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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9일 주일예배 설교
창세기 30:1-24
생명의 장인(匠人) 하나님
본문 ‘창세기’는 '세상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극초반에는 세상의 기원, 이후 11장까지는 민족들의 기원, 12장 아브라함 이야기부터 마지막 50장까지는 이스라엘과 그 12지파의 기원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책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는 창세기(創世記)는 ‘세상이 창조될 때의 기록’, ‘세상의 창조에 관한 책’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풍깁니다. 그래서 제목만 들었을 때 직관적으로 창조 이후의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 Septuaginta)의 제목 게네시스(γένεσις)가 이 책의 전체 구조와 흐름, 내용을 직관적으로 잘 담아냈다고 보입니다. 헬라어 게네시스(γένεσις)의 뜻은, ‘기원, 발생, 시작, 생성, 출생, 종족, 혈통’ 등입니다. 따라서 이 책을 ‘기원에 관한 책’, ‘시작에 관한 책’으로 이해한다면, 세상의 기원과 시작, 민족들의 기원과 시작, 그리고 이스라엘과 그 열두 지파의 기원과 시작이라는 전체 내용을 보다 직관적으로 파악하기가 수월해집니다. 라틴어 성경과 영어 성경도 이를 그대로 이어받아 Genesis라 부릅니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창조’가 태초에 한 번 지으시고 끝이 아니라, 생명을 계속해서 만들어내시고 유지하시고 보존하시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란 ‘지금도 계속해서 생명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고 보존하시는 모든 일’을 가리키긴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창세기’라는 제목이 오히려 더 낫다고 볼 수 있으나, 많은 사람에게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는다는 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원과 족보의 흐름 속에서, 이스라엘의 족장사에는 매우 독특한 패턴 하나가 반복됩니다. 바로 친자를 쉽게 낳지 못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난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난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야곱의 아내 라헬도 난임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의 이야기는 구약 다른 곳, 이를테면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게서도 나타나지만, 이렇게 한 가문 안에서 삼대에 걸쳐 연달아 몰려서 나타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창세기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간간이 언급되는 이 주제가 유독 이스라엘과 그 12지파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족장사에서만 이토록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것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하셨던 말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과 정확히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이 약속의 성취는 사람의 힘으로는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언약의 성취가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철저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난주 우리가 함께 본 아브라함과 사라, 하갈의 이야기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 패턴이 한 번 더, 그것도 훨씬 더 복잡하고 진하게 반복됩니다.
이런 점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족장들의 이야기 속에서 태와 자손에 관한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으로 언급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근거로, 오늘날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에게 섣불리 어떠한 입장을 권하거나 신앙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참으로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모습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까닭 모를 고난을 겪고 있던 의인 욥에게 전통적인 신학을 들이대며 “욥, 너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라” 정죄했던 지인들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권고가 아무리 선의일지라도요.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들은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그저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힘과 위로와 응원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일에 대한 해석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그 일을 겪고 있는 당사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의 뜻과 해석에 대해 당사자가 먼저 물어올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 이것이 우리 분수에 맞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침범하지 않고 넘보지 않는 자세와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엔 목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 족장들의 이야기, 그중에서도 오늘 본문 30장의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야곱은 두 아내 중 라헬을 편애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언니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는데, 역설적으로 연달아 네 명의 아들(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을 낳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다른 아내가 연달아 네 생명을 잉태하는 동안, 텅 빈 태를 안고 살아가야 했던 동생 라헬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본문은 언니를 맹렬히 시기하였다고 말하면서 야곱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합니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은 자입니다.”
여기서 라헬이 언니를 향해 품었던 감정인 ‘시기하였다’는 가벼운 부러움 정도가 아닙니다. 히브리어 문법적으로 행동의 맹렬함을 나타내는 강조능동형(피엘, Piel)이 사용됐는데, 이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이성을 잃고 솟아오르는 통제 불가능한 질투를 의미합니다.
