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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서예라는 말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정부에서 실시하는 미술전람회가 처음 열려
글씨 부문이 다른 미술품과 함께 참여하게 되었을 때 붙여진 이름이다.
그 이전에는 일본인들이 부르는 대로 ‘서도(書道)’라고 하였다가 우리의 독자적인 명칭을 붙이기 위하여 생긴 것이다.
그러나 서예·서도라는 말은 모두 글씨라는 뜻 외에 다른 것이 없다.
회화·조각·음악 등이 예술임에는 틀림없으나 ‘예(藝)’라는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다만, 글씨에 서도 또는 서예라는 말을 붙인 것은 이것이 독립된 대상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어서,
오히려 글씨의 순수성을 해치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서예는 한자를 대상으로 하여 시작되었다. 한자 자체가 표음문자가 아닌 상형문자의 원형을 그대로 지녀 왔고,
또 붓·먹·종이를 통하여서 나타나는 글씨는 그 자체가 벌써 조형적인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자 문화권 안에서는 일찍이 한자를 예술적 감상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우리나라에도 한글이라는 고유문자가 있으나 15세기에 이르러서야 만들어졌으며,
당시로는 그것이 심미의 대상으로는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서예라고 하면 먼저 한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자가 우리나라에 전하여진 것은 고조선시대이므로 우리나라의 서예는 2,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다고 하겠다.
그러나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은 삼국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였다.
현전하는 글씨의 유적은 금석(金石)·목판전적(木版典籍)·법첩(法帖)·진적(眞蹟) 등으로 구분되는데,
진적은 본인이 직접 쓴 친필이므로 가장 귀중하다.
중국에는 3,000년 전의 문자인 갑골문(甲骨文)을 비롯하여 춘추전국시대 및 한(漢)·진(晉) 이래의 진적이 많이
출토되었으며, 당·송 이후 종이에 쓴 문자도 남아 있어서 당시의 필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까지의 진적은 10여 점에 불과하고 조선시대의 것도 임진왜란 이전의 것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전쟁과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며, 남아 있는 작품들도 대체로 편지와 같은 소품들이고
큰 글씨는 매우 드물다.
서예작품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같은 작가의 글씨라도 초기·중기·말기에 따라 글씨의 형태와 우열이 다르고,
작품의 대소에 따라서 평가를 달리하여야 할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어떤 작가를 논할 때 그의 소품 한두 점을 보고
그 작가의 전모를 비평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서예를 역사적으로 정리함에 있어서 자료의 빈곤이라는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다.
고려 이전까지는 금석문에서 그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기까지만 하여도
상당한 수의 비갈(碑碣)과 금문(金文)이 남아 있고, 고려시대는 비문 외에도 많은 묘지(墓誌)가 남아 있어
풍부한 자료를 전하여 준다. 조선시대는 전적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고, 또 글씨들을 모은 법첩이 다수 전하여지고 있다.
법첩이란 역대명인의 글씨를 모아서 돌이나 나무판에 새겨 인쇄한 것으로,
송나라 때의 『순화각첩(淳化閣帖)』을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는데,
이것은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는 동안의 명가 80여 인의 글씨를 모아서 새긴 것이다.
우리나라의 법첩으로는 조선 초기에 안평대군이 편각(編刻)한 『비해당집고첩(匪懈堂集古帖)』이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이 고첩에서 우리나라 사람의 글씨를 새긴 부분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이 밖에도 조선 중종 때 신공제(申公濟)가 편집한 『해동명적(海東名迹)』이 전하고 있다.
이 법첩은 앞에는 조선 역대 국왕의 글씨를 싣고, 뒤에는 신라의 김생(金生)·최치원(崔致遠)을 비롯하여
고려와 조선시대 명가들의 작품을 모은 것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밖에도 이우(李俁)가 편집한 『관란정첩(觀瀾亭帖)』과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이지정(李志定)의 『대동서법(大東書法)』, 일제강점기 때 박문회(朴文會)가 편집한 『고금역대법첩(古今歷代法帖)』, 백두용(白斗鏞)의 『해동명가필보(海東名家筆譜)』 등의 법첩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법첩이 서법을 전문으로 다룬 것은 별로 없고, 각 개인의 문집 가운데서 약간씩 뽑은 것을 싣고 있을 뿐이다.
서예의 역사[1. 삼국시대의 서예][1.1. 고구려의 서예]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에 비하여 중국의 문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였다. 초기에는 한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서 낙랑(樂浪)·현도(玄菟) 등 네 개의 군을 설치한 적이 있었으나, 고구려는 그들과 항전하여 3세기 말 그들을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마침내 요하(遼河)의 동서 일대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정치적인 성장은 문화면에도 큰 영향을 끼쳐 문학과 예술에 이르기까지 한인과 공통된 문화를 누리게 되었다. 당시의 글씨가 새겨진 유물로서 현전하는 것이 상당수인데, 그 가운데서 77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용강의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는 한대의 예서(隷書)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그 밖에 와당(瓦當)·봉니(封泥)·묘전(墓塼) 등에 새겨진 문자들 또한 모두 한대 서예의 정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그대로 고구려 상류사회의 교양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찬란하였던 700년의 고구려 왕조가 멸망한 뒤 문화의 계승자가 없었기 때문에 문헌으로 전하는 고구려의 역사는 가까스로 왕의 계보를 전하는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사료는 중국측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글씨의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는데, 겨우 몇 점의 금석유물을 가지고 고구려의 서예를 음미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및 평양성벽석각(平壤城壁石刻) 등을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예서·행서·해서 등 여러 가지의 서체가 갖추어져 있으며, 그 형태가 각기 다른 양상을 지니고 있어 이 시기의 서예를 다양하게 고찰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광개토대왕비는 7m에 달하는 거대한 돌에다 4면에 꽉차게 글씨를 새겼는데, 서체는 당시 일반적으로 쓰이던 해서가 아닌 예서이다.
예서는 전한과 후한이 달라서 전한에서는 자획에 삐침과 파임이 없어 소박하고 중후한 맛을 지녔으나, 후한에 와서는 삐침과 파임이 생겨서 웅건한 맛 대신에 가냘픈 외관미를 나타내게 되었다. 후한의 예서는 바로 해서로 변하여 광개토대왕비가 세워질 무렵 예서는 일반적으로 쓰지 않았는데, 이 비에 쓴 자체는 예서도 아닌 전한의 예서체로 썼다.
전체적으로 무게를 느끼게 하며, 웅장한 기상을 나타낸 이러한 글씨는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명품이다. 모두루묘지의 벽서는 행서로서 약동하는 기운이 넘치고, 중원비는 글씨의 짜임새가 있어 광개토대왕비와 일맥상통한다. 또, 평양성각의 석각은 행서체로 썼으며, 당시 중국 북조의 서풍과 비슷하면서도 고구려 사람들의 힘찬 기상을 보여 준다. 이상 몇 되지 않은 유물이지만 그 하나하나가 각기 특색을 지니고 있는 점이 더욱 주목된다.
[1.2. 백제의 서예]
고구려가 중국 북조의 문화를 받아들인 데 대하여 백제는 바다를 통하여 남조와 교류를 가졌다. 현재 글씨로서의 유물은 거의 남은 것이 없는데, 무녕왕릉에서 발견된 매지권(買地券) 2점은 당시의 서체를 보여 주는 사료로서 귀중함은 물론, 유려하고 우아한 필치가 중국 남조풍을 그대로 살려 중국의 어느 명품에 비하여도 손색이 없다. 이 매지권은 광개토대왕비보다는 100여 년 뒤지고, 신라의 진흥왕순수비보다는 약 40년이 앞서 삼국간의 문화발전의 기념을 편성할만한 좋은 자료이다.
