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이 많은 남자
이번에는 유시민에 대해 살펴보자. 유시민은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다. 양심의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다. 어느 정도 자의식이 형성된 스무살 이후에 자신을 지탱한 삶의 에너지는 슬픔과 노여움, 부끄러움이라고 고백한다. 슬픔과 노여움이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란다.
대학 신입생 시절, 그는 구로공단 봉제공장의 열 여섯 꽃같은 처녀가 매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 달치 월급이 대학촌의 하숙비보다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뒤로는 밥을 남긴다거나, 예쁜 여학생과 고고미팅을 한다거나, 첫시간 강의에 지각을 하게 되면 문득 문득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말한다.
나이가 먹을수록 슬픔과 노여움이 줄어드는 대신에 부끄러움은 자꾸만 커지는데,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세상에서 느끼는 슬픔과 노여움을 제대로 터뜨리지 않아서일 것이라는 게 유시민 자신의 진단이다. 유시민은 그런 사람이다.
요즘 유시민은 ‘MBC 100분토론’의 진행자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전에는 매주 한두 편 이상의 글을 어느 매체엔가 기고할 만큼 날카롭고 인상적인 시사칼럼 필자였지만 지난해 7월 ‘100분토론’의 진행을 맡고 나서는 일간지 등에 칼럼쓰는 일을 중단한다. 여러 가지 문제를 다뤄야 할 토론프로그램 진행자로서 개인적인 견해를 미리 밝히면 공정성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그럼에도 자기의 견해를 숨기고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토론사회자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토론자들간의 견해차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방화범’노릇을 하는 그의 진행방식은 자주 구설수에 오른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의 폭넓은 지지를 받으면서 8개월 가량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지만 그의 ‘경력’ 등을 들어 진행이 편파적이라는 주장도 심심찮게 제기된다. 유시민 자신도 자신의 외모나 사투리가 비디오용이 아니라는 단점 이외에 자신의 ‘진보적 성향’에 대한 패널들의 선입견을 문제로 꼽는다. 도대체 유시민이 어떤 ‘경력’을 가진 ‘진보적 성향’의 사람이기에 그러는 것일까.
유시민에게는 80년대 학생운동권의 핵심인물, 운동권, 좌파, 진보주의자, 자유주의자, 아웃사이더란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는 주로 수도권에서 살았지만,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란 ‘토종 TK’다. 78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는데, 80년 ‘서울의 봄’ 당시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으로 서울역 시위를 주도해 그 해 5월17일 계엄포고령 및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 제적된 뒤 3개월 만에 풀려나 같은 해 9월 군에 강제징집됐다.
83년 5월 제대, 같은 해 말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정부의 복교조치에도 불구하고 “교수, 기자, 근로자들은 복직이 안되는데 학생들만 복학할 수 없다”며 재야활동에 주력했다. 84년 9월 대학자율화 바람을 타고 총학생회가 부활하자 경제학과 3학년으로 복학한 유시민은 복학생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다 서울대에 들어온 외부인을 ‘프락치’로 알고 집단구타한, 이른바 ‘서울대 학원 프락치’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면서 두 번째로 제적됐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폭력과격 학생’의 대명사가 되어 깡패두목처럼 포승줄에 묶여 구속되는 광경이 연일 텔레비전 뉴스를 장식하는 바람에 첫 번째 유명세를 타게 됐다. 그는 1심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는데, 이때 옥중에서 작성한 ‘항소이유서’는 서슬퍼런 기개와 논리정연한 문장, 진솔한 내용으로 유시민이란 이름을 전설로 만들었다. 수많은 히트곡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란 노래와 짝지워지는 조용필씨처럼,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유시민하면 그의 항소이유서를 떠올린다.
85년 10월 만기출소한 유시민은 민청련 등 재야단체에서 활동하다가 88년 여름 재복학하였다. 약 2년 동안 당시 평민당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으로 5공 청문회 광주특위 등에서 활약했고, 91년 8월 13년 만에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7개월 정도 한국 학술진흥재단이란 정부 산하단체의 기획실장으로 근무하던 유시민은 ‘젊은 시절엔 용기 하나만으로도 사회에 봉사할 수 있으나 역사발전에 의미있게 참여하기 위해서는 좀더 정확하고 깊이있는 지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독일 마인츠요하네스 구텐베르크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박사과정을 공부하다가 ‘IMF 귀국 유학생’이 된 98년 이후에는 시사평론가라는 타이틀과 자유기고가라는 직업만으로 살아가고 있다.
