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60 (2권 4. 김홍신. 펌글)
"쟤들 이쁘지?"
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관심없어."
차가운 목소리였다.
버스는 양양을 돌아 동해의 명승지 길을 타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바다를 낀 해변길이 길게 뻗어 나갔다.
낙산해수욕장에서 승객 일부가 내리고 차는 다시 낙산사를 끼고 돌아 설악 해수욕장으로 들어갔다.
울긋불긋한 백사장 풍경이 정겹게 가슴에 와 닿았다.
"병신이 수영하러 왔다고 욕하지 않을까."
"지랄하구 있다. 너 그 따위 소리 한번만 더 했다간 목을 비틀어 버릴 거야."
내가 화를 냈다.
"아냐, 괜히 그런 거야."
명식이는 멋적게 웃었다.
"너 수영 잘 한다고 했잖아."
내가 물었다.
명식이는 시골에서 자랄 때 수영만은 어느 누구보다도 잘 했다고 했다.
다른 운동은 다른 애들을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었지만 수영만은 물 속에서 기량껏 겨룰 수 있었다고 했다.
얼마나 열심히 수영을 배웠는지 몇 번이나 강에서 빠져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도 했다.
그래서 결국 명식이는 동네의 수영선수가 되었었다.
그것이 내가 명식이를 가까이하는 명식이의 장점인 것이었다.
"여기서 네 수영실력 한번 보여 주자구. 구명요원들이 배타고 쫓아오도록 보여 주란말야."
나는 명식이를 충동질했다.
녀석의 투지와 사람 앞에서 자신있게 나서는 배짱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바다는 첨인데."
"강물보다 쉬워. 처음엔 나만 따라서 해. 강물에서 한 시간 떠 있을 수 있으면 여기선 두 시간도 충분해.
물이 차니까 올리브유만 듬뿍 칠하고 들어가면 돼."
"까짓거, 해보자."
우리는 다시 여행사의 미니버스로 설악동으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명식이와 둘이서 떠날 여행이었으면 해수욕장 근처의 여관을 잡았을 텐데,
다혜와 이 여름의 음모를 꾸미기 위해서 설악동 쪽에 여관을 잡은 것이었다.
내 음모는 간단한 것이었다. 다혜를 훔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나 말처럼 다혜를 우지끈 뚝딱 꺽어놓고 말 계획이었다.
여자를 꺽어 놓지 않으면 항상 팔팔하게 살아서 다루기 어려운 것이었다.
한번 꺽인 나무는 꺽은 사람 마음대로이듯이 나는 다혜를 마음대로 다루고 싶었다.
욕망의 끝에는 내 사랑이 있으니까 하나님도 책망할 일이 못 되는 것이다.
여자를 해치우고 도망가는 사내가 아니니까 그 정도는 괜찮은 것이다.
요즘 누가 결혼할 때까지 귀찮게 그 놈의 처녀, 총각 딱지를 끌어안고 사느냐 말이다.
"다혜하고 왔으면 근사할 뻔했잖아."
명식이는 제법 내 기분을 이해하려고 들었다.
"현지조달도 있고 차관도 있는데 멀."
"그러면 죄 받는다."
"받을 때 받더라도."
"너 같은 비도덕군자와 나 같은 도덕군자가 같이 있다는게 슬픈 일이다."
"어차피 인생은 그런 거 아니냐."
"너 같은 친구 때문에 더러운 놈의 법이 생긴 거 아니가."
"맞다 맞아."
설악동 여관단지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옛날의 어지러운 정취만큼 정들어 보이지 않았다.
이런 뻔질거리는 외모만이 관광개발이라면 뭐하러 개발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외국의 산장이 아니고 우리나라의 산장이라는 사실을 잃어버린 개발인 것만 같았다.
외국의 흉내를 그렇게 내고 싶으면 설악산도 외국의 산처럼 깍고 다듬어서 새로 만들 일이지.
