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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문학관* 스크랩 비에 관한 명상 수첩 외 / 이외수
동산 추천 0 조회 40 09.06.26 16:51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비에 관한 명상 수첩 / 이외수 

 

 


비는 소리부터 내린다.
흐린 세월 속으로 시간이 매몰된다.
매몰되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나지막히 울고 있다.
잠결에도 들린다.
비가 내리면 불면증이 재발한다.
오래도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던 이름일수록
종국에는 더욱 선명한 상처로 남게 된다.
비는 서랍 속의 해묵은 일기장을 적신다.
지나간 시간들을 적신다.
지나간 시간들은
아무리 간절한 그리움으로 되돌아 보아도 소급되지 않는다.
시간의 맹점이다.
일체의 교신이 두절되고 재회는 무산된다.
나는 일기장을 태운다. 그러나
일기장을 태워도 그리움까지 소각되지는 않는다.
비는 뼈 속을 적신다.
뼈저린 그리움 때문에 죽어간 영혼들은 새가 된다.
비가 내리는 날은 새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날 새들은 어디에서 날개를 접고
뼈저린 그리움을 달래고 있을까.
비 속에서는 시간이 정체된다.
나는 도시를 방황한다.
어디에도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도시는 범람하는 통곡 속에서 해체된다.
폐점시간이 임박한 목로주점.
홀로 마시는 술은 독약처럼 내 영혼을 질식시킨다.
집으로 돌아와 바하의 우울한 첼로를 듣는다.
몇 번을 반복해서 들어도 날이 새지 않는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목이 메인다.
우리가 못다한 말들이 비가 되어 내린다.
결별 끝에는 언제나 침묵이 남는다.
아무리 간절하게 소망해도 돌아갈 수 없는 전생.
나는 누구를 사랑했던가.
유배당한 영혼으로 떠도는 세속의 거리에는
예술이 암장되고 신화가 은폐된다.
물안개 자욱한 윤회의 강변 어디쯤에서 아직도
그대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쓰라린 기억의 편린들을 간직한 채
그대로부터 더욱 멀리 떠나야 한다.
세속의 시간은 언제나 사랑의
반대방향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설야 / 이외수

 

 

사람들은 믿지 않으리
내가 홀로 깊은 밤에 시를 쓰며
눈이 내린다는 말 한마디

어디선가
나귀등에 몽상의 봇짐을 싣고
나그네 하나 떠나가는지
방울소리
들리는데
창을 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함박눈만 쌓여라
숨죽인 새벽 두 시

생각나느니 그리운 이여
나는 무슨 이유로
전생의 어느 호젓한 길섶에
그대를 두고 떠나왔던가

오늘밤엔 기다리며 기다리며
간직해 둔 그대 말씀
자욱한 눈 송이로 내리는데
이제 사람들은 믿지 않으리
내가 홀로 깊은 밤에 시를 쓰면
울고 싶다는 말 한마디
이미 세상은 내게서 등을 돌리고
살아온 한 생애가 부질없구나

하지만 이 시간 누구든 홀로
깨어있음으로 소중한 이여
보라 그대 외롭고 그립다던 나날 속에
저리도 자욱히 내리는 눈
아무도 걷지 않은 순백의 길 하나
그대 전생까지 닿아 있음을

 

 

 

 

 

 

 

 

 

감성18.jpg

 

  

 

 

진달래술 / 이외수

 


 

생각납니다
폐병 앓던 젊은날에는 양지바른 산비탈
각혈한 자리마다 진달래가 무더기로 피었지요

지금은 주름살이 깊어가는 지천명
부질없는 욕망은 다 버렸지만
아직도 각혈같은 사랑만은 버리지 못했습니다
술 한잔 주시겠습니까.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안개중독자 / 이외수

 

 

사랑아
그대가 떠나고 세상의 모든 길들이 지워진다
나는
아직도 안개중독자로 공지천을 떠돌고 있다
흐리게 지워지는 풍경 너머 어디쯤
지난 날 그대에게 엽서를 보내던 우체국이 매몰되어 있을까
길없는 허공에서 일어나 길없는 허공에서 스러지는
안개처럼
그토록 아파한 나날들도
손금 속에 각인되지 않은 채로 소멸한다
결국 춘천에서는
방황만이 진실한 사랑의 고백이다

 

 

 

 

 

 

 

 

감성17.jpg

 

 

 

 

사랑은 자주 흔들린다 / 이외수  

 

 

 

울고 있느냐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해서
우는 너의 모습을 숨길 수 있을것 같더냐

