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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정종수(鄭鍾秀)
갱신일 2015년 12월 8일
정의
상례喪禮의 한 절차로 시신을 처리하는 의례.
역사삼국시대 및 삼국 이전의 장례는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확인된 장법이나 극히 제한된 문헌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 민족의 상장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과 『후한서後漢書』에 보인다.
부여夫餘에서는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모두 얼음을 넣어 장사지내고, 장사 때 사람을 죽여서 매장하는 순장제를 실시하였다. 또 장사를 후하게 지내는데, 곽槨은 사용하나 시신을 넣는 관棺은 사용하지 않았다. 또 가능한 한 장례기간을 길게 하는 것을 예禮로 알아 5개월 동안 장례를 행하였다. 동옥저東沃沮의 장례는 부여와는 달리 뼈만 추려 묻는 이중장二重葬을 행하였다. 이는 일차장이라고 생각되는 빈의 과정을 거쳐 육탈肉脫하면 뼈만 취하여 커다란 목곽 속에 일가의 뼈를 넣는 이중 장법이다. 동옥저 사람들은 장사를 지낼 때 큰 덧널[大木槨]을 만드는데 그 길이가 10여 장이나 되며 한쪽 끝, 즉 머리 쪽을 열어서 문으로 삼는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시체를 임시로 매장하여 가죽과 살이 모두 썩게 한 다음, 뼈만 추려 곽 속에 안치하되, 한 가족의 유골을 하나의 곽에 넣어 보관한다.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에서는 장사를 지낼 때 관 밖의 덧널에 큰 새의 깃털을 꽂았다. 삼한은 장사 때 소와 말을 잡아 사용하였다. 장사 때 곽에 새의 깃털을 꽂는 것은, 새가 영혼을 현세와 천상 세계로 운반하는 매개자의 기능을 가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새는 천상의 인도자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말은 죽은 자의 영혼을 지하에서 명계冥界, 즉 천상세계로 운반하는 매개 동물로 생각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집안에 가매장하였다가 삼년이 지나면 길일을 택해 장사지내고, 부모와 지아비는 3년, 형제는 3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다. 운명하면 슬피 울지만 장사지낼 때는 북치고 춤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장송葬送하였다. 또한, 장례는 성대하게 지내는데, 금은의 재물을 모두 장사에 소비하며,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었다. 백제에서는 부모와 남편이 죽으면 고구려와 같이 삼년복을 입었으나, 나머지 친족은 장례를 마치면 바로 복을 벗었다. 이처럼 부모와 남편의 상복이 3년인 점으로 보아, 백제의 장례 풍속은 고구려의 유제를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는 관을 사용하여 염하고 장사를 지냈는데, 분릉分陵을 설치하거나, 혹은 불교의 예에 따라 화장하여 장골藏骨을 하기도 하고, 바다에 뼛가루를 뿌리기도 하였다. 불교가 들어와 공인된 23대 법흥왕 이전까지는 토장土葬을 실시한 반면, 그 이후로는 화장과 토장을 병행하였다. 신라의 화장법은 30대 문무왕 때 시작되어 34대 효성왕 때에 이르러 일반적으로 행해졌다. 이러한 불교식 화장법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크게 성행을 하다가 고려 말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배척받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융성으로 화장과 같은 장법이 계승되었다. 고려의 불교식 화장법은 사망―불사佛寺 부근에서의 화장―습골拾骨―권안權安(권빈權殯이라고도 하며, 일정 기간 절에 유골을 안치하는 것)―매장埋骨의 과정을 거친다. 또한, 부모의 해골을 임시로 절에 두고 여러 해가 지나도록 매장하지 않으면 해당 관리가 이런 사실을 조사하여 죄를 다스리되, 집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관가에서 장례 비용을 대주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토장묘과 함께 화장묘와 석실묘가 성행하였다. 통일신라 때는 주로 골호骨壺를 사용하였으나, 고려에서는 골호 대신 1m 내외의 소형 석관을 사용하였다. 석관은 조립식이며 뚜껑이나 관의 네 면에 청룡, 백호, 주작, 현무와 같은 사신도四神圖 혹은 성운도星雲圖를 양각하거나 석관에 명문을 새기기도 하였다. 장례 기간도 고려는 조선과 달리 일반적으로 백 일이었다. 