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야간夢野間 / 최정진
네가 꾸는 꿈 속으로 들어가려고 네 잠꼬대에게 길을 물은 적이 있다
시린 몸을 뒤척여서 네가 덮은 것이 이불이 아니라 강줄기임을 알았다 감은 네 눈꺼풀 아래로 꽃잎도 아니고 금붕어도 아니고 새의 깃털로 채워진 강줄기가 흘러들고 있었다
혹여라도 너와 닮은 여자를 볼 때면 그 여자가 안보일 때까지 나는 몸이 얼어붙는 기후에 속해 있어야만 했다
불어간 바람을 따라 허공이 한 줄기 파였고 바람소리가 석순으로 자라났다 환한 빛에 이끌려 동굴의 입구로 나오면 추위 속에서 떨어 온 나무의 시간만큼 나뭇가지마다 꽃송이가 발자국으로 피어나 있었다
내가 뒤쫓던 네 흔적은 떠나온 지 오래 될수록 가까이서 빛나는 향기였을까
헤어진 날 밤에 너는 함께 베던 네 방의 베개를 만리향 밑에 묻었다고 했다 덕분에 일만 시간이 지난 오늘에까지 내 잠을 통로로 풍겨오는 네 머리칼 냄새를 잊을 수 없다
바람을 따라가다 길가에서 쉬는 모자를 주워 머리에 썼다 그날부터 나는 모자 속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꿈만 꾸게 되었다 내가 지르는 짐승의 비명소릴 따라 깨어나는 날이 늘어갔다
내 방의 베개를 마당에 내놓고 태우던 날 멀리 보이는 산의 골짜기 속에서 캄캄하게 타고 있을 동굴들을 떠올렸다 꽃잎이었다가 금붕어의 지느러미로 나부꼈다가, 한 토막 숯에 벽화를 무늬로 남겨놓고 날갯짓으로 솟구친 새 떼를 떠올렸다
죽어서 땅에 묻히면 동굴이 된다는 불길에게 제를 올려주고 싶은 밤이었다
잠이 들면 나는 새로 산 베개에 조금씩 꿈을 흘려둔다 잠에서 되돌아오는 길을 잊고 싶지 않아서다 네 입속으로 날아간 내 목소리는 어느 하늘 동굴 앞에서 떨고 있을까
꽃은 나뭇가지가 베고 자는 베개이다
* 몽야간- 우루시바라 유키, '충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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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夢野間이라서 그런지 몽유병이 생각나는 시입니다.^^ 최근에 유행하는 몽환적 분위기의 표출을 의도하는 시라고 볼 수 있겠네요. 이런 시를 행을 쫓아가며 정확한 의미를 살펴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작가가 이미 그것을 염두에 두고 시어를 선택하가나 또는 비트는 방법으로 시적 구성을 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시는 과거와 현재, 꿈속과 생시를 번갈아 조합하고 또한 넘나들고 잇습니다. 이런 시를 좋아하는 일반 독자도 드물 겁니다만, 우리는 시를 쓰는 입장이니 이 시를 한 번 살펴보기로 합니다.
몽야간夢野間 / 최정진
네가 꾸는 꿈속으로 들어가려고 네 잠꼬대에게 길을 물은 적이 있다
-도대체 그는 무슨 꿈을 꾸는 것일까? 본격적으로 또는 노골적으로 꿈속으로 여행을 언급합니다. 그러니 [네 잠꼬대에게 길을 물은 적이 있다]라는 진술은 시적 논리가 확보된 셈입니다.
시린 몸을 뒤척여서 네가 덮은 것이 이불이 아니라 강줄기임을 알았다 감은 네 눈꺼풀 아래로 꽃잎도 아니고 금붕어도 아니고 새의 깃털로 채워진 강줄기가 흘러들고 있었다
-제목에서 들(野)을 언급했으니 강줄기를 이불로 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2연 뒷부분, 이제 화자는 [너의 눈꺼풀 아래로 ....... 새의 깃털로 채워진 강줄기가 흘러들고 있었다]며 서서히 夢遊病者의 시각을 드러냅니다.
혹여라도 너와 닮은 여자를 볼 때면 그 여자가 안보일 때까지 나는 몸이 얼어붙는 기후에 속해 있어야만 했다
-[몸이 얼어붙는 기후]라니, 간절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구절이군요. 그 대상이 이성일 수도 있겠지만, 몽환적 시의 분위기로 볼 때 어떤 장소나 특정된 시간으로도 생각될 수 있습니다. 특히 제목에서 시간을 의미하는 틈(間)을 넣은 것을 보면 그런 짐작이 가능하겠지요.