부여에서 발견된 사택지적당탑비(砂宅智積堂塔碑)는 백제 말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글씨가 비교적 크고 서체는 방정하고 힘이 있어서 남조보다는 북조풍이 짙다. 이것은 백제 말기에 와서는 남북조와 다 같이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1.3. 신라의 서예]
신라의 한문화는 불교와 함께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 때라고 알려져 있다. 법흥왕 이전에도 고구려를 통하여 한문과 불교가 수입되었지만, 따로 중국에 사절을 보내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6세기 초인 법흥왕 때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라의 금석유물에 글자가 들어 있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 울주 천전리서석(川前里書石)의 암면에 새겨진 제기(題記)이다. 넓은 암벽에는 선사시대의 그림이 조각되어 있고, 그 밑부분에 따로 새겨진 이 제기는 문장도 치졸하고 글씨도 매우 서투른 솜씨인데, 그 내용으로 보아 법흥왕 때의 유적으로 추정된다.
이로부터 삼국통일기까지의 금석유문(金石遺文)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진흥왕이 세운 창녕척경비(昌寧拓境碑)와 북한산을 비롯한 3개 소의 순수비(巡狩碑), 진평왕 때에 경주 남산의 성을 쌓을 때 새긴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등 여러 점이 있고, 근래에 단양에서 발견된 적성비(赤城碑)가 있다.
그러나 순수비를 제외하고는 글씨·문장·각법이 모두 치졸하여 보잘것이 없다. 다만, 진흥왕순수비들은 문장이 유려하면서도 장엄미를 띠어 왕자의 교령에 들어맞는 품위 있는 글이며, 서법은 북조풍을 따라 우아한 품격이 넘쳐 흐른다.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인 기간이 얼마 되지 않은 신라로서 이러한 작품을 남겼다는 것은 놀랄 만하다. 다른 작품들의 서풍은 모두 중국 북조풍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는 한(漢)·위(魏)시대로부터 중국문물에 접하여 예서로부터 출발하였고, 신라는 가장 늦게 출발하였다. 이 세 나라의 특성은 한 마디로 고구려는 힘이 넘치는 필치이며, 백제는 우아, 신라는 단중(端重)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2. 통일신라시대의 서예]
삼국 말기 신라와 당나라와의 교섭은 정치적인 것이 주가 되고, 문화의 수입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통일사업이 달성된 뒤 신라는 학술·문화·정치 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중국의 것을 모방하였다. 사신의 왕래가 빈번하여지면서 관료의 자제와 승려들로서 중국에 유학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과거제도를 받아들여 관리등용에 학문하는 사람을 채용하게 됨에 따라 문필에 능한 사람이 다량 배출되었다.
또한, 이때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문화가 찬란한 시기였으며, 글씨에 있어서는 전형적인 해서의 규범이 정립되던 시기로서 구양순(歐陽詢)·저수량(褚遂良)·우세남(虞世南)·유공권(柳公權) 등의 대가들이 나타나 중국 서예 사상 가장 활발한 시대를 이루었다.
신라의 서적으로는 근년에 발견된 사경(寫經)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과 일본 쇼소원(正倉院)에 전하는 신라장적이 있으며, 상당한 수의 금석이 남아 있다. 통일 초기는 왕희지(王羲之)의 서체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영업(靈業)의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감산사석조불상조상기(甘山寺石造佛像造像記)·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鐘銘)·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와 김생의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藇雲塔碑)의 서체가 모두 왕희지의 서풍을 따르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영업의 글씨는 왕희지의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와 구별하여 낼 수 없을 정도의 명품이며, 김생은 왕희지의 법을 따르면서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남북조시대의 서풍과 당대 초기 저수량의 필의를 참작하여 개성이 뚜렷한 서풍을 창안하였다.
김생의 글씨는 한 획을 긋는 데도 굵기가 단조롭지 않고, 변화가 무쌍하며, 글자의 짜임새에 있어서도 좌우와 상하의 안배에 있어 율동적 효과를 살려 음양향배(陰陽向背)의 조화를 나타내고 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가 「동국제현서결평론(東國諸賢書訣評論)」에서 김생을 ‘신품제일(神品第一)’이라고 평가한 것은 당연하다.
통일신라시대의 서예에서 또 하나 특기하여야 할 것은 화엄사에 보존되어 있는 화엄석경(華嚴石經)의 깨어진 조각들이다. 이것은 정강왕이 부왕인 헌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화엄사를 짓고, 각황전(覺皇殿) 벽에도 『화엄경』 전문을 돌에 새겨 끼워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란으로 건물이 타고 석경도 산산조각이 나버려서 현재 몇백 개의 파편만이 보존되어 있다.
서풍으로 보아 한 사람이 쓴 것은 아니나, 대체로 구양순의 서풍이 많은 당대의 사경체(寫經體)이다. 당나라의 개성석경(開城石經)과 연대가 거의 비슷한데, 글씨의 수준은 오히려 개성석경보다 높다.
신라 말기의 대가로는 최치원을 들 수 있다. 그의 작품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쌍계사진감선사비(雙磎寺眞鑑禪師碑)인데, 이것은 구양순의 아들인 구양통(歐陽通)의 도인법사비(道因法師碑)와 매우 유사하다. 통일신라의 서예에 대하여서는 이 밖에도 많은 자료가 있으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초기에는 왕희지의 서풍이 유행하였는데, 이는 당나라의 태종(太宗)이 특히 왕희지의 글씨를 좋아한 까닭에 그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말기에는 구양순의 서풍이 도입되어 고려로 이어졌다.
[3. 고려시대의 서예의 서예]
고려는 초기에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실시하고, 제술(製述)과 명경(明經)의 두 과목을 두었다. 명경과는 신라시대의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와 비슷하지만, 제술과는 시(詩)와 부(賦) 등의 문학작품을 가지고 시험을 보는 것이다. 고사의 기준은 문학작품의 우열이 결정하는 것이나, 글씨도 심사에서는 제외될 수 없는 것이므로 서예의 수련에 힘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밖에 잡과(雜科)라는 것이 있었는데, 잡과는 전문직을 위한 시험으로 이 잡과 가운데 글씨 쓰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서업(書業)이 있었다. 서업은 기본 과목인 『설문해자 說文解字』와 『오경자양 五經字樣』 외에 실기로 예서·전서의 여러 서체를 써서 통과되어야 하였으므로, 이러한 제도의 출현은 서예의 융흥(隆興: 기운차게 일어남)을 조장하여 실로 고려시대는 통일신라 못지않게 서예문화가 찬란하게 발달하였다.
고려의 서적은 진적으로 몇 점의 고문서와 말기에 작성된 수십 점의 사경이 남아 있고, 그 밖에 진가가 확실하지 않은 명인의 글씨 몇 점이 남아 있을 뿐 서예자료로 다루어야 할 것은 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비석과 묘지 등의 금석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또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비롯한 각종 목판서적의 글씨도 좋은 자료가 된다.
비석은 사적비(寺蹟碑)와 승탑(僧塔)·탑비(塔碑) 등을 들 수 있는데, 문장·글씨 모두 당시의 대가가 왕명에 의하여 성의를 다한 것이므로, 우수한 필법을 보여 주는 동시에 고려 서예의 뛰어난 수준을 보여 준다.
초기에는 신라의 전통을 계승하여 당나라의 여러 대가들의 필법을 모방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구양순의 서체가 지배적이었다. 구양순의 필법은 자획과 짜임새가 모두 방정하고 근엄하여 한 점, 한 획을 긋는 데도 정신이 이완되어서는 안 되는 서법이므로, 비를 세울 경우 정중하고 경건한 자세가 깃들여 있는 이 서체가 즐겨 사용되었다. 구양순체의 대가로는 구족달(具足達)·한윤(韓允)·민상제(閔賞濟)·안민후(安民厚)·임호(林顥)·오언후(吳彦侯)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당·송의 유명한 금석에 손색 없는 작가들이 많이 있다. 특히, 이원부(李元符)와 장단열(張端說)은 우세남체(虞世南體)에도 능하였다. 이원부의 반야사원경대사비(槃若寺元景大師碑, 보물 제128호)는 우세남체로 썼고, 칠장사혜소국사비(七長寺慧炤國師碑, 보물 제488호)는 구양순체로 썼다. 장단열의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 보물 제172호)는 우세남체로,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는 구양순체로 썼다.