심지어는 삼일장을 하기도 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공후公侯 이하는 3일 만에 장사한다.”라고 하였으며, 태조 4년 6월 헌사憲司에서 올린 내용에서도 “모든 전·현직 관원은 삼년상을 지내고, 삼일장과 화장을 금지하며 신분에 따라 삼월장과 유월장踰月葬을 시행하도록 한다.”라고 한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장례 기간이 매우 짧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려 왕실은 한漢나라 이후 일반적으로 왕실에서 사용되던 역월제易月制, 즉 하루를 한 달로 바꾸어 행하는 단상제短喪制를 시행하였다. 이러한 역월단상제는 고려 4대 광종 때부터 시작되어 5대 경종, 11대 문종비 인예태후, 12대 순종, 15대 숙종, 16대 예종, 17대 인종, 24대 원종 등이 역월제를 행하였다. 한漢의 문제文帝의 유조에 의해 비롯된 역월제를 기초로 한 단상제는 사실상 고려왕조 전 기간에 걸쳐 시행되었다.
14세기 말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는 단순한 성씨의 교체가 아니었다.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왕조 교체기는 고려의 불교를 대신하여 주자학적 유학이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아 사회 여러 부분이 크게 변화한 시기였다. 유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사대부에서부터 일반 서인까지 『주자가례朱子家禮』가 관혼상제의 규범서로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장례 및 상례에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예서는 성종조에 『주자가례』를 본으로 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있고, 중엽에 예학의 태두라 할 수 있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상례비요喪禮備要』와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사례편람四禮便覽』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재의 『사례편람』은 『주자가례』와 『상례비요』를 기본으로 하여 실제로 예를 실천하는 데 편리하도록 서술하여 대부분의 가정이 다 구비할 만큼 널리 보급되었다. 조선시대에도 화장을 금지하고 『주자가례』를 근간으로 하는 유교식 상장제를 확립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조선 초기에는 초상이 나면 상여를 맬 향도를 불러 모아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불며 상주를 위로하였다. 당시는 초상을 성대하게 치렀으며, 장사 치르기 전날 밤에는 손님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주악을 베풀어 빈객을 즐겁게 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으며, 돈이 없어 빈객을 대접하지 못할 경우에는 장사를 연장하기까지 하여 심지어는 수년이 지나도록 장사를 치르지 못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또한, 10명 중 6~7명은 매장이 아닌 불교식 화장을 하였다. 비록 화장을 하지 않고 매장하였다가도 뒤에 묘를 파 유골을 화장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화장을 금지하기 위해 중앙에서는 예조와 사헌부가 화장하는 자를 처벌하도록 하였고, 지방에서는 감사와 수령이 철저히 감독하여 죄를 물도록 했다. 이와 같은 화장에 대한 강력한 규제와 『주자가례』의 적극적인 시행으로 성종 집권 후반기에는 화장이 감소하고 대신 유교식 장법인 토장이 점차 일반화하였다. 한편, 고려에서 행했던 역월단상제는 조선에서도 이어졌다. 문무백관의 상복 기한은 송宋나라의 역월제를 써서, 즉 하루를 한 달로 바꾸어 13일에 소상小祥하고, 25일에 대상大祥, 27일에 담제禫祭를 지내도록 하여 형식상으로는 삼년상을 마쳤다. 태조 이성계의 국상을 맞아 시행된 역월단상제는 세종이 태종의 국상을 주관하면서 폐지되었으나 연산군대에 부활했다가 성종대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처럼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여 치르는 역월제는 국상 기간의 정치적 공백을 최소화하여 왕권의 안정을 꾀하고, 지방관에게 현지에서 왕의 죽음을 애도하도록 하여 왕권 교체기에 있을 혼란을 사전에 방지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고려시대 및 조선 세조 이전까지는 석실묘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세조는 자신의 능실에 석실대신 회격灰隔을 쓰도록 하여 세조의 광릉부터 조선의 능묘는 모두 석실분에서 회격묘로 바뀌었다.
