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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10.18 04:34
https://www.chosun.com/politics/diplomacy-defense/2023/10/18/WEJN3IIENNGYDDPKEV27TIUTRI/
역대 최장 44년 복무를 마치고 은퇴를 앞둔 한미동맹의 상징 카투사 출신 주한미군 김영규 공보관이 2023년 10월 11일 오전 서울 용산의 옛 미 8군 사령부 앞에서 소감을 말하고 있다. / 오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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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8월 18일 북한군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터져 주한미군 병력이 판문점에 투입될 때 이들과 함께한 한국인이 있었다. 당시 미 2사단 기관지 소속 카투사였던 김영규(76) 주한미군 공보관이다. 그는 미 2사단 대원들이 북한군과 대치하며 판문점의 미루나무를 잘라 제거하는 ‘폴 버니언 작전’을 지켜보며 기록으로 남겼다. 제대하고 1980년 정식으로 주한미군 공보관이 된 그는 이후 44년간 미군과 한국 사회를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 한미 동맹의 산증인인 그는 오는 31일 은퇴한다. 그를 지난 11일 미 용산 기지에서 만났다.
-최장수·최고령 공보관이다.
“주한미군뿐 아니라 한미연합사·유엔사도 담당했다. 44년간 세 조직의 변화에 함께했다는 데 자부심이 크다. 유엔사의 역할이 커져 최근 유엔사 전담 한국 공보관이 따로 생겼다. 격세지감이다.”
-무슨 역할을 했나.
“한국 공보관은 주한미군 사령관의 ‘눈’과 ‘귀’ 역할을 한다. 국내 주요 뉴스를 정리해 영문으로 보고서를 만들어 사령관과 참모들에게 전달한다. 판문점을 지금까지 1000번 넘게 출입했는데 1989년 임수경 밀입북 사건 등 유엔사와 관련된 남북 업무도 했다.”
-2017년 북한군 오청성씨의 귀순 사건도 있었다.
“음모론을 막기 위해 그가 차를 몰고 판문점까지 접근하는 것부터 북한군이 그를 향해 총을 쏘며 추격하는 광경까지 다 CCTV 영상을 공개했다. 발표할 때 한국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영상이 워낙 생생하다 보니 의문 가질 게 거의 없었던 것이다. 우리 군이 포복해서 오씨를 끌어 구하는 영상까지 공개해 오해와 거짓말이 퍼지는 것을 막았다. 잘한 공보 활동으로 평가받았다.”
역대 최장 44년 복무를 마치고 은퇴를 앞둔 한미동맹의 상징 카투사 출신 주한미군 김영규 공보관이 2023년 10월 11일 오전 서울 용산 미8군 기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오종찬 기자
-아쉬운 점은 없나.
“주한미군지위협정(SOFA)과 관련한 오해가 제대로 해소되지 않은 점이다. 한국군도 외국에 파병되면 똑같이 주재국과 SOFA를 맺는다. 몇 년 전 SOFA에 따라 형사재판권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100건의 미군 범죄 사건이 어떻게 처벌됐는지 정리해 보도 요청을 했는데, 어디서도 다루지 않았다. 2002년 미선이·효순이 사건 때도 초기부터 미 장병들이 촛불 집회를 열었는데 이런 점은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그는 은퇴 후에도 한미 동맹의 발전을 위한 일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무엇을 할지는 아직 엠바고(보도유예) 상태입니다. 하지만 기대는 해주십시오. 아직 일할 열정이 있습니다.” 한미연합사는 오는 20일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에서 열리는 한미 동맹 7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그에게 감사패를 전달할 예정이다.
2023.10.18 04:48:36
김영규씨가 미군의공보고관으로서 국가를위하여 열심히 일하셨읍니다 고생했읍니다 앞으로 많은지식으로 국가를위한일 많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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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8 07:35:22
참 훌륭한 분이시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퇴직하시더라도 한미동맹을 위해 노력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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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8 07:19:23
역시 미국이라 정년없이 76세까지 근무가 가능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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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8 08:05:16
이런 분들 때문에 한미관계가 유지되고 또 더욱 공고해졌다. 떠난 뒤에도 관심갖고 도와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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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8 08:01:14
양국의 군인들에게 많은 도움 주셔서 고맙습니다. 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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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8 09:32:00
대한민국의 거울입니다. 고생하시고 편한 남은 삶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청출어람의 좋은 후배가 임무를 잘 감당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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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8 09:19:31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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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8 08:18:05
그동안 한미동맹을 위해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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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8 10:07:23
한미동맹의 산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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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8 21:25:21
TIME지에 따르면 그때 당시 군복무하던 문재인이 이 작전에 특전사요원으로 투입되어 북한군과 대치하였다고 하는데....조선일보는 왜 이런 특종을 보도하지 않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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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정치
‘한미동맹의 산증인’ 김영규 주한미군 공보관 44년 만에 퇴임
입력 2023-10-18 15:34업데이트 2023-10-18 15:34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1018/121729950/1
김영규 공보관 제공
“44년간 판문점을 찾은 횟수가 1500여 차례는 될 겁니다.” 31일 퇴임하는 김영규 주한미군 공보관(76)은 18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반세기 가까이 한미동맹과 남북분단의 현장을 언론인들과 함께 누빈 경험이 너무도 소중하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한미동맹의 산증인으로 꼽히는 그는 1976년 입대 후 카투사(KATUSA·미군에 배속된 한국군)로 차출돼 주한미군과 인연을 맺었다. 연세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그는 미2사단 공보실에서 미 2사단 기관지 ‘인디언 헤드’ 기자로 근무하면서 1976년 북한군의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당시 미군 장병들이 북한군과 대치하면서 판문점의 미루나무를 제거하는 작전을 지켜보고 기록으로 남겼다.