‘완벽하고 행복한’ 자격 갖춘 지식인
확실히 평범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이력이지만 공정성 시비에 휘말릴 만한 ‘경력’이나 ‘성향’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아마 유시민은 떳떳하게 대(對) 사회적 발언을 할 수 있는 ‘완벽하고 행복한’ 자격을 갖춘 몇 안 되는 지식인 중 한 명일 것이다.
어떤 경우엔 메시지보다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더 중요할 때도 있는데 유시민이 바로 그런 메신저다. 존경받는 독립투사의 친일파 비판은 그 자체만으로 일정한 무게를 가지며, 치열한 왕위 계승쟁탈전에서 적자(嫡子)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다. 마치 그와 같다.
유시민의 민주화투쟁 경력이나 진보적 성향은 여타 지식인의 메시지를 압도한다. 그건 ‘너 감옥갔다 와봤어?’로 대변되는 운동권의 배타적 냉소주의나, 자기만 옳다는 식의 독선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물론 유시민이 우리나라 민주화 투쟁을 상징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유시민보다 더한 고초를 겪고 심지어 목숨을 잃거나 아직도 병고에 시달리는 민주투사가 수없이 많긴 하지만, 유시민은 누구못지 않게 강력한 메신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의 민주화투쟁 경력이 특정한 이유로 왜곡되어 일종의 정치적 성향으로 간주되는 세간의 그릇된 인식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는 지난 20여 년 동안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말라’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라’ ‘거짓말하지 말라’고 가르쳐주신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불변의 진리로 생각하며 그 가르침대로 살아오려고 애쓴 사람이다.
실상 민주화투쟁이란 명백한 거짓과 부당한 압박에 저항하는 당당한 소신이며, 진보적 운동이란 이웃에 대한 연민의 표현일 뿐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향해야 할 가치이며,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소신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소중한 가치와 소신을 마음속으로 되뇔 뿐이었지만 유시민은 그걸 실천했다.
유시민의 글과 말은 날카롭고 적확하며 상식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유시민이 단순히 ‘신뢰할 만한’ 메신저 수준에 그치지 않는 건 그런 타당성과 논리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소매상이 직업
‘항소이유서’라는 뜻하지 않은 데뷔작품(?)으로 저작활동을 시작한 유시민은 이후 20여권의 저서를 발간했는데, 많은 젊은이가 그의 사상과 가치가 추구하는 독특한 시대정신을 추종하고 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란 책은 88년 출간 후 수십만권이 팔렸는데 지금도 대학생과 청소년들 사이에 인기를 누리면서 꾸준히 팔리는 사회과학 도서 중의 하나다. 87년 6월 그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져 ‘도바리’ 신세가 되어 집필한 책인데 무식해서 용감하게 쓴 책이라는 게 그의 고백이지만 YMCA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이 책을 청소년 추천도서로 선정했고, 서울대생들은 비문학 분야에서 가장 좋아하는 저술가의 한명으로 그를 꼽기도 했다.
그는 잠시동안의 국회의원 보좌관과 계약직 공무원 생활을 제외하고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프리랜서로 살아가고 있다. 이 직업 아닌 직업이 자신의 몸에 가장 잘 맞는 옷처럼 편안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직업을 ‘지식소매상’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규정한다.
지식소매상이란 유통업의 일종인데 누군가가 창조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널리 퍼뜨려 많은 사람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지식을 대중화하는 직업이란다. 그는 ‘창작과 비평’을 통해서 정식으로 데뷔한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그가 쓰는 대부분의 글은 ‘지식소매상’이라는 그의 직업개념에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은 토론진행이라는 영역에서 ‘말’을 통해서 그 일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89년 그는 좀 특이한 작업을 통해 ‘지식소매상’ 노릇을 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텔레비전 드라마 극본을 쓴 것이다. MBC베스트셀러 극장을 통해서 방영된 ‘신용비어천가’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5공화국 초 전두환정권의 정당성 홍보에 앞장선 어용언론의 행태를 통렬하게 풍자한 것이었는데, 군과 정보기관이 제작 통제에 나서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결국 그 일이 빌미가 되어 베스트셀러 극장은 3개월 뒤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대학에 들어간 1978년 이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는 언제나 ‘발본색원’의 대상이었다. 그의 유일한 죄는 권력자들이 좋아하지 않는, 그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발본색원자’를 혐오한다. ‘일사불란주의’나 ‘국론통일주의’에도 결단코 반대한다. 그렇게 해서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사상과 견해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유주의자를 자처한다.