유교식 상장례는 일제강점기에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일제는 1912년 6월 총독부령으로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체 규칙」을 공포하였다. 이 규정으로 오랫동안 지속해온 매장 풍습은 화장장과 공동묘지라는 새로운 문화를 등장시켰다. 또 조선총독부는 1934년 11월 10일 「의례준칙」을 제정·공포하여 조선의 관혼상제례를 인위적으로 바꾸고자 하였다. 특히 일제의 「의례준칙」은 조선시대 상장례 규범서의 하나인 『사례편람』의 상례절차 및 내용을 대폭 축소·간소화하였다.
광복 이후 미군정까지는 일제의 장묘법제가 시행되었고, 건국 이후에는 1961년 12월 2일 「매장 등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공포하여 묘지설치 장소, 묘지면적, 묘지시설물, 분묘의 형태 등에 대한 관리를 시작하였다. 1968년에는 이 규정을 개정하여 매장·화장의 기준과 묘지, 화장장, 납골당의 설치 금지지역을 명문화했다.
내용
장례는 ‘장의葬儀’ 또는 ‘양의襄儀’로 불리기도 한다. 시신의 처리 방법은 땅에 매장하는 토장, 불에 태우는 화장, 땅 위 혹은 나무에 놓는 풍장風葬, 물속에 넣는 수장水葬, 시신을 토막 내 독수리 먹이로 주는 조장鳥葬, 나무 위에 시신을 매달아 두는 수상장樹上葬 혹은 현장懸葬 등 다양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매장과 화장을 주로 행하였다. 일반적으로 장례는 ‘장사葬事 지낸다’고 한다. 장葬자는 ‘감춘다[藏]’는 뜻이다. ‘장藏’자를 풀면 ‘艸+死+艸’가 된다. 시신을 묻지 않고 들에 그대로 방치한 모양의 무덤이 바로 ‘장葬’자의 모습이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서는 “옛날에는 죽은 사람을 매장하지 않고 그냥 들에다 두고 풀이나 나뭇가지로 덮고 나무나 봉분도 하지 않았다. 상복을 입는 기간도 결정되지 않았다. 후세에 성인이 이를 고쳐서 관곽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시신을 묻지 않고 그냥 들에 두다 보니 부모의 시신이 짐승의 밥이 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활을 가지고 지키기까지 했다. 조弔자의 형상이 바로 시체를 풀로 덮어 장사 지내고 활을 들고 짐승을 쫒는 모양이다. 점차 사람들이 인지가 발달하고 효 관념이 생기면서 방치했던 시신을 구덩이를 파고 묻기 시작하였다. 봉분은 물론이고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은 무덤의 형태가 ‘묘墓’자로, 시신을 땅속에 매장하고 봉분 없이 평지처럼 한 것을 이른다.