이 밖에 김원(金薳)의 용두사철당간기(龍頭寺鐵幢竿記)는 훌륭한 유공권체로 썼으며, 현재는 없어진 승가굴비(僧伽窟碑)는 안진경(顔眞卿)의 서풍을 따랐음을 현전하는 탁본에서 볼 수 있다.
고려 중기에 이르면 우리나라의 서예사상에 큰 변화를 일으킨 대가가 나타났으니 그가 곧 탄연(坦然)이다. 그는 왕사와 국사를 지낼 정도로 학문과 덕이 높은 고승이었으나, 일반적으로 불법보다는 글씨의 명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글씨는 구양순체 일색이던 당시의 전통을 깨뜨리고 왕희지의 서풍에 기초를 둔 서법을 창출하였다. 그의 글씨로 전하는 것은 문수원비(文殊院碑)인데, 이 비는 현재 없어졌으나 탁본이 전하여지고 있다.
그 글씨는 왕희지의 「집자성교서」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왕희지의 글씨에서 볼 수 있는 경직한 맛이 전혀 없고 운치가 넘치는 유려함에 강철과 같은 힘이 들어보인다. 그의 영향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어 탄연의 문인 기준(機俊)은 탄연의 글씨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을 남겼는데, 단속사대감국사비(斷俗寺大監國師碑)가 바로 그의 글씨이다. 같은 탄연의 서법으로 쓴 것으로는 운문사원응국사비(雲門寺圓應國師碑)가 있으나 쓴 사람의 이름이 마멸되어 알아볼 수가 없다.
12세기에 이르러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뒤 문인들은 모두 활기를 잃어 문학·예술 전반에 걸쳐 크게 쇠퇴하였는데, 서예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종 말기에 최씨정권(崔氏政權)을 몰아낼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동안 우수한 작가로서는 유공권(柳公權)·김효인(金孝印) 등이 있다. 유공권의 서봉사현오국사탑비(瑞峯寺玄悟國師塔碑, 보물 제9호)는 송나라 소식(蘇軾)의 서법을 띠고 있으며, 사경의 풍미가 풍기는 걸작이다. 김효인은 고종 때의 사람인데 보경사원진국사비(寶鏡寺圓眞國師碑, 보물 제252호)는 탄연의 서법을 계승한 명작이다.
말기에 이르러서는 정치적으로 원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면서 고려의 국왕은 원나라 수도인 북경(北京)을 자주 내왕하였고, 또 오랫동안 체재하는 경우도 많았다. 관료는 사절로 또는 왕의 수행으로 북경 나들이가 빈번하였고, 그 가운데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한 명사도 많이 나왔다. 따라서, 그들은 원나라 학자들과의 교유가 두터워졌고, 전에 없이 많은 문인과 학자가 배출되었다.
특히, 충선왕은 1314년 왕위를 아들인 충숙왕에게 물려주고, 북경에 들어가서 만권당(萬卷堂)이라는 서재를 지어 놓고 당시 원나라 명사인 우집(虞集)·조맹부(趙孟頫)·구양현(歐陽玄) 등과 매일 교유하였다. 당시 조맹부는 원나라 일대를 대표하는 글씨의 명가로서 왕을 따라갔던 문신들 중 조맹부의 서법을 따른 사람들이 많았다. 이군해(李君侅)·이제현(李齊賢)이 그 대표적 명가이다.
이군해는 뒤에 이름을 암(嵓)으로 고치고 호를 행촌(杏村)이라 하였는데, 그의 글씨로는 문수사장경각비(文殊寺藏經閣碑)가 남아 있다. 이 비는 조맹부의 서체로 쓴 걸작으로 현재 탁본만이 전한다. 이 비의 두전(頭篆)인 ‘文殊寺藏經碑(문수사장경비)’라는 6자 역시 이군해의 글씨인데, 진전(秦篆)의 법을 제대로 터득한 명품이다. 고려의 비로 많은 두전이 있으나 대개는 보잘것이 없고, 이 전서만이 뚜렷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神勒寺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29호)를 쓴 한수(韓脩)와 회암사선각왕사비(檜巖寺禪覺王師碑, 보물 제387호)를 예서로 쓴 권중화(權仲和)는 모두 말기의 대가들이다.
끝으로, 고려시대의 서예자료로 묘지를 들 수 있다. 현재까지 출토된 묘지(墓誌)는 200여 점에 달하며, 시대로는 초기부터 말기까지 400년에 가까운 연대에 걸쳐 있다. 비갈이 우리나라 서법의 정수임에는 틀림없으나 묘지는 또 다른 면에서 주목된다. 비갈은 지상에 세우는 것이므로 쓰는 사람이 심력을 쏟아서 쓴 작품인 데 반하여, 묘지는 땅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대개는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운필하여 극히 자연스러운 자세로 썼기 때문에 비갈과는 다른 친근감을 가질 수 있다.
또한, 그것은 각기 그 시대의 일반적인 서법을 그대로 나타내어 주는 좋은 서예사의 자료가 된다. 서체가 다양하며 교졸의 차가 많고, 또 필자를 밝힌 것은 몇 점에 불과하지만, 모두 정확한 연대가 새겨져 있어 각 시대 서법의 변천을 파악할 수 있으며, 서예사의 연보를 편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묘지는 고려시대 서예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4. 조선시대의 서예][4.1. 조선 초기의 서예와 안평대군]
조선왕조는 건국 초기 불교를 배척하고, 주자학을 숭봉하는 유학자들이 혁명에 참여하여, 예의와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유학의 기본원리 위에서 통치의 원칙을 세웠다. 그러나 초기는 주자학의 기반이 확립되지 않아 관료들 가운데는 아직도 시문과 서화의 대가가 많이 나타나서 예술적인 운치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이후 성리학파가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여 학계를 지배하기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학문적 태도는 매우 편파적이고 배타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져서 주자학 외의 어떠한 학문도 용납하지 않았다. 불교나 도교사상은 물론, 문학을 숭상하는 사람들을 경박한 사장파(詞章派)라 하여 공박하였다. 근엄한 예의도덕을 중시하여 조금이라도 유학의 행동규범에 어긋나면 가차없이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다. 이렇게 경색된 풍토 속에서 예술의 자유로운 발전을 바랄 수 없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따라서, 글씨도 고루한 경지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걸쳐 생존하였던 인물로 태조의 건원릉비(健元陵碑)를 쓴 성석린(成石璘)은 소식의 서체를 씀으로써 대가를 이루었고, 여러 가지 불경의 판본을 쓴 성달생(成達生)은 소해(小楷)의 명가였다.
조선 초기의 글씨는 고려 말기에 받아들인 조맹부의 서체가 약 200년간을 지배하였다. 그것은 고려 충선왕 때 직접 조맹부를 배운 서가(書家)가 많았고, 또 조맹부의 글씨와 그의 법첩이 다량으로 흘러들어와서 그것을 교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의 송설체(松雪體)를 가장 잘 쓴 사람은 고려의 이군해와 안평대군(安平大君)이용(李瑢)이다.
이용은 예술적인 천분을 타고나서 시문서화(詩文書畫)에 모두 능하였고, 궁중에서 성장하여 궁중에 수장된 많은 진적을 보았으며, 진지하게 수련을 쌓아서 그림도 잘 그렸다. 그의 글씨는 송설을 모방하는 한편, 자기의 개성이 충분히 발휘된 독자성을 나타내었다. 그의 진적은 현재 일본의 덴리대학(天理大學)에 수장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발문이 있고, 국내에 몇 점의 진적이 있으나 소품에 불과하다.