한때는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믿었는데 지나고 보니 진보적이라기보다는 자유주의적 성향이 훨씬 강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자유주의에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환경주의, 여성주의 등 다른 어떤 ‘주의’보다 자유주의가 자신의 취향이나 세계관과 잘 들어맞는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은 확고하다. 자유만 가지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고방식과 문화, 법률, 제도가 우리 국민의 정신적 개안과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게 그의 일관된 주장이다. ‘나의 자유는 언제나 나의 정치적 반대자의 자유’라는 경구속에 그가 주장하는 자유주의의 핵심이 담겨 있다. 제대로 된 자유주의자는 자신의 사상 그 자체보다도 그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더 소중히 여긴다. 자신은 보수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가 그 사상 때문에 탄압을 받는다면 그와 연대해 싸울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하느님 놀이’에 대한 혐오
서울대 출신이면서 서울대의 패권주의와 학벌주의의 폐해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며, ‘토종TK’라는 유리한 지위(?)를 이용하여 영남지역의 ‘TK정서’가 일종의 집단적인 정신질환이라고 질타하고, 우리사회의 ‘지나친 여성화’라는 어거지 논리로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 진출을 훼방놓는 마초들에게 우리사회의 ‘지나친 남성화’를 경계하는 풍자의 메시지를 던져 그들의 말문을 닫아버린다.
유시민은 다른 사람의 사상을 검열해 딱지를 붙이는 행위를 극도로 증오하는데, 그는 그것을 ‘하느님 놀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대공수사관들은 죄없는 사람을 잡아다가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듯 거만을 떤다. 그 사람들이 마치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나 되는 것처럼, ‘이놈들 모조리 세뇌가 되어가지고 말야’하며 거만을 떤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유시민이 말하는 ‘하느님 놀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그의 고민은 치열하며, 자의식은 남다르게 민감하다. 그래서 그는 크고 작은 일에서 의식의 자아분열 현상을 경험한다.
80년대 초 그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갔을 때의 일이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내가 받은 첫 질문은 ‘너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맞지’였다. 일단 이런 올가미를 쓰면 대책은 두 가지밖에 없다. ‘그래 맞다, 어쩔래?’하거나, 아니면 내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해명을 하다보면 스스로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그야말로 참담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인생이 구차해지는 것이다.”
강제징집을 당해 입영전야에 낯선 고장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이상 축복이 아니요, 치욕임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햄릿형 소신
입대 후에도 그는 늘 감시 대상이 돼서 중동부 전선의 최전방 말단 소총 중대의 소총수를 제외한 일체의 보직으로부터 차단당한 채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기에 밤마다 열 시간이 넘게 철책근무를 했다. 고참에게 얼차려를 받다가 상처가 난 손은 동상이 걸렸고, 발에는 무좀, 그리고 온몸에는 옴이 잔뜩 올라 있었다고 한다.
특변자(특수학적 변동자)라는 이름으로 군대에 있던 32개월 동안 그가 겪은 물리적 고통과 심적 괴로움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그는 극단적 반공주의와 유신찬양 세뇌교육을 받았다. 유시민은 세뇌란 말을 믿지도 않지만 그 단어를 끔찍하게 싫어한다. 인간의 주체적 사고능력을 부정하는 고약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이든 맹목적으로 신봉하고 주장하지 않는다. 일종의 ‘햄릿형’소신이라고 할까.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 절대적으로 옳거나 틀린 것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한 점의 오류도 없는 사상이나 단 한 톨의 진실도 담지 않은 사상은 없다. 사상의 자유가 필요한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새로운 사상치고 처음에 ‘불온’하지 않았던 것은 없다. 세상을 보는 눈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상이한 여러 사상 사이에서 대립과 경쟁을 거쳐야 알 수 있다. 어떤 사상이 잘못된 것인지 아닌지를 선험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가치있는 행동은, 자기가 반대하는 사상과 견해를 가진 이가 그것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을 때 거기에 대항해서 함께 투쟁하는 것인데, 그것은 용감하고 의미있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행동이라는 게 유시민의 신념이다.
