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 | 강봉덕
무한구간반복 외
저 유배지는 달린다, 덩굴장미가 있는 정거장을 밀어내면서
공업탑로터리에서 가두고 공단입구에서 뱉을 때까지
나를 유배시키고 시치미를 뗀다, 낡은 의자는
이미자의 동백꽃 아가씨가 두 번 재생되고 세 음절의 구간이다
정거장 뒤편 장미는 매년 같은 자리에서 피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였고 바퀴만큼 부풀었던 꿈은 닳기를 반복하였고 꽃 같은 시절을 끝내고 퇴직을 바라보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장미와 버스가 만났다 헤어지기를 거듭 반복하는 동안
정류소 건너 양철지붕이 오피스텔로 바뀌고 이미자에서 싸이에서 랩으로 바뀌었고 정차할 때마다 매몰되고 다시 유배되는 사람들의 붉은 표정은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장미가 목줄을 하나씩 달고 태어나는 것처럼 아침마다 나를 가둔 버스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입은 작업복이 계급보다 더 계급 같은 유배의 흔적이어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정차지를 지나친 날이면 비를 맞으며 다시 돌아와야 하는 포기할 수 없는
테이프를 거꾸로 돌리듯 늦은 밤이면 다시 유배지에서 유배지로 돌아온다 누구도 억지로 가두지 않았지만 내 발목은 딱딱한 의자를 벗어날 수 없었다
가시가 꽃을 보호해 주는 것처럼 내 발목을 잡고 있었으므로
장미꽃이 넝쿨을 벗어나지 못하듯 나는 수의 같은 낡은 작업복이 내 피부인 줄 알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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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 혹은, calla
유리컵에 꽃을 꽂으면 컵은 화병으로 태어나듯 우린 이름을 붙여 주기로 했어요 선생님이 흰 종이에 복사해온 사진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꽃
칼라 아닌 것을 붙여 만든 칼라 종이에 주렁주렁 열린 칼라 금단의 과일 같은 칼라 혓바닥에 핀 칼라 뒤집으면 칼라 또 다른 칼라를 넘기면 칼라
종이 뒤편에서 자라고 있을 뿌리를 들춰봐요 뿌리에겐 근본이 있다고 하잖아요 근본 없이 자란 아이처럼 아무렇게 이름을 붙여 줄 수 있겠어요
이것은 우리가 칼라에게 붙여 주고 싶은 이름;
쭈그러진뇌,절뚝이는의자,종기난엉덩이,내려둔젖꼭지,꿈틀거리는벌레,갈라진뒷꿈치,빨간아기,날아가는부채,녹는설탕,멍든책,뜨거운물방울,구멍난심장
이름엔 감옥이 들어있다고 하잖아
마음을 숨기는 것처럼 왜 이름은 모호할까
입속에 손을 넣고 당신을 찍어 먹으면 이름이 따라 나올 것 같아 당신, 여기서 잘못된 삶을 산다면 이름을 잘못 붙였을 거예요 어쩌면 오래전 면서기가 잘못 기록한 이름으로 어긋난 길을 걸어가고 있을지도 몰라 다시 태어나고 싶어 법원 서기 책상에 쌓인 개명 신청서 좀 봐
이름을 주고 뒤에서 맛을 조종할 사람 없지요 내가 낳은 아이라고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것쯤 다 알잖아요 칼라가 칼라의 맛을 버리고 비린내를 좀 내면 어때요 처음 세상에 도착한 것인데
종이를 탈출하고 싶은 게 틀림없어요 처음 태어난 뿌리를 종이에 포박해두고 입맛대로 재단하려는 거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강봉덕 | 2006년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시집 『화분 사이의 식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