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3주(2020621)
제가 누구를 의지하리이까?
시편 86:1~10, 16~17

인간은 희망과 절망 사이에 놓인 존재입니다.
희망 속에는 절망이 잉태되어 있고, 절망 속에는 희망이 내재하는 법입니다. 누군가 아름다운 삶을 살아간다고 했을 때, 평온할 때 감사할 줄 알고 절망 중에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봄 속에 겨울이 들어있고, 가을이 끝나면 겨울이 온다는 것을 자연의 섭리로 인정한다면, 우리 삶이 봄날처럼 평온할 때도 있고, 겨울처럼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할 때가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과 절망 속에는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COVID-19가 창궐하고 있는 지금 인류는 고난의 때를 살아가고 있지만, 이런 상황이라고 해도 희망적인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 인류가 그동안의 인류문명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반성한다는 점에서 희망적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했을 때, 무엇을 보며 살아가느냐가 그 사람의 존재성을 드러낸다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맑은 눈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즐겁거나 평안할 때에는 기도에 소홀하기 쉽습니다. 어떤 분들은 평안할 때 기도하지 않다가, 환난의 때에 염치없게 기도하느냐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기도는 본래 그런 것입니다. 오히려 환난의 때에 절실하게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하나님을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최선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 전화위복의 삶을 살아가시는 지혜로운 분들 되길 바라면서 시편 86편이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86편은 다윗의 기도입니다.
다윗이 기도하는 상황은 ‘가난하고 궁핍한 상황’입니다. 언제 악인들의 손에 붙잡혀 죽을지 모를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원천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 육체적인 생명을 위해서 기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 즉 천명(天命)을 지켜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지향하는 삶은 이렇게 두 영역, 생명(生命)과 천명을 동시에 바라봅니다. ‘생명’은 말 그대로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고난이 찾아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니, ‘저 좀 제대로 살도록 도와주십시오!’ 구하는 기도는 결국 천명, ‘살아가라 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십시오’ 하는 간구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이리저리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고 하늘의 마음을 품어 삶을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삶을 수시로 흔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맑은 눈으로 고요하게 살펴서,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늘 기도하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요즘 남도는 모내기를 거의 마쳤습니다. 자라는 과정은 생략하고, 가을이 되면 추수를 합니다. 추수를 하고 난 뒤에는 벼를 찧어 키질하고 체질하여 불순물을 골라낸 후에야 하얀 쌀을 얻습니다. 그냥 모내기를 해서 흰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쌀 한 알을 얻기 위한 많은 과정들이 있습니다. 기도는 키질하고 체질을 하여 우리 마음의 불순물을 골라내고 정갈하게 하여, 마음에 하늘의 마음을 품게 하는 거룩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물꼬’를 트고 메우는 행위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이나 논농사를 져본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물꼬’가 뭔지 아실 것입니다. 논에 물을 들이기 위해서 혹은 논에 있는 물을 빼내기 위해서 논두렁 일부분은 헐어내는 것을 ‘물꼬를 튼다.’고 합니다. 이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물이 없으면 벼가 타죽고, 물이 너무 많으면 숨 막혀 죽습니다. 그래서 ‘물꼬’를 트고 메우는 일은 벼농사의 승패를 좌우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승패는 기도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일을 중단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종일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간절히 기도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한 후에는 응답받았음을 믿고 기도한대로 살아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종일, 간절히 기도하는 때가 물꼬를 메우는 시기라면, 기도한대로 살아가는 때는 물꼬를 트는 때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물꼬를 메우는 일은 잘하는데, 물꼬 트는 일을 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보니 종종 논에 물이 가득차서 애써 심은 모가 숨을 쉬지 못해 죽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면 응답받으실 줄 믿고 기도한대로 살아가십시오. 기도하는 것 자체가 응답의 기적입니다. 과정과 결과는 하나입니다. 길 따로 목적지 따로가 아니라 길이 곧 목적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하셨습니다. 기도하는 그 순간 우리는 진리요 생명이신 길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시편 86편에서는 다섯 가지로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첫째로 8절의 말씀입니다.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 즉,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라는 고백입니다. 둘째로 9절의 말씀입니다. “주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이 와서...”즉,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10절의 말씀입니다.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오직 주 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 즉, 무한히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넷째, 16절의 말씀입니다.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즉,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다섯째, 시편 16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나이다.” 즉, 보혜사요,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특권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특권을 소홀히 여기지 마시고, 환난의 때에, 삶이 힘들 때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오,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오, 무한히 위대하신 분이시기요,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오, 보혜사요,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오늘 설교제목 “제가 누구를 의지하리이까?”는 바로 이런 하나님을 의지하는 다윗의 신앙을 드러내는 제목입니다.