같은 맥락에서 유시민은 ‘남’보다 앞서 독재와 싸우고 그 ‘비용’을 혼자서 감당한 사람들에게 그 비용을 ‘사후정산’해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단지 감정적 차원에서 뿐만이 아니라 경제정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남’들은 가만히 있는데도 ‘나’는 싸우겠다는 ‘미련한 선택’을 한 ‘비합리적 인간’들의 피눈물에 대해서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또 다시 파시즘의 덫에 걸릴 경우 옛날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처자식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고 기꺼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투쟁에 나선다는 것이다.
어떤 주의자든 제대로 된 ‘주의자’라면 그 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래서 나온다. 그러니까 그의 ‘소신’이나 ‘주의’는 단순히 햄릿처럼 사색하고 회의(懷疑)하며 우유부단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실천력을 동반한다. 그렇게 본다면 유시민의 신념을 ‘햄릿형 소신’이라고 표현한 필자의 표현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이다.
지식인은 ‘공부하는 프로페셔널’
유시민은 지식인을 ‘공부하는 프로페셔널’이라고 정의한다. 공부를 하면서 사회현실에 봉사하고 그러면서 대가를 얻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글을 발표할 때마다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부족’이 아니라 ‘불성실’을 탓할까봐 밤잠을 설친다고 말한다.
유시민은 진지하고 치열한 사람이다. 대학 2학년 때 첫 전공과목이던 ‘경제학 원론’에서 F학점을 받았지만, 감옥에서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해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이라는 경제사상서를 저술해 스테디셀러로 만든다.
경제학을 수치와 이론만으로 이해하지 않고 당시 사람들의 삶과 사회의 여러 문제와 결부시켜서 이해했다는 것이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도 그랬지만 유시민 만큼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사고능력이 확실한 사람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이 시대가 보호해야 할 귀하고 소중한 ‘지식소매상’이다.
“나는 한번 하기로 마음먹으면 진지하고 성실하게 제대로 하는 인간이다. 나는 ‘무늬만 자유주의자’가 아니고 자유주의 신념을 지키는 ‘진짜 자유주의자’가 되겠다. 처음 해보는 것이니까 결과가 어떨지는 아직 모른다. 일단 한번 해보고 마음에 들면 죽을 때까지 ‘자유주의자’로 남을 것이다.”
아마도 유시민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아웃사이더로 밀려나지 않고서도 인간의 사상과 자유에 고삐를 채우고 있는 지배적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지식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선내의 공기부족을 제일 먼저 감지하는 잠수함 속의 참새처럼 이 시대의 부끄러움을 제일 먼저 느끼는 ‘진짜 자유주의자’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가 한 잡지에 연재하던 칼럼을 끝내며 썼던 글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자.
“세상은 완전히 희거나 검은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니며 타고난 악당과 성인군자가 싸우는 무대도 아닙니다. 세상은 불완전한 인식능력을 지닌 불완전한 인간들이 고뇌와 번민 속에서 서로 다투면서, 그리고 저마다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을 바로 잡아가면서 살아가는 곳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언제나 ‘올바른 생각’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독자들께서 가벼운 마음으로 이렇게 볼 수도 있군 하고 느끼셨다면 그래서 또 하나의 생각의 소재로 받아들이셨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필자는 유시민이 말하는 ‘나의 생각’에 기꺼이 동참할 마음이 충만하다. 사람이 믿음을 갖고 사는 건 자기방어 본능의 한 형태일 수도 있다. 만일 믿을 수가 없다면 모든 일에 대해서 늘 각성상태로 있어야 하고 모든 경우에 대비하고 살아야 하므로 정신적 에너지 소모가 대단히 많아지기 때문이다.
남들이 신호를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거리의 모든 자동차에 대해서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이런 상태에서 운전을 한다면 1시간만 해도 녹초가 될 것이다. 이런 때는 약간 불안한 구석이 있더라도 믿음을 가지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우리의 소신이란 것도 어떤 면에서는 이런 심리적 메커니즘이 적용된다. 자기가 ‘믿는 바’가 유일무이의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건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드골은 일찍이 다음과 같은 잠언을 남겼다.
“스스로를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여기지 말라. 전세계 묘지에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출처 : 정혜신 박사의 책 <남자 vs 남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