이름도 알프스라고 고치고 구경 오는 사람들도 성형수술이라도 해서 고쳐 놓을 일이지.
T산장에 짐을 풀었다.
주인 남자가 친절하게 짐을 받아주며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나 말하라고 일러 주었다.
인상이나 태도가 장사꾼 같지 않았다.
태도나 말씨도 관광지의 장사꾼이 아니라 집안에 온 손님 대하듯 해서 기분이 좋았다.
온통 외국 흉내만 낸 설악산에서 내가 유일하게 맛보는 우리나라의 정취가 바로 주인의 친절이었다.
"오늘은 요 앞 물가에 가서 밥이나 해먹고 일찍 자자. 하루 종일 차를 탓더니 피곤하다."
내 제안이 달갑지 않은 듯 명식이는 자꾸 설악산과 바깥 풍경만 바라다 보았다.
"있고 싶을 때까지 있을 테니까 오늘은 푹 쉬는 게 좋아."
내가 또 거들었다. 녀석은 그때서야 방바닥에 철푸덕 주저 앉았다.
저녁밥을 먹고 우리는 계곡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텐트촌을 끼고 왼쪽으로 숲길을 따라 걸었다.
명식이는 느닷없이 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개나 걸이나 시인 되는 게 아니다."
"나는 개나 걸이 아니니까."
명식이는 확실히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고시공부를 하지 않는것이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어린 것들이 너무 많다."
명식이가 숲속을 가리키며 말했다.
텐트촌을 벗어나도 곳곳에 작은 촌락처럼 텐트들이 많았다.
외진 곳에는 까가머리 사내들과 단발머리 계집애들이 많았다.
우리는 호기심으로 그곳을 기웃거렸다.
어둠 속으로 경쾌한 디스코 음률과 괴성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우린 숲속으로 자꾸 빠져 들어갔다.
형광랜턴의 조명 밑에 나이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 얼크러져 춤을 추고 있었다.
맥주병과 소주병이 그들처럼 질펀하게 깔려 있었다.
"저 꼴을 눈 뜨고 봐야만 하는 거니? 정의도 이런 땐 침묵하는 거니?"
명식이가 나를 충동질하고 있었다.
"한두 쌍도 아니고 수십 쌍을 어떻게 다뤄."
"대여섯 쌍씩이니까 차례차례 훈계를 하면 되잖아."
"저런 경우엔 경찰에 연락해서 훈계하는 게 현명해. 철모르는 애들이라서 우리 얘기가 씨도 안 먹혀."
눈길을 피해 더 안쪽으로 걸어갔다.
"저런 저런!"
명식이가 이렇게 소리 질렀다.
"이놈들! 이 나쁜놈들."
내가 말릴 틈도 없이 명식이가 버럭 고함쳤다.
나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청계천 골목에서 눈짓 신호로 파는 이른바 문화영화 필름 한장면 같았다.
"어떤 새끼야? 칵 씹어 버린다."
술취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소녀들은 벗은채 텐트 속으로 뛰어 들어갔고 소년들은 재빨리 수영복이나 반바지를 입었다.
벌서 그들 손에는 손도끼와 등산용칼, 식칼과 몽둥이가 들려져 있었다.
아홉 명의 소년들 덩치가 모두 건장해 보여서 명식이가 움츠렸다.
"건방진 놈들 같으니라구. 학생 녀석들이 이따위로 놀아!"
내가 앞으로 나서며 맞받아 소리쳤다.
"으흐흐, 우리의 청춘공화국을 무단침입한 너희들을 지금부터 심판하겠다."
소년들이 재빨리 우리를 포위했다.
술냄새가 역하게 끼쳐 왔다.
술병을 깨뜨려 들고 서 있는 소년은 비틀거리고 있었다.
"한놈은 병신이구나."
"머리통을 수박 쪼개듯 박살내 줄게."
"어른입네 하는 새끼들 보면 골통을 깨줘야 해."