기도하는 다윗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3절에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다윗이 간구합니다. ‘은혜’라는 단어의 어원은 ‘측은히 여기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측은하게 여기셔서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니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7절에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라는 말씀은, 내가 원수를 갚지 않아도 원수들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이유는, 하나님이 기도하는 다윗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성서일과의 주제는 환난 중에 기도하는 이들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주요내용입니다. 먼저 창세기 21장 8~21절은, 아브라함의 첩이었던 하갈이 브엘세바 광야에서 이스마엘과 방황하다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이 울부짖을 때에 “두려워 말라”하시며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오늘 주 본문으로 삼은 시편의 말씀은 다윗이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죽을 위기에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위로하시는 내용입니다. 예레미야 20장 7~13절의 말씀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조롱거리가 되고 모욕거리가 되어 한탄할 때에 행악자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또 다른 시편성서일과인 시편 69편의 말씀은, 주님을 위해 비방 받고 수치를 당할 때에 수렁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서신서 로마서 6장 1~11절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이 그와 함께 살줄을 믿는다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복음서 마태복음 10장 24~39절은,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말씀이며, 머리털까지도 다 헤아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어떤 시련 앞에서도 하나님을 시인하라는 말씀입니다.
성서일과의 공통주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이요, 그때에 반드시 응답해주시실 것이라는 위로의 말씀들인 것입니다.

오늘 성서일과는 아니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에 꼭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있습니다. ‘주의 기도, 주기도문’이 그것입니다. 기도의 끝에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하라고 하십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은 곧 예수님의 명예와 관련이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예수님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 기도를 응답해주시겠다는 은혜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조차도 자기의 이름을 걸면,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합니다. 지난주에 청과상에서 토마토 한 박스를 샀는데 박스에 ‘이길호 토마토, 토마토는 이길호다’라고 인쇄되어 있습니다. 다른 토마토도 있었지만, 저는 자기의 이름이 인쇄된 ‘이길호 토마토’를 선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 이름을 걸었으니 신뢰가 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옷도, 누가 디자인 했는지에 따라서 다르지만, 디자이너의 이름이 들어간 제품이 퀼리티도 좋고, 값도 비쌉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의 이름을 걸고 정성껏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도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이것은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기도를 예수님께서 책임지고 응답해 주시겠다는 은혜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COVID-19를 극복하는 것도 우리의 기도제목이지만, 각자의 삶을 힘겹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들 모두 기도 제목으로 삼으십시오. 기도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도와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으로 위로받으시고 힘내십시오.
“제가 누구를 의지하리이까?” 이렇게 질문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순간, 우리 삶의 물꼬가 트입니다. 그 순간 제대로 된 ‘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그 순간 우리는 ‘진리요 생명이신 길’,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나오지 않으면 “주여!”하고 울부짖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마음을 다 헤아리시고,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다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아 울부짖는 하갈의 눈을 밝혀주시어 샘물을 보게 하신 것처럼 우리 눈에 쓰인 백태를 벗겨주실 것입니다. 구상 시인의 <말씀의 실상>을 소개해 드리며 오늘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無明)의 백태(白苔)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萬有一切)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무심히 보았던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이적(異蹟)에나 접한 듯
새삼 놀라웁고
창 밖 울타리 한 구석
새로 피는 개나리꽃도
부활(復活)의 시범을 보듯
사뭇 황홀합니다.
창창한 우주,
허막(虛漠)의 바다에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말씀의 신령한 그 은혜로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상상도 아니요,
상징(象徵)도 아닌
실상(實相)으로 깨닫습니다.
[거둠 기도]
주님, 에덴의 동쪽에 살아가기는 우리에게 환난과 고난과 두려움은 필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두려움 속에 빠져 살아가지 않도록 ‘기도’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저희가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불러주시어 기도의 물꼬를 트라고 하시며, 기도할 때에 반드시 응답해 주시겠다 말씀하시니 감사합니다. 평안하고 행복할 때도 기도하게 하시되, 환난 중에는 반드시 기도하게 하셔서 절망의 늪에 빠져들지 않도록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오히려 환난의 때를 하나님을 만나는 최선의 기회로 삼아서 전화위복의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