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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백제가 요서 지역에 백제군을 두었다는 중국 정사 기록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있었던 백제로서 과연 가능했을까라는 점과 어떻게 경략했을까라는 점을 가장 궁금해 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글들을 보면서 제가 느끼는 것은 백이면 백, 모든 이들이 요서지역을 경략했다는 백제의 건국, 중흥, 쇠퇴 시기의 영역을 한반도 남쪽에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꿔 말해서 <삼국사기>의 모든 역사적 사건이 한반도 내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거의 신앙적 수준으로까지 믿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지리 인식은 후조선 500 여년 간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석학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백제 흥망지가 한반도 중앙 이남지역이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요서지역을 경략했다는 중국 기록을 의심할 수 밖에 없고 똑부러지게 요서 지역을 경략한 방법을 설명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해 봅니다.
백제가 과연 한반도 남쪽 지역 즉 한강 유역에서 건국되고 망했을까?
<삼국사기> 편찬 작업이 한반도에서 이루어졌을까?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그 이유를 이렇게 봅니다.
상징적, 대표적으로 지목하자면 <한서/지리지>의 낙랑군 비정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이라 판단합니다.
또한 고려 시기까지의 역사 중심지는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대릉하 유역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때문이라 봅니다.
한나라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을 한반도 평양 지역으로 비정하면 백제는 영락없이 한반도 남쪽에 위치할 수 박에 없게 되고 결국 백제의 요서 지역 경략 기사는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연 장수 진개가 동침하여 1000 혹은 2000 여리를 빼앗고 그 동북쪽 끝 지역에 설치했다는 요동군이나 요동지역을 한반도 북쪽에 있는 지금의 압록강 인접 지역이라고 이해한다면 요서백제 경략 건 뿐만이 아니라 <삼국사기>의 나머지 많은 기록들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억지 해석을 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중국의 정사 기록까지도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다고 공언하며 자구를 바꾸어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동북공정을 밀어붙치는 중국은 계속 웃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거 아세요?
1. 역사서에 등장하는 요하가 정확히 1911 년 까지는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인 청룡하라는 것,
( 앗, 실수했군요. 청룡하가 아니라 그 북쪽에 흐르는 폭하인데 잘못 썻습니다. 청룡하는 압록수였데...)
2. 1916~1918 제작된 <중국여도>에 폭하 위치가 지금의 요하로 바뀌는 기막히는 수법이 숨어 있다는 것.
3. 1934 년 경의 만주국지도에는 중국 하북성 동북쪽 지역을 흐르는 란하부터 전면적으로 조금씩 동쪽으로 이동되어 표시되었다는
것.
4. 현대축척지도는 만주국지도와 똑같다는 것
허황돼 보이나요?
저는 낙랑군이 설치된 곳을 지금의 대릉하 상.중류의 남쪽 일부 지역으로 봅니다.
따라서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13 년의 기사에 근거, 백제가 건국되고 흥성하며 멸망한 곳을 아래 추정지도의 패수 남쪽 지역으로 봅니다. 아주 협소한 지역이지요. 백제가 요서 유성현 지역에 백제군을 두었다는 기록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지금의 란하 동쪽 큰 지류 두개 중 남쪽에 있는 청룡하 하류 남북 지역이 백제의 흥망지이기 때문에 서쪽으로 란하를 건너기만 하며 요서지역 경략은 아주 아주 쉬운 일이 됩니다.
하지만 저 란하 하류를 만만히 볼 것이 아닙니다.
<한서/지리지>에는 바다로 표현된 곳이며 후조선 시기에는 연경으로 향하는 사신들 중 뱃길로 가야만 했던 몇몇 정사들은 저 란하 하류에서 풍랑을 만나 죽었다고 합니다.
이흘의 연행기에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우선적으로 현대지도에 표기된 지명에 문제가 있다는 것 다음으로 한국사 내에서도 중심지 이동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만주국이 건국된 이후 청나라 직예성 승덕부.영평부의 땅,강,산 이름들을 죄다 동쪽으로 적당한 자리를 찾아 옮겼다는 것을 아주 쬐끔이라도 기억하시고 역사 공부에 매진하시기를 주제넘게나마 부탁드립니다
추정도 - 낙랑군 추정지
주) 낙랑 1,2 지역은 잠깐 등장하는 동부도위 지역으로 추정함
제 주장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어지는 아래 글, 지도는 참조용입니다.