법첩에 실린 것도 있고, 또 그의 글씨만을 모아서 새긴 각첩이 있다. 금속활자로 경오자를 썼는데, 이것조차 그가 화를 당한 뒤에 활자를 녹여 없애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경오자의 책을 보기가 어렵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세종대였는데, 그의 「소상팔경도권(瀟湘八景圖卷)」을 보면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남수문(南秀文)·정인지(鄭麟趾) 등 30여 명의 명사들의 시를 각기 자필로 썼는데, 시와 글씨가 모두 명품이다.
이 밖에 성임(成任)·강희안(姜希顔)·김희수(金希壽)·김로(金魯) 부자 및 송인(宋寅) 등의 해서가 있고, 초서로는 최흥효(崔興孝)·김구(金絿)·김인후(金麟厚)·황기로(黃耆老)·양사언(楊士彦) 등이 있어, 모두가 일가를 이룬 역사적 명가들이었다. 이때까지의 글씨는 신라나 고려에 비하면 품격과 기운에 있어서는 다소 쇠퇴한 감이 없지 않으나, 이는 중국의 서가에서도 같은 영향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시대적인 추이는 어쩔 수 없는 일로서 전체적으로는 중국의 수준에 떨어지지 않을 만큼 활발한 시기였다.
[4.2. 조선 중기의 서예와 한호]
조선왕조 수립 이후 200년이 지나고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서체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송설체가 외형의 균정미에 치중한 나머지 박력이 없이 나약한 데로 흐르는 데 대한 싫증이 일기 시작하여 어떠한 변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내부에서 변혁에 부응할 만한 터전이 잡히지 못하였고, 밖으로도 자극을 받은 것이 없어 학문적인 새로운 원리를 발견함이 없이, 다만 성리학적인 견지에서 송설체에 대하여 깊이가 없고 저속한 감이 있다는 이유로 싫증을 내는 것뿐이었다.
마침내 유학의 복고사상에 의하여 천고의 서성(書聖)인 왕희지의 서법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이론적 근거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왕희지의 법첩이라는 것이 『필진도(筆陣圖)』 외 『황정경(黃庭經)』·『유교경(遺敎經)』·『악의론(樂毅論)』 등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위작이거나 몇 번의 복각을 거쳐서 진적과는 거리가 멀어진 것들이었다. 이러한 체본을 모방한다거나 이런 것을 가지고 공부한 훈장으로부터 체본을 받아 쓴 글씨가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 수가 없다.
조맹부는 연대가 가깝기 때문에 진적도 있고 진적에서 직접 모각한 법첩도 있었으나, 1,000여 년이 지난 왕희지의 서체는 그 원형을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에 글씨가 갑자기 후퇴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서가는 한호(韓濩)이다. 그는 사자원(寫字員) 출신으로 글씨를 잘 써서 선조의 사랑을 받았고, 임진왜란중 외교문서를 도맡아 써서 중국인들에게까지 절찬을 받았다. 그는 왕희지의 위서(僞書)를 임모(臨模)하여 배웠으나, 많은 훈련을 쌓아 원숙한 경지에 달하였다. 그러나 품격이 낮고 운치와 기백이 부족하여 외형미만을 추구하는 것에 그쳤다.
한호의 서체는 그대로 관부의 양식을 이루어 중국에서 말하는 간록체(干祿體: 직업적인 서체)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의 영향은 후대에까지 전승되어 그의 서체는 ‘석봉체(石峰體)’라고 불렸고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배웠다. 그 뒤 100여 년간 글씨는 기백과 품격이 저하되고 속기(俗氣)가 배제되지 않았다. 윤순(尹淳) 같은 사람은 각 체에 능하고, 특히 행서에 있어서 여러 서가의 장점을 잘 조화시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제자인 이광사(李匡師)는 새로운 발상으로 서법의 혁신을 시험하여 『필결(筆訣)』을 지어서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법의 바른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역량에도 한계가 있어서 필력과 품격이 그의 스승인 윤순을 따르지 못하였다.
[4.3. 조선 후기의 서예와 김정희]
18세기 말에 이르면, 청나라에 가는 사절을 따라 학자들이 북경(北京)에 들어가서 그곳 학자들과 교유하며, 크게 견식을 넓혀 학계에는 물론 서예면에서도 커다란 발전을 가져왔다. 당시 청나라 학풍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고증학(考證學)이었다. 곧, 모든 고전의 문헌과 전통적인 학술에 대하여 무조건 전승하던 전래의 태도를 지양하고, 그 용어·문자에 대한 근본적 고찰에서 시작하여 실증을 얻는 데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 옛 문헌을 재검토, 재평가하기에 이르렀다.
문자에 대한 연구를 위하여 금석학(金石學)이 발달되고, 따라서 문자의 근원인 고문(古文)·전(篆)·예(隷) 등에 관한 고찰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글씨를 쓰는 사람도 현행하는 해서와 행서 이전의 전과 예의 필법을 추구하여, 옛 서체의 운필을 배워 해서와 행서에 임하게 되었다. 종래는 체본과 법첩에만 의존하여 학습하였는데, 다시 비문의 탁본에서 직접 옛법을 배우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우리나라의 선진학자들은 바로 중국에서 이러한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 청대의 대학자인 옹방강(翁方綱)·기균(紀균)·완원(阮元)·손성연(孫星衍) 등으로부터 경학과 금석에 대한 지식을 얻었고, 시문서화의 대가인 장문도(張問陶)·나빙(羅聘)·이병수(伊秉綬) 등도 한국의 학자들과 깊은 학문의 인연을 맺었다. 그들의 영향을 직접 받은 사람으로는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신위(申緯) 등이 있고, 이들보다 약간 후진으로는 김정희·권돈인(權敦仁)·이상적(李尙迪)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글씨에서 가장 큰 혁신을 일으킨 사람은 바로 김정희(金正喜)이다. 그는 자를 원춘(元春)이라 하고, 호를 추사(秋史)·완당(院堂)·예당(禮堂) 등 100여 가지를 사용하였는데, 처음은 안진경과 동기창(董其昌)의 서체를 모방하여 한동안 구양순체를 썼으나 차차 독창적인 서법을 개발하였다. 그는 서법의 근원을 전한예(前漢隷)에 두고 이 법을 해서와 행서에 응용하여, 전통적인 서법을 깨뜨리고 새로운 형태의 서법을 시도하여 서예사에 큰 혁신을 일으켰다.
그의 글씨는 근대적 미의식의 표현을 충분히 발휘하여 당시 사람들의 놀라움을 받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예술적 평가는 더욱 높아졌다. 그의 영향을 받은 권돈인의 행서, 조광진(曺匡振)의 예서가 모두 우수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의 제자에 허유(許維)·조희룡(趙熙龍) 등이 있으나, 그의 정신을 체득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였다.
[5. 근대의 서예]
19세기 말엽에 이르게 되면 전국적으로 서양식 제도의 학교 교육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먹글씨 전용이 점차로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교육과 일상적 필기생활에 있어서 연필과 펜이 갈수록 널리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서예와 문화적 일상생활의 오랜 밀착관계는 전문적·직업적 서예가의 사회적 역할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러한 새로운 관계가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이후의 일로, 김규진(金圭鎭)의 직업적 서예활동을 비롯하여 오세창(吳世昌)·정대유(丁大有)·현채(玄采)·김돈희(金敦熙) 등 전문적 서예가의 활약이 그 시기에 비롯되었다. 1911년에 발족한 서화미술회(書畫美術會)의 신진양성을 위한 3년제의 전문적 교육과정이 서과(書科)와 화과(畫科)로 나누었던 사실도 사회적 요청에 부응한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한학(漢學)의 깊이와 정신생활에 부수되었던 문인 또는 학자의 글씨에서 전문적 서예가의 시대로 옮겨가는 과도기의 한 단면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의 대표적 서예가들의 글씨가 어떤 뚜렷한 근대적 서풍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오랜 역사적 밀착관계에서의 일방적 중국 서법 숭상 및 추종에서 한국 글씨의 자주적 가능성과 의지가 확연히 싹텄던 것은, 오히려 19세기 중엽 이전의 김정희에게서였다.
