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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윤리 도덕문제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이 있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이런 왕들이 능력이 있어 백성의 고단한 삶을 잘 헤아렸다면 과연 쫓겨나야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즉 성격이나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으면 쫓겨나야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조가 넘 능력이 없는 임금이나
처참한 백성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광해군을 잠깐 훑어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이다.
광해군은 어려서부터 유능했다. 사진과 글 다음에서 펌
하지만 아버지 선조에게 임진왜란 직전까지세자 책봉을 받지 못했다.
만약 임진왜란이라는 돌발 변수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광해군의 아버지가 거의 전적으로 능력만을 근거로
그를 세자에 책봉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왕이 된 뒤에도 계속 여러가지 컴프렉스로 인한 또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해서는 안될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켜 쫓겨나는 임금이 되었다.
물론 그는 존경 받을 만한 군주였고
그리고 광해군은 개혁정치와 실리외교를 추구한 훌륭한 군주라는 평가를 받는 임금이라고 한다(인터넷글)
여기서 인조임금도 살펴보자
인조임금의 초상화는 구하기가 어렵네요
능창군의 형이었던 능양군(뒤에 인조)이 광해군을 쫓아내기 위해 일을 꾸미기 시작해
김자점, 이귀 등과 함께 광해군을 쫒아내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왕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나 백성들을 고생시킨 왕이었는지 자신의 능력평가를 한번 해 보고 일을 일으겼을 뻔도 한데.
백성 입장에서는?
미운놈인 누루하치 초상화
청나라는 만주 지역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이다.
여진족은 본래 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작은 부족이었으나 명나라의 국운이 쇠퇴하는 틈을 타 누르하치는
여러 부족의 세력을 통합하여 후금(後金)을 세운다.
이에 명나라는 팽창하는 후금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였고, 조선은 임진왜란을 치른 뒤의
피폐한 상황 속에서도 고민 끝에 광해군 11년(1619) 만주 지역으로 군사를 파병해 후금과 대치하기에 이른다.
이를 빌미로 후금은 인조 5년(1627)에 쳐들어와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킨다.
전후 처리로 두 나라는 화약(和約)을 맺기는 했으나 그것은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어서 양국은 불편한
관계를 지속한다.
그러다가 인조 14년(1636) 병자년 2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연호도 숭덕(崇德)이라
정하면서 조선에 신하의 예를 갖추도록 강요하기에 이른다.
두 나라의 관계가 더욱 불편해졌음은 물론이다.
남한산성과 병자호란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묘사된 병자호, 청태종은1636년 12월 1일 12만 대군을 심양에서 모아 조선을 침입
하였다 / 사진 = 영화 '최종병기 활' 캡쳐 영상] (네이버글 사진 펌)
청태종은 몸소 전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1636년 12월 1일에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아 조선 침입에 나섰다.
9일에 압록강을 건너 다탁은 전봉장(前鋒將) 마부태에 명해 바로 서울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마부태는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수비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피해 밤낮을
달려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서울에 육박하였다.
13일 오후 늦게 청군은 이미 평양에 도착하였다. 조정은 갑작스런 변란에 황망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도성 안은 흉흉해 성을 빠져나가는 자들로 줄을 이었다.
다음 14일 개성유수의 치계(馳啓)로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
을 검찰사(檢察使)로,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張紳)으로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직시켜 강화를 수비하도록 하였다.
[남한산성 수어장대에서 바라본 영춘정 / 사진=문화재청 제공]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
인조도 그날 밤 남대문으로 서울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와서 청국군
이 벌써 영서역(迎曙驛: 지금의 서울 은평구 대조동과 불광동 사이)을 통과했으며, 마부태가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해, 한 부대를 보내 양천강(陽川江)을 차단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겼다고
