들과 드잡이 질하며 큰소리 탕탕 치고 다니지만 언젠가부터 집이 무서
워졌다.
더 정확하게 말해 마누라의 서슬이 너무도 두렵단 말이다! 처음부터 이랬냐고? 물론, 당연히, 절대로,
맹세코 그랬을 리 없다! 분명 이삼 년 전까지만 해도-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 수치는 왕삼만의 착각이
다-새벽까지 술 퍼먹고 기녀들에게 가진 은자를 다 풀어도 찍 소리 한번 토하지 못한 마누라였다.
찬이 마음에 들지 많으면 밥상을 엎어버리는 것으로 불만을 표시하면 됐었다.
일각도 지나지 않아 마누라는 어김없이 새로 상을 올렸었으니까.
생활비? 달마다 꼬박꼬박 그런 것을 바치는 남정네들을 경멸해 마지않던 그었다.
그 딴 소소한 것에 정신 팔 시간이 어디 있다고.
한마디로 호통 한 번이면 적어도 가정에서는 제왕처럼 군림했던 그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비 맞은 갈대처럼 늘 숙여 있던 마누라가 허리를 꼿꼿이 펴기 시작하면서
모든 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소리를 지르면 몇 배의 고함과 악다구니로 되받아 쳤고, 밥상을 엎으면 그대로 집을 나가서는 몇
날 며칠이고 들어오지 않았다.
주먹이라도 들라 치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른 빰을 들이밀며 맹수처럼 으르렁거렸
다.
독사? 독사 정도는 우습게 질식사시킬 만큼의 독기를 풀풀 뿜어대며 자연스레 주도권을 잡아가더니 이
제는 아예 상전이다.
달마다 꼬박꼬박 가져다주는 생활비인데도 한 푼이라도 비는 날에는 천지가 요동을 쳤고, 광풍과 눈보
라를 동반한 회오리가 온 집을 휩쓸었다.
그리고 왕삼은 인정해야만 했다.
이제 그의 권좌는 영원히 마누라의 몫임을.
"제기랄! 어떻게 돈을 메운단 말이야!
" 오늘은 마누라에게 생활비를 가져다주는, 더 정확히 말해서 바쳐야하는 날이다.
요즘 경기도 좋지 않고 해서 상인들도 예전처럼 자릿세를 척척 바치지도 않는 형편이라 술 한 잔 마시
지 않고 돈을 모아 겨우 돈을 맞췄었다.
그대로 집으로 갔으면 아무런 일도 없었을 텐데‥‥‥자신의 열 명도 안 되는 수하 가운데 가장 돈 개
념 없는 마국천이가 오늘따라 도박을 하고 싶었던 건 운명이라면 운명일 거다.
뭐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는지 청빈로의 암루에서 수중의 은자를 단 일 문도 남김없이 탈탈 털렸다는 것
또한 마국천의 운명일 테고.
그렇다, 그것까지는 모두 마국천이의 문법이었던 거다! 은자 열다섯 냥을 잃고-물론 열다섯냥 이라면
시전 상인들을 세 달간 들볶아도 건지기 어려운 거금이지만, 어됐든-수중에 땡전 한 푼 없이 유령처럼
배회하든 말든 모른 체하고 집으로 얌전히 발길을 돌렸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는데! 누구한테 돈이라도 뜯긴 거냐로 시작된 핀잔은 곧 마국천의 통곡으로 이어졌고, 왕삼
의 눈가에 어렸던 한심함은 곧 의혹으로 바뀌었다 생각해 보라, 열아홉 판을 연달아 깨졌다고 하는데
의구심이 들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불어 녀석은 대단히 멍청하단 말이다! 째진 눈으로 힘없는 사람들에게 큰소리치는 일은 곧잘 해내지
만 그게 녀석의 특기이자 전부다.
다른 무엇은 머리에 칼을 쑤셔 박아도 절대로 하지 못하는 위인이 마국천이다.
뭔가 생각하고 계산하는 능력 따윈 애당초 가지지 못한 인물이 바로 마국천이다.
부연 설명할 필요도 없이 징징대는 수하를 앞세운 왕삼은 암루로 쳐들어갔다.
자고로 아랫사람의 문제조차 해결해 주지 못하는 우두머리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
었으니까.
대문을 거의 부술 기세로 도박장에 난입한 그가 바보 같은 수하의 돈을 쪽쪽 빨아먹은 패주(牌主) 녀석
의 멱살을 기세 좋게 틀어쥔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그는 곧 손을 풀어야만 했다.
심증만으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냥 암루를 떠났어야 했다.
하도 실실거리는 녀석의 꼴이 눈에 거슬려 그만 판을 벌이고 말았다.
수를 쓰면 그 즉시로 잡아서 물고를 내리라 결심하고.
한 식경 후‥‥ 당연한 결말이지만 풀린 눈으로 청빈로를 배회하는 유령이 하나 더늘었다.
이번 유령은 아까의 그것과 조금 다른 것이 가끔 기물을 파손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과격성을
보인다는 거다.
연락을 받고 분분히 뛰쳐나온 전갈파의 졸개들이 그를 말리고 쌈짓돈을 모아 어떻게든 추렴해 주지 않
았다면 왕삼은 분명 관아에서 며칠간 밥을 먹어야 할 판이었다.
은자 부딪치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잃은 돈과 모인 은자와의 괴리는 도저히 어찌해 볼거
리가 없었다.