‘추사체(秋史體)’로 불리는 그 특출한 서체의 위대한 출현은 곧 한국 근대서예의 뚜렷한 기점으로 여길 수 있다. 임창순(任昌淳)은 김정희의 내면을 “근대적 서풍의 발생”이라고 분석하고 있고, 김기승(金基昇)은 김정희를 “근대서예의 종장(宗匠)”으로 칭하였다. 김정희의 독창적 서법은 너무나 파격적인 것이었으므로 처음에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그의 필치의 탁월함에 감명을 받은 사람의 수가 이미 급증하고 있었다.
그런 한편 김정희의 서체에 영향을 받거나 철저하게 모방한 문인과 서예가도 있었는데, 그들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권돈인을 비롯하여 이상적·조희룡·허유 등이었다.
김정희 이후 19세기 중엽에서 후반에 걸친 시기에 서법의 명가는 이종우(李鍾愚)·전기(田琦)·권동수(權東壽) 등이었다. 그리고 앞에서 이미 언급한 정대유·현채·서병오(徐丙五)·오세창·김규진·김돈희 등은 한국 근대서예사의 실질적 개창자로서 1910년대 이후 다채로운 활약을 보였다. 이들은 김정희가 이룩한 바와 같은 근대적 표현방법이나 서법의 독자성을 뚜렷이 빛내지는 못하였으나, 각기 성격적 또는 득의(得意)의 전통서체로서 한 시대를 대표하며, 근대서예계 형성에 기여하였다.
[5.1. 일제강점기의 서예]
나라를 잃은 뒤 서화계의 움직임은 암울하기만 하였으나, 차차 새로운 양상의 개막을 보게 되었다. 그때만 하여도 서예계가 따로 형성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글씨로 명성을 얻고 있던 인사들 중에서 근대적 서화운동에 스스로 혹은 추대되어 참여하는 일이 있게 되고, 나아가서 전문적 서예가로서 사회적 존중을 받게 되는 변화가 시작되었다.
1910년대 이후 서예가로 명성을 떨친 사람 중에는 국권을 상실하기 전에 고관대작을 지낸 사람이 많았다. 외부대신을 역임한 김윤식(金允植), 탁지부대신을 역임한 김성근(金聲根), 농상공부대신을 지낸 김가진(金嘉鎭), 궁내부대신을 역임한 윤용구(尹用求), 궁내부대신서리를 역임한 박기양(朴箕陽), 여러 부의 대신을 역임한 민병석(閔丙奭), 철종의 부마로 궁내부대신을 역임한 박영효(朴永孝), 그리고 총리대신 및 정부 전권위원을 지낸 이완용(李完用) 등이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들은 그 시대의 필수적 시문교양 및 한학의 깊이와 함께 글씨에 있어서도 어느 한 체(體)나 여러 체에 특출하여, 1910년대의 서화계 변동기에 여러 형태로 참여하였다.
최초의 근대적 미술학원으로서 서화미술회가 발족할 때 이완용을 회장으로 앉힌 것은, 일제강점기의 현실에서 그의 위치가 서화미술회 운영에 필요하였다는 이유 외 글씨에서의 그의 명성도 작용하였던 것 같다. 그는 해서·행서·초서·예서·전서의 각 체 글씨에서 자유로운 필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1918년 민족미술가들의 모임이던 서화협회(書畫協會)가 결성되었을 때도 서예가로서의 평가와 당시의 현실적 상황이 고려되어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때 서화협회는 이완용 외도 민병석·김가진·박기양을 고문으로, 그리고 김윤식을 명예부총재로 추대하였다. 이보다 앞서 김윤식은 1915년 김규진이 독자적으로 창설한 서화연구회(書畫硏究會)의 대외적 회장직을 수락하고 있었으며, 그는 당대의 탁월한 문장가이자 석학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또, 이완용은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1922년부터 개최하기 시작한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초기에 박영효·박기양과 함께 서(書)와 사군자부 심사위원에 위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글씨는 앞에서 살펴본 지난날의 고관대작 역임자들의 글씨와 마찬가지로, 근대 서예계에 어떤 특별한 공헌을 한 것은 없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독서와 시·서·교양을 자연스럽게 누리면서 한묵(翰墨)을 즐긴 사람들이다. 그들 가운데서도 박기양·윤용구 등은 묵란(墨蘭)과 묵죽(墨竹)으로 세평이 높았다.
[5.2. 전문적 서예계의 형성]
서가(書家) 또는 서화가로 불린 1930년대까지의 대표적인 글씨의 명인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즉, 고관대작 역임자, 순수한 문인·학자, 직업적 전문서예가 등이다. 둘째 부류인 순수학자에는 『동국사략(東國史略)』 등의 저서를 남기며 안진경체를 잘 쓴 현채, 한학자로 특히 초서에 능하였던 유창환(兪昌煥), 황정견체(黃庭堅體)를 잘 쓴 최영년(崔永年)·정만조(鄭萬朝)·오세창·김돈희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오세창과 김돈희는 1910년대 이후의 직업적 또는 전문서예가의 시대를 연 대표적 인물로서 셋째 부류에도 넣을 수 있다. 셋째 부류에 속하는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김석준(金奭準)·정학교(丁學敎)·강진희(姜進熙)·지운영(池雲永)·정대유·민영익(閔泳翊)·나수연(羅壽淵)·오세창·김규진·노원상(盧元相)·김돈희·안종원(安鍾元)·김태석(金台錫)·민형식(閔衡植)·김용진(金容鎭)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전문서예가 외 화가로서 글씨를 잘 써서 서화명단에 넣을 수 있는 사람으로 안중식(安中植)·김응원(金應元)·이도영(李道榮)·이한복(李漢福) 등을 들 수 있다. 또, 독립운동가로 상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과 국무위원을 역임한 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신익희(申翼熙) 등도 개성적이고 격조 있는 서법인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5.3. 서화연구소와 학원의 서과]
교육제도의 근대적 변화와 국문 또는 국한문의 보편화가 촉진됨에 따라 한문 교양의 전통적 서법 습득과 예술적 심화는 별도의 연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러한 시대적 추세는 서법의 전문적 학습과정을 설정한 서화연구소(書畫硏究所)와 학원의 등장을 보게 하였는데, 서화미술회의 서과(書科)는 그 효시였다.
정대유와 강진희가 서법지도를 맡았으며, 학생들은 대개 한학을 공부하면서 따로 서법을 정식으로 배우려고 입학한 청소년들이었다. 화과(畫科)에서 화법과정을 마친 학생들이 계속하여 서과과정을 밟기도 하였다. 이 서화미술회 서과의 교습과정은 전서·예서·해서 행서 등 모든 서체를 연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서과 수학생 가운데서 뒤에 직업적 서예가로서 활약한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당시 서과 학생들에게 장차 직업 서예가로 진출하게 할 만큼 진지한 태도의 지도가 이르지 못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며, 글씨의 수련이 어렵고 힘들어서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 화과는 그렇지 않았다. 1918년까지 4회에 걸쳐 배출한 서화미술회 화과 출신의 신진들은 1920년대 이후의 전통화단의 움직임에서 모두 핵심적인 신예로 부각되었다.