보고하였다.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뒤 영의정 김류(金瑬) 등은 본 산성이 지리적으로 불리함을 들어 야음을 타서 강화도로 옮겨갈 것을 역설하므로 다음 15일 새벽에 인조는 산성을 떠나 강화도로 떠나려 하였으나 마침 눈이 내린 뒤라 산 언덕에 얼음이 얼어서 왕이 탄 말이 미끄러져 왕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갔는데, 여러 번 미끄러져 몸이 편안하지 못해 강화도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산성으로 돌아왔다. 청 태종은 남한산성에 20만 군사를 포진시켰다. 이 고립무원의 산성에서 인조와 군신들은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라는 말의 다툼을 벌였다 삼전도의 치욕적 굴욕 47일동안의 항쟁을 끝내고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식량이 떨어져가고, 세손과 비빈이 피란간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는 산성 서문을 나와 삼전도로 향했다. 삼전도는 서울 도성에서 송파에 이르는 한강나루로 1950년대까지 나룻배가 다녔으나, 1970년대 이후 한강 개발로 사라졌다. 이곳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조아렸다. '삼궤구고두'의 예로서 항복을 한 바로 그 자리쯤이다. 삼전도비와 관련하여 사실처럼 믿어지는 얘기 하나가 전해오고 있는데 인조가 청태종을 앞에 두고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의 예를 행할 때 피가 나지 않는다며 청장 용골대가 인조를 핍박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하는 수 없이 이마에서 피가 날 때까지 머리를 땅에 찧어야 했기에 인조와 배석한 신료들이 모두 피눈물을 흘리는 대목에서 그 자리는 절할 때 풍악이 울려 퍼졌다고 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힘없는 나라의 설움에 대해 원통해 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아! 안타깝다. 지금도 국토 지키기를 방심한다면 이 때 이 상황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낭만 / 사진= 영화 '최종병기 활' 영상 캡쳐]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청군의 전리품으로 끌려가는 조선의 무고한 백성들, 청으로 끌려간 조선의 백성들은 청나라의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거나, 성의 노리갯감으로 삼으려는 뜻고 있지만 실상은 돈을 받고 조선에 되팔기 위한 목적이었다 청에게 항복을 한 조선을 청의 요구대로 신하의 예를 행하고 조공을 약속하였다. 또한 명나라와 교류를 단절하고,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병을 파병하기로 약조하였다. 마지막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삼학사를 비롯한 수많은 대신들의 청에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갔다. 10년의 볼모 생활을 하다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조선 17대 효종)은 1645년(인조 23)에 환국하였으나, 세자는 2개월만에 죽었다. 그리고 인조의 뒤를 이른 봉림대군은 왕위에 오른 뒤 볼모 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재야의 인사를 발탁하고 군비를 확장하는 등 북벌의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수( 螭首 지붕돌)라고 하는데 이곳엔 용두마리가 입에 여의주를 물고 희롱하며 마주 보고 있다. 삼전도비의 머릿돌과 몸돌은 대리석이다. 따로 만들어 붙인 것이 아니라 한몸이다. 조각수법이 뛰어나고 구성이 아름다운 예술품이다. 일제시대 그들이 보물로까지 지정한 명분을 이해할수도 있는 부분이다.
강화도가 함락되어 왕자들과 비빈들을 포함한 200여명이 포로로 잡히자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잠실에 위치한 삼전도비(三田渡 도는 나룻터 이름 1950년대에도 있었으나 70년도한깅 개발에 없어졌음)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태종은 전승기념을 위해 비를 건립하였다. 정식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이지만 문화재
지정 당시 지명을 따서 삼전도비(사적 제101호)라고 지었다.
. 당시 왕이었던 인조(仁祖)가 비문을 지으라 했지만 다 같이 상소를 하며 사양했다고 합니다.
특히 조희일의 경우 일부러 글을 거칠게 만들으면서까지 역사에 ‘더러운이름’을 남기기를
피했다고 합니다.
왕이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향배를 시험하려 하니 우리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의해서
판가름 나는 것이다”며 간청을 해도 자신의 명예를 중시했던 선비들은 비문을 지을 수 없다고
누구도 하기 싫은 일, 치욕과 고통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일일지라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또한 임금이 사정을 하니
이경석이 비문을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다. 비석 앞면은 만주글자와 몽골글자로, 뒷면은 한자로 새겨
17세기 세 나라의 언어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비문을 해석하면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고 기르는데,
오직 황제께서 이를 본받아 위엄과 덕을 함께 펴시네.
황제께서 동쪽으로 정벌하심에 그 군사는 10만이요,
은은한 수레소리 호랑이 같고 표범과 같네.
서쪽 변방의 터럭하나 없는 벌판과 북쪽 부락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창 들고 앞서 진격하니 그 위세 혁혁(赫赫)하도다.
황제께서 크게 인자하심으로 은혜로운 말씀 내리시니,
10 줄의 밝은 회답 엄하고도 따뜻하였네.
처음에는 미혹되어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근심을 끼쳤지만,
황제의 밝은 명령이 있어 비로소 깨달았네.
우리 임금 이에 복종하고 함께 이끌고 귀복(歸復)하니,
단지 위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덕에 의지함일세.
황제께서 이를 가납(嘉納)하시어 은택(恩澤)과 예우(禮遇)가 넉넉하니,
얼굴빛을 고치고 웃으며 병장기를 거두었네.
무엇을 주셨던고, 준마(駿馬)와 가벼운 갓옷,
도회의 남녀들이 노래하고 칭송하네.
우리 임금이 서울로 돌아가신 것은 황제의 선물이요,
황제께서 군대를 돌이키니 백성들이 살아났네.
유랑하고 헤어진 이들 불쌍히 여겨 농사에 힘쓰게 하시고,
금구(金甌)의 제도 옛날과 같고 비취빛 제단은 더욱 새로우니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고 언 풀뿌리에 봄이 돌아온 듯하네.