그래도 대가리의 체면상 우는소리는 하지 못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답례를 한 후 웃는 낮으로 겨우 자리
를 빠져나왔으나 한결 가벼워진 전낭의 무게가 그의 가슴에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아, 어쩌냐.
어쩌면 좋단 말이냐!
" 길거리를 배회하는 왕 영감의 속내를 그 누가 알랴! 하늘의 별님은 알아줄까? 그렇게 걷다 보니 자신
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왕삼의 발걸음은 자연 집과 멀어지고 있었다.
'매도 먼저 맞는 편이 낫다고 하는데‥· 이놈의 발이 왜 이 방정이냐!' 자의 반, 타의 반? 오락가락
거리던 그가 마침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집에 가는 거다! 설마 하니 맞아죽기야 하겠는가! 설마 하니 잔소리에 깔려서 압사하겠는가! 어
깨에 힘을 딱 준 왕삼이 힘차게 걸음을 옮기려는데 어디선가 그를 불러 세우는 소리가 들렀다.
"자네가 왕노삼인가?”
'어럽쇼? 감히 어떤 놈이기에 자네가 왕노삼, 어쩌고 하는 건가? 비록 지금 아주 사소한 고민거리로
인상이 편치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왕삼이다.
결정적으로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노(老) 자를 집어넣어? 이런 빌어먹을 놈!' 분기탱천한 왕삼
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청빈로 사람치고 왕삼의 이름 가운데 노 자를 집어넣는 이는 없다.
아니, 딱 한 명만 제외하고.
아직 팔팔하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왕삼이기에 위의 호칭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니까.
"누구야? 어떤 자식이 왕 어르신의 함자를 멋대로 주둥이에 올리는 거야?“ 불끈불끈.
근육이 뛴다.
이렇게 흥분하면 왕삼의 대머리에서 꿈틀거리는 전갈문신이 핏물을 머금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왕삼의 전갈이 움직이면 줄행랑을 놓기 일쑤였다.
헌데 이번엔 달랐다.
"대머리에 발간색 전갈 문신‥‥.
황노삼이 맞나 보군.
" 흠칫! 상대는 자기를 미리부터 노렸다는 얘기다.
이렇게 인적 드문 소로에서! 이건 의심할 여지 없는 웅담회(熊擔會)의 기습이다! 번개처럼 뒤를 돌아서
며 벽에 등을 붙인 왕삼이 소매에서 소도를 꺼내 사방을 경계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분명히 옆이었는데? 제아무리 몸이 날래다고 해도 사람인 이상 어떻게 바로 옆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는 있다.
바로 무림인들이다.
그렇다면 웅담회에서 강호인을 고용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돼!' 돈이 어디 있다고 강호인인가? 그런
이들을 부르려면 적어도 웅담회의 반년 치 수입 정도를 고스란히 바쳐야 할 판이다.
회원들의 끼니도 걱정하는 판에 무림인? 그렇다면 남은 하나는 귀신이라는 건데.
'세상천지에 귀신이 어디 있어!' 하며 호기롭게 빙글 몸을 돌린 그의 눈앞에 한 쌍의 귀화가 활활 타오
르고 있었다.
"어이쿠!
" 털썩 무릎을 꿇으며 왕삼이 고개를 처박고 손이 발이 되게 빌기 시작했다..
"사신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가지 못합니다요~ 그의 입에서는 잡다한 잘못들이 쏟아
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오십년도 더 된 얘기에서부터 오늘 아침까지를 망라하는 방대한 분량이라 듣는
이가 설사 사신이라도 지겨워서 죽을 판이었다.
"그래서 꿔간 두냥은 변상했습니다아~ 겨우 이 정도밖에 잘못한 것이 없는 저보다 부디 웅람회라는 시
시껄렁한 건달 조직을 만들어 우리동네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호정대 녀석을 데리고 가십시오오~
" 그래도 사신은 아무런 대담이 없었다.
이럴 땐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져야 한다! 남자 체면은 그 다음의 문제다.
생사가 걸려 있는 문제에서 체면은 무슨 얼어죽을 체면인가!
"아이고오~ 사신니임 휘적휘적.
발목을 잡아보려 손을 휘저어보았으나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체투지였기에 바닥밖에 볼 수
없던 그가 고개를 살짝, 아주 살짝만 들었다.
신발이라도 보면 매달리리라, 마음먹고.
"어‥‥‥신발? 없었다.
용기를 낸 그가 조금 더 고개를 들었다.
"어라‥‥‥ 아무것도 없었다.
완연히 용기를 되찾은 그가 힘차게 몸을 세웠다.
"이런 제기랄!
" 헛것을 봤나 보다.
나이는 역시 속일 수 없는 건가! 그나마 아무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개망신을 당할 뻔했다
"어허험!
"누가 볼세라 옷에 묻은 흡을 탁탁 털어내며 유유히 휘파람을 불던 왕삼이 품에 삐죽이 나와 있는 봉서
를 발견하고 어리둥절해졌다.
"어라? 이게 뭐야?' 봉서를 꺼내려 손을 드는 순간,
"열지 마라!!
"
"케엑!
"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는 그만 귀를 부여잡고 다시 한 번 지면과의 조우를 강요당했다.
목청 좋은 이가 바로 옆에서 고함을 질러도 이보다 시끄러울까.
문제는 사람이 또 없다는 거다.
귀신이 곡을 하고 자살까지 고려할 상황.
마라, 마라, 마라‥‥ 은은한 울림으로 사라지는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아까보다 침착한 음성이 들려왔
다.