온몸으로 아프다며 울고 앉아
두팔로 온몸을 끌어 안았다해서
그 슬픔이 새어 나오지 못할것 같더냐

스스로 뱉어놓고도 미안스러워
소리내어 울지도 못할 것을
왜 그리 쉽게 손 놓아 버렸느냐

아픈 가슴 두손으로 쥐어 잡았다해서
그 가슴안에서 몸부림치는 통증이
꺼져가는 불꽃마냥 사그러지더냐

너의 눈에 각인시키고 그리던 사람
너의 등뒤로 보내버렸다해서
그사람이 너에게 보이지 않더냐

정녕 네가 이별을 원하였다면
그리 울며 살지 말아야 하거늘

왜 가슴을 비우지 못하고
빗장 채워진 가슴에 덧문까지 닫으려 하느냐

잊으라하면 잊지도 못할것을
까닭없이 고집을 부려 스스로를 벌하고 사느냐

그냥 살게 두어라
그 좁은 방에 들어 앉았다
싫증나면 떠나는 날이 오지 않겠느냐

문득 가슴 언저리가 헛헛해
무언가 채우고 싶어질 때
그때는 네가 나에게 오면 되는 것이라

갈기갈기 찢어지고
피멍들은 가슴으로 온다해도 내가 다 안아 줄 것이라
내게 돌아올 것을 알기에 기다리는 것이라
너는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다 안을 수 있는 것이라
그래서 오늘 하루도 살아 낸 것이라
살아 간다는 것은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랑은 자주 흔들린다
어떤 인연은 노래가 되고
어떤 인연은 상처가 된다

하루에 한 번씩 바다는 저물고
노래도 상처도 무채색으로 흐리게 지워진다
나는 시린 무릎을 감싸 안으며
나즈막히 그대 이름 부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도 내가 혼자임을 아는 것이다

 

 

 

 

 

 

 

 

 

 

 

  

 

 

 

겨울비 / 이외수

 

 

 

모르겠어
과거로 돌아가는 터널이
어디 있는지
흐린 기억의 벌판 어디쯤
아직도 매장되지 않는 추억의 살점
한 조각 유기되어 있는지
저물녘 행선지도 없이 떠도는 거리
늑골을 적시며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
모르겠어 돌아보면
폐쇄된 시간의 건널목
왜 그대 이름 아직도
날카로운 비수로 박히는지

 

 

 

 

 

 

 

 

 

 

 

 

 

  

 

 

광장의 저녁 바람 / 이외수  

 

 

 

이제 우리도 떠나자
더 이상 어두워지기전에

박수도 없는 빈 층계위로
한겹씩 날아 오르는
빈 껍질의 비둘기들

바람이 불고 불이 꺼진다
쓸쓸히
누군가 은퇴하고 있다

낯익은 것은 겨우내 모두 죽고
못 잊을 것도 겨우내 모두 죽고
아아 혼자 남아서 허공을 떠다니다가
붙잡을 것 없는 빈 손으로 떠다니다가
愛人 하나야
끝끝내 나는 허물어져 江으로 간다

 

 

 

 

 

 

 

 

 

 

 

  

 

 

 

음악이 죽어 버린다면 / 이외수 
 

 

 

그대여 어느 날 갑자기
음악이 죽어버린다면 얼마나 슬플까
헐벗은 가로수들
다리를 절름거리며 떠나는 도시
결별한 사랑 끝에 날이 저물고
어디로 갈까
그대 상실한 젊음 황사바람에 펄럭거릴때
홀연히 음악이 죽어버린다면 얼마나 슬플까

생금가루 같은 햇빛 자욱하게 쏟아지는 어느 초여름
낯선 골목의 아늑한 양옥집
장미넝쿨 그림자 드리워진 담벼락에
비스듬히 어깨를 기대고
그대 진실로 그리운 사람에게 엽서를 쓸 때
예전에 못다한 말들이 되살아나서
돌아오라 돌아오라

망초꽃 수풀처럼 안타깝게 흔들리고
저 깊은 시간의 강물 가득 달빛이 부서질 때
이 세상 모든 이름들이 노래가 되고
이 세상 모든 눈물들이 노래가 되고
이 세상 모든 소망들이 노래가 된다지만
한밤중 먼 여행에서 돌아와
지친 다리를 끌며 그대 홀로
불꺼진 방으로 들어설 때
문득 가을 숲을 스쳐가는 바람소리

그대 허전한 발밑으로 우수수 빌어먹을 고독이
가랑잎처럼 떨어져 내릴 때
그래 그럴 때
온 세상 음악이 모두 죽어버린다면
얼마나 슬플까
바다도 적막하고 하늘도 적막하고
몸부림도 적막하고 통곡도 적막하고
적막한 시간속으로 부질없이
그대 허망한 인생만 떠내려 간다면
얼마나 슬플까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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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바다를 머리맡에 걸어 두고 / 이외수


 

 

살아간다는 것은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랑은
자주 흔들린다

어떤 인연은 노래가 되고
어떤 인연은 상처가 된다

하루에 한 번씩 바다는
저물고
노래도 상처도
무채색으로 흐리게 지워진다

나는 시린 무릎 감싸 안으며
나지막이
그대 이름을 부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도
내가 혼자임을 아는 것이다

 

 

 

 

 

 


 

 

          

 

  

 

 

독작 / 이외수  

 

 

 

애인도 하나 없는 세상
겨울까지 깊어서
거리는
폐항처럼 문을 닫았네


남의 아픔까지 내 아픔으로
울던 시대는
끝났네


허망한 낱말들 펄럭거리며
바다로 가는 포장마차
밀감빛 등불에
한잔술에
늑골이 젖어
울먹이는 목소리로
암송하던 시들도 이제는
죽었네


과거로 돌아가는 통로는
폐쇄되고
아침마다 조간신문에 싸여
목이 잘리운 시체로
배달되는 사랑


믿을 수가 없어서
오늘도 나는
독약인 줄 알면서도
홀로 술을 마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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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밭에서 / 이외수

 

 

 