불어간 바람을 따라 허공이 한 줄기 파였고 바람소리가 석순으로 자라났다 환한 빛에 이끌려 동굴의 입구로 나오면 추위 속에서 떨어 온 나무의 시간만큼 나뭇가지마다 꽃송이가 발자국으로 피어나 있었다
-4연의 내용으로 볼 때 화자는 격리된 공간인 동굴에서 세상과 조우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석순이란 종유굴 안의 천장에 죽순 모양으로 이루어진 돌을 말하는데, 이처럼 석순이란 시어를 포함한 위의 진술은 원시적인 삶을 영위하는 먼 과거를 불러오기 위한 것으로 보면 되겠네요.
내가 뒤쫓던 네 흔적은 떠나온 지 오래 될수록 가까이서 빛나는 향기였을까
-4연에서 꽃송이가 발자국으로 피어나 있다고 하는 것에 이어 5연에서는 화자가 누군가를 쫓고 있지만 아직은 그 흔적만 잡힐 뿐인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했군요. 그런데 4연과 5연의 표현이 좋습니다.
헤어진 날 밤에 너는 함께 베던 네 방의 베개를 만리향 밑에 묻었다고 했다 덕분에 일만 시간이 지난 오늘에까지 내 잠을 통로로 풍겨오는 네 머리칼 냄새를 잊을 수 없다
-여기서는 현재의 시점에서 일만 시간 전의 과거를 회상합니다. 그 과거의 특정된 상황을 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만나는 것이겠지요.
바람을 따라가다 길가에서 쉬는 모자를 주워 머리에 썼다 그날부터 나는 모자 속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꿈만 꾸게 되었다 내가 지르는 짐승의 비명소릴 따라 깨어나는 날이 늘어갔다
-회상으로 시작된 몽유적 방황이 본격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몽유이므로 꿈과 현실의 경계가 없습니다. 현재와 과거의 경계도 모호합니다.
내 방의 베개를 마당에 내놓고 태우던 날 멀리 보이는 산의 골짜기 속에서 캄캄하게 타고 있을 동굴들을 떠올렸다 꽃잎이었다가 금붕어의 지느러미로 나부꼈다가, 한 토막 숯에 벽화를 무늬로 남겨놓고 날갯짓으로 솟구친 새 떼를 떠올렸다
-위의 연과 비슷한 흐름입니다.
죽어서 땅에 묻히면 동굴이 된다는 불길에게 제를 올려주고 싶은 밤이었다
-회상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 꿈과 생시를 넘나듭니다. 둘의 시점과 둘의 공간을 조합하면 다양한 시공간의 상상도 가능할 겁니다.
잠이 들면 나는 새로 산 베개에 조금씩 꿈을 흘려둔다 잠에서 되돌아오는 길을 잊고 싶지 않아서다 네 입속으로 날아간 내 목소리는 어느 하늘 동굴 앞에서 떨고 있을까
-달콤한 꿈속 여행이 좋다 해도 역시 일상이 좋은가 봅니다. 그렇지만 옛 기억은 여전히 못 잊을 추억입니다.
꽃은 나뭇가지가 베고 자는 베개이다
-화자의 새로운 주장이 도출되었군요. 사랑시로 읽게 되었네요.