물론 옆에서
"그 봉서를 장추삼에게 전해주거라 둘이 안면이 있을 터이니 찾기쉬울 것이다.
만약 노부의 말을 어겨 봉서를 버리거나 열어보기라도 한다면 삼족이 참화를 당할 것이다!.
"
"아이구, 예, 예!! 각골명심(刻骨銘心)하겠습니다요! 반드시 추삼이에게 이 봉서를 전하겠으니 부디 이
비천한 놈을 어여삐 여겨주시오오~
" 한동안 엎어져서 부들거리던 왕삼이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칠흑같은 어둠이 가로놓은 골목에 아련한 메아리가 도도히 멤돌다 꼬리를 늘어뜨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장추삼이‥‥.' 봉서를 깊게 쑤셔 넣으며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렀다.
장추삼이라면 청빈로에서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만큼 유명하다.
동네 건달로 그저 그런 인생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강호의 영웅이 된 사내.
청빈로의 한량들에게 그의 일화는 전설이 되었고, 술자리마다 그의 애기가 빠지지 않을 정도다.
"장추삼이‥‥ 왕삼으로는 유명해졌든 유명해지지 않았든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심어주었던 사내
이기에 그 이름이 왠지 정겨웠다.
한 칠 년 전인가? 봉황루에서 주정 부리던 왕삼이 그에게 두들겨 맞았던 날이.
분을 참지 못하고 패거리들을 모조리 불러 모았지만 그 하나를 이겨내지 못하고 모조리 나가떨어졌었다.
그날부터 장추삼은 왕삼을 보면 왕노삼, 왕노삼하고 웃어주곤 했었다
"이제는 정말로 우리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장추삼‥‥.“ 귀신의 정체는 무림인일 것이다.
그것도 굉장히 강한.
건달 생활 오십 년인데 그 정도 눈치가 없을까.
나이는 그저 배꼽으로 먹는 게 아니다.
멀리서 이런 말을 보내는 방법은 전음이라는 수법일테고.
문득 달을 올려다보던 그가 옷깃을 여몄다.
왠지 추웠고, 뭔가가 한심했으며, 창피하기까지 했다.
"이젠 이 짓도 그만둬야겠어‥‥‥“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왕삼의 얼굴에 한줄기 웃음이 스치고 지
나갔다 자조적이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관조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세월은 차근차근 쌓이기도 하지만 어느 한순간 몰아서 올 수도 있나보다.
삼류무사 250
무림첩(武林帖)과 단심주(丹心呪)
복룡표국의 정문을 호위하는 일은 그야말로 정통 따분한 임무였기에 두 명의 위사가 오뉴월 대청마루
에서 조는 개처럼 한숨을 연발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간판을 올린 지 어언 사십여 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청해복룡표국에 시비 비슷한 거라도 붙인 사람들
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거기다 요즘의 성세라면·.
그렇지만 방비를 하는 척은 해야겠기에 어쨌든 두 다리에 힘 꽉 주고 부동자세를 유지하고는 있었다.
"어이, 짝다릴세.
조심해.
" 표사 오원철이 한쪽 발을 비스듬히 세우고 긴장을 풀고 있는 동료 표사에게 주의를 줬다.
짝다리가 대수냐고? 그렇다, 많이 대수다.
말이야 바른말이지만 이렇게 삼엄한 표정과 몸짓은 필요 없다..고 그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 표사들의 마음이고, 표국의 내정을 맡고 있는 집법당주 철무웅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얘기
였다.
하나도 기강이요, 둘도 기강을 강조하는 철무웅이다.
이효는 좀 풀라고까지 말하지만, 오족하면 아침에 술 냄새 풍기며 출근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할까.
하물며 정문 경비를 서는 사람이 짝다리? '난리나지.' 그 뻣뻣한 턱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미친 소처럼
씩씩대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조금 힘들더라도 정해진 시간 동안 임무에 충실 하는 편이 낫다.
지적을 받은 표사 주대발이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재빨리 자세를 바로 했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오늘 하루 복룡표국의 얼굴이니까.
"심심하구먼.
사서오경을 하루 만에 모조리 읽으라고 해도 이보다는 덜 지루하겠어.
"
"그만 즘 투덜거리게.
사람이 그리 진득하지 못해서야 · 배에 힘 한번 주고 참어.
"
"배에 힘 줘봐야 배변(排便)에나 도움이 된다네.
주고 싶으면 자네나 많이 주라고.
지겨워라~
" 주대발의 푸념에 오원철이 혀를 찼다.
원래가 신소리를 좋아하고 방랑벽있는 동료의 성격을 잘 아는지라 어떻게든 안정시키려 하는 그의 노력
은 눈물겨울 정도였지만 주대발은 나 몰라라, 여전히 딴소리였다.
"그렇게 입으로 뱉어봐야 더 지루할 뿐이라니까.
그냥 참으라고.
"
"어이구~ 자네 눈을 한 번 보고 그런 말을 하게.
어물전 동태들이 아주 형님, 형님 하면서 쫓아다닐 판이구만.
"
"내가 내 눈을 어떻게 보나?'
"사람하고는, 무슨 농담을 못해요.
아구구~ 지겨워! 차라리 표물 수행을 나가고 말지.
이건 영‥‥ 도무지 체질에 맞지 않아서리.
안 그래?'
"그야 이를 말인가.
" 이런저런 한담 속에 태양은 서서히 중천으로 이동했다.