도로변 꽃집 꿈꾸는 수국밭에서
암록빛 배암이 꽃을 게울 때
도시에서 하루 한번씩
꽃집 창 앞을 기웃거리던 버릇을
생각하는 친구여 차를 들게
지금은 비가 오지만
그리운 이유조차 알 수 없지만
몇년이 지나도 아는 이 없는 거리
따뜻한 커피잔 속에 보이는 친구여
도무지 사는 일이 힘들어 야위어가는
네나 내나 동무 삼는 수국밭에서
하루 한번씩 그립던 버릇을 생각하는
친구여

 

 

 

 

 

 

 

 

 

 

 

            

시인의 이름 / 이외수

 

 

 

오늘따라 유난히
그리운 이름 하나
서산 어스름 속에
서성이더라
술 취해 흥얼흥얼
노래 부르며
개떡 같은
세상아 잘 있거라
나보다 먼저
하늘로 떠난 사람
아직도                        
서럽게
울고 있더라

 

 

 

 

 

 

 

 

 

 

  

 

 

여름엽서 / 이외수

 

 

오늘같은 날은
문득 사는 일이 별스럽지 않구나
우리는 까닭도 없이
싸우고만 살아왔네

그 동안 하늘 가득 별들이 깔리고
물 소리 저만 혼자 자욱한 밤
깊이 생각지 않아도 나는
외롭거니 그믐밤에도 더욱 외롭거니

우리가 비록 물 마른 개울가에
달맞이꽃으로 혼자 피어도
사실은 혼자이지 않았음을
오늘 같은 날은 알겠구나

낮잠에서 깨어나
그대 엽서 한 장을 나는 읽노라
사랑이란
저울로도 자로도 잴 수 없는
손바닥 만한 엽서 한장

그 속에 보고 싶다는
말 한 마디
말 한 마디만으로도
내 뼛속 가득
떠오르는 해 

 

 

 

 

 

 

 

 

 

 

 

 

 

 

 

장마전선 / 이외수

 

 

 

흐린 날
누군가의 영혼이
내 관절 속에 들어와 울고 있다
내게서 버림받은 모든 것들은
내게서 아픔으로 못박히나니
이 세상 그늘진 어디쯤에서
누가 나를 이토록 사랑하는가
저린 뼈로 저린 뼈로 울고 있는가
대숲 가득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

 

 

 

 

 

 

 

 

 

  

 

 

불빛 / 이외수


배추 흰나비 한 마리 강물 위를 날고 있다
해는 이미 지고
허전한 내 무릎 가득 술렁이는 갈대밭
지워지고
다만 배추흰나비 한 마리만
지워질 듯 지워질 듯 날아서
하나님 귀밑으로 가고 있다
우리가 말 못하고 돌아 앉아
낮술이나 마시던 그 설움의 끝
멀리 갈릴리 바다 불빛이 하나

 

 

 

 

 

 


 

 

 

 

 

 

 

더 깊은 눈물 속으로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비로소 내 가슴에 박혀 있는
모난 돌들이 보인다
결국 슬프고
외로운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고
흩날리는 물보라에 날개 적시며
갈매기 한 마리
지워진다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파도는 목놓아 울부짖는데
시간이 거대한 시체로
백사장에 누워 있다
부끄럽다
나는 왜 하찮은 일에도
쓰라린 상처를 입고
막다른 골목에서
쓰러져 울고 있었던가

그만 잊어야겠다
지나간 날들은 비록 억울하고
비참했지만
이제 뒤돌아보지 말아야겠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저 거대한 바다에는 분명
내가 흘린 눈물도 몇방울
그때의 순순한 아픔 그대로
간직되어 있나니
이런 날은 견딜 수 없는 몸살로
출렁거리나니

그만 잊어야겠다
흐린 날 바다에 나가 보면
우리들의 인연은 아직 다 하지 않았는데
죽은 시간이 해체되고 있다
더 깊은 눈물 속으로
더 깊은 눈물 속으로
그대의 모습도 해체되고 있다

 

 

 

 

 

 

 

 


 

 

 

 

연말결산 (年末決算)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지나간 날들은 망실되고
사랑한 증거도 남지 않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자폐증에 빠져 있는 겨울풍경
속으로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리면
시간이 깊어진다
인생은 겨울밤
얼음 밑으로 소리 죽여
흐르는
강물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겨울비


 

모르겠어
과거로 돌아가는 터널이
어디 있는지
흐린 기억의 벌판 어디쯤
아직도 매장되지 않는 추억의 살점
한 조각 유기되어 있는지
저물녘 행선지도 없이 떠도는 거리
늑골을 적시며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
모르겠어 돌아보면
폐쇄된 시간의 건널목
왜 그대 이름 아직도
날카로운 비수로 박히는지

  

 

 

 

 

 

 

 

 

 

 

 

점등인의 노래

 

 

이 하룻밤을 살고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헤어진 사람들은 다시 돌아와
이 등불가에서 만나게 하라

바람 부는 눈밭을 홀로 걸어와
회한만 삽질하던
부질없는 생애여
그래도 그리운 사람 하나 있었더라

밤이면 잠결마다 찾아와 쓰라리게 보고 싶던 그대
살속 깊이 박히는 사금파리도
지나간 한 생애 모진 흔적도
이제는 용서하며 지우게 하라.