"쟤들도 어른야? 그렇다면 표본실의 청개구리 실습 좀 해주지."
"배때지 갈라서 창자 구경 좀 해보자."
모두들 입이 험했다.
나는 대꾸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식이가 썩은 나무를 들고 입을 앙다물었다.
"느이들은 형도 없냐?"
명식이의 목청 터지는 소리였다.
"형님 아구통부터 조져주지."
한 소년이 도끼를 치켜 들었다.
나는 명식이를 그 자리에 주저앉혔다.
그리고 명식이의 몽둥이를 뺏어 들었다.
"얼씨구, 한번 춰보자 이건가!"
소년들이 바짝 다가섰다.
나는 몸을 낮추고 소년들의 동작을 유심히 살폈다.
어린 애들한데 표창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좋게 말할 때 비켜라."
내가 위엄있게 한마디 했다.
"나쁘게 말해 보시지 그래."
애들이 일제히 덤볐다.
나는 명식이를 밀어내며 앞쪽에서부터 몽둥이를 후렸다.
세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다시 세 녀석을 걷어찼다.
조금이라도 여유를 줘선 안 되는 게 어린애들이었다.
몸사릴 줄 모르기 때문에 큰 녀석들보다 더 위험한 것이었다.
나머지 세 녀석을 땅바닥에 눕혔다.
텐트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구경하던 소녀들의 고개가 쏙 들어갔다.
"너희들 모두 나와."
내가 소리쳤지만 텐트 속의 소녀들은 아무말이 없었다.
명식이가 랜턴을 찾아 켰다.
텐트 속의 소녀들은 아직도 발가벗은 채 수건이나 등산모로 부끄러운 부분을 가린 채 잔뜩 수그리고 있었다.
그녀들도 술에 취해 있어서 술 내음이 풍겨 왔다.
"이년들, 빨리 옷 입어."
명식이가 계집애들의 따귀를 한대씩 올려 부쳤다.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계집애가 무릎을 꿇고 명식이에게 빌었다.
"빨리 옷 입어!"
명식이가 악쓰듯 했다.
계집애들이 다른 텐트 속으로 뛰어 들어가 옷을 입고 나왔다.
쓰러졌던 소년들을 풀밭에 앉혀 놓았다.
녀석들은 아직도 도전적인 자세를 풀고 있지 않았다.
나는 돌아가면서 한녀석씩 갈겨 주었다.
급소를 정통으로 맞은 녀석들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빨리 옷 입고 짐 챙겨. 늦는 놈은 진짜 맛을 보여주겠다."
"형님,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이러지 않을 테니 한번만 봐 주세요."
한 녀석이 무릎을 꿇자 나머지 녀석들도 모두 꿇었다.
명식이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 녀석들 파출소에 넘기면 모두 퇴학당하고 부모들 알면 기집애들은 머리끄댕이가 싹뚝 날아가. 그러니 대충 용서해 버려."
나는 그 순간에 내 계집애 동생 미숙이 생각을 했다.
하찮은 일로 퇴학을 당한 한때의 실수를 그들만의 잘못으로 치부하기엔 어른들 세계가 너무 지저분하고 야박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애들을 저렇게 팽개쳐 둔 부모와 어린애들이 이런 곳에 와서,
저지경으로 놀 수밖에 없는 사회의 몰이해를 나는 그 순간에 또 생각했다.
건전하게 교제할 수 없게 만든 어른들 잘못을 나는 따지고만 싶었다.
"좋다. 대신 나하고 약속한다. 내가 여기서 너희들 떠날 때까지 같이 지낸다는 조건이다."
"승복하겠습니다."
소년들이 이렇게 말하자 계집애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 명은 명식이 형님 따라가서 짐을 가져와라."
명식이가 세 녀석을 데리고 짐을 가지러 갔다.
나머지 애들을 둘러앉게 하고 오락시간을 갖게 했다.
애들은 티없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재미있게 놀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