두 위사의 밥통은 빈곤의 신음성을 내지르기 시작했고, 길가를 오가는 사람들도 뜸해지기 시작했다.
"배고픈데‥
"조금만 기다리세.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지 말고.
" 한 식경만 버티면 다음번 조와 교대다.
이렇게 한 번만 때우면 적어도 한 달간은 지겨운 문지기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된다.
너무 평온해서 하기 싫은 임무.
위험을 꺼리면서도 지겨운 것 역시 참지 못하는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심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두 위사의 위장에서 급박한 외침이 들려오고 사십여 년 동안 이어온 임무는 언제나 그러하듯 아무 일도
없이 끝날 뻔했다.
그런데·
"어? 무슨 일이 났나?'
"어? 뭔 일이야?' 두 위사가 합창이라도 하듯 입을 열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엔 무림맹의 깃발을 앞세운 많은 수의 무사가 보무(步武)도 당당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평온한 호북이라고 해서 무림맹의 무사들이 다니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어됐든 이곳에도 호북지부가 위치하고 있으니까.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뒤쪽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마상전사(馬上戰士)들이었다.
철컥철컥!
"설마‥‥‥‥
"처, 철갑기마대?' 둘의 말 그대로 마상의 무사들이나 말들 모두 검은 철로 온몸을 감사고 있었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의 근원도 그들의 철갑주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철갑기마대? 아니, 이 좁아 터진 청빈로에 무슨 큰일이 터졌다고 철갑기마대라는 거야?“
"가시奇事)일세, 기사야!
" 철갑기마대라면 무림맹의 대표적 무투 조직이다.
무림맹의 이름으로 벌어진 싸움에서 철갑기마대가 투입되었다는 건 사안의 중대성을 떠나 그만큼의 대
적(大離)을 맞이한다는 의미다.
다른 말로 하자면 철갑기마대를 개입시킬 정도로 큰일이라는 거고, 그들의 출몰은 강호인들에게 적잖은
공포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노릇이란 거다.
점심밥 생각도 날려 버릴 만큼 희한한 구경거리에 두 위사는 그저 입을 쩍 벌리고만 있었다.
철갑기마대를 볼 기회는 그리 흔치 않은 일 이었으니까.
그런데‥‥‥‥ “조금 이상한데?”
넋 놓고 감탄만 하던 오원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말인가?”
"저들 말이야 · 우리 쪽으로 오는 것 같지 않은가?”
“음?”
그러고 보니 천천히 움직여서 잘 몰랐는데 깃발을 앞세운 사람들이 나 철갑기마대나 모두 복룡표국의
정문으로 직진해 들어오고 있었다.
"아니, 무림맹에서 우리 표국에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거지? 표물을 맡기려고 왔나?“ 주대발의 한심한
발언에 오원철이 혀를 끌끌 찼다.
"이 사람아, 표물 맡기러 오면서 무슨 철갑기마대란 말이야! 자네도 들은 풍월이 있다면 철갑대가 언제
움직이는지 잘 알 거 아닌가!
"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고·.
아, 혹시 길을 묻기 위함이 아닐까? 제아무리 날고 긴다는 사람들이라도 우리 표사들보다 길눈이 정확
한 이는 없을 테니 말이야.
" 쓸데없는 소리를 온몸에 두르고 다니는 주대발의 말 가운데 개중 일리 있는 얘기라서 오원철도 고개
를 끄덕이고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절도 있는 복룡표국의 위상을 보여줘야 한다! 철크덩! 아니나 다를까, 무림맹의 깃발을 앞세운 행렬은
복룡표국의 정문을 한 자 정도 사이에 두고 딱 멈춰 섰다.
누구인지 몰라도 마지막 철갑이 부딪치며 파생시킨 묘한 파찰음에 주대발이 이를 갈아붙였다.
푸륵! 푸륵! 거친 말의 콧김 소리와 함께 묘한 정적이 찾아들어 하오의 태양을 정지시켰다.
꿀꺽! 어디서 왔는지 모를 긴장이 두 위사의 마른침을 재촉했지만 둘은 감히 나서지 못했다.
그만큼 무림맹의 무사들이 풍기는 기도는 압도적인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다행인 것이,
"수고들 많네.
"하고 무림맹 측에서 말을 붙인 이가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는 정도일까.
"아니, 태극검 기영제 대인이 아니십니까!
"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 구세주가 따로 없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반색을 하는 두 위사를 보며 기영제도 환하게 웃었다.
"그래, 그래.
잘 있었다네.
그나저나‥‥ 청해복룡표국의 현판을 힐끔 쳐다본 그가 목소리에 작은 힘을 실었다.
"팔파공동문하의 귀하신 분들이 왕림하셨다고 청해복룡표국주 이효에게 어서 전하게!
"
"팔파공동‥‥‥ 옛?!
"
"엑!
" 두 위사가 서로를 바라보다 눈썹이 휘날릴 정도로 뛰었다.
잠시 후 뛰쳐나온 집법당주 철무웅도 검토하던 서류를 오른손에 쥔 상태였다.
"철무웅이 기 대협을 뵙습니다! 어쩐 일로 이렇게‥
"이 국주에게는 기별을 했는가?”
"그야 이를 말씀입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 사실 기영제와 복룡표국과의 관계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호북에서 표국을 운영하는 이들 가운데 무당과 가장 먼 거리를 두는 사람이 바로 이효였다.
또한 기영제는 무당 재정의 한 축을 담당하는 입장이니 그들의 사이가 원만할 리는 없었다.