 

 

 

 

 

 

 

 

 

 

 

 

 

雨 季


 

밤마다 머리풀고 가문비나무 숲이 울더라
먼 강물 자욱히 물 넘는 소리
무덤마다 비가 오리라
쑥대풀은 우거지고
쓰러지고
반딧불 한 점 불려가더라
모두가 빈 집이더라
다만 자정 무렵 한 남자가
절벅절벅 젖은 양말로 돌아와
램프의 심지를 죽이며 낮게 울더라

 

 

 

 

 

 

 

 

 

 

 

1월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 내가 서 있다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한밤중에 바람은 날개를 푸득거리며
몸부림치고
절망의 수풀들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망명지
아무리 아픈 진실도
아직은 꽃이 되지 않는다

내가 기다리는 해빙기는 어디쯤에 있을까
얼음 밑으로 소리 죽여 흐르는
불면의 강물
기다리는 마음 간절할수록
시간은 날카로운 파편으로 추억을 살해한다
모래바람 서걱거리는 황무지
얼마나 더 걸어야 내가 심은 감성의 낱말들
해맑은 풀꽃으로 피어날까

오랜 폭설 끝에
하늘은 이마를 드러내고
나무들
결빙된 햇빛의 미립자를 털어 내며 일어선다
백색의 풍경 속으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눈부시다

 

 

 

 

 

 

 

 

 

 

표류기


 

아직 방황이 끝나지 않았는데
가을이 문을 닫는다
무참히 낙엽은 져 버리고
싸늘한 저녁비에 함몰하는 도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걸음을 멈추면
서늘하게 목덜미를 적시는
겨울예감
새떼들이 떠나 버린 광장
맹목의 개들만 어슬렁거리고 있다
예술이 암장되고
희망도 유보된 시대
시계탑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수은주의 눈금이 내려갈수록
눈물은 투명해진다
나는 투명해지는 눈물로 만들어진
한 마리의 해파리
홀로 시간의 바다를
표류한다
이제는 누구의 사랑도
믿지 않는다
오로지 독약 같은 외로움만
일용할 양식이다

 

 

 

 

 

 

 

 

 

 

 

 

 

강이 흐르리

 

이승은 언제나 쓰라린 겨울이어라
바람에 베이는 살갗
홀로 걷는 꿈이어라.

다가오는 겨울에는 아름답다
그대 기다린 뜻도.

우리가 전생으로 돌아가는 마음 하나로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
눈을 맞으며 걸으리니.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마다
겨울이 끝나는 봄녘 햇빛이 되고
오스스 떨며 나서는
거미의 여린 실날 맺힌 이슬이 되고
그 이슬에 비치는 민들레가 되리라.

살아 있어 소생하는 모든 것에도
죽어서 멀리 있는 모든 것에도
우리가 불어 넣은 말 한 마디.

아, 사랑한다고
비로소 얼음이 풀리면서 건너가는 나룻배
저승에서 이승으로 강이 흐르리.

 

 

 

 

 

 

 

 

 

 

 

감성사전 / 이외수  

 

 

 

 

   달팽이


   한여름의 고독한 여행자. 그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집을 한번도 떠나 본 적이 없는 여행자.

 

 

 



 


   

호롱불

  

초가삼간 토담 벽에 펄럭이는 세월이다.
세월 속에 피어나는 한 송이 연꽃이다.
어머니 귀밑머리에 스며드는 놀빛이다.
천년을 침묵으로만 다스려 온 설레임의 불꽃이다.
겨울밤 심지가 타 들어가는 아픔으로 피워 올린 그리움이다.
흥건한 눈물이다

 

 

 

 

 

 



 

눈보라


겨울이 깊어지면 바람의 함성을 타고 수 천만 마리의 백색 나비 떼가
어지럽게 난무하며 마을에 출몰한다. 눈보라다.
때로는 길이 막히고 통신이 두절된다. 시간도 깊어지고
그리움도 깊어진다.


 

 

 

 

 


진눈깨비


저물어 가는 겨울 풍경 속으로 쏟아지는 비창이다.
세월의 통곡이다. 목메이는 그리움이다. 쓰라린 아픔이다.
부질없는 사랑이다. 회한의 눈물이다. 시린 뼈의 신음이다.

 

 





 

 

사랑




반드시 마음 안에서만 자란다.
마음 안에서만 발아하고 마음 안에서만 꽃을 피운다.
사랑은 언제나 달디단 열매로만 결실되지는 않는다.
사랑에 거추장스러운 욕망의 덩굴식물들이 기생해서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나를 비우고 너를 채우려 할 때 샘물처럼 고여든다.
그 샘물이 마음 안에 푸르른 숲을 만든다. 푸르른 낙원을 만든다.
온 천지를 둘러보아도 사랑의 반대말이 없으며 온 우주를 살펴보아도
아름다움의 반대말이 없는 낙원을 만든다.
사랑은 바로 행복 그 자체이다.


 

 

 

 

 

 


달맞이꽃


밤에만 핀다. 어둠 속에 흩어져 있는 달의 비늘이다.
그리움의 편린이다. 눈 뜨는 사랑이다. 수절 같은 슬픔이다.


