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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8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제1독서 : 1코린12,31-13,13
복 음 : 루카 7,31-35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없다면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시기하고 교만하며 이기적일까요? 꼭 그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자기 몸까지 넘겨준다 하여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어렵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것을 잘 짚어보면,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지만,
시기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을 수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요란한 소리만 낼 뿐입니다.
그가 행한 모든 것은, 하느님 앞에 갔을 때는 무의미할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계속된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뵙고
그분을 환히 알게 될 때에는 믿음이 더는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완전하게 다 이루어진 다음에는 더 이상 희망할 것도 없습니다.
누가 한 말인지 기억 나지 않지만, 믿음과 희망은 천국 문 앞까지 가고,
천국 안에서 온전한 것이, 왔을 때까지 남는 것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언과 시녕한 언어도 온전한 것이 오기 전의 기간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다른 선행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전한 것이 와서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것들이 사라질 때,
우리는 빈털터리가 되지는 않을까요?
신령한 언어도 선행도 필요 없는 때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자기 몸까지 내준 일들은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안 들어주실까요?
많은 이가 들어주신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이렇게 답하기도 합니다.
“제 기도는 하나도 안 들어주세요.”
부모님의 건강을 기도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안 좋아지신다고 하고,
자녀의 진학을 위해 기도해도 현재 삼수째라고 하십니다.
남편의 승진을 기도했는데 갑작스럽게 퇴직할지 모른다는 말도 들었다고 하십니다.
그 밖에도 기도하면 더 나쁜 상황이 되는 것 같아서
기도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것이 아니냐고 물으십니다.
정답을 말씀드리면, 주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100%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우리 뜻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맞게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가 절대 아닙니다.
자기 뜻이 하느님 뜻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끝까지 매달리며 기도하는 우리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주십니다.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 ‘하나도 자라지 않았어.’라고 불평합니다.
다음날 나와도, 또 그다음 날 나와도….
결국 포기하려고 할 즈음 땅 위로 무엇인가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쑥쑥 자라면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기도도 이렇습니다.
그래서 멈춰서는 안 되고, 또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계속 밭에 나가야 씨가 자라나 열매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뜻보다는 주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기도를 다 들어주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희망이며 기쁨임을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터에서 노는 아이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장터에서 피리를 불 때는 함께 춤춰야 하고,
장터에서 곡을 할 때는 함께 슬퍼해야 놀이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 뜻에 맞춰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취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외쳤던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라며 반대했고,
구원의 기쁨을 전하는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면서 반대합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보다는 자기 뜻만을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뜻만을 주장한다면,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사랑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그 안에서 기쁨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주님 뜻’을 따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지혜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1)
주님의 심장을 할퀴어 터져 나오는듯한 이 탄성에는
안타까움을 너머 비탄과 자조감마저 듭니다.
이 비유의 뜻은 명료합니다.
곧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마치 회개에 대한 요한의 외침에도 가슴을 치지 않고,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도 춤추지 않는 ‘완고함’을 드러냅니다.
사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 무지’를 넘어,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도 없고 바닥도 없다고 투덜거리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바르게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지진 마음’이 그 뿌리에 있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애시당초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완고함’입니다.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척하는 원인은
예수님의 메시아적인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고 있는 그들의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인 것입니다.
사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이미 아픔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거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흘러내리는 피눈물이 됩니다.
어쩌면 바로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피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렸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비뚤어진 마음이 아니라, 반겨 받아들이는 영접의 마음이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 피리에 춤추게 하소서!
세상 죄악의 곡소리에 가슴을 치게 하소서!
아픈 이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부활하신 당신과 함께 기쁨을 선포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 임과 더불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 32)
주님!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무디어진 까닭입니다.
빛보다 어둠을 사랑해 버린 까닭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목은 가시에 찔리셨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함께 울고 함께 웃게 하소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완고함의 벽이 헐리고 사랑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소서!
진리와 평화가 흐르게 하소서! 아멘.
어깃장을 놓지 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제 눈에 안경이라” 는 옛말이 있습니다.