그래서 서로 소가 닭 보듯 하는 입장이었고, 이효 역시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무당의 속가
제자들을 홀대하지 않았다.
물론 특별대우도 없었고.
그런고로 철무웅으로서는 이런 자리가 여간 버거운 것이 아니었기에 어서 표국주가 나와 주기만을 바랐
다.
철무웅의 안내에 따라 철갑대가 좌우로 갈라지며 네 명의 젊은이가 앞으로 나섰다.
척 보기에도 재기발랄해 보이는 삼남일녀(三男一女)는 주위를 오연하게 돌아보고 청해표국의 정문을 넘
었다.
철갑대는 미동조차 없이 복룡표국의 정문을 지키고 있었기에 철무웅으로서는 여간 걸리는 것이 아니었
으나 말할 입장이 아니기에 누구도 들리지 않을 한숨으로 답답한 심경을 대변해야만 했다.
"접견실노 ‥‥
"그럴 것 없네.
" 철무웅의 말을 자르며 표물 하역장에 떡 버티고 선 이는 기영제가 아니었다.
이제 나이가 서른 정도나 됐을까 적당히 마른 체구에 날카로운 눈빛으로 복룡표국을 쓸어보는 청년.
그가 바로 활파공동문하 가운데 맏형 격인 아미의 군가휘(君壽瞬)란 사내었다.
"형제들, 예서 기다리세나.
"
"아, 아직은 볕이 따갑습니다.
안으로 드셔서 차라도 한잔하시는 편이..
대꾸없이 태양을 응시하는 군가휘의 기세에 철끝한 철무웅이 두어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이도 어린 게 무게 잡기는.
성질 같아서는 끊어앉혀 놓고 혼줄을 내주고 싶었지만 항렬이 항렬인지라 철무웅은 괜히 삐죽한 턱수염
을 쓰다듬었다.
팔파공동문하라고 한다면 그 문파 장문인의 직전제자라는 얘기가 된다.
물론 특별한 경우에 한시적으로 만들어진 기형적인 항렬이라고 하나 어쨌든 구파의 인증이 떨어진 이상
그걸 거역할 무인은 없다고 봐도 옳다.
나이가 많건 적건 말이다.
"아, 국주님이 나오십니다!
" 철무웅의 말에 네 젊은이의 시선이 한 곳으로 옮겨졌다.
'저자가 · 이효? 양광을 받으며 천천히 다가오는 오십 줄의 사내.
'발걸음에 힘이 있으며, 전혀 동요한 기색이 없다.
무엇보다 의지가 강한 턱 선‥‥ 쉽지만은 않겠군.' 심유한 눈빛으로 이효를 살피던 군가휘가 일행 가
운데 한 사람과 말없는 눈짓을 교환했다.
그의 눈길을 받은 여인도 고개를 젓는 것이 군가휘와 같은 생각을 품은 모양이었다.
그들의 앞에 선 이효가 크게 포권을 취했다.
"청해복룡표국주 이효가 네 분 공동문하와 기영제 대협을 뵈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워낙 정중한 포권인지라 네 젊은이도 화답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기영제만이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났을 뿐.
웅성웅성.
일을 하던 표사들이 그들의 주변에 하나둘 모여들었다.
호랑이 같은 집법당주도 기를 펴지 못하고 멀적이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꽤 높은 지위의 인물들이
찾아왔음을 직감했지만 일반 표사들에게 그런 건 별로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네 청년은 표사들의 움직임이 신경 쓰였지만 그렇다고 제지하지는 않았다.
이효 역시 그들을 물리치지 않았기에 표사들의 설왕설래는 조금씩 커져만 갔다.
대략의 인사가 끝나고 이효가 다시 한 번 포권으로 예를 표했다.
그래, 어쩐 일로 네 분 귀인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행차하신 것인지?
"기별도 띄우지 않고 이렇게 들이닥친 결례에 관해서는나중에 따로 사과하겠소.
양해해 주시길 바라오.
"
"결례씩이나..
허허!
" 이효의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군가휘가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호북 청빈로의 제이대 청해복룡표국주 이효는 무림첩을 받들라!
" 쿠쿵!
"무, 무림첩이라고!
"
"무림첩!
" 표사들의 동요는 그대로 철무웅에게도 이어졌고, 이효의 얼굴에도 순간적으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무림첩.
강호에 커다란 일이 생겼을 때 내리는 일종의 직권 처리 문서.
이 작은 종이 안에는 무림맹의 수뇌들이 의결한 중요 안건이 담겨있기에 구속력과 강제력은 여타의 무
림법을 능가한다고 하겠다.
지난 십수년간 한 번도 발동한 적이 없는 무림첩.
그 의미는 실로 간단치 않으리라.
"이효가 삼가 무림첩을 받습니다!
" 그 자리에 부복하는 이효를 냉엄히 쏘아보던 군가휘는 낭랑한 목소리로 무림첩을 읽어 내려갔다.
"삼십 년 전 무림을 뒤흔들었던 비천혈서와 흉몽지겁을 아직도 기억할 것이다.
이제 강호는 안정을 되찾아 무림인들이 서로 도우며 자기개발에 매진하여 예전의 성세를 되찾아가고 있
었다.
그런데 근자에 들어 다시금 비천혈서에 관한 소문이 돌고 있다.
말이란 건 한 사람을 건너면 부풀려지는 경향이 있는지라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 숨을 한 번 고른 군가휘가 병풍처럼 둘러싼 표사들을 보고 다시 무림첩에 시선을 옮겼다.