 

 

 

 

 

 


이슬


새벽에 내린다.
만물이 깊이 잠든 안식의 새벽에 소리 없이 내려와 꿈을 적신다.
신의 서늘한 입김이다. 생명의 속삭임이다.
사물들의 표면에 닿아 물방울이 되고 물방울은 땅에 스미어
옹달샘을 만든다.
옹달샘은 그 흐름을 다하여 바다에 다다른다.
이슬은 바다의 투명한 미립자다. 모든 생명의 기원이다.

 

 

 

 

 


 


 

구름


때로는 하늘을 떠도는 풍류도인이다.
허연 수염을 나부끼며 세상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다.
때로는 슬픈 영혼의 덩어리다.
암회색으로 온 하늘을 지우고 깊은 우울 속에 빠져 있다.
때로는 범람하는 비탄의 강이다.
하늘 전체를 통곡 속에 잠기게 한다. 
온 세상을 적시는 눈물로 소멸한다.



 

 

 




 


호수

고여 있는 슬픔이다. 고여 있는 침묵이다.
강물처럼 몸부림치며 흐르지도 않고 바다처럼 포효하며 
일어서지도 않는다.
다만 바람 부는 날에는 아픈 편린처럼 쓸려가는 물비늘.
기다림 끝에 흘리는 눈물들은 기다림 끝에 흘리는 눈물들끼리
한자리에 모여 호수가 된다.
온 하늘을 가슴에 담는 사랑이 된다.


 

 

 

 

 

 

 

 

가을


영혼마저 허기진 시인의 일기장 갈피로 제일 먼저 가을이 온다.
고난의 세월 끝에 열매들이 익고 근심의 세월 끝에
곡식들이 익는다.
바람이 시리고 하늘이 청명해진다.
사랑은 가도 설레임은 남아 코스모스 무더기로 사태지는 언덕길.
낙엽이 진다.
세월도 진다. 더러는 소리 죽여 비도 내린다.
수은주가 떨어지고 외로움이 깊어진다.
제비들이 집을 비우고 국화꽃이 시든다.
국화꽃이 시들면 가을이 문을 닫는다.
허기진 시인의 일기장 갈피로 무서리가 내린다.
가을이 끝난다. 가을이 끝나도 외로움은 남는다.


 







낙엽




수확의 가을이 끝나면 나무들은 잎을 떨구어
자신들의 시린 발목을 덮는다.
바람이 불면 세월의 편린처럼 흩날리는 갈색 엽신들.
모든 사연들은 망각의 땅에 묻히고
모든 기억들은 허무의 공간 속에 흩어져 버린다.

나무들은 인고의 겨울 속에 나신으로 버려진다.
낙엽은 퇴락한 꿈의 조각들로 썩어가지만
봄이 되면 다시금 푸르른 숲이 된다.
숲의 영혼을 덮어주는 이불이 된다.

 

 

 

 





 

 


들국화




기러기 울음소리가 하늘을 청명하게 비우고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달빛을 눈부시게 만들면
바람에 실어보낸 그리움의 언어들은 그리움의 언어들끼리 모여
달빛에 반짝이는 詩가 된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안타까운 사랑도 
아무리 벽이 높아 닿지 못할 사랑도
가을 들녘에 모여 꽃이 된다.
바람이 전하는 한 소절의 속삭임에도 물결같이 설레이며
흔들리는 꽃이 된다.
이름하여 들국화다.

진실한 자는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고,
눈물이 남아 있는 자에게는 고통을 굳게 껴안을 
순수가 남아 있다.

 

 

 

 

 


 

 

 

 

 

 

어쩌자고 하늘은 저리 높은가
이 풍진 세상에 가을빛 짙어
날아가는 기러기 발목에 그대 눈물 보인다 

 

 

 

 

 

 

 

 




가을밤 산사 대웅전 위에 보름달 떠오른다

소슬한 바람 한 자락에도 풍경소리 맑아라

때로는 달빛 속에서 속절 없이 낙엽도 흩날리고

때로는 달빛 속에서 속절없이 부처도 흩날린다

삼라만상이 절로 아름답거늘 다시 무슨 깨우침에

고개를 돌리랴 밤이면 처마 밑에 숨어서

큰스님 법문을 도둑질하던 저 물고기 지금은

보름달 속에 들어앉아 적멸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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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외수가 화려하게 조명받고 있다. 지난달 한국대학신문이 창간 20주년

맞아 전국 대학생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좋아하는 문인’ 1위

황석영도 이문열도 조정래도 아니었다. 이외수였다. 문학동네뿐이 아니다.

이외수는 드라마(‘크크섬의 비밀’)에 이어 라디오(‘이외수의 언중유쾌’) 출연,

CF 촬영 등으로 정신없이 바쁘다. 산문집 『하악하악』은 판매 40만 부를

훌쩍 넘어섰다. 고정독자 수십만 명. 그는 스스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군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만 62세 깡마른 이 초로(初老)의 작가 매력은

도대체 무엇일까.

 


경기도 포천시에서 백운계곡을 건너 강원도 화천군으로 들어갔다. 많은 제대

군인들의 추억이 서린 사창리를 거쳐 상서면 다목리 ‘감성마을’에 도착했다.

아담한 단층집. 디자인이 참 예뻤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의 예술인마을에 가면

클래식 애호가인 아나운서 황인용씨의 음악카페 ‘카메라타’가 있다. 살림집을

겸한 카메라타를 설계한 건축가 조병수씨가 “나는 이외수 애독자”라며 자진해

거의 무료로 설계해 준 집이란다. 뒤뜰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고, 고양이 한

마리가 현관에 웅크리고 있다 낯선 일행과 눈이 마주치자 몸을 숨겼다.