남은 우습게 보는 것도 마음에 들면 좋게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물론 자기는 좋게 생각하는데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모습을 인정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기중심으로 사는 고집이 살아 움직일 때가 있어서 걱정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장 나쁜 노예근성 중 하나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집 센 어린이들의 비유를 들으면서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는 얘기는
고집을 피우면서 상대편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피리를 부니까 장례식 놀이를 하고, 장례식 놀이를 하려고 하니까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부는 것은 어깃장을 놓는 행위입니다.
사실 ‘제가 하는 일에 장단을 맞춰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삐딱 선을 탄 고집불통의 어린이들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남이 잘되면 축하해 주고 어려움을 당하면 같이 아파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 질투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잘못되면 고소해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나의 잇속을 챙깁니다.
그러고는 사람으로부터 현명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해 버립니다.
실은 내가 그러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데 세상을 탓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예수님의 눈으로 본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눈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인정하고 공감하며 배려하는 넉넉함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은 우리를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너무 금욕적이라고 하여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룩하지도 않고 세리들이나 죄인들과 어울리는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고 비판하며
자기 구미에 맞는 메시아, 구세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작 그분께서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1,11).
그러나 구원의 길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완고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구원의 길은 멀고도 멉니다.
아무리 은총이 크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담지 못하고
준비된 사람에게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빛나게 됩니다.
지혜서를 보면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다”(지혜6,14-15).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릇을 비울 수 있는 지혜를 얻어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기꺼이 누리시길 바랍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님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하느님은 내가 장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나 자신을 봉헌해야 할 분입니다.”
나의 법을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의 법을 내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정채봉-
진자와 가짜
진짜 사랑의 주머니 속에는 꿈이 들어 있고
가짜 사랑의 주머니 속에는 욕심이 들어있다.
장애물 경주
장애물 경주와 같은 것
출발보다 도착이 중요한 것
사랑의 경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며칠 전입니다. ‘라디오 스타’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는 인기가 떨어진 유명 가수와 가수를 도와주는 매니저의 진한 우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래만 잘하는 가수는 늘 사고를 치고, 매니저는 가수의 뒷수습을 합니다.
강원도 영월의 방송국 진행자가 된 가수는 솔직한 입담으로 지역에서 인기를 얻습니다.
전국 방송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이 승격되었고,
가수에게 새로운 기획사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단 매니저 없이 가수만 영입하겠다고 합니다.
매니저는 20년 넘게 동고동락했지만, 가수의 미래를 위해서 말없이 떠납니다.
가수는 기획사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고, 라디오 프로를 진행하면서
울먹이며 매니저에게 돌아와 달라고 방송합니다.
방송을 듣던 매니저는 다시 가수에게 돌아오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만이 푸르다.”
여름철에는 녹음이 우거지지만,
추운 겨울에는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소나무와 전나무만이 푸르다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진정한 사랑은 고난과 역경의 순간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본당에 어린이 합창단이 문을 열었습니다.
‘임마누엘 합창단’이 있었는데 팬데믹의 여파로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주보에 어린이 합창단 모집 공고를 하였고, 19명이 합창단에 가입했습니다.
19명의 맑은 눈망울을 보니, 저도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스페인 몬세랏에는 수도원이 있고, 수도원 성당에서 수사님들이 매일 기도합니다.
기도를 마치면서 소년 합창단이 성가를 부릅니다.
지난 4월에 수도원을 방문했고, 그때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새롭게 문을 연 어린이 합창단은 예전에 사용했던 이름을 다시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 아이들이 본당의 날에, 성탄에, 부활에 공연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고운 노래와 깨끗한 마음이 공동체를 따뜻하게 해 줄 것입니다.
밤하늘에 수많은 별이 있습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별 대부분은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의 빛을 받아서 빛난다고 합니다.
태양계도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의 빛을 받아서 빛나는 별들이 있습니다.
라디오 스타에서 가수가 빛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매니저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합창단의 고운 노래가 본당 공동체를 환하게 비출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오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산을 옮기는 큰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재산을 나누어주고, 목숨까지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오로는 사랑이라는 추상명사에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를 이야기합니다.
그 사랑의 행위가 있어야, 사랑은 비로소 빛을 낸다고 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이런 사랑의 행위가 어둠에 빛을 주고, 이런 사랑의 행위가 절망 속에 희망을 드러냅니다.