·허나 소문이라고 마냥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
방임의 결과는 제 이차 무림혈겁이라고까지 불리는 흉몽지겁의 상처로도 잘 드러나는 바, 유한초자에
관한 소문과 비천혈서의 소문이 강호를 어지럽힘에 일단 소문의 진원지인 하남을 수색하였으나 어떤 징
후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여 또 다른 소문의 진원지인 호북을 주시하게 되었고, 청해복룡표국 주 이효가 비천혈서와 모종의 관
련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 뭐!
"우리 국주님이!
"
"말도 안 돼!
" 표사들의 놀람을 즐기기라도 하듯 말을 끓은 군가휘가 헛기침으로 주위를 환기시켰다.
·.그런고로‥‥ 무림청에서는 이효에게 아래와 같이 명을 내리니 받들기 바란다.
첫째, 이효의 집무전과 사무실, 기타 서류는 무림맹의 관할 하에 귀속된다.
" 누구도 모르리라.
이 순간 이효의 얼굴이 어떤 형상을 그렸는지.
집무전과 사무실을 점거하고 서류를 감찰한다는 건 이효에게서 복룡표국의 국주 자리를 박탈하는 처사
나 진배없는 일.
표물 의뢰인의 신분은 표국주만의 기밀 사항에 속하니까.
"둘째, 청해복룡표국의 십삼조, 약칭 실회조는 오늘부로 해체한다.
물건을 운송하는 일을 주 업무로 하는 표국에 이런 전투 조직은 온당치 않다.
" 실회조의 해체, 이건 복룡표국의 자율경영권을 완전히 무시하겠다는 것,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표국의 실질적인 힘을 무력화시키겠다는 저의가 깔린 결정일 테고‥ 벌떡.
이효가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군가휘는 보지 못한 사람처럼 계속 읽어 내려갔다.
"셋째, 별도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 철갑기마대가 호북 청빈로에 주둔한다.
숙식은 청해복룡표국에서 제공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 밖에 운집한 철갑기마대의 인원은 어림잡아도 오십 명 이상, 당연히 철갑마도 오십 마리 이상이라는
얘기다.
무려 백(百)의 인마(人馬)를 무한정 청해표국에 주둔시킨다는 의미는 간단하게 말해서 그 기간 동안 표
국으로서의 정상적인 업무가 불가하다는 거다.
바꿔 말한다면 그 기간 동안 표사들의 일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뜻.
이건 사십여 년이 넘게 걸려 있던 청해복룡표국의 현판을 내리라는 말과 무엇이 다를까.
"그, 그런 일이!
"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던 철무웅이 군가휘의 눈길을 받고 이를 악물었다.
두루마리를 접어 건너편의 다소 어린 청년에게 건넨 군가휘가 빙글 몸을 돌렀다.
입가에 걸린 미소만큼이나 당당한 눈빛으로.
"본 건은 즉시로 발동되오.
고로 지금부터 국주의 집무전은 우리가 사용하겠소.
" 무림첩은 절대명제다.
거역이란 있을 수 없다.
그 자체로 무림공적이 되는 일이니 그 누가 있어서 무림첩의 명을 이행하지 않을까.
그리고 전 무림 역사상 가장 뜻 깊은 말 한마디가 지금 호북의 작은 표국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무
인의 입을 빌어 터져 나왔다.
"불.
가!
" 불가하다니?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이효의 눈을 보고 군가휘와 세 젊은이가 허허롭게 웃었다.
이건 의견이 아니다! 강제력이 있는 판결이란 말이다!
"국주· .
원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
우린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오.
설마 무림첩을 거역하면 어찌 되는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물론이오.
하지만 귀인들의 무림첩은 그 효력이 심히 의심스럽기에 따르기 어렵소!
"
"뭐라? 그럼 우리가 거짓 문서라도 가져와서 행세하고 있다는 건가!
" 쿠쿠쿠- 문득 네 사람 중에 가장 젊은 청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초췌해 보이는 젊은이의 기세가 이효를 압박해 들어왔다.
'과연 팔파공동문하.”
그러나 이효 역시 밀리지 않았다.
그는 할 말이 너무도 많았고, 무림첩을 뽑아 든 사람들이라면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으니
까.
"달마 이래, 아니, 무림맹이 태동된 후로 수많은 무림첩이 발송되었지만 오늘처럼 경우가 없는 적은 없
었소!
"
"경우가 없다니, 제정신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무림맹의 권위에 도전하는 건가!
" 젊은 청년, 오청지-얼마 전 장추삼에게 일장 연설을 들었던-의 장포가 부풀어 오르자 막대한 압력이
이효의 전신을 난타했다.
"묻겠소! 나와 우리 복룡표국이 혈서와 관련되었다는 증거를 단 하나라도 댈 수 있소? 만약 그렇다면
순순히 조사에 응하겠소!
"
"으음..
그들 역시 알고 있었다.
이번 건은 순전히 풍문에 의거했다는 것을.
"오우!
"
"역시 국주님이아!
" 표사들의 눈빛도 바뀌었다.
경외와 두려움으로 대했던 손님들인데 이제는 노골적인 적의와 약간의 조소, 그리고 통쾌함이 뒤범벅이
된 무엇으로.
주먹을 들고 빙빙 휘두르는 표사들의 모습은 군가휘들에게 어떤 위기감까지 심어줄 만한 것이었으니까.
'상황이 좋지 않아.' 수습해야 한다.