『맹자孟子』에 의하면 “상고에 부모가 죽어도 장사 지내지 않는 시대가 있었는데, 부모가 죽자 시체를 들어다가 구덩이에 버렸다. 뒷날 그곳을 지나다 여우와 살쾡이가 시체를 뜯어 먹고, 파리와 모기가 엉겨서 빨아 먹는 모습을 보자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눈길을 돌리고 바로 보지 못했다. 곧 집으로 돌아와서 들것과 가래를 가지고 돌아와 흙으로 시체를 덮었다.”라고 했다. 이처럼 상고시대에는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고, 인지가 발달하면서 매장법이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은대殷代에도 매장지가 없었으며, 주周나라 문왕과 무왕의 무덤도 분구가 없는 평지묘였다. 『한서漢書』 「유향전劉向傳」에도 옛날 무덤은 봉분을 만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평평한 형태의 묘는 시신을 짐승들로부터 보호하고 무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무덤인 분墳으로 바뀌었다. ‘분’자를 풀면 ‘土+十+十+十+貝’로서 흙과 조개껍질 30짐을 쌓아 봉분을 갖춘 무덤임을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조개껍질 속에 시신을 묻거나 흙과 섞어 봉분을 만들었기 때문에 ‘분’자에 조개 ‘패貝’를 쓴 것이다. 흙과 조개껍질이 30짐이라는 것은 상징적으로 많다는 뜻으로 이 정도면 봉분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오늘날과 같은 봉분 형태의 분구식墳丘式 무덤은 춘추시대 말기에 처음 만들어져 전국시대에 보편화하였다. 공자도 옛날에는 묘를 수리하지도 않고 봉분도 하지 않아, 후에 묘를 찾기가 힘들어 어머니를 장사 지내고 봉분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처럼 무덤은 들에 시신을 버리는 것과 같은 장葬의 형태에서 봉분이 없는 평지묘平地墓로, 평지묘에서 봉분을 한 분墳으로 발전하였다. 즉, 무덤은 장葬―묘墓―분墳의 형태로 변천한 것이다.
장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관곽과 상복을 마련하고 장지를 선정하는 등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이를 ‘장기葬期’라 한다. 오늘날에는 삼일장이 가장 보편적이다. 3일은 되어야 최소한의 예를 갖춰 장사를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각기 신분과 지위에 따라 장기를 달리했다. 『예기禮記』에 “천자는 7일 만에 빈하고 7개월 만에 장사 지내고, 임금과 같은 제후는 5일 만에 빈殯하고 5개월 만에 장사 지내며, 대부·사·서인은 3일 만에 빈하고 3개월 만에 장사 지낸다.”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왕은 5개월, 대부는 3개월, 선비는 1개월(유월장踰月葬)을 치렀다.
출상 행렬은 맨 앞에 방상이 서고 이어 명기와 복완―명정銘旌―혼백―만장輓章―공포功布―상여喪轝―삽―주상―상주―복인―존장―무복친―조문객의 순으로 나간다. 상여가 묘역에 도착하면 방상이 먼저 광중에 들어가 네 모퉁이를 창으로 치고 잡귀를 몰아내고, 하관 시간에 맞춰 머리가 북쪽으로 가게 안장을 한다. 하관을 마치면 명기와 지석을 묻고, 석회·황토·모래를 섞은 삼물三物로 회격을 만들고 흙으로 광중을 메운다. 요즈음은 흙에 석회만을 섞어 광중을 메운다. 흙을 한 켜 넣고 다지고, 다시 적게는 3켜, 많게는 5켜까지 흙을 넣으면서 외광을 완전히 다진다. 이렇게 다지는 것을 ‘달구질’ 또는 ‘회다지’라 한다. 봉분이 완성되면 묘 앞에 제물을 진설하여 평토제平土祭(성분제 또는 제주제라고도 함)를 올린 후 혼백과 신주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를 ‘반혼返魂’이라 한다. 이로써 장송의례가 끝나게 된다.
특징 및 의의
1990년대에는 묘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화장 위주의 장례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특히 한시적인 매장제도를 도입하여 최대 60년까지만 묘지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매장문화에서 화장문화로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다. 1990년대 중반에는 장례 장소가 집이 아닌 장례식장인 경우가 증가했다. 특히 전문장례식장과 병원장례식장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또한, 상여나 우마차로 시신을 운구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자동차로도 장지까지 운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시신을 운반하는 이른바 영구차는 당시로서는 대표적인 신문화로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최근에는 망자의 유언에 의해 매장을 하지 않고, 화장 후 납골 혹은 산골散骨하는 식으로 장묘 문화가 많이 변화하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國朝五禮儀, 四禮便覽, 三峯集, 世宗實錄, 禮記, 周易, 增補文獻備考, 의례준칙, 조선초기 상장의례연구(정종수,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중국고대능침제도연구(양관, 상해고적출판사, 1985).
** 옮긴이 : 국민장례협동조합 이사장 효학박사(孝學博士) 박종윤 010-4445-4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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