커다란 강가에 솟은 비 우뚝하니,
만년토록 삼한(三韓)은 황제의 덕을 이어가리.'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兼 同知義禁府事) 신(臣) 여이징(呂爾徴)
이 왕명을 받들어 전액(篆額)을 씀.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신(臣) 오준(吳竣)
이 왕명을 받들어 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홍문관대제학(兼 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신(臣)이경석(李景奭) 이 왕명을 받들어 지음.
숭덕(崇德) 4년(인조 17, 1639년) 12월 초 8일에 세움 ' 이다 산동반도 글 올림
또한 삼전도비의 수난사를 살펴보면, 청일전쟁 이후 청의 세력이 약해지자 1895년(고종
32)에 강물 속으로 쓰러뜨렸으나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다시 세웠다가 1956년에 묻어 버렸다.
1963년 홍수로 모습이 드러나면서 다시 세웠다.
내용은 “삼한에는 만세토록 황제의 덕이 빛나라
“황제께서 지극히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을 내리시니 열 줄의 조서가 밝게 드리움에 엄숙하고도 온화했다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는데 황제의 밝은 명령으로 자다가 깬 것 같았다
임금의 몀에의해 또한 백성을 위해 글을 지울 수 밖에없는 백헌 이경석은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라며 피를 토하듯 괴로워 햇다고 합니다.
궤 헌종이 이경석에게 내린 장궤
궤장(·몸받침대와 지팡이)
▲ 사궤장연회도첩(1668년 보물 930호) : 현종에게 이경석이 궤장을 하사받을 당시의 상황을
그림으로 그리고 함께 축하하는 시문을 써서 묶은 첩. 하지만 이것으로 삼전도비 쓴 것을 비방함
한번의 굴욕이었지만,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1668년(현종 9년) 사건이 터진다. 송시열이 현종으로부터 궤장(궤仗·몸받침대와 지팡이)을
하사받은 이경석에게
“공(이경석)은 ‘수이강(壽而康·오래 살고 편안히 지냄)’했다”는 축하글을 남겼다.
당시는 아무도 몰랐지만 ‘수이강’, 이 세 단어는 무시무시한 가시를 품고 있었다.
금나라에 멸망당한 뒤 ‘과도한 내용의’ 항복문서를 지어 바친 북송의 손적이 ‘오래 편히 살았다(수이강·壽而康)’
는 비아냥을 들은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이경석이 바로 ‘조선판 손적’이라고 공격한 것이다. 송시열은 더
나아가 “~개도 이경석의 똥은 먹지 않을 것”
이라고 사납게 몰아붙였다. 반면 이경석은 소극적인 대응으로 예봉을 피했다.
그때 꺼진 줄 알았던 사건은 이경석 사후에 다시 타오른다(1701년).
소론의 박세당이 고(故) 이경석의 신도문을 쓰면서 “이경석은 봉황(군자)이며, 송시열은
봉황을 꾸짖는 올빼미(소인배)”라고 맹비난한 것이다.
그러자 노론 측은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춘추대의에 따라 오랑캐에 아첨한 이경석을 탄핵한
것일 뿐”이라고 앙앙불락했다. 또 한번 조정은 아수라장이 됐다.
돌이켜보면 이경석의 처지가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죽은 뒤에까지, 아니 이 순간까지 ‘주홍글씨’를 새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삼전도비문을 억지로 ‘지어야 했던’ 이경석이 대체 무슨 죄를 지은 것인가.
모든 것이 힘없는 나라를 둔 설움인데 서로 이렇게물고 뜯어야하다니.
역사는 바꾸는게 아니라 그대로 물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삼전도비는 지켜져야한다고...
삼전도비는 역사의 증거이기 때문에 이것을 없애거나 훼손하면 곧 증거가 없어지는 셈입니다.
증거가 없어지면 사실이라고 주장하기 어려워지고 이런일이 많아진다면 후손들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을 하게 될겁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가 거짓말이라고 할 것이고 서로간의 불신만 쌓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신이 폭팔하면 민족이 또다시 나눠집니다.
이런 가장 대표적인 예가 광개토대왕비입니다.
일제가 광개토대왕비의 글자를 훼손하는 바람에 우리 후손들은 정확한 광개토대왕비의 뜻을 두고 다투고
있습니다.
훼손하지 않았다면 사실에 근거한 주장을 펼쳤을것이고 최소한 의견이 다른 주장이라도 신뢰했을겁니다.
만약 삼전도비를 훼손해서 민족의 정신을 찾겠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민족의 정신을 훼손하는겁니다.
문화재는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는데
도움이 됩니다.
만주 문자(满洲文字)/몽고문자를 자신의 언어에 맞게 개량한 문자이다. (산동반도님 사진 감사!