서화연구회에서는 김규진이 혼자 글씨와 그림 양쪽을 지도하였다. 다만, 평양에서 노원상을 오게 하여 한때 서법 부강사로 있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연구회에서도 뚜렷한 서예가를 배출하지는 못하였다. 1918년 이 서화연구회 3년 과정을 정식으로 졸업한 이병직이 서예와 문인화가로 활약한 정도이다. 이렇듯 서화미술회나 서화연구회가 뚜렷한 서예가를 배출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연구소나 학원에 서과를 설정하여 신진 서예가를 양성하려던 움직임은 그 뒤에도 있었다.
1923년에 서화협회가 중요 사업의 하나로 미술학교 체제의 3년제 서화학원을 설립하고, 학생을 모집할 때도 동양화부·서양화부와 함께 서부(書部)가 배려되고 있었다. 그때의 서부 주임교사는 당시 서화협회 회원이던 김돈희였다. 같은 시기에 평양과 대구에 등장하였던 서화연구회도 서울에서의 움직임과 같은 시대적 성격의 신진양성 및 교양의 연구소였다.
1914년 무렵 평양에서 윤영기(尹永基)가 중심이 되어 발족하였던 기성서화회(箕城書畫會)에서는 노원상과 임청계(任淸溪)가 서법을 지도하였다. 윤영기는 1911년 서화미술회를 발족하게 한 실질적 인물이었으나, 그 뒤 사정으로 평양에 가서 또 한번 그러한 서화연구소를 개설하였지만, 그 움직임은 1916년 무렵까지만 확인될 뿐 그 뒤의 성과는 분명하지 않다.
1922년 대구에서 발족한 교남서화연구회(嶠南書畫硏究會)는 당시 영남 일대에서 가장 명성이 높았던 서병오가 중심이 되어 회장 겸 선생으로서 서법과 사군자 범위의 문인화법을 지도하였다. 서병오는 조선미술전람회의 서와 사군자부 심사위원도 지냈는데, 1935년 죽을 때까지 문하생을 받고 있었으나 서예가는 별로 배출하지 못하였다. 다만, 서동균(徐東均)이 글씨에서보다는 사군자에서 서병오를 계승하였을 따름이다.
[5.4. 서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람회의 서부]
먹글씨를 미술의 한 형태로 여기려고 한 근대적 의식은 서화미술회 명칭과 서·화 분리의 전공과정 설치에서 분명히 확인되었다. 따라서, 서예가는 화가와 대등한 위치의 미술가로서 사회와의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191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특정 장소에서의 서화회(書畫會) 또는 서화전람회는 글씨와 그림이 함께 출품되었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미술전람회 형식을 취한 것은 1913년 4월 남산동의 국취루(掬翠樓) 건물에서 서화미술회가 주최한 서화대전람회(書畫大展覽會)였다. 그때 글씨 출품자는 미술회 교수진이던 정대유·강진희·이완용 등이었다.
1918년 6월 근대적 미술가 단체로는 효시인 서화협회가 결성되었을 때의 13인 발기인 가운데 서예가는 정대유·강진희·현채·오세창·김규진이었고, 화가는 조석진(趙錫晉)·안중식·김응원·강필주(姜弼周)·정학수(鄭學秀)·이도영·고희동이었다. 그리고 나수연·지운영·안종원·서병오·심인섭(沈寅燮) 등이 협회 정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서화협회는 발족과 함께 사회적 활동으로서 휘호회(揮毫會)·전람회·의촉제작(依囑製作)·도서인행(圖書印行) 및 강습소 운영 등을 좋은 계획으로 착수하려 하였으나, 1919년 3·1운동으로 인하여 불가능하다가 1921년 봄에 가서 첫 회원작품 전람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 서화협회전람회(약칭 協展)는 1936년의 제15회전으로 중단될 때까지 민족미술가들만의 전람회로서 항일의지의 자부심과 긍지를 보이며, 신진진출도 뒷받침하였다.
이 전람회는 서부(書部)·동양화부·서양화부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1회전이 열린 1921년 10월 25일자로 발행된 『서화협회회보』 제1호는 최초의 미술잡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해 제2호를 내고 출판비 부담 등으로 중단되었지만, 김돈희의 「서법강론」은 잡지를 통한 서예진흥 노력의 일면이었다.
1920년대 이후의 전문적·직업적 서예계 형성의 직접적 배경은 서화협회전 서부와 조선미술전 서부였다. 특히, 후자는 자극적인 신진진출의 무대였다.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책으로 시작된 조선미술전에는 모든 부문에서 일본인들과 경쟁적으로 출품하여야 하였으나, 서부는 다른 어느 부보다도 조선인 출품자가 많았다. 심사에 있어서도 동양화부·서양화부·조각부가 모두 동경(東京)에서 온 일본인 유명 미술가에게 맡겨졌던 것과는 달리, 서부만은 정략적 배려에서 민족사회에서 명성 높은 서예가를 심사위원으로 위촉하였다.
그리고 총독부에서의 유형·무형의 강요와 위협으로 민족사회의 여러 명사와 서화협회 간부 및 중심회원들도 서부에 출품하였다. 조선미술전 서부는 1931년의 제10회전까지만 존속되었다. 1932년부터 조선미술전의 서부를 제외시킨 것은 시대변화에 따른 먹글씨의 사회적 한계성 및 비보편성이 고려된 결정이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조선미술전에서 조선인이 심사를 맡아온 부분을 없애버림으로써 모든 부문에서 일본인들이 심사권을 행사하려는 술책이었는지 모른다.
조선미술전에서 서부를 없애고 대신 공예부를 설정하게 한 조선총독부는 그 동안의 서부 출품자들의 반발에 대한 배려로 독립적인 서예전을 가지게 하였다. 이것이 곧 조선서도전람회(朝鮮書道展覽會)였다. 1932년 11월의 제1회전 이후 이 조선서도전에는 지금까지 계속된 조선미술전 서부에서 신진으로 부각되었던 손재형(孫在馨)·송치헌(宋致憲)·강신문(姜信文)·김윤중(金允重) 등이 계속 출품하였다.
궁체로 처음부터 주목된 이철경(李喆卿)이 서예계에 진출한 것도 이 조선서도전 입선을 통하여서였다. 그러나 한글 글씨의 서예로서의 시도는 제2회 조선미술전에 참고품으로 진열되었던 김돈희의 「조선문(朝鮮文)」과 제10회 조선미술전에 입선한 윤백영(尹伯榮)의 「조선언문(朝鮮諺文)」등에서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상황에서의 서예가 일본인 취향으로 흐른 감은 있으나, 한국서예의 맥은 결코 꺾이거나 변질되지는 않았다. 그 맥은 오세창·김규진·안종원·김태석·김돈희·민형식 등에 의하여 근대적 양상으로 이어지고, 1920∼1930년대에 여러 전람회를 통하여 부상한 새 세대인 손재형·송치헌·김윤중·이철경 등이 활약하였다. 특히, 오세창·안종원·김태석은 광복 이후까지 생존하여 그 뒤 새로운 서예계 형성에 정신적 지주로서 기여하였다.
[6. 현대의 서예]
1945년 광복과 함께 새로운 현대 서예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현대 서예는 1945년에서 1950년에 걸친 민족서예 암흑기의 극복시기와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친 성장과 다양화 시기, 그리고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친 발전과 확산의 시기로 개괄하여 볼 수 있다.
[6.1. 광복전 서예 암흑기의 극복]
김기승은 『한국서예사 韓國書藝史』에서 “일정시대는 친일적 서예와 소극적 항일서예가가 병존하였으나, 전체적으로 민족서예계의 쇠퇴, 암흑기였다. ”고 하였다. 이러한 민족서예 암흑기의 잔재는 8·15광복 후에도 일부 일본체가 잔존하였으나, 현대 서예의 발전과 더불어 자취를 감추었다. 광복 직후의 서예활동은 1945년 9월 손재형이 주도한 조선서화동연회(朝鮮書畫同硏會)의 창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 단체의 발족을 계기로 일제강점기 때 통용되던 ‘서도’라는 말 대신 글씨의 예술이라는 뜻의 ‘서예’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하였다. 이 단체는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해방전람회’를 열었는데, 여기에서는 ‘서가 곧 화요, 화가 곧 서’라는 전통적인 동양의 예술관에 따라 서예가와 화가가 동참하였다.