고대 서아시아 사회에서 여성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서운한 일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가문 내에서의 존재 가치와 경제적 생존권이 완전히 박탈당하는 치명적인 위협이었습니다. 현대의 많은 성서학자들과 사회학적 주석가들은 라헬의 이 질투를 단순한 치정 싸움이 아니라, 가부장적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여성의 ‘절박한 실존적 몸부림’으로 봅니다.
그 절박함이 라헬의 마지막 절규에 담겨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은 자입니다.” 저는 라헬의 이 절규를 “자식이 없는 나는 지금 숨을 쉬고 있어도 이미 사회적으로, 실존적으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라며 존재론적 절망을 쏟아낸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고통에 남편 야곱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내가 하나님입니까? 당신 태를 닫으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나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이 얼마나 기가 막힌 대화입니까? 야곱의 대답은 좁은 의미의 신학적으로는 지극히 훌륭하고 모범적인 정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분명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러나 고통받는 아내의 눈물을 닦아주고 함께 무릎 꿇어 기도해야 할 그 긍휼의 자리에 남편인 야곱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라는 거룩한 교리를 방패 삼아, 아내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무능함을 덮으려는 이기적이고 지독히 방관자적인 태도를 보일 뿐입니다. 정답을 말하지만, 사랑이 없는 신앙의 민낯입니다. 더군다나 자기가 편애할 정도로 사랑하는 아내에게요. 이 야곱이 훗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되고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다니.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라헬은 자기 여종 빌하를 대리모로 삼아 남편의 침소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렇게 얻은 두 아들의 이름을 라헬이 직접 짓습니다. ‘단(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셨다)’, ‘납달리(내가 언니와 크게 겨루어서 이겼다)’. 이름의 뜻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생명을 주신 창조주를 향한 거룩한 경외는 사라지고, 오직 언니를 향한 적개심, 내가 저 언니를 짓밟고 이겼다는 서늘한 경쟁심만이 가득합니다.
이에 질세라 아들들을 넷이나 낳은 언니 레아도 자기 여종 실바를 남편에게 들여보내어 출산 전쟁을 이어갑니다(갓, 아셀). 생명이 태어나는 그 거룩한 창조의 신비가, 인간의 찌그러진 욕망과 결핍을 채우는 비참한 도구로 전락해 버린 것이기도 하고, 단순한 시기심을 넘어 자식이 없으면 생존 자체가 위협받던 고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여성들의 처절하고도 절박한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이 비극적인 경쟁의 절정은 본문 14절의 ‘사랑 식물들(דּוּדָאִים, 두다임)’ 사건에서 폭발합니다.
이 식물의 이름은 ‘사랑’을 뜻하는 어근 ‘도드’에서 파생된 것으로,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임신을 돕고 남녀의 사랑을 불러일으킨다고 널리 믿어지던 식물입니다. 그래서 그 열매는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사랑과 다산을 가져다주는 신비로운 열매로 여겨졌습니다. 실제로 이 식물에는 향정신성 성분이 있다고 합니다. 이러면 14절 이하 레아와 라헬이 이 식물을 두고 왜 이런 대화와 그 신경전 그리고 거래를 나눴는지 잘 이해됩니다.
이 ‘사랑의 약초’를 레아의 첫째 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구해오자, 라헬이 그것을 달라 부탁합니다. 그러자 레아가 쏘아붙입니다. “네가 내 남편을 빼앗아 간 것도 모자라서, 내 아들이 구해 온 것마저 빼앗으려 하느냐?” 자매 사이에 오간 말들이라기엔 이 얼마나 날카로운 언사입니까.
