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와 함께 탄생한 풍류의 상징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화나 전설에는 으레 술이 등장한다. 즉, 신과 함께 술이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 술은 어쩌면 인간보다도 앞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서양에서는 술을 관장하는 '바커스'라는 신이 있을 정도이며 이집트 신화에는 최고의 여신 이시스(Isis)의 남편 오시리스(Osiris)가 보리로 맥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술에 대한 이야기는 {제왕운기}의 주몽신화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이 신화에서 천제(천제)의 아들 해모수는 압록강 변에서 놀고 있는 세 처녀를 보고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버린다. 세 처녀는 하백의 딸 유화, 선화, 위화였다. 해모수는 신하를 시켜 유혹하였으나 이 처녀들이 응하지 않았다. 낙담한 해모수는 고민끝에 새로 웅장한 궁궐을 지어 그녀들을 초청하고 술을 대접한다. 처녀들이 만취되어 돌아가려 하자 해모수는 앞을 막고 하소연을 한다.
그러나 두 처녀는 달아나고 유화만 해모수에게 붙들려 궁전에서 잠을 자게 된다. 해모수의 행위에 분노한 하백은 도술 싸움을 벌인다. 그 결과 해모수의 신성성이 입증되자 주연을 베풀어 모두 취하게 한 후 해모수와 유화를 가죽 수레에 태운다. 그러자 남녀는 취중에 수레 안에서 한몸이 되고 해모수가 깨어나면서 햇빛을 타고 승천하게 된다.
그 뒤 유화가 아들을 낳아 주몽이라 했으니 그가 바로 나중에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
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화를 통해서 술의 기원을 밝혀내기는 어려우며 인류의 형성과 더불어서 자연적으로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어쨌든 술은 문자의 발생보다 먼저 나타났으며 중국 은나라 시대의 유적에서도 술 빚는 항아리가 발견된 바 있다.
민족의 특성 반영하는 술의 문화
세계 여러 민족들은 저마다 독특한 자연환경과 풍토에 맞는 술을 빚어 왔다. 그리고 각 민족에 따라 술을 빚는 전통적인 비법들이 발전해 왔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기록에 나타난 우리나라 술의 역사는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한시대에는 이미 누룩을 사용하여 곡주를 제조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시기부터 술은 제천의식(제천의식)의 필수적인 제물이었다. 추수가 끝나면 모든 부족민이 한자리에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추수에 감사하는 의미로 술을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었던 것이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술은 화합의 상징이었다. 제천의식에서 술이 제물로 등장한 것도 따지고 보면 신과 화합하여 하나가 되려는 염원이 드러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술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화합을 도모하게 한다. 이를테면 제주도 무속신화인 '나주 기민창 조상' 신화에서는 술이 사람과 사람을 화합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제주도 안씨 선주가 흉년으로 굶어 죽게 된 제주 백성을 위해 쌀을 구하러 육지에 나갔으나, 육지 사람들의 인심을 움직이지 못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주(나주)에서 술을 마시다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즉, 쌀로 막걸리를 빚어 술독에 담아서 동네 곳곳에 놓고 나주 백성들이 오가면서 바가지로 떠먹게 하였다. 그랬더니 나주 백성들은 사정을 이해하게 되었고 안씨 선주가 쌀을 구해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한편, 각 민족마다 술 문화는 하나의 풍습으로 생활 속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정서 속에서 술은 인정의 표현이었고 친지와 이웃 간에 즐거움을 나누는 도구였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손님을 맞으면 정중히 술을 대접하였고, 농촌에서는 막걸리를 빚으면 이웃 어른과 친지를 불러 술을 내놓고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곤 하였다.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주막, 또는 주점에서도 우리 겨레는 술로 인정을 나누었다. 장날 동네 어른을 만나면 목로주점에 들어가 막걸리 한 사발을 대접하는 것이 우리네 인사법이었고 친구들과 어우러져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는 데 가장 좋은 매개물도 역시 술이었다.
약 주고 병 주는 술
술은 알맞게 마시면 약이 된다고 한다. 기분이 가라앉았을 때 힘과 용기를 복돋워 주고 피로를 덜어준다. 그리고 농사철에는 일의 성과를 올려주고 일체감을 주어 작업을 원할하게 하도록 한다. 또한 흥에 겨워 적당히 취하면 노래와 춤을 곁들여 신명과 멋을 낼 수도 있다. 어느 민족이든 잔치 때 술을 마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농촌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술은 남녀간의 사랑 만큼이나 많이 묘사되고 있다. 정철, 윤선도 등 조선시대 문장가들도 술을 논하며 무상한 인생을 달랬다.