* 몽야간- 우루시바라 유키, '충사'인용
셀프 포트레이트 / 곽은영
이제 나는 더 이상 바람의 아이를 낳기 위해 기다리지 않아요
우산을 들고 지붕에 앉아 백묵으로 날짜를 긋지 않아요
엄마, 난 바람이 좋아
바람이 너의 머리칼을 빗겨줘서 그렇단다, 기다리렴
그러나 엄마, 엄마가 죽은 날 알아버렸어요
내가 바람이라는 사실을
이게 무슨 냄새야 아침마다 벌컥 창문을 열던 아빠,
내가 밤마다 꿈속에서 춤추고 온 묘지의 냄새를
온 집안에 뿌려놓았어요
어쩌면 좋아, 이젠 다락방에서 잃어버린 구두 한 짝을 찾지 않아도 괜찮아요
구두는 애초부터 없었어요
이곳은 대대로 내려오는 짐승들의 땅
코는 바닥의 냄새를 맡도록 아래로 열렸고
망할, 넌 열성 유전자를 긁어 모아놨어
소리를 지르던 고모, 사랑해요
돌들이 부딪치며 숨겨놓은 불을 토하듯
나는 당신들의 털가죽의 부대낌에서 태어났어요
불쌍한 엄마, 나를 위해 갈색 털가죽을 입힌 엄마
얼룩덜룩 털가죽은 헐렁해서 사진 속 나는 두려웠어요
그러나 이제 나는 두렵지 않아요
내가 울었기 때문에 풍향계는 늘 부러졌어요
여행가방은 필요 없어요 모자 하나면 충분한 시간이 왔어요
지붕 위에 상냥한 에이프런을 넣어주세요
빨간 하트가 하나씩 갈색으로 변해가는 것은
명랑한 나의 안부 인사에요
상큼한 나뭇잎이 찰랑거리고 있어요 라임의 바다가 나를 불러요
당신들을 사랑해요 지금은 굿바이, 굿바이, 굿바이
[시 읽기]
이 시는 시적화자가 동화 속의 주인공인, 대화체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1연에서 [......바람의 아이를 낳기 위해......]라는, 상상 속에서나 나올법한 바람의 아이가 등장합니다. 그럼에도 공상이 아닌 동화와 관련시키는 것은 1연과 2연의 언술들이 앙증맞은 분위기인 소꿉장난에 관한 기억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1연에서는 화자의 마음이 삐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1행의 기다리지 않는다는 언술이나 날짜를 긋지 않는다는 언술이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어쩌면 아이는 상대의 마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그것이 2연에 나타납니다. 화자는 바람이 좋다 하고, 엄마는 바람이 좋은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3연에선 엄마가 죽은 날 스스로가 바람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합니다. 1연과 연결시켜 생각하면 조금 모호한 표현입니다만, 이 시가 동화적 상상을 바탕으로 발현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가능한 언술입니다. 바람이 바람의 아이를 가지는 소꿉장난이나, 상상의 끈을 더 풀어 자웅동체 또는 내면적 합일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연은 아이가 엄마의 무덤에서 가져온 냄새를 아빠가 눈치 채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화자가 바람이 좋다 하고, 엄마가 바람이 좋은 이유를 말한 근거를 생각합니다. 그것은 스킨쉽을 해주는 바람이기 때문인데, 죽은 엄마의 스킨쉽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제 받을 수 없는 엄마의 스킨쉽. 많이 그리울 겁니다.
때문에 엄마의 무덤에(실제 무덤이 아닌 회상이나 추억) 매일 드나들 수 있습니다. 그런 언술들이 4연 5연 6연에 나옵니다. 그리고 7연은 주변이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내용이군요. 그 뒤 10연 까지는 성장과정에 대한 이미지로 생각됩니다. 특히 [라임의 바다가 나를 불러요]에서 성장통을 잘 이겨낸 건강한 화자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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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고 보니 이제 [셀프 포트레이트]라는 시의 제목이 생각납니다. self portrait는 흔히들 줄여서 [셀카]라 한다지요. 자신의 성장과정을 스스로 찍어놓은 사진들은 해피엔딩인 것 같습니다. -- 여 백
첫댓글 지난번 어느 분이 제가 올리는 시 감상은 골치가 지끈거린다는 말을 하더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가 읽는 시는 해독이 가능한 시입니다. 다양성을 인정한다면, 그런 꼬리 글은 사양합니다. ^^ 다만 좋은 시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네요.
다양성의 인정에 대하여 공감합니다. 숲을 이루는 것이 어디 소나무뿐이겠습니까. 떡갈나무도 자작나무도 너도밤나무도 저마다 선 자리의 주인공이지요... 박승류 시인님, 오랫만이네요. 이렇게 글만 보아도 아, 평안하시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시, 좋은 사람...막연한 단어인 것 같습니다. 유독 자기에게 좋은 사람이 있듯이 시도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부 여쭙고 갑니다.
작가들의 시작 노트나 그들의 "시 읽기"가 있으면 참 좋으련만, 작가들은 "나는 썼으니 독자 너희들이 알아서 해석해 보아라."라는 태도라고 하데요. 이런 시들이 좋은 시인가요? 저는 개인적으로 다양성을 추구하고 싶습니다만, 소통 가능한 다양성이어야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무런 제약이 없는 다양성이야 저도 엉터리로 장난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맞춤법 체크를 하려고 해도 카피가 안 되어 못했습니다.). 정말 무엇이 진실인가요? - 모두들 궁금해 하는 것 같군요. -- 저를 위해 '암호' 해독을 잘 해주신 여백 시인님께 찬사를 보내며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두 시인, 다 유명한 중견작가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