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닷컴] (글=이동진) 영화에 대한 평을 쓰는 사람으로서 저는 연말이면 한 해 동안의 개봉작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들을 외국영화와 한국영화로 나눠서 뽑아왔습니다. 창작품에 순위를 매겨서 순서대로 줄을 세우는 것에는 어느 정도 무리가 따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정리하면 1년간 개봉한 수많은 작품 중에서 유달리 빛났던 뛰어난 영화들에 대해 간명하고도 흥미로운 자료가 될 수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우선 오늘은 ‘2008년의 외국영화 베스트 10’을 올립니다. 2008년 1월1일부터 12월18일까지 한국에서 정식 개봉한 작품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영화제에서만 상영된 작품은 제외했습니다. 이 리스트는 영화평을 직업적으로 쓰고 있는 저의 미학적인 판단 기준과 개인적인 취향에 따른 순위입니다.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리스트인 만큼 보시는 분들도 가볍게 즐기는 마음으로 대해주시길 바랍니다.
올해는 좋은 외화들이 유달리 많았습니다. 특히 국내 개봉된 미국영화들이 대단히 뛰어나고 혁신적이었던 한 해였습니다. 세기가 바뀔 무렵의 무기력했던 할리우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울러 예년에는 거의 소개조차 되지 않았던 이스라엘과 루마니아의 영화들 중에서 좋은 작품이 많았던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10위. ‘미스트’(감독-프랭크 대러본트)
“충격적인 결말”을 내세우는 영화를 많이 보아왔습니다. 하지만 ‘미스트’의 염세적인 결말은 보고 나면 턱이 떨리는 수준입니다. 프랭크 대러본트는 스티븐 킹의 원작에 대해 무한한 존경심을 표현했지만, 적어도 이 작품만큼은 킹의 소설보다 대러본트의 영화가 더 뛰어납니다. 킹이 이야기를 멈춘 지점에서 대러본트는 몇 걸음 더 나아가 이토록 뛰어난 결말을 만들어냈으니까요.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을 들였지만, 갖가지 괴생물체를 그려낸 이 영화의 특수효과 역시 대단히 창의적입니다.
9위. ‘더 폴-오디어스와 환상의 문’(감독-타셈 싱)
‘더 폴’은 영화에서 미술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인도 출신의 감독 타셈 싱은 흡사 스크린을 거대한 캔버스처럼 사용합니다. 하반신이 마비된 남자가 침침한 병실에서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그 내용이 화려한 원색의 명징하고 웅대한 이미지들로 펼쳐지면서 관객을 압도하지요. 아울러 이 영화만큼 로케이션들이 화려하고 효과적인 경우도 찾기 어려울 겁니다. ‘더 폴’은 부족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영화에도 없는 게 ‘더 폴’에 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8위. ‘아임 낫 데어’(감독-토드 헤인즈)
‘아임 낫 데어’는 전기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줍니다. 토드 헤인즈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밥 딜런의 삶을 이런 방식으로 다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여섯 명의 배우를 동원해 밥 딜런의 분신에 해당하는 일곱 캐릭터를 연기하게 만든 방식은 결국 밥 딜런이라는 텍스트를 조각내고 분절시켜 신화를 해체했습니다. 러닝타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비워지는 이 이상한 영화에서 토드 헤인즈는 그리면서 지워나가는 신필(神筆)을 보여줍니다. 135분이 전부 흐르고 밥 딜런에 대한 그 모든 이미지마저 사라진 후에 남는 것은 결국 한 인간이 지나간 길에 감도는 기묘한 정적이었습니다.