이 전람회에는 원로서예가인 오세창·안종원·김용진·손재형 그리고 이상범(李象範)·노수현(盧壽鉉)·이용우(李用雨)·변관식(卞寬植)·최석우(崔錫禹)·박승무(朴勝武)·배렴(裵濂) 등의 화가와 송치헌·김기승·이기우(李基雨)·원충희(元忠喜) 등의 중진·신진서예가들이 참가하였다. 같은 무렵 김태석이 주동한 대동한묵회(大東翰墨會)가 조직되어 전시회를 가졌다.
1949년 11월에 열린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第一回大韓民國美術展覽會, 약칭 國展)의 개최로 서예활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국전은 6·25전쟁으로 정지되었다가 1953년 12월부터 다시 열리게 되었는데, 1950년대 말까지의 서예계는 국전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초기의 국전(1949∼1960년, 제1회∼제9회)에서 서예부 최고상인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한 사람은 김기승(제1·2회)·최중길(崔重吉, 제3·4회)·유희강(柳熙綱, 제5·6회)·정환섭(鄭桓燮, 제7회)·오제봉(吳濟峰, 제8회)·박세림(朴世霖, 제9회) 등이었으며, 이 밖에도 조수호(趙守鎬)·김응현(金膺顯)·최현주(崔賢柱)·정현복(鄭鉉輻) 등이 입선하였다.
초기 국전에서는 부분적이나마 광복 이전의 조선미술전람회시대를 대표하던 김돈희 서풍의 잔재가 가시지 않았다는 비판이 가하여지기도 하였으나, 해서와 전서·예서에서 기교적이며 독자적인 서체를 시도한 손재형의 영향이 매우 컸다. 또, 해서에서는 안진경·구양순과 특히 황정견 서풍의 글씨가 많았다.
[6.2. 서예의 성장과 다양화]
1950년대 중반부터 국전 중심의 서예활동과 더불어 개인전 활동이 시작되어 1954년의 김충현(金忠顯), 1955년의 이기우, 1959년의 유희강 등의 개인전이 열렸다. 1950년대 후반이 되면 개인전 활동과 동시에, 서예교육 보급에 뜻을 둔 개인 및 민간활동이 대두되었다.
초·중·고등학교나 대학의 특별활동과는 달리, 서예가 개인 또는 모임을 중심으로 한 서예교육활동이 대두되었는데, 1956년에 발족한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와 원곡서숙(原谷書塾)·대성서예원(大成書藝院) 등을 우선 들 수 있다. 동방연서회에서는 김충현을 중심으로 김용진·김응현·민태식(閔泰植)·홍진표(洪震杓)·송치헌·강창원(姜昌元)·최중길 등의 서예가들이 참여하였으며, 1969년 이후 조직적인 서예교육기관으로 발전하여 활동의 폭을 넓혀 나갔다.
반면에, 대성서예원은 김기승의 개인 서숙으로 1958년 이래 해마다 서숙전을 열고 있다. 이어서 1958년 한글 궁체를 지도하는 이철경의 갈물서회, 1960년 유희강의 검여서원(劍如書院), 공정서예원(空亭書藝院, 김윤중 지도), 철농서회(鐵農書會, 이기우 지도) 등의 서예원과 최중길·정환섭·박세림이 지도하는 서숙형태의 서원·서회들이 급속하게 늘어갔다.
개인전 활동이 더욱 늘어가는 1960년대 중반까지도 국전 서예부는 현대 서예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국전은 1955년 제4회 때부터 초대작가제를 신설하였다가, 1961년 제10회를 계기로 초대작가와 추천작가를 다시 추천작가로 통합하였다. 이 시기의 국전 수상작에는 진나라의 전서를 바탕으로 한 일부 작품 이외 황정견체와 육조체(六朝體)를 절충한 행서와 안진경·하소기(何紹基)의 작풍이 절충된 작품 등이 있었는데, 대체로 손재형 서풍의 영향력이 강하였다.
제10회에서 제16회까지의 국전 문교부장관상 수상작 7점 중에서 적어도 4점은 그의 영향을 받고 있다. 손재형의 국전에 대한 영향, 나아가 서예계 전반에 대한 영향력은 그만큼 컸으며, 아울러 그의 공과에 대한 시비도 적지않게 가하여졌다. 아울러 국전 자체에 대한 비판이 일부 일어났는데, 그것은 서예인들이 고법연구(古法硏究)는 등한히 하고 심사위원들의 취향에 영합하려는 경향이 높아가고 있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중반에 걸친 10여 년간의 서예활동의 중요한 무대로서의 국전 서예부는 현역작가가 되기 위한 관문이었다. 서예가로서 사회적 인정을 받고자 하는 서학도의 일반적 경향은 옛법의 충실한 연구에 의한 실력함양보다는 시류적인 서풍에 추종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아울러 국전의 비중을 상대적으로 낮아지게 하는 결과를 빚었다.
1960년 6월 약 30명의 서예가들이 모여 난정회(蘭亭會)를 조직하여 배길기(裵吉基)·김기승·유희강 등 중진·중견·신인서예가들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난정회도 1961년 동인전을 한 번 연 다음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이어 1964년 젊은 동인들의 서예단체로 동연회(同硏會)가 조직되어 해마다 동인전을 열었다.
1965년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서예가들의 요청에 따라 범서예가 단체를 지향하는 한국서예가협회(韓國書藝家協會)가 탄생하였다. 창립회원은 배길기·김충현·유희강·원충희·김응현·최현주 등 57인이었고, 그 뒤 몇 차례 체질변화를 해가며 해마다 서협전을 열고 있다. 또, 같은해 초·중·고등학교 서예교육의 실무자들이 모여 대한서예교육회(大韓書藝敎育會)가 조직되고, 학생경시대회 등을 주최하였다.
1960년대에 조직된 몇몇 서예단체들의 활동과 더불어, 여러 기관에서 주최하는 서예전들이 개최되어 신인들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국내에서의 서예활동은 국전의 테두리에서 개인전·단체전 등으로 범위를 넓혀가면서 1960년대 중반부터 서예의 국제적 교류를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국제서예인연합회(國際書藝人聯合會)의 한국이사회가 정필선(鄭弼善)·김광제(金光濟) 등의 주선으로 결성되고, 김용진·손재형을 비롯한 많은 서예가들이 이사로 선정되었으나 눈에 띌 만한 두드러진 활동은 전개되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개인전 활동은 더욱 많아졌다. 1960년대 전반부터 개인전으로 두드러진 활동을 한 서예가는 유희강·김기승·이기우·김응현 등이다. 이와 함께 단체전·서숙전 등을 통한 발표 행위는 더욱 많고 다양하여졌다. 그러나 양의 증가와 질의 향상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개인전을 비롯하여 여러 전시회를 통하여 활동한 서예가는 김용진·손재형·민태식·김기승·김충현·유희강·최중길·배길기·김응현·이기우·박세림·김광업(金廣業)·김윤중·정환섭·현중화(玄中和)·정현복·송성용(宋成鏞)·김태주(金兌柱)·이병순(李炳順)·김종오(金鍾午)·고동주(高銅柱)·정기호(鄭基浩)·홍석창·오상순(吳相淳)·조수호 등이 있다. 단체서숙전으로는 동연회전·한국서예가협회전과 동방연서회·대성서예원·공정서예원·규당서회(葵堂書會)·검여서원의 전시회 등이 활발하게 열렸다.