김영규 공보관 제공
1979년 전역 후 미 2사단 공보실에 정식 채용된 뒤 1985년 당시 서울 용산의 주한미군사령부로 자리를 옮긴 뒤 지금껏 주한미군사와 한미연합사령부, 유엔군사령부 공보관으로 한미 양국군의 가교 역할을 했다. 또 내외신 기자들을 이끌고 남북 회담 등이 진행된 판문점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그는 “여의치 않은 판문점 취재 여건 속에서도 우리 기자들이 질서있게 잘 협조해준게 항상 기억에 남는다”며 “퇴임 후에도 한미동맹에 기여할수 있는 일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미연합사는 20일 경기 평택 서부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한미동맹 7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김 공보관에게 한미동맹에 기여한 공로로 감사패를 전달할 예정이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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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가교’ 31년 … 판문점 1000번 드나들어
중앙일보
입력 2007.07.05 05:03 업데이트 2007.07.05 08:05
https://www.joongang.co.kr/article/2782125
“판문점은 남북관계의 체온계입니다.”
31년째 판문점과 한미연합훈련장을 누비며 한미동맹의 가교 역할을 해 온 김영규(60·사진)주한미군사령부 공보관. 올해 환갑을 맞은 그는 버웰 벨 주한미군사령관이 한미연합사령관, 유엔군사령관 등 세개의 ‘모자’를 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3개 사령부의 공보관을 겸하고 있다. 내외신 기자들이 주한미군과 관련된 사안을 취재하려면 김 공보관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정도다.
김 공보관이 주한미군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6년. 제주 출신으로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30세의 늦은 나이에 입대해 카투사로 근무했다. 카투사는 주한미군에 배속된 한국군 병사다.
그는 경기도 동두천 미 2사단 공보실에서 2사단 기관지 ‘인디언 헤드’ 기자로 군 복무를 시작했다. 당시 그가 미군 병사 기자와 함께 취재해 보도한 국내 혼혈인 문제 기사 등 여러 건은 한국 언론에 그대로 전해지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인 동료 병사들과 함께 혼혈아들에게 영어도 가르쳤다.
이 같은 인연으로 김 공보관은 제대 후 곧바로 미 2사단 공보실에 정식 직원으로 채용됐다. 그 뒤 85년 서울 용산에 있는 주한미군사령부 공보실로 자리를 옮겨 현재까지 주한미군의 언론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31년 동안 내외신 취재진을 안내해 남북 분단의 현장인 판문점을 문턱이 닳도록 다녔다. 매주 수요일의 정기방문과 남북 접촉 등 수시 방문을 합치면 적어도 1000번 이상 판문점을 찾았다고 한다. 판문점 회담의 산증인인 셈이다.
그래서 판문점에 얽힌 사연도 많다고 했다. 이등병으로 인디언 헤드 기자로 활동하던 76년 8월18일 북한군이 판문점에서 도끼로 주한 미군 장교를 살해한 이른바 ‘도끼만행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그는 방탄복과 카메라를 지급받고 현장을 취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김 공보관은 “취재를 가면서 죽으러 가는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판문점에 취재를 가면서 미군 탱크들이 동두천 시내에서 북한을 향한 채 출동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김 공보관은 91년부터 한미 동맹 관계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나름대로 평가했다. 이때부터 한반도 방위에 미국이 주도적인 역할에서 지원 체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휴전선 일대 초소 운영 책임이 한국군과 유엔사로 넘어왔다. 유엔사 군사정전위 수석대표(소장)에 한국군 장성이 임명됐다. 한국인으로서 뿌듯함을 느끼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숨진 효순·미선양 사건은 ‘정말 안타까운 사건’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이 사건을 이야기 하면서 공보관의 임무를 잊지 않았다. “주한미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좋은 이웃’(good neighbors) 프로그램으로 한국사회에 더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주한 미군이 나름대로 적지않은 노력을 했는데 한국인들이 이 같은 노력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 공보관은 지난달 정년을 맞아 은퇴해야 하지만 미군 당국의 요청으로 5년가량 더 일하기로 계약했다. 은퇴 후에는 자신의 체험과 가슴에 담아뒀던 이야기들을 책으로 펴낼 계획이란다.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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