이런 사랑의 행위가 지친 이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오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볼 것은 단식과 옷차림이라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그의 설교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알아보고
‘나는 저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라고 했던 그의 겸손입니다.
예수님에게 볼 것은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겉모습이라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신 그분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두려움과 걱정으로
숨어 있던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평화를 빌어주시는 자비입니다.
담대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도 깨끗하게 하셨고, 앉은뱅이도 일어나게 하셨고,
눈이 먼 사람은 뜨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은 어찌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 의심이 자꾸만 다른 곳을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보고 의지하는 건 오해와 거짓이라는 손가락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혼인놀이와 장례놀이를 들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당시의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사두가이들, 원로들은
요한의 가르침도 예수님의 기적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다니지도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하셨다.
이들을 두고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31절) 하신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33-34절).
이런 사람들의 욕구를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을까?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35절)
지혜의 자녀들이란 의인들을 말한다(집회 4,11 참조).
우리는 참으로 지혜의 자녀들인가?
혹시나 우리 자신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가졌던
사고판단, 고집스러운 비판의 자세는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진정한 뜻은 모른 채 자기 생각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만일에 그렇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도
십자가를 외면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우리에게서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마르 8,29-33 참조).
그 때문에 구원의 은총을 거부하는 결과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순간에 내가 이루어야 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여
고집스럽게 서 있는 아이들과 같은 것이 아니라, 즉시 따르는 그러한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만이 진정 풍요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를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그 자유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지만
받아들이는 한에서 자유롭고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시지만,
그것은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어떤 면에서 자신의 원의 대로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고 싶어 하므로,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거부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회개는 이러한 이기적인 자신에게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하느님의 뜻으로 향하는 데 있다.
회개는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드러나야 한다.
“그들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7,32)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장을 보러 갔던 기억이 새삼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오릅니다.
어린 날의 장터는 우리 모두에게 아름답고 추억으로,
신기한 것으로 가득 찬 곳으로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특히 시장에서 펼쳐지는 놀이판은 장터에 구경 나오는 사람들을 신명나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 저의 집은 시내 한복판에, 상설시장에서 가까운 곳이라 그런 광경을 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랫 장날이 서는 날이며 온갖 새로운 물건들과 몰려든 사람들로 넘쳐났기에
사람 냄새와 삶의 끈적끈적한 질감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고 기억됩니다.
세상의 변화만큼 장터 또한 놀랍게 변신했지만,
예전의 향수가 그리울 때는 한 번씩 들러보는 것이 장터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비웃더니, 예수님이 와서 먹고 마시자,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고 험담해서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장터에 노는 아이들에 빗대어 질타하고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7,32)
결국 그들의 눈에는 어떤 존재이든 어떤 삶을 살든 상관없이
자기 위주의 관점과 시선에서 판단하고 비난하는 이중적인 편견과 아집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인용한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는 가사는
당대 시대 어린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마치 예전에 그리고 지금도 아이들이 골목에서 고무줄넘기 하면서 불렀던 노래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한 장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로 북적대는 공공장소이며,
이 장터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상품을 사고파는 데 있습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이고, 물건을 사도록 흥미와 시선을 끌기 위해서
큰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곳이라 기도하기 어려운 시끄러운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장터는 상인과 손님 사이에 흥정을 위해 소리에 더 큰 소리로 주고받음을 통해서
각자의 이익, 상인과 고객 사이에 서로 다른 입장에서 요구를 설득시켜야 하는 소란한 자리입니다.
자기의 이익과 주장만을 외쳐대는 장터와 같은 곳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
이기적인 자기중심이 아닌 타인 중심적이고 남을 배려하고
남을 위해 섬기도록 바라시는 하느님을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어디 손해 보고서 장사하는 분 보셨나요.
사실 안면이 있다고 늘 장사꾼이 하는 표현, 손해 보고 주는 것입니다, 라는 말에 속지 마세요.
장사꾼은 본질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사람이지 자선 사업가는 아닙니다.
베트남에서 제가 경험한 것은 단골 가게이고 분명 얼굴도 알고 신부라는 사실도 알면서도
외국 사람이라고 가격을 속일 때는 참 마음이 불편하더군요.