한편, 1960년대에는 주요 서회·서숙활동을 통하여 광복 후 제2세대라고도 할 수 있는 서예가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동방연서회를 통한 배종승(裵宗承)·홍석창·권창륜(權昌倫) 등과 검여서원의 원중식·정하건(鄭夏建), 공정서예원의 유치봉(兪致鳳)·김종상(金鍾上) 등이 바로 이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6.3. 서예의 발전과 확산]
1970년에서 1980년대 초에 걸쳐서는 서예인구가 급격히 확산되고, 세속적인 서예학습 경향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979년 4월 24일 『내외경제신문』에서는 “한국의 서예가 수는 『’78년도 한국미술연감』에 수록된 276명(국전 입선 이상의 수준)과 이 밖에 연감에 수록되지 않은 자칭 서예가를 합치면 약 500명 선에 달한다.”고 추산하였다.
1970년대의 서예인구의 증가와 확산을 가져온 요인은 6·25전쟁, 4·19혁명, 5·16군사정변 등의 격동기를 거쳐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성장을 이룩하였고, 각종 서예연구 자료와 재료가 보급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79년도 『한국미술연감』은 1970년대의 서예활동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7가지로 정리하였다.
① 그 동안의 활동실적 등으로 저명하게 일가를 이룬 서예가의 개인전 또는 단체전 출품, ② 오래 전에 한때 서예활동을 하다가 갑자기 다시 작품을 들고 나온 개인전, ③ 혼자서 알게 모르게 수십 년간 글씨를 써 오다가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지는, 이른바 숨은 서예가의 등장, ④ 승려·정치인·취미인 등의 개인서예전, ⑤ 각종 서회·서숙·묵연(墨緣) 등의 동우회전, ⑥ 직장·주부·단체 등의 직장서예전, ⑦ 국제교류전 등이다.
이 가운데서 특히 많았던 것이 ⑤의 서회·서숙활동이었으나, 한국 현대 서예가 예술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여 가는 것은 ①에 속하는 서예가를 통하여서였다. 1970년대의 중요한 흐름으로는 개인전·서회·서숙활동 등이 활발하여짐에 따라 국전서예활동이 상대적으로 낮아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더구나, 수상작품 중 일부의 오자(誤字)·오기(誤記) 사건이 생겨 국전서예의 문제점이 논란되기도 하였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는 손재형·김기승의 서예회고전이 열리고, 유희강의 왼손글씨활동이 시작되었으며, 김충현·이기우·김응현 등의 작품활동과 작품집 발간 등이 있었다. 1977년 6월 동아일보사 주최로 열린 ‘손재형회고전’에는 1920년대부터 1974년까지의 그의 글씨·문인화 등 180여 점이 출품되었고, 김기승의 회고전 역시 동아일보사 주최로 1979년 6월에 개최되었다. 특히, 김기승은 『한국서예사』(1966)와 『신고한국서예사(新稿韓國書藝史)』(1975)를 저술하는 등 서예에 관한 문필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한편, 전문적인 서예가가 아니면서도 한학과 교양으로 글씨를 쓰며, 단체전·개인전 등을 통하여 격조 높은 작품을 발표한 인사들은 임창순·이가원(李家源)·윤석오(尹錫吾) 등을 꼽을 수 있다. 판각 분야에서는 오옥진(吳玉振)이 1978년과 1979년 두 번의 개인전을 열고, 이 분야의 기교 연마에 의한 여러 가지 가능성을 개척하여 갔다. 1970년대에도 몇 개 단체가 새로 조직되어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국민서예협회(國民書藝協會, 1971)·열상서단(洌上書壇, 1974)·한국전각협회(韓國篆刻協會, 1974)·한국기영서도회(韓國耆英書道會, 1975)·소완재묵연(蘇院齋墨緣, 1976)·묵림회(墨林會, 1977)·한국전각학회(韓國篆刻學會, 1981) 등으로 대개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쳐 꾸준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 밖에 국제서도연맹(國際書道聯盟) 한국본부가 1977년에 조직되어 몇 차례의 해외전 등을 주선하였고, 동방연서회가 대만·홍콩 등의 서예단체와 1974년부터 교류전 및 서법대회(書法大會)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광복 이후 새로 형성된 한국 현대 서예의 특성을 요약하여 보면 한마디로, ‘새로운 감각이 담긴 다양화와 저변확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광복 이후 한자교육 부진으로 한자를 바탕으로 존립, 발전하여 온 서예의 입지조건은 취약하여졌고, 감상자의 폭도 필연적으로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하여 서예를 직업으로 하는 서예전문가가 생겼으며, 1970년대 이후의 경제성장에 따라 서회·서숙 등의 팽창과 더불어 취미와 교양을 위한 서예인구는 다시 늘어났다. 그러나 서예의 질적인 향상은 대체로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극히 소수의 서예가들만이 한국 현대 서예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한글 서예
한국 현대 서예에서 독자적인 문제를 안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여 온 것이 한글서예이다. 광복 이후 한국서예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궁녀들이 써 오던 궁체가 현대적으로 정리되고, 학교 교육을 통하여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널리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최초의 작업은 1946년에 간행된 이철경의 『초등글씨본』·『중등글씨본』과 김충현의 『중등글씨본』이었다.
한글글씨는 일제강점기 때의 조선미술전람회에 김돈희·윤백영 등 몇 사람의 작품이 「조선문」·「조선언문」이라는 표제로 출품된 일이 있고, 조선일보·동아일보 등에 투고나 현상공모한 학생의 작품에도 등장하였다.
조선시대의 궁체는 선이 맑고 곱고 단정하며 아담한데, 실제로 궁녀들이 사용하여 온 글씨들은 편지나 책을 베낀 잔글씨들이며, 흘림체나 반흘림체가 많았다. 이러한 궁체를 바탕으로 1910년대에 남궁 억(南宮檍)이 『신편언문체법(新編諺文體法)』을 펴낸 일이 있다. 이철경의 궁체는 남궁 억의 체법과 운현궁·안동(安洞)별궁에 있던 나인들의 글씨 등을 바탕으로 체계를 세운 것이었다. 같은 궁체라도 이철경의 궁체는 곱고 부드러우며 단아한 특성을 지니고, 김충현의 경우는 밝으면서도 남성스러운 강건한 특성을 지녔다.
궁체는 맑고 단아한 아름다움은 지니지만, 여러 체로 다양하게 발달하여 폭넓은 예술성을 지닌 한자와는 성격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제약성을 탈피하기 위하여 몇몇 서예가들이 한글서예의 새로운 형태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작업이 바로 손재형의 한글 전서·예서 글자체화와 김충현의 ‘훈민정음체’라고 불려지는 고체(古體)의 창시라고 할 수 있다. 손재형의 예서체 한글은 1951년 진해의 「이충무공동상명문」에서 처음 발표되었고, 전서 한글은 1953년 제2회국전에서 발표되었다.
1956년 진도에 세워진 「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李忠武公碧波津戰捷碑)」에는 예서와 전서의 필획이 절충된 한글체로 한글 글씨를 썼다. 손재형의 예서·전서체 글씨는 김기승 등 많은 후진에게 영향을 끼쳤다. 한편, 김충현의 고체는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월인석보(月印釋譜)」 등 고판본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하여 전서·예서체의 필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의 고체한글은 1981년에 간행된 『일중김충현서집(一中金忠顯書集)』에 수록된 작품에 의하면, 1960년부터 등장하였다.
그는 1961년 제10회 국전 때 고체한글의 고려가사 「사모곡 思母曲」을 발표하였는데, 훈민정음 반포 당시 글자의 모양과 형태를 고전(古篆)에 따랐다는 사실에 의하여 이 고체를 ‘훈민정음체’라고 부른다. 이 밖에도 김응현·이기우 등도 격조 높은 한글서체를 쓴 서예가로 손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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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