이처럼 술은 멋과 풍류와 정서를 가다듬게 하여 생활에 활력 주는 반면 지나치게 마시면 악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일찌기,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 같은 이는 "차를 마시는 민족은 흥하고 술을 마시는 민족은 망한다"고 개탄한 적도 있다. 사실상 그 때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의 음주벽은 좀 지나쳤다고 할 수 있다.
무분별한 음주로 가산을 탕진하고 몸을 버려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허다했으니 말이다. 지금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1인당 음주량이 세계 1위라는 통계만 보더라도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 전통적인 술의 예법은 사라져 버리고 폭음하는 습관만 남아서 닥치는대로 마셔대는 사태에 이르고 만 것이다.
우리나라 술의 역사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실제로 술이 등장한 것은 삼한시대 무렵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는 삼국시대 후기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동안 우리 술은 종류도 다양해 졌고 그 명성이 중국에까지 전해졌다.
{제민요술}에 의하면 중국의 술빚는 기술을 도입한 우리나라는 이를 발전시켜 독특한 주조법을 개발하였고 일본에까지 기술을 전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누룩을 사용한 술이 일반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송나라, 원나라의 양조법이 도입되어 보리와 쌀을 술에 이용하였으며 술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특히 고려 후기에 들어서는 증류주 문화가 유입되어 주곡 뿐만 아니라 수수, 조 등을 이용한 술이 개발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 술의 역사상, 지금까지 유명주로 손꼽히는 것들은 주로 조선시대 때 정착된 것들이다. 이때부터 술은 고급화 추세를 보여 양보다는 질 좋은 술들이 개발되었으며 증류주는 일본, 중국 등지에 수출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와서는 각 지방의 특성을 살린 지방주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유명한 술로는 서울의 약산춘, 여산의 호산춘, 충청의노산춘, 김천의 청명주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소주에 각종 약재를 응용한 술들이 새로 개발되어 전라도의 이강주, 죽력고 등이 유명해졌다. 그리고 양조주와 증류주를 혼합한 혼성주로서는 과하주가 유명하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활짝 꽃피운 우리 술 문화는 일제 침략을 맞이하기 전까지 절정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외래주도 적잖게 도입되어 토속주와 외래주가 공존하는 현상을 빚어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에는 마침내 양주 문화가 도입되기에 이른다.
또한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일제가 수탈 목적으로 과중한 주세를 부과하는 바람에 전통적인 향토주와 토속주는 자취를 감추게 되고 신식술이 획일적으로 제조되어 우리의 전통적인 술 문화를 발칵 뒤집어놓고 말았다.
서민들의 벗 막걸리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그 종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술들이 제조되었지만 오늘날까지 서민들의 입맛을 돋궈주는 전통주로 대표적인 것을 들라면 막걸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막걸리는 청주를 떠내지 않고 그대로 걸러낸 술로, 빛이 탁하며 알콜 성분이 적다. 그래서 옛 문헌에는 '혼돈주'라는 이름으로 나오기도 하고 탁주, 약주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막걸리는 쌀과 누룩으로 술을 빚은 뒤 숙성되면 술밑을 체에 받아 버무려 걸러낸 것이다. 그러면 쌀알이 부서져서 뿌옇게 흐린 술이 된다. 보통 농촌에서는 농주라 하여 농사철에는 식량만큼이나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일제 침략기에 이르러 주세법이 제정됨에 따라 막걸리 빚기가 규격화 된다. 그리고 일제시대 말기부터 만성적인 식량부족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외국산 양곡을 많이 도입하는 바람에 1964년부터 막걸리에 쌀의 사용이 금지되고 밀가루 80%, 옥수수 20%의 도입양곡을 섞어 빚게 되었다.
이와 같이 막걸리에 밀가루를 사용하자 술맛이 떨어지게 되어 서민들은 맛없는 막걸리보다는 소주를 선호하게 되었다. 또한 중산층이나 상류층은 맥주와 양주를 찾게 되었다.
그 뒤 쌀 생산량이 다시 늘어 식량자급이 이뤄지고 쌀이 남아돌게 되자 1971년 쌀막걸리를 다시 허가하였다. 그러나 술 빚는 방법이 규격화 되었고 대형 양조장에서 화학약품을 첨가하여 빚는 바람에 좀처럼 옛맛이 살아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막걸리는 이미 되살릴 수 없는 옛맛이 되고 만 것이다.
또한 국민들의 생활 형편이 나아지고 국내에서도 양주가 생산되어 이제는 서민들도 막걸리보다는 맥주나 국산 양주를 즐겨 찾는 단계에 이르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