비록 출처 불명으로 신뢰성이 약간 떨어지지만 중국의 고지도들도 아래 사행도에 묘사된 모습과 거의 같으니 사실에 접근하는 데에는 별 상관 없습니다.
고지도 - 출처불명의 조선 사신 사행도
주) 산해관 토묵특우익 구관태문 성경 압록강
위 사행도에서 산해관에서 성경까지의 길 오른쪽에 보이는 바다를 모두들 지금의 요동만이라 합니다. 그런데 1656 년 한양을 떠나 연경을 향하던 인평대군은 산해관 망해정에 올라 앞바다를 바라보면서 이 바다는 바다가 아니라 했답니다. 그의 <연도기행>에 전해는 데, 그 바다는 구하가 둘러빠진 것이라고 씌여 있습니다. 곧 바다가 아니라 또 지금의 요동만이 아니라 지금의 란하 최하류이며 <한서/지리지>에 2100 리 길이의 염나수와 1250 리 길이의 대요수가 요동군에서 만나 남쪽으로 흐르며 발해 해안선에 도달하기까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만灣이며 이것을 명 시기 편찬된 <황여고>에 실린 `해운도` 등에서는 낙타만이라 했습니다.
고지도 - <황여고> 해운도
위 해운도에서도 낙타만이 지금의 요동만 같이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비장하게 준비했습니다. 송.요 시기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지리도>입니다.
고지도 - 지리도
위 고지도에서 산동반도 북쪽으로 보이는 만灣이 지금의 란하 하류라는 것이며 그 만을 빙 둘러서 요 시기의 중경.상경.동경이 설치되었습니다.
안보인다고요?
저곳만 잘라서 확대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청 시기에 저곳의 형세를 그린 약도와 같은 고지도 <건륭부청주현도지>를 소개합니다.
단재 신채호가 패수라고 비정한 해성의 어니하가 보이는 것도 같습니다.
후조선 시기 <동국여지승람>,오운, 이수광 등이 3 패수설을 주장한 이후 안정복.정약용 등 내노라하는 석학들이 한반도 대동강입네 저탄강이라느니 또 압록강이라느니 이구동성하였지만 모두 엉뚱한 곳으로 비정한 셈이 되겠지요. 오직 <동국통감제강>을 저술한 횽여하 만이 요하라고 명백하게 지목하여 가장 근접하게 맞춘 것으로 판단합니다.
뭐, 서국 고지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동국에도 많습니다.
후조선 영조 20 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입니다.
지금의 백두산처럼 보이는 백산 보이시죠?
다산 정약용이 <강역고/백산보>에서 설명하고 <청사고/지리지> 편찬자들이 거의 그대로 따라 기록한 위 지도에서의 백산대맥 동남쪽 끝에 보이는 백산이 후조선 시기의 백산,백두산입니다. 지금의 백두산은 역사서에 콧빼기도 내밀지 못했습니다.
저 백산대맥의 남북지역이 중국이 탐내는 요하문명지입니다.
하지만 요하는 백산대맥의 서북쪽 끝에 있는 한 시기의 백평산, 명 시기의 금산, 청 시기의 고열눌와집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만 흐르는 1250 리 정도 길이의 비교적 짧은 물길입니다. 따라서 요하문명이라 부르기에는 문명지가 너무 큽니다. 즉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과 백산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청룡하와 지금의 대릉하 상.중류 지역에 넓게 분포되어 있으니 이형구가 말한 발해문명도 정확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저는 백산문명이라 해야 한다고 봅니다.
나머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첫댓글 낙랑군은 정약용도 지금의 평양이라고 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정약용 뿐만이 아니라 안정복,한치윤 등 내노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도 후조선 당시의 평양을 낙랑군이 설치된 곳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요?
정약용은 낙랑군을 평양으로 비정하지 않았다고 제가 글을 썼나요?
노하라신노스케 이건 족바리 단어 아닌가요?씨를 말려야 하는 족속이 여긴 왜 왔는지?원생이라면 당장 섬으로 꺼져라.때려 죽이기 전에.개씹의 미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