표사들이 몰리는 것을 방치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정당성을 만천하에 공표하기 위함이지 이효에게
힘을 실어주려 했던 건 아니니까.
입소문은 그 자체로도 무서운 위력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대로라면 무림맹의 행사가 자칫 안 좋은 의미로 각인될 우려가 있다.
이 국주, 분명히 언급하지 않았소.
소문을 방치했다가 별어졌던 일에 관해서?' 소문을 두려워한 이의 변명 수단이 소문이라는 건 누가 봐
도 역설적인 것이었다.
기가 막혔지만 이효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럼 두 번째로 묻겠소.
귀인께서 제시한 무림첩의 직인은 어느 고인의 것이오? ..직인 말이오.
설마 직인조차 없는 무림첩이라는 건 아닐 테니.
" '이런‥ 군가휘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흘렀다.
말 그대로 무림첩은 무림맹의 의결을 거친 최고의 강제 문서다.
그 만큼의 권한을 가지려면 그만한 요건을 갖춰야 하는 법.
그래서 무림첩엔 반드시 무림맹주의 직인이 적혀 있어야만 한다.
누가 뭐래도 전 무림을 대표하는 사람의 말이라면 구속력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 군가휘가 읽어 내려간 무림첩에 맹주의 직인이 적혀 있을까? 물론 아닐 터였다.
지금 대외적으로 무림맹주는 실종 상태니까.
그리고 그 맹주는 바로‥
"무림맹주가 실종 상태라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 아니오? 지금 국주는 나와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
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로군.
그렇다면 무림첩의 구성 요건이 성립되지 않을 텐데? 잠시 이효를 쏘아보던 군가휘가 씹어뱉듯 입을 열
었다.
"훗, 정히 알고 싶다면 말해 주도록 하지.
" 그의 미소는 어쩐지 사이한 기운마저 풍겼다.
"전대 무림맹주 만승검존의 권한은 정지되었소! 곧 지위까지 박탈되겠지!
"
"뭐라고!
" 놀란 이효가 휘청 몸을 떨었다.
검존의 권한이 정지되었다‥
"하하하!
" 고개를 젖히고 웃는 이효의 얼굴에서 밝은 루주(淚珠)가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뭐야? 어쩐지 켕기는 바가 있는지라 군가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목소리엔 방금 전과 비교하기 어려운 힘이 실려 있었다.
검존은 지난 십팔 년간 무림맹을 비웠을 뿐만 아니라 단 한 번도 맹과 연락을 시도하지 않았소! 이것은
명백한 직무 유기일뿐더러 무림맹을 무시한 처사라고 볼 수 있지! 그가 아무리 맹주의 신분을 가졌다
해도 무림맹의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의무는 지켜야 하는 거요! 얼마 전에 소림에서 검존이 모습을 보였
다고 했지.
그러나 그뿐, 이후로 어떤 연락도 취하지 않았고 취하려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았소이다!
" 어깨를 들씩이던 군가휘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 모든 결정은 검존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오.
"
"그런 법이‥.어디 있냐고 물으려는 거요? 하기야, 일개 표국주의 신분으로 어찌 무림법을 자세히 알까
" 군가휘의 웃음은 신랄한 뾰족함을 담고 있었다.
마치 이효의 패부를 갈가리 찢어버릴 듯이.
.무림법 제이조.
맹주의 유고(有刻), 기타 확인되지 많은 장기간의 부재 시 강호의 주요 사항이 발생할 경우 구파의 원
로가 모여 직권으로 맹주의 권한을 한시적으로 제한하거나, 경우에 따라서 그 자격을 완전히 박탈할 수
있다.
후후, 몰랐다면 알아보고 말하시오.
" 으드득! 이효의 입에서 핏줄기가 흘렀다.
노야, 이들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다 싶으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뱉어버리는 노야는 그저 국외자였던 겁니다.
뭔가를 주장하려거든 똑바로 알고 말하시오.
어디서 건방지게.
" 너무도 분했지만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다.
힘으로 부딪친다면 더 안 좋은 쪽으로만 흐를 뿐.
명분도, 시기도 이효의 편이 아니었다.
그렇게 복룡표국은 몇몇의 결정으로 짓밟힐 판이었다.
나이 어린 표사들의 눈망울에 어린 분노는 그래서 안타까웠고, 늙고 힘없는 표사들의 어깨에 내려앉은
절망은 그래서 처연하기까지 했다.
"이건 아니야!
" 누군가가 앳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젊은 표사들 가운데 다혈질의 청년인 듯했는데 그의 외침은 묘한 울림으로 하역장을 뒤흔들었다.
"맞다! 무림맹은 부당한 명령을 철회하라!
"
"철회하라!
" 한마디의 외침은 잠들어 있던 복룡표국을 깨웠다.
방금 전까지 권위와 힘에 짓눌려 아무 소리도 못하던 소시민들일진대, 앞서서 나서지 못하고 치만 떨고
있었는데.
"우리 표국주님을 그런 식으로몰아간다면 우리 역시 무림맹을 인정하지 않겠다!
" '저 친구·머리 좋은 이효도 이름을 기억하기 어려운 청년.
그러나 그의 눈엔 간결한 의지가 뚜렷이 표출되어 있었다.
그건 바로 불의에 맞서는 신념.
선창의 효과는 빠르게 파급되었다.
표사들의 얼굴은 뚜렷한 결의가 덧씌워졌고, 그들의 근육은 팽팽히 곤두섰다.
"우습군.