부인 전영자(56) 여사가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거실에 자리 잡으니 한 청년

(문하생)이 조심스레 차를 따라주었다. 그는 전날 금연보조제 CF 녹음을 끝내고

모처럼 쉬고 있다고 했다. 인터뷰는 10월 27일 진행됐고, 여러 차례 전화 인터뷰

로 보충취재를 했다.

불가사의한 이외수의 몸

-오랜만에 뵙습니다. 술에다 담배까지 끊으셨다면서요.

“술은 3년째 안 먹고 있고 담배는 지난해 12월 17일 끊었어요. 하루 예닐곱 갑

을 피웠는데, 조금씩 줄이려 했더니 도저히 안 돼. 명색이 작가라는 놈이 이거

하나 못 끊나 하고 단번에 확 끊어 버렸어요. 그랬더니 몸이 놀랐는지 탈이 났어.

장염이 궤양으로 번져 올해 3월 춘천까지 가서 대수술을 받았어요. 지금은 멀쩡해. 평생 45㎏(키는 1m69㎝)이었는데 며칠 전 재보니 50㎏이에요. 종합검진에서도

‘이상 무’래. 의사가 불가사의라고 하더군요.”

(젊은 시절의 이외수는 소주 30도짜리를 한 자리에서 됫병으로 2병을 마셨다.

글씨를 잘 써서 육군본부 총무과 필경사로 군 복무를 했는데, 전입 첫날 내무반장이 2홉들이 소주 한 병을 권하자 소주병을 입에 물고 뒷짐을 진 채 한 방울도 안

흘리고 다 들이켰다. 덕분에 내무반장의 귀여움을 받았다.)

-요즘 무척 바쁘신데, 일각에선 ‘작가인지 탤런트인지 헷갈린다’고 비판하던데요. 문단 주류도 이외수를 애써 외면하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속으로는 부러워하거나 당혹해하겠지만.

“칼국수 잘 끓이는 놈이 수제비도 잘 끓이는 격 아닐까요. 섹소폰 불다 클라리넷

불고 피아노도 치는 거죠. 시인은 시, 소설가는 소설만 쓰는 게 아름다운 지조

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게는 그런 말이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소리로 들려요.

여하튼 남을 씹는 사람은 능력 없는 사람이야. 뭔가 하는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

이고.”

-올봄 촛불집회 때 정치적으로 해석될 발언을 해서 화제였죠. ‘낚시 달인처럼

행세하던 놈이 막상 강에 나가니까 배스와 쏘가리도 구분 못하더라’든가,

‘백성이 손가락질한다고 백성의 손가락을 자르는 왕이 있다면 백성은 팔다리가

모조리 잘라져 절구통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왕에 대한 항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말들이 주목받지 않았습니까.

“주목보다는 시달림을 많이 받았죠. 그냥 얘기 한마디 했을 뿐인데. 아직도

내가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제일 존경하는 조상이 양녕대군이에요. 대궐 담벼락 넘어가서 음주가무

를 즐기던 사람이지. 내 혈관에 그분 피가 제일 많이 흐를 겁니다.

정치나 벼슬은 체질에 안 맞아요. 내가 싫어하는 일이 살아서 관(棺) 속에 들어

가는 것과 걸어서 관(官)에 들어가는 겁니다. 난 면사무소도 가기 싫어해요.”

쫄쫄 굶어본 경험에서 나온 애정

-우리 사회는 계층·세대·지역 간 소통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특이하게도 초등생부터 노인까지 폭넓은 팬을 확보하고 있어요. 비결이 뭘까요.

“국밥집 욕쟁이 할머니를 연상하면 돼요. 욕을 해도 감정 아닌 애정이 섞인 욕

하잖아요. 상대의 애정이 느껴지면 소통은 저절로 됩니다. 내가 처음 인터넷

들어가니까 나이 많다고 싫어하거나, 버릇없이 굴거나, 책이나 팔아먹으려는

취급을 하더라고. 그러나 그게 아닌 걸 깨닫고부터는 얘기가 통해요.

애정? 내 애정은 쫄쫄 굶어 본 경험에서 나왔어요. 옛날엔 3일 정도는 일상적

으로 굶었고, 라면 한 개로 일주일을 버틴 적도 있어요. 감자튀김 20원어치 사

먹고 다음날 종일 굶고, 번데기 20원어치 사 먹고 다음날 또 굶고…. 이런 식으로

1년을 보낸 적도 있죠. 인간 이하로 살아본 경험이 정말로 인간에게 애정을 갖게

만들더라고요.”

(혹심한 가난을 어떻게 견뎌냈느냐고 묻자 이외수는 “작가가 되겠다는 놈이

이런 고생쯤이야”라는 마음으로 버텼다고 말했다. 1970년대 강원도 춘천에

살던 이외수의 퀴퀴한 자취방은 작가 지망생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사랑방

이었다. 돈이 없어 겨울에도 대개 불을 때지 못했다. 손님들은 방문할 때 소주

와 라면·연탄 따위를 사왔다. 시장 좌판에서 시래기나 비지를 도넛 모양으로

빚어 당시 돈 10원씩에 팔았는데, 이것도 선물용으로 인기 품목이었다.