그러자 다급했던 라헬이 거래를 제안합니다. 사랑의 약초들을 자신에게 주면, 이 밤은 남편이 언니와 함께 눕게 해주겠다고. 남편을 언니에게 양보해서라도 당대로선 최선의 처방이었던 약초를 얻겠다는, 그래서 임신하여 자식을 낳고 말겠다는 라헬의 강한 의지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출산을 한 사람은, 임신을 가져온다는 이 약초를 손에 쥔 동생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였습니다. 다섯째와 여섯째 아들을 연달아 낳고(잇사갈, 스불론), 딸 디나까지 낳습니다. 사랑의 약초를 손에 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포기한 사람에게 생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 서사의 아이러니를 통해 본문은 우리에게 조용히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을 다 쓴다 해도, 생명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요.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에 라헬이 요셉을 낳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태어난 경위입니다. 시기, 질투, 거래, 생명을 얻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약초를 두고 남편과의 잠자리를 흥정하는 아내들, 대리모, 자매간의 냉전, 그리고 아내들의 거래에 따라 오늘 밤은 이 텐트로, 내일 밤은 저 텐트로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는 족장 야곱. 이것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기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이토록 긍정적인 면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스라엘 조상들, 족장들의 흑역사를 지우거나 포장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펼쳐놓은 것일까요?
더욱이, 성경이 진술하고 있는 이스라엘 족장들의 흑역사는 이것 외에도 더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고자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는 그 부족의 지도자가 아내를 어떻게 다루든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 2번이나 나옵니다.(창 12:10-21, 20:1-7) 이삭도 이와 똑같은 모습을 보입니다.(창 26:1-11) 사라는 시기 질투하는 모습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다소 비웃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삭의 가정은 편애가 극에 달해 편이 나뉜 모습을 보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사냥을 잘하여 동물들의 고기와 가죽을 가져다주는 형 에서를 편애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바깥으로 나돌지 않고 집에서 집안일을 도와주는 동생 야곱을 편애합니다. 결국 리브가와 야곱의 합작으로 이삭을 속여 장자권을 차남인 야곱이 물려받게 하는 지경의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 오게 됐고, 그곳에서 일한 삯으로 외삼촌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야곱의 가정 역시 시기와 질투 그리고 편애가 난무하는 집안입니다. 그야말로 질서가 있고 뼈대가 있으며 가풍이 바른 집안이라기보단, 본능과 그로 인한 무질서와 혼돈이 판치는 가문입니다. 소위, 이런 부분에서는 세상의 여느 집안과 다를 바 없고 똑같은 모습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이스라엘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족장들, 어떻게 보면 위대한 족장들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논리나 사회 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한 민족이나 집단의 기원을 서술할 때 그 조상들의 결함은 철저히 감추고 그들의 뛰어난 능력이나 도덕적 공로(Merit)나 탁월함을 부각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탁월성과 정통성 그리고 당위성을 이야기하고 설득하고 선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성경은 이들의 이기적인 행동 패턴과 그로 인해 불화를 겪는 가족 간의 사회적 관계망을 가감 없이, 아니 오히려 당혹스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성경이 족장들의 시기와 질투와 편애와 거래 등 못난 모습을 반복해서 이토록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주된 이유는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공동체의 탄생이 결코 인간의 자격이나 훌륭함, 도덕적 탁월성 등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쐐기 박기 위함입니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기원과 형성, 그 시작과 출발이 결코 인간의 자격이나 훌륭함, 도덕적 탁월성에 기인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달리 말해, 창세기에서 친자 출산이 지연되고 불가능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이나 그런 이야기들 속에서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족장과 그 가족들이 어리석은 삶을 반복하는 것이나, 모두 하나의 큰 틀과 목적 안에서 서술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기원과 형성은 결코 족장들이 탁월하거나 훌륭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타 인간들과 다를 바 없고 똑같이 나약하고 어리석고 못난 인간들이었음에도 하나님께선 그들을 선택하셔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흘려보낼 민족으로 하나님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말씀하신 약속들 중 하나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다.”(창 12:3)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유는 이스라엘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긍휼. 이스라엘이 특별히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무궁하신 자유에 입각하여 하나님께서 그저 어여삐 봐주시어 선택하시고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존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그로 인한 시기와 질투, 분노, 협잡 등 인간의 모순과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족장들의 모습과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달리 말해,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는 흠 없고 완벽한 사람들을 통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비록 상처투성이에 연약함과 나약함, 한편으론 비겁함과 포악함을 안고 살아가는 일그러진 인간들의 진흙탕 현실 한가운데서 시작되고 피어났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은혜의 역설’ 또는 ‘은혜의 스캔들’입니다. 솔직히, 자격 없는 자에게 구원이 값없이 주어진다는 것은 다소 불쾌하고 납득하기 힘든 ‘거리끼는 것(스캔들, 걸림돌)’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곧 세상의 시작과 이스라엘의 시작에서부터 바로 이 은혜에서 비롯되고 시작되고 출발되고 발생되고 기원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오래된 도자기 수선 기술이 있다고 합니다. 킨츠기(金継ぎ)라고 부른다는데요. 그릇이 깨지면, 우리는 보통 버리거나 최대한 티가 안 나게 붙여서 감추지요. 가끔 TV에서 나오는 도자기 장인들도 흠이 있다고 깨버리는 장면이 상당히 자주 나옵니다. 우리 눈에는 멀쩡하고 좋아 보이는데 말이지요. 전문가와 장인의 눈에는 흠과 결함이 보이기 때문에 작품으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가치관이자 삶의 방식입니다. 세상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흐름이자 방식입니다. 흠결 없는 완벽함과 그것을 갖춘 존재의 가치가 인정받습니다. 그것을 최고로 여깁니다.