제게 별로 큰 액수는 아니기에 말없이 속아줄 수도 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속고 나면 다시는 가지 않는 게 사람의 마음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시장보다 가격표가 붙은 곳을 선호하는 까닭은 흥정하는 게 너무 싫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사지 않을 때, 구경할 때는 시장이 적합한 장소이지만요. 사람 냄새도 맡고...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의 비유에서
“피리를 불어 주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았다.”(6,32)라는 표현에서
피리와 춤은 잔치 놀이를, 곡과 울음은 장례 놀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이라는 것은 본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잔치에는 술과 음식을 함께 먹고 마시는 기쁨과 즐거움이 수반하지만,
장례에도 술과 음식이 필요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슬픔과 애도 분위기가 우선하기에
절제와 참회의 마음이 필요하겠지요.
이렇게 놀이의 특성과 분위기에 맞게 장례 놀이는
회개와 참회의 세례를 선포했던 금욕주의자 요한에 비유되고 있으며,
잔치 놀이는 혼인 잔치에서 신랑의 역의 맡아 잔치에 초대받은 모든 사람과 어울려
함께 먹고 마셨던 예수님을 암묵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당대의 어린아이들이 즐겨 부른 동요(?)에 빗대어,
요한의 세례를 거부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외면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을
간접적으로 그들의 태도를 비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요즘 자주 표현되는 제3의 길을 걸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위기에 처한 자신들의 입지와 권위를 지키기 위한 보신책으로
그리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한 발상에서 나온
해결책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 편리대로!
우리는 매일 수많은 희비가 교차 되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한편에서는 잔치가 또 다른 편에서는 장례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네 인생입니다.
슬퍼할 때가 있으면 기뻐할 때가 있고,
함께할 때가 있으면 떠날 때도 있기 마련인 것이 인생살이잖아요.
이렇게 잔치와 장례가 뒤섞이고 교차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중요한 것은 잔치 놀이든 장례 놀이든 놀이가 벌어질 때마다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그 놀이에 함께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뒹굴면서
매 순간을 만끽하면서 참여하고 호응하며 교류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선뜻 그 놀이에 몰입하지 못하는가를
침묵 가운데서 가끔은 내면의 소리를 들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바람직한 장터는 바로 우리 내면의 공간입니다.
이 영적인 장터인 영혼의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면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인생살이를 살아가게 되고 그런 만큼
삶은 점진적으로 활기와 활력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리라 여겨집니다.
이는 곧 사도 바오로가 사랑의 찬가에서 말하고자 했던
‘더욱 뛰어난 길’(1코13,31)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능력을, 지식을 가졌다 한들
인생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함께 어울림 속에서 나누는 삶의 신비
곧 사랑의 지혜는 결코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7,35)
낯선 이웃에게도 친절과 호의를 베풉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다들 고향을 찾아 떠난 여유로운 시간, 근처 방파제로 고도리 낚시를 갔습니다.
시장표 판매용이 아닌 사이즈가 좀 작은 고등어를
고도리라고 하는데, 나름 손맛이 쏠쏠합니다.
만조 전후로 잘 잡히는데, 떼로 왔다 갔다 하다가 쑥 물고 들어가는데,
도착한 시간이 딱 타이밍이라 정신없이 잡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어린이들을 포함한 대가족이 낚시를 왔는데,
전혀 조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낚시꾼들은 다들 열심히 낚아 올리는데,
꽝 치고 있으니, 아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슬쩍 바라보니 바늘이며, 미끼며 전혀 아닌 도구들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입질 타이밍에도 불구하고 잠깐 낚시를 멈추었습니다.
찌도 달아주고, 바늘도 바꿔주고, 미끼도 잘게 잘라 끼워주었습니다.
즉시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싱싱한 고도리가 번쩍이며 올라오자, 아이들은 탄성을 내질렀고,
드디어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었습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는 이유는
아무래도 인간이 지닌 이타적 성향 때문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낯선 이웃에게도 친절과 호의를 베풀 줄 아는 그런 태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참인간은 자기라는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돈 한 푼 나오지 않는 일이지만 이웃이 당하고 있는 부당한 현실 앞에 기꺼이 발 벗고 나섭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낯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긴박한 상황에 처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 상황에 뛰어듭니다.