" 군가휘의 냉소적인 한마디는 그들의 가슴에 기름 부은 격이었다.
챙!챙! 분분히 병장기를 뽑아 드는 표사들.
그리고 군가휘의 입술도 묘하게 뒤틀렸다.
팔파공동문하와 무림맹에서 인증한 무림첩에의 도전.
이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그런 시도조차도 없었다.
허허‥‥ 아버님, 못난 자식이 그래도 사람 농사는 제대로 지었나 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여기서 더 나간다면 유혈만이 기다릴 뿐이다.
"그만!
" 이효가 부르짖었다.
최악이다.
이건 아니다.
같은 식구들이야 감싸주려는 입장에서 나선다고 하지만 타 무인들이 보자면 이건 어디까지나 항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렇게 간다면 오욕과 희생만이 남을 뿐이다.
"그만들 두시오! 어떠한 결정이든 이건 무림맹의 정당한 권리니 복룡표국의 식구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나서지 마시오! 그의 외침은 통곡이었다.
"우욱 ‥ .국주님, 이건 아닙니다!
" 으흐흑! 일전 불사의 기세로 전의를 불태우던 표사들이 무릎을 끊으며 서럽게 울부짖었다.
"아아‥ 이효의 입에서도 탄식이 흘렀다.
이렇게 무너질 가업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멈춰 버릴 일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끝장날 행보가 아니었는데.
아직은, 아직은 아닌데‥ 후, 귀찮군.' 표사들의 동요를 보며 군가휘가 머리를 짚었다.
설마 하니 무림첩이라는 절대 권위 앞에서 토를 달 줄이야.
그것도 일개 표국주가.
일개 표국주로 썩기에는 지나치게 큰 인물이로군.
아까운 사람이다.
삼류표사부터 쟁지수에 이르기까지, 표국의 모든 인물을 아우르는 신망과 믿음.
이런 건 무공의 고하와 상관없이 그릇의 크기로 가능한 일이다.
거기에 통제력까지 갖추었으니‥ 그러나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칠 수 없다.
무림첩은 절대적인 결정이다.
권고사항 같은 게 아니란 말이다.
단 한 글자의 첨삭도 용납 할 수 없는.
하지만 이대로의 집행은 아무래도 무리다 이효의 저항도 저항이지만 무엇보다 표사들의 분위기가 심상
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
뒤에 시립해 있는 세 남녀를 돌아본 군가휘가 잠시 궁리를 하다 큰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본인의 직권으로 사흘의 유예 기간을 주겠소.
그때까지 모든 것을 정리하시오.
알아듣겠소?
"사흘‥ 충분히 전달된 듯하니 우리들은 이만 가보겠소.
명심하시오.
사흘 후 오시(午時 11:30~01:30) 초에는 무조건적인 집행이라는 것을.
" 대답은 필요치 않았다.
그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가 전부였으니까.
표사들의 적의에 찬 눈동자를 받으며 네 남녀가 하역장을 벗어나자 그때까지 철탑처럼 서 있던 이효의
무릎이 부르르 떨렸다.
분하다.
너무도 분했지만 방법이 없다.
"국주님!
" 아직까지 무릎을 꿇고서 통곡을 하고 있는 표사들을 바라보던 그가 처연하게 웃었다.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만 바라보고 열심히 일했던 이들인데.
"모두들 일어나시오.'
"국주님!
"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소.
너무 걱정 말고 일어나시오.
복룡표국의 표사들은 함부로 무릎을 꿇는 법이 아니라오.
"
"으흐흑
"흑흑 ‥ 애달픈 통곡은 멈추지 않았지만 표사들이 하나둘 일어서자 이효가 빙글 몸을 돌려 집법당주
철무웅에게 손짓을 했다.
"철 당주, 오늘은 더 이상 일을 받지 마시오
"
"옙!
"
"그리고 묘시(卯時 5:30~7:30)부터 연회(宴會)를 열 터이니 주방에 그리 이르시오.
오늘 하루 마음껏 먹고 마셔봅시다!
" 당신은 어떻게 이런 순간에도 다른 이부터 헤아리는 겁니까..
"예, 옙!
" 겨우 눈물을 참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철무웅이 안쓰러워 이효도 고개를 돌렸다.
"뭐하고 있소? 어서 가서 이르라니까?
"아, 알겠습니다! 가, 가야지.
" 비틀거리며 겨우 걸음을 떼는데 뒤에서 또 한 번 기분 좋은 음성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음식은 넉넉하게 준비하라 이르시오 먹다 지쳐 버릴 정도로 말이오.
그리고 술‥‥ 갑자기 끊긴 말.
"국주님?“
"아하하·.
괜찮소.
가슴이 조금 답답한 것뿐이니.
철 당주는 어서 가서‥ 풀썩 주저앉은 이효가 급한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전의 충격이 이제야 오는 걸까.
"나는 괜찮.
쿠에엑!
" 사발만한 선지피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국주니임!
"
"괜찮소.
조금만 쉬면 될·, 커헉!
" 철무웅이 달려들고 멀리서 표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지만 초점 없는 눈으로 뭔가를 부르려던 이효
가 끝내 정신을 놓고 말았다.
주먹만한 핏자국은 그의 눈물이런가.
노야가 오실 때까지는 버텨야 하는데 ‥ 아직은 쓰러지면 안 되는데‥ 하필 오늘이었던가 ‥ 하필이면
‥ 오늘‥
(10권 끝)
첫댓글 즐감합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