그런데 킨츠기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합니다. 깨진 자리를 옻칠로 이어 붙인 다음, 그 이음새를 감추기는커녕 오히려 그 위에 금가루를 입힙니다. 그러면 깨졌던 자리가 오히려 그릇 전체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됩니다. 금이 간 흔적이 부끄러운 흠결이 아니라, 그 그릇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무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론 완벽하게 매끈한 원래 그릇보다, 깨졌다가 금으로 이어진 그릇이 더 값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답니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더 값진 작품으로요.
오늘 우리가 마주한 창세기 30장의 족장사가 꼭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의 가정에 깊게 파인 인간적인 결함들 곧 이삭과 리브가와 야곱의 편애, 라헬과 레아의 지독한 시기와 질투, 임신을 돕는다는 약초를 두고 남편과의 잠자리를 거래하고, 서로 경쟁하는 그 지극히 영악하고 자기중심적인 면모들, 그래서 산산이 깨진 관계의 파편들을 감쪽같이 지우거나 없었던 일이라며 쉬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부끄러운 흠의 자리에 친히 들어가 당신의 긍휼을 바르시고 은혜의 금가루를 덧입히셨습니다. 그야말로 금이 간 그릇과 도자기마저도 아끼시고 쉬이 버리지 않으시며 다시 살려내고야 마시는 장인(匠人)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시기와 질투, 편애와 비겁함으로 생채기가 나고 균열이 있는 흠의 자리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시조들이 태어납니다. 르우벤도, 시므온도, 레위도, 유다도, 단과 납달리도,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도 그리고 요셉도,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벤야민까지 그 어느 한 사람도 이 깨어진 인간의 욕망과 상처를 거치지 않고 태어난 아들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가정의 흠결을 그저 덮어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 금이 간 균열 자체를 직접 어루만지시고 수선하시며 세상에 복을 흘려보낼 거룩한 당신의 백성을 빚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못나더라도 사랑하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빚어가십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으로, 신실한 주권의 사랑입니다. 그야말로 금이 간 그릇과 도자기마저 사랑으로 수선하시며 기어이 아름다운 생명으로 빚어내시는 생명의 장인(匠人)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은혜의 역설은 모든 인간적인 계산과 꼼수가 철저히 실패로 끝난 자리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을 발합니다. 거래를 통해서라도 임신을 가져온다는 그 신비로운 식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라헬 그래서 남편의 사랑과 생명을 쟁취하려 했던 라헬의 몸부림은, 그토록 애타게 구했던 그 방법으로는 결국 생명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그 노력이 무력하게 끝난 그 자리에, 인간의 능력이 철저히 끝난 그 텅 빈 절망의 자리에, 마침내 본문 22절이 선포됩니다.
