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말씀하신 유혹이 많아 오히려 반어법이 아닌가 싶던 불혹이 지나고 ,어느 덧 이순도 지났습니다.
마흔에서 쉰으로 넘어가던 시기,젊지도 아름답지도 않을 시기가 다가온다는게 서글프더군요.
중년의 살찐 여자는 목소리크고 뻔뻔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의 이미지였으니까요.
그래서일까요. 소설 '은교'가 네이버에서 연재되던 2년전 흠뻑 빠졌더랬습니다.
한달반동안 작가의 말대로 폭풍처럼 써 내려간 젊음과 예술에 대한 고뇌는 매혹적이었지요.
그 은교가 영화로 나왔다기에 소설속의 묘사와 갈등과 아름다움을 스크린에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역시 소설은 소설,영화는 영화더군요.두 장르의 한계가 느껴졌습니다.
소설은 내면묘사에 충실할 수 있어서 밀도가 높은 반면, 단 한 컷의 화면이 보여주는, 말이 필요없는
강렬함에는 못미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인 이적요,그는 자신의 필명 적요처럼 홀로 고고하게 시의 세계에서 현실과는 담을 쌓고
소멸을 기다리는 칠순입니다.
켜켜이 쌓인 책들을 뒤로하고 이제 화석이 되기를 기다릴 뿐인 그의 집에 눈부신 소녀가 찾아듭니다.
길을 잃은 파랑새같은 소녀,그는 소녀의 젊음과 천진함에 매혹됩니다.
그리고 탄식하지요.
'너의 젊음이 너가 잘한 일에 대한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 또한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한 벌이 아니다'라고요.
유리창을 닦는 은교,계단을 통통통 올라오는 은교의 발자욱 소리,까르르 웃는 웃음.
시인에게 자신의 가슴에 있는 문신과 같은 것을 해주겠다며 막무가내로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눕게하는 소녀.
어찌 매혹되지 않을수 있을까요?
시인은 이제는 영영 시들어버렸다고 느끼는 자신의 정염에 반짝 하는 섬광이 이는걸 느낍니다.
시인도 한때는 젊었더랬죠.
젊음은 아름답습니다.그것은 영원하지 않기때문에, 서툴고 연약하기 때문에 더 그러하지요.
눈이 부시네요.
시인에게는 제자가 있습니다.그는 문학을 향한 열망만 있을 뿐 아쉽게도 재능이라고 부르는 '무엇'이 없습니다.
그는 해바라기처럼 스승 적요를 따릅니다.결혼도 하지 않아 가족이 없는 스승에게 수족처럼 십여년 최선을 다하지요.
어떤 계기로 스승은 그에게 자신의 소설을 줍니다.그는 이제 스포트라이트를 받습니다.그것은 얼마나 달콤한지요.
후속작을 채근하는 출판업자에게 시달리다 마침내 그는 시인의 미발표 단편을 훔쳐서 그것으로 문학상을 받습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궁정악장 살리에르는 경박하고 어린 모짜르트가 자신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훌륭한 곡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탄식합니다.
'신은 왜 공평하지 않냐'고요.
모든 예술가들이 자신보다 훌륭한 예술가들에게 질투와 선망을 보내며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명작을 탄생시키고 싶어합니다.그 욕망은 종종 '표절'이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남의 작품을 훔쳐서 내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또 다른 지옥에 빠뜨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서지우는 자신에게 늘 냉엄하기만 했던 시인이 은교에게는 봄눈 녹듯 화사한 눈길과 웃음을 주는 것을
질투합니다.이제 이들에게 파국이 시작됩니다.
영화를 볼 분들을 위해 이야기를 여기서 마칠까 합니다.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길 권하고 싶네요.
개연성의 측면에서 영화와 소설은 좀 다릅니다.
설득력에 대한 문제도요.
짧아서 더 아름다운 봄날에 ..
첫댓글 선생님, 정보 감사합니다,
사실 이번 주말에는 영화를 좀 봤으면 좋겠는데
애들 아빠 친구들이 집에 와서 하룻밤을 묵고 갑니다.
누가 집에 온다고 하니까 할 일이 많으네요.
은교도 보고 봄눈도 보고 싶은데.
영화 .은교.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다더군요.
영화가 아님, 책으로라도 만나고 싶군요. ^^
손님 맞으신다 정신 없겠네요.
손님맞이가 다반사였던 옛날에는 그리 힘들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동생이 온다고 해도 그 무게가 만만치 않습니다.
아무튼 몸살 나지 않게 살살 하세요.
책이 훨씬 좋겠네요
저 예전에 책을 읽었는데 영화는 볼까 말까
아직도 생각중 ~~괜히 보고싶기도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