청나라 여진 수령 누루하치가 1599년 2월에 내린 사령문 산동반도님 사진 감사!
여진 문자 산동반도님 사진 감사!
지금 키릴 문자이전의 몽고문자/1946년 이전
지금의 몽고 문자 기릴/Cyrillic letters
산동반도님 사진 펌감사합니다.
去拓印了韓國首爾三田渡 滿文<大清皇帝功德碑>
发表于 2010-11-19 17:22:06
삼전도비 만주어 문자
위의 탁본 사진은 중국에서 와서 탁본해가서
발표한 것으로 발표날자는 2010년 11월 19일 입니다.
(산동밤도 올린 것을 펌함- 감사합니다.)
사진과 해설 전부 인터넷에서 펌해서 올림 2015 1 23일 낭만씀
첫댓글 정리해주셔서 감사.힘없고 작은나라 치욕과 굴욕의 삼전도비 생각하니 맴이 애려요.
희망이님 댓글로 많은 힘을 주셨는데 오늘 처음 보아 얼마나 반가운지... 좋은 밤 되시어 좋은 꿈 꾸세요
浪漫님 역사에 대해서 많은 애착을 갖이시고 좋은 글 올려주시니 넘 반갑군요.
어제 백제고분 적성총을 본후 한성백제 박물관도 함께 보았으면 좋았었을 것을 바쁘셨겠지 생각했답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자주 뵈요.
역사란 얼마나 흥미로운가요 난 지금도 친구겠서 올려주신 대 서사시같은 전설이 아닌 사실인 역사
신라 후예라고 하는여진족 만주족등의 동영상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산동반도님 정말 감사해요
낭만 선배님 수고 하심에 감사 드립니다 .
사람이 공짜는 절대 없나봐요
그 동안 애 많이 쓰셨는데 하고 맘으로 찡하니 남아있었는데 만나뵈니 얼마나 반가운지...아직도 의지하는 마음이 남아있었나 봅니다
정은 확실히 질펀하게 들어야 하는 것 같아요 후배님 오늘 좋은 하루 되시기를...
해박한 역사지식의 작가 낭만님...이렇게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늘 우리 회원들에게 역사지식을 재미있게 올려주시는 낭만님의 성의에 감사함을 전합니다
*제가 낭만님의 오셨음을 알면서도 사진을 안 올렸을까요?...정말 미안하고요...깜빡해서(본의는아님)..
늘 건강하시길...
산 좋아님
선배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제일 인기 많은 것을 아시나요
선베님의 모습 뵙는 것민으로도 저희들 마음은 봄의 풀솜처럼 푸근하답니다.
부디 건강 지키시어 오래도록 저희들이 드리는 사랑에 흠뻑 적셔지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감기조심하옵소서.
이렇게 훌륭한 자료를 만드시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해 보면서 사진과
긴 설명글 잘 읽고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오로라 선배님 선배님의 열성적인 후원없이는 저도 맥빠져 이렇게 열심이지는 못했을 것 같으니 모두 선배님의 덕이십니다.
들어가나 나가나 선배님의 힘찬 성원에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좋은 저녁 보내시고 좋은 밤 되시기를...
낭만 님, 우리의치욕의;역사를 잘 조명하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되풀이해서는 안되는 역사ㅡ 명심 해야합니다
운영자이신데도 이렇게 역사탐방 후미에서서 늘 염려하시고 지켜주시는 복조리님을 뵈올 때 늘 존경하는 마음입니다.
누구 보다도 지혜로우셔서 믿음을 주시는 후배님 늘 감사드리며 드나듭니다. 건강하시기를...
낭만님 긴글로 자세히 작성하신 글 고맙습니다
치욕적인 이것을 누가 청화대 앞에 갔다 놔야 한다고 하였다 하든이
맞느말 청화하대 앞이나 국회 의사당 앞에 놓고 정치인들 정신좀 차리라고 하고 싶네요
선배이면서도 친구같으신 정겨운 분
선배님 덕분에 역사탐방이 반듯한 틀에서 잘 굴러가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좋은 밤되시고 고운꿈 꾸시기를...
낭만님!해박한 지식에 고개 숙여집니다
감사합니다
해피님 안녕하세요 댓글에 감사드림니다. 전 지식은 없어요 인터넷에서 퍼 담은 것뿐이랍니다.
하지만 좋게 말씀해 주시는 해피님의 넉넉한 마음을 읽습니다 오늘 즐거운 하루 보내시기를 빕니다.
좋은 자료 게시에 많은 것을 배웟습니디. 감사합니다.
삼전도 비문 간단한 해석문이 "중국어방" 산동반도님 게시한 "청나라 시조는 신라경주 김씨" 제목에 있어니 참고 바람니다.
산-다물님 닉이 예사롭지 않아요
이 장에 머물러 주심 정말 감사드립니다. 산 -다물님 알씀대로 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