자취방의 솥은 씻지 않아서 항상 무언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이외수는 “100도가 넘으면 안전하다”며 라면·비지·시래기 등속을 한꺼번에

넣고 끓여 요깃거리 겸 술안주로 삼았다. 이런 처지였으니 연애사업은 순조롭

못했다. 딸이 이외수와 사귀는 걸 알면 아버지·어머니는 물론 오빠들까지

기겁하며 말리곤 했다. 애인에게 차인 추운 겨울날 춘천 소양로의 차디찬 자취

방에 술 취해 들어와 숨 죽이며 울다가 이외수는 뇌까렸다. “아, 쓰발… 외로운

XX.”)

사창가 방에서 도 닦으며 탈고한 첫 장편소설

-그 어려웠던 시절에 습작에 매진해 강원

일보 신춘문예에 당선(72년 ‘견습어린이들’)하고, 3년 뒤에는 ‘세대’지 현상공모 당선

(중편소설 ‘훈장’)으로 중앙문단에도 등단

했지요. 사창가가 무대인 장편소설 ‘꿈꾸는 식물’(78년)은 실제로 춘천시내 사창가

방에서 탈고한 작품이죠?

“아, 장미촌 8호집이었지요. 그때 도 좀 닦았지. 수도를 엄청나게 했어요. 밤마다 옆방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오는데, 글은 써야겠고, 젊은 놈이 미치겠더라고. 장미촌 언니들은 내가 글 쓰러 들어온 거 아니까 ‘저 오빠는

아니야’라며 눈길도 안 줬어요. 가끔 손님이 행패를 부리면 내가 나서서 수습해 주기는 했지. 8호집 이웃에 주인집 초등학생 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몇 년 뒤 출판된 소설을 들고 가니 대학생이 되었더라고요. 주인장에게

아들이 대학생이고 하니 이 장사 그만두시는 게 어떠냐’고 진심으로 권했어요.

그랬더니 다음날로 포주 일을 접었더라고. 길에서 만나 그 얘기를 듣고 반가워서 ‘대신 무슨 일 하시느냐’고 했더니 화원을 차렸대요. 꽃집 말이야.

‘아이구, 화대는 똑같은 화대로군요’라고 말해 줬지.”

-부인과의 연애·결혼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던데요. 아무 비전도 없어 보이는

소설가를 반려자로 택한 것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든든한 매니저 역할을 하시는

보면 부인 복이 있어 보입니다.

“(웃으며)매니저? 아이고, 내가 노예계약을 맺은 거지. 요새는 하루에 스케줄이

서너 건이나 돼요. 다 이 사람이 관리해. 나도 기왕에 화천에 터를 잡았으니

화천을 많이 알려야겠다고 생각해 웬만하면 인터뷰 요청을 거절 안 해요.”

(기자가 보기에 이외수와 전 여사는 상보적 관계다. 이외수는 돈 얘기를 잘 못

하고 남에게 떼이기도 일쑤다. 70년대 말 시인 L씨가 작가들의 대표작을 모아

책을 내고도 인세 한 푼 주지 않은 적이 있다. L씨에게서 인세를 받아낸 사람은

딱 두 명, 황석영과 이외수였다. 황 작가는 “안 주면 때려 죽이겠다고 협박해

받아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이외수의 경우 부인이 나섰다. 전 여사는 갓난

아기인 장남 한얼이를 업고 서울의 L씨 사무실에 쳐들어갔다. 바닥에 포대기를

깔고 아기에게 젖을 먹여 가며 인세를 요구했다. 며칠을 따라다니자 L씨도 질려

돈을 내놓았다. 이외수와 미스 강원 출신의 전영자 여사는 76년 11월 26일 결혼

했다. 무료로 식장을 빌려주던 춘천 여성회관에서 1차 결혼식을 치르고, 의암호

부근 김유정 문인비로 가서 2차로 식을 올렸다. 이외수는 선배 문인 김유정에게

‘평생을 같이할 여자가 생겼습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라고 신고 겸 맹세를 했다. 부부의 생활고는 불문가지. 전 여사는 ‘연탄(19공탄)을 한꺼번에 5장 산 게 가장

많이 사본 기억’이라고 말했다. 아이를 임신해도 임신복부터 기저귀·분유까지

모든 게 없었다. 전 여사는 지금도 울적할 때면 시내에 나가 필요하지도 않은

임신복을 산다. 가슴 아픈 가난의 추억 때문이다.)

외계인과 교신하고 달친구와 채널링

-선생님의 그림·글씨 실력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싸움을 잘했다든가 젓가락을

기막히게 던지는 솜씨는 모르는 이가 많을 겁니다.

“싸움실력이야 옛날 얘기고…. 나무젓가락을 던져 함석판을 뚫는 기술 정도는

누구나 한 달이면 배울 수 있는 거예요. 자꾸 ‘나무는 쇠를 못 뚫는다’는 선입관

에 휘둘리는 게 문제지. 그래도 나는 사람한테는 젓가락을 던지지 않았어요.

기 죽이려고 겁만 준 거지.”

