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 안국사지 석조 여래삼존 입상 (唐津 安國寺址 石造 如來三尊 立像)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수당리 안국사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2026년 1월10일 이 곳을 방문 해 보았다.
안내판 설명문: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 및 석탑 보물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의 조성시기는
2003년 발굴조사시 출토된 太平중국 요나라 성종의 연호 명문 기와로 보아
고려 현종 12~21년 1021~1030 으로 추정된다.
중앙의 본존불은 얼굴과 몸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고 머리에 네모난 갓 모양의
보개(寶蓋)를 쓰고 있다. 두 팔과 두 손이 신체에 조각되어 있고, 좌우에 있는
협시보살(脇侍菩薩)도 본존불과 같은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전면에 여래좌상이 있다.
측면에도 여래좌상이 새겨져 있고 총 3면에 여래좌상이 있는 탑주이다.
불상 하단의 석탑은 원래 5층일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1층에 1매의 몸돌만 남아 있고
그 위에 4매의 지붕틀이 겹쳐져 있으며 받침부의 구조는 매우 간략하다.
1층 몸돌의 네 모서리에 기둥 형태가 표현되어 있고 3면에는 여래좌상(如來坐像),
1면에는 문고리형이 조각되어 있어 4면에 불상을 조각하는 기본형식에서 벗어난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불상과 석탑은 고려시대 충청도 지방에서 많이 나타나던 양식으로
혼란기 백성들이 마을공동으로 세운 것으로 거칠고 섬세하지는 않지만 종교적인 구원사상을
넘어 힘든 현실 세계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노력한 지역공동체의 모습이 엿보인다.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명문기와와 막새기와를 통해
조성 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 2004년 실시된 발굴조사에서는 ‘태평십(太平十)’명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다. 발굴단은 이 시기를 요(遼)의 성종(1021~1030) 연간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태평십’은 1030년(현종 21)임을 밝혔다. 안국사지에서는 막새 기와가
단일 종류의 것만이 출토되고 있어 ‘태평십’명 기와를 안국사 창건기의 기와로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석조여래삼존입상 역시 이 시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여겨진다.
안국사지 매향암각
Machyangamgak of Anguksa Temple Site
안국사지 매향암각
Machyangamgak of Anguksa Temple Site
도지정 기념물 제163호
Chungcheongnam-do Monument No. 163
불상 후면에 있는 매향암각은 모양이 배(舟)같이 생겨서 배바위, 고래모양이라 하여
'고래바위' 또는 베틀에 딸린 북모양이라 하여 '북바위' 등으로 불린다.
바위에는 매향의식(埋香儀式)을 치른 내용을 담은 명문이 새겨져 있다.
매향(埋香)은 향나무를 땅에 묻는 민간 불교의식으로 향나무를 통해 소원을 비는 자와
미륵불(彌勒佛)이 연결되길 바라는 신앙의 한 형태이다.
이런 매향활동을 통해 고려시대 몽고와 왜구의 침입 등으로 어려움을 겪은 지역민들이
불안한 민심을 달래고자 미륵신앙의 안식처로써 안국사를 선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보통 향나무를 묻는 곳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갯벌에 묻는데,
현재 매향비의 위치로 봐서는 갯벌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이지만,
지도를 보면, 수당리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증거는 이 지역이 갯벌을 메워
논으로 만든 간척지라는 것이다.
미륵불 뒤 산 기슭쪽에 2개의 전각들이 있다.
그 오르기 입구 좌측에 지장전 아래 옆에 작은 저수지가 아름답게 놓여있다.
지장전과 산신각 오르는 길은 세멘트 길 같지 않고 바위 하나를 다듬어 놓은 듯한 길이다.
지장전 건물이 먼저 자리하고 있고
산신각 건물이 그 옆을 지키고 있다.
두 건물들은 아마도 근세에 지은 건물인지 아무 설명도 없다.
사찰들에서 보는 단청도 없이 그냥 그대로 꼭 천년고찰의 모습인양 보인다.
산신각 내부에는 공양을 올려 놓은게 많은걸 보니 많은 신자들이 찿아오나보다.
지장전 내부에도 마찬가지로 공양물들이 많이 진설 되 있다.
지장전 문고리가 예사롭지 않다. 고전의 미를 갗추게 하느라 이런걸 사용했나.
지장전 처마에서 보는 주변 풍광이 꽤나 아름답다. 그야말로 고즈녂한 분위기의 사찰같다.
앞을보아도 조경이 아름답게 되 있는 걸 보게된다. 천년전에 지어진 사찰이 어이하여
이씨조선에서 사라진걸까? 나라의 안녕을 기원한다고 한 이름대로 안국사인데.
산신각 처마 아래서 바라보는 사찰로서의 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거대한 사찰이였음을 나타내는 주위 풍경이 주는 멋진 장소에 풍수적으로는
명당은 아니였나? 황제는 곧 부처라는 사상으로 지어진 곳이라 하던데.
나라에서 녹을 하사받지 못해 사찰이 망했을까?
지장전 앞에서 그 천년의 역사를 생각해 보았다. 화려하게 등장하였던 이 거대한 사찰이
오래도록 가지 못하고 없어진 것이 과연 조선조대에 억불정책시절의 피해자였을까?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즉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이 나라의 기틀을 세우던
초기부터 국가의 공식적인 통치 방침이었으니. 그 영향을 받았을까?
제일 심할 때가 연산군 시절이라 한다. 승려선발시험을 폐지하고 선종과 교종의 본산인
흥천사와 흥복사를 폐쇠하였다 한다.
앞서 성종왕은 승려가 되는 길인 도첩제를 완전히 폐지한 왕이라 한다.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분위기 시대였다니.
그리곤 중종시대에 와서 불교의 공식적인 지위를 완전히 박탈 했다한다.
이 때부터 승려는 사회 최 하층계급인 천민(팔천) 으로 취급받게 되었다는데
이런 이유로 이 사찰이 망했나?
분명한 건 모든 왕이 억압만 한것은 아니다. 세조대왕, 수양대군의 역사를 보면 개인적인
불교 신앙심으로 간경도감을 설치해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등 불교를 후원하였고
특히 월정사와 상원사는 세조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알려 져 있을 정도이다.
명종왕 때에도 불교가 부흥하기도 한 시대였다는데.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에서 주목되는 형식적 특징은 본존불상이 방형의 보개를
착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면류관 형태의 방형 보개는 고려 광종대 조성된 불상에서
처음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부여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을 들 수 있다. 면류관 형태의 방형 보개를 착용하고 있는
불상의 조성 배경은 ‘황즉불(皇卽佛)’ 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의 경우 광종대 조성된 면류관 형태의 방형 보개를
착용한 불상보다 형식화되어있는데, 불상이 제작된 11세기 전반에도 고려는 여전히
황제국 체제를 표방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의
조성 배경에도 ‘황즉불’사상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륵불 상으로 오르는 길에서.
이 안국사지를 돌아보고 난 소감은 이런 아름다운 곳에 불교계에서 그야말로
나라의 안녕을 위해 안국사를 재건해 놓으면 어떨까 생각 해 보았다.
참으로 아까운 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