7위. ‘4개월 3주 그리고 2일’(감독-크리스티안 문주)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지독하리만치 사실적인 리얼리즘 영화입니다. 크리스티안 문주는 인물들의 대화만으로도 지옥의 풍경을 그려낼 줄 압니다. 철저한 리허설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이 영화의 롱 테이크 대화 장면들은 그가 얼마나 집요하고 냉철한 감독인지를 잘 말해줍니다. 세상에는 보는 것이 아니라 겪어야만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관객을 2시간 동안 앓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6위. ‘데어 윌 비 블러드’(감독-폴 토머스 앤더슨)
‘부기 나이트’와 ‘매그놀리아’의 폴 토머스 앤더슨은 언제나 최고 수준의 영화들을 만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한번 더 멋지게 성공했습니다. 그가 ‘펀치 드렁크 러브’로 숨을 고른 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간 ‘데어 윌 비 블러드’에는 고전의 품격과 향취가 제대로 살아 있습니다. 서서히 영화적 압력과 온도를 높여간 끝에 마침내 폭발하는 라스트 신은 실로 무시무시합니다. 거기엔 황폐한 현존과 무거운 생존 그리고 시퍼런 실존이 숨을 헐떡이고 있습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이 영화에서 메소드 연기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5위.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감독-야마시타 노부히로)
어둡고 음울한 올해의 걸작들 사이에서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의 미소는 단연 찬란합니다. 세상의 습한 기운을 모두 다 날려버릴 듯한 영화적 햇살이 시종 은총처럼 반짝인다고 할까요. 이 영화의 쇼트들은 흡사 살균효과까지 지니고 있는 듯 여겨집니다. 성장영화의 습관적인 엄살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이 작품은 그 정갈한 리듬으로 인물들의 마음을 훌륭히 스케치합니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의 주인공은 올해 본 가장 사랑스러운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역시 올해 개봉한 ‘마츠가네 난사사건’까지 함께 보고나면, 야마시타 노부히로는 지금 일본에서 가장 미래가 밝은 감독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4위. ‘다크 나이트’(감독-크리스토퍼 놀런)
크리스토퍼 놀런만큼 야심이 큰 감독도 드물 겁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야심을 실현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첫 장면부터 관객의 얼을 빼놓는 이 영화는 시청각적으로 시종 흥미진진합니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것은 바로 이야기 자체입니다. 놀런에게 수퍼 히어로 장르란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딜레마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사회 실험 마당입니다. 그리고 히스 레저는 그곳에 서늘한 구두점을 찍었습니다.
3위. ‘렛 미 인’(감독-토마스 알프레드슨)
극장을 나선 후 시간이 지날수록 더 또렷해지는 영화가 있습니다. ‘렛 미 인’이 지닌 아름다움은 특별합니다. 스웨덴의 혹독한 겨울, 눈과 얼음이 온통 세상을 뒤덮은 세상에서 펼쳐졌던 소년과 소녀의 사랑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아릿하고 처연합니다. 공포영화가 동화와 만나고, 성장영화가 시(詩)와 조우하도록 한 것은 피와 눈물의 연금술이었습니다.
2위. ‘바시르와 왈츠를’(감독-아리 폴만)
‘바시르와 왈츠를’은 올해 나온 가장 혁신적인 영화일 것입니다. 아리 폴만은 이 작품을 통해 새로운 영화 언어를 발명했습니다.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라는 희대의 형식을 통해 이스라엘 감독 아리 폴만은 환상과 악몽, 전쟁에 대한 성찰과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반성이 절묘하게 뒤섞인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독창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정직한 영화 역시 쉬운 게 아니지요. 그런데 아리 폴만은 이 영화에서 그 두 과제를 동시에 훌륭하게 수행해냈습니다. 또한 이 영화엔 ‘올해의 라스트 신’이 들어 있습니다.
1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감독-조엘 코언, 에단 코언)
‘파고’를 꼽는 이도 있습니다. ‘밀러스 크로싱’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선 ‘위대한 레보스키’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혹은 ‘바톤 핑크’를 거론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저는 코언 형제의 베스트는 바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2008년 국내 개봉된 가장 뛰어난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스타일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화술까지 구태의연한 구석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내내 우아하고 깊습니다. 스토리상 가장 중요할 것 같은 장면이 생략되는 한편, 전혀 의외의 장면이 길게 이어지면서 관객을 사로잡기도 합니다. 촬영과 편집은 내내 최상의 조합으로 관객의 넋을 빼놓습니다. 이 작품은 연기에서도 황홀한 경지를 보여줍니다. 올해 가장 뛰어난 악역은 ‘다크 나이트’의 히스 레저가 아니라 이 영화의 하비에르 바르뎀입니다. 토미 리 존스의 생애 최고 연기 역시 이 영화에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