의학과 약학이 현대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고대 사회에서, 이 식물을 통해 임신을 시도하는 것은 불신앙이라기보다 당대 사람들이 인간의 능력으로 동원할 수 있었던 최선이자 최후의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노력 자체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것을 사실 본문은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17절 “하나님이 레아의 호소를 들어 주셔서, 레아가 임신을 하였고, 야곱과의 사이에서 다섯 번째 아들을 낳았다.” “22절 “하나님은 라헬도 기억하셨다. 하나님이 라헬의 호소를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열어 주셨다.”)
하나님이 라헬을 ‘기억하셨다(자카르, זָכַר, 기억하다)’는 것은 잊고 있던 것을 머릿속으로 떠올리셨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노아의 방주가 깊은 물에 잠겨 꼼짝할 수 없었을 때 하나님이 그를 ‘기억하사’ 구원의 바람을 불게 하셨던 것처럼, 인간의 능력이 완전히 소멸된 곳에서 하나님께서 전적인 주권으로 구원의 행동을 개시하셨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참고로 올해 우리 평화목교회의 주제인 ‘함께 기억하기’(이사야 63:7) 곧 하나님께서 그동안 베푸신 신실하신 사랑들을 ‘기억하게 하겠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라헬이 마침내 안게 된 첫 아들 요셉은, 그녀의 치열한 인정 투쟁이나 임신을 불러온다는 신비로운 식물이 만들어낸 성과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텅 빈 태를 안고 “나는 죽은 자입니다”라며 절규했던 그 비참한 여인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맹렬하고도 주권적인 은혜의 선물, 사랑의 선물이었습니다.
우리들의 가정과 내면, 오늘 우리 삶의 자리를 정직하게 돌아보면, 위대한 신앙의 영웅처럼 살기보다는, 라헬과 레아처럼 매일매일 타인의 인정, 자식 문제, 자녀의 성공, 끊임없는 비교와 시기심,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속에서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게 우리네의 솔직한 일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동생만큼 사랑받지 못해서 서러운 레아의 마음도 우리 안에 있고, 언니만큼 뭘 이루지 못해서 조급한 라헬의 마음도 우리 안에 다 있습니다. 물론, 편애하는 이삭과 리브가, 야곱의 마음도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어쨌든, 내 삶의 텅 빈 결핍을 채우기 위해, 도움이 된다는 ‘약초’를 손에 쥐고자 발버둥 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내 모습이 라헬 같고, 레아 같고, 야곱 같아서, 이렇게 감정 통제도 못 하고 속물 같은 내가, 시기심에 차 있고 남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비겁한 내가, 이런 모순덩어리인 가정이 과연 하나님의 백성이 맞나? 과연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때론 자책하고 후회하는 것도 우리네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평화목교회 교우 여러분.
그렇기에 우리는, 아니 그럴수록 우리는, 오늘 이 흠집투성이인 야곱 가정 나아가 이스라엘 족장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거대한 위로를 굳게 붙잡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이 못난 조상들임에도 포기하지 않으셨듯, 오늘 모순덩어리인 우리 가정과 내 연약하고 깨어진 삶 역시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족장들과 가정임에도 당신의 언약 백성을 형성하시고 빚어내셨듯, 우리가 내 인생에 만들어낸 그 부끄러운 얼룩과 깊게 파인 균열들 위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금빛 은혜의 옻칠을 바르시고 기어이 선한 구원의 빛의 역사로 빚어내시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관계 속에 있는 그 깨어진 자리들이,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그 균열의 자리들이, 비록 그런 모습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금빛으로 흘러 들어가 채워지고 더 아름답게 빚어지는 자리가 될 수 있을까요? 바라기는, 그렇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름다운 걸작으로 빚어지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찌질한 꼼수와 시기, 질투, 비겁함, 나약함 등 깨진 삶의 파편들마저 당신의 생명의 역사와 선한 역사로 빚어가시는 그 은혜롭고 신실하신 분.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하나님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생명으로 빚어내시는 생명의 장인(匠人)이심을 신뢰하기를. 바로 그 하나님께 우리의 삶 전체를 온전히 내어드리고 맡기고 의탁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