이웃이 겪고 있는 깊은 슬픔에 연민의 정을 느끼는가 하면
이웃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동참합니다.
오늘,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 하나는 소통의 단절입니다.
인간 각자가 마치도 고립된 섬과도 같습니다.
같이 살아도 진정으로 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대화를 하고 있지만 진정한 대화가 아닙니다.
공감(共感)할 줄 안다는 것, 이 시대가 요청하는 참으로 큰 미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감의 능력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2)
인간관계 안에서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 냉담함입니다. 무표정입니다.
분위기 한번 반전시켜 보려고 생쇼를 다해도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별의별 짓을 다 해도 그저 심드렁한 얼굴입니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저 소 닭 보듯 멀뚱멀뚱 쳐다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똑같은 체험을 하셨습니다.
그릇된 신앙, 왜곡된 논리에 젖어 허우적거리며 죽음의 길로 빠져들던 율법학자들,
두렵고 경직된 얼굴로 하루하루 두려움 속에 힘겹게 살아가던
바리사이들의 삶이 너무나 안타까우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선구자로 세례자 요한을 당신에 앞서 파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새출발을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자는 마귀 들렸다’며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참수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고대했던 메시아 예수님이 도래 하셨습니다.
이분까지도 ‘먹보요 술꾼’이라며 거부합니다. 십자가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결정적 실수 그 배경에는 경직된 신앙이 있었습니다.
새로움을 죽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최고라는 뻣뻣한 목덜미가 있었습니다.
결국 따지고 보니 부드러움이 인류를 구원합니다.
편안함, 친절함, 편안함, 넉넉함, 통틀어서 호감이 새 세상을 건설합니다.
호감이 지닌 매력은 생명력입니다.
따뜻한 미소, 부드러운 음성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호감 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런 사람은 존재 자체로 매일 이웃들에게 큼직한 선물을 건네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에너지를 건네는 사람이며 행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이 없으면.
첫째 성령의 언어도 요란한 징이거나 소란한 꽹과리이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물놀이에서 징이나 꽹과리는 대단한 악기이고 중요한 악기입니다.
그러니 그것들이 문제가 아니라 아무 의미 없이 시끄러움뿐일 때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왜 이런 얘기를 한 것입니까?
그것은 앞서 봤듯이 코린토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은 없이
성령에 취해 방언하는 것으로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비판하면서
아무리 성령의 은사로 방언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소음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방언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나타나고 일치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둘째로 아무리 영적 능력과 덕이 있어도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고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동양에서는 재승덕(才勝德)한 사람을 낮추봅니다.
재주는 많은데 덕이 없는 사람 말입니다.
머리는 좋은데 그것을 나쁜 데 쓰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신학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그런 꼴입니다.
사실 프란치스코가 권고 5번에서 얘기하듯
더러운 영이나 악령도 영적인 능력이 있고,
천상 신비와 세상 지식을 많이 알고 있지만 제일 중요한 사랑이 없지요.
악마는 능력은 대단하지만, 사랑이 없는 존재의 대표이고
마찬가지로 영적 능력이나 지식이 많은데 사랑이 없으면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넘어 악마적인 존재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셋째로 아무리 선행을 하고 사랑 실천을 해도 내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바오로는 오늘 아리송한 말을 합니다.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심지어 내 몸까지 넘겨주는 것은
대단한 사랑 행위인데 ‘사랑이 없으면’이라고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고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말은 ‘내게 아무 소용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재산 나눔과 자기 내어줌은 분명 그에게는 사랑을 실천한 것이지만
사랑이 없이 실천한 그런 행위가 내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사랑 행위인 것 같지만 속으로는 사랑이 아닌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재난이 발생했을 때 TV에 나와 성금을 내는데
자기 선행을 자랑하기 위해 위선적으로 내놓는 경우 말입니다.
이런 위선적인 행위는 죽 쒀서 개 준다는 말처럼 남 좋은 일만 하는 것이고,
내게는 아무 유익이 없고 내 행복과 구원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너 또는 그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고,
그러기에 사랑이 없으면 남의 불행이 아니라 자기 불행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머리로 알지만 실제로는 사랑 없이 살아갑니다.
사랑이 없으면 너의 불행이 아니라 나의 불행임을 뼛속까지 알아야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