(이외수는 원래 화가 지망생이었다. 그동안 시화전만 50여 회 열었다. 지난해

작고한 부친(이승윤)은 “그토록 원하던 홍익대 미대에 외수를 진학시키지 못한

게 가슴 아프다”고 회고했었다. 이외수의 개성 있는 글씨체(일명 나무젓가락체)

는 인터넷 서체로 개발돼 곧 시판될 예정이다. 젊은 시절의 이외수는 젓가락을

잘 던졌다. 자취방 장롱 위에 놓인 라면 박스를 향해 나무젓가락을 던지면 미리

예고한 지점에 팍팍 꽂혔다. 삼양라면의 ‘양’자의 ‘ㅇ’ 받침에 정확히 꽂히는 식

이었다. 한번은 술집에서 덩치 큰 태권도 사범과 시비가 붙었다.

이외수가 겁만 주려고 사범의 몸 근처로 쇠젓가락을 던졌는데, 운 없는 사범이

얼떨결에 손을 뻗어 막다가 젓가락이 손바닥에 꽂히고 말았다.)

-춘천을 떠나 화천에 정착한 게 재작년이죠. 화천군으로서는 지자체 발전에

선생님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을 텐데요.

“그해 1월에 왔죠. 홍천군·양구군, 그리고 고향인 경남 함양에서도 오라는

제의가 있었지만 화천을 택했어요. 화천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적이 있습니다.

군수(정갑철)가 문화적 열정이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어려운 예산에 감성마을도 조성해 주었으니 지역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부담이 크겠네요.

“그럼요. 해마다 두 번씩 문학연수를 하는데, 수업료는 무료지만 식사나 잠은

마을에서 해결하도록 합니다. 연수생들이 돈을 쓰고 가야 지역에도 좋지요.

화천에는 군부대가 많잖아요. 부대에서 정기적으로 관심사병(문제사병)들을

감성마을에 보내오면 내가 정신교육도 해주고 있어요. 체중 45㎏인 나도군생활

을 했다, 너희는 한 명 한 명이 다 보석 같은 존재다, 힘내라, 뭐 이런 강연이죠.

효과가 좀 있나 봐요. 어떤 사단장이 사병들의 밝아진 모습을 보고 ‘야, 이외수가

애들 마약 먹여 보냈느냐’고 농담을 하더래요.”





-외계인과 교신한다는 건 정말입니까.

“그럼요. 일반인이 그걸 납득하려면 비물질계의 의식체계에 대한 상식을 갖춰

해요. 바위·산·강에 의식이 있느냐, 있다, 이런 상식을 갖고 있어야 납득되고

대화도 가능해집니다. 내가 달 친구들과 채널링(channeling·교신)해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도 전용 채널러(channeler)가 있어요.

거기서 얻은 정보로 영화 ‘ET’ 같은 걸 제작할 때 도움을 받았다는 거죠.”

-혹시 좌우명이 있나요.

‘쓰는 자의 고통이 읽는 자의 행복으로 남을 때까지’예요. 죽을 때까지 쓸 겁니다. 한동안 쉬다 내년 초에 지금까지와 다른 장편소설을 시작할 거예요. 흔히 ‘목숨

바쳐도 아깝지 않은 소설’이라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지요. 나도 환갑이 지났으니 그런 작품 하나 써야죠. 난 그동안 산전·수전·공중전에 ‘네티전(네티즌+戰)’까지

다 거친 놈입니다. 남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소설을 계속 쓸 겁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춘천이 고향인 기자는 중학교 1학년 때 이외수를 처음 만났다. 중 3 때 이외수의 권유로 난생 처음 소주를 입에 댔다 (소주병 뚜껑으로 딱 한 잔

이었다). 고교 2학년 말에는 집을 나와 그의 자취방에서 몇 달간 더부살이를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이외수는 “술을 끊었지만 오늘만은 한잔해야겠다”고 했다.

그는 딱 석 잔을 마셨다. 술자리가 끝날 무렵 손님이 찾아왔다. 남자 대학생이

이외수를 찾아 전북 익산에서 오토바이로 달려왔단다.

역시 젊음은 방황도 예쁘다. 혁명가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가 생각

났다. 얼마 전에는 인천에서 젊은 여성 두 명이 자전거를 타고 왔더라고 했다.

전남 해남에서 22일 걸려 걸어서 온 사람도 있다나.

이외수와 감성마을이 앞으로도 이 나라 젊은이들의 마른 목을 축여 주길 빌었다.

화천(강원도) / 글 노재현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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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6.27 07:18

    첫댓글 양아치! 이외수.....하면 수 많은 이 시대의 기인들이 동시에 떠오르죠...걸레스님 중광, 천상병, 가수 이남이 등등....존경은 몰라도 신뢰합니다....그 만큼 고생을 해보았기에 자신을 알고, 할 말을 다 하고, 독자를 속이지 않습니다....참 되고 좋은 글을 소개해주어 고맙습니다...우리 카페의 보배이신 동산님!

  • 09.06.27 08:41

    이외수님 글을 좋아 하는데 서울 다녀와서 끝까지 일고 꼬리글 달겠습니다 동산님 감사합니다

  • 09.07.03 12:19

    '일기장을 태워도 그리움까지 소각되지는 않는다.' 그리움은 태울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것. 이외수님의 글 많이 좋아합니다. 담배를 끊으셨다니 정말 놀랄 일이네요. 동산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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