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부 운문 대상 수상작품
반성
안양예술고등하교
3학년
김희진
본드냄새가 굳어가는 골목
그늘 아래서 그는 알로 돌아가는 중이다
잉크가 마르지 않은 책들이
선반 위에 누워있는 ××문화사
진부한 이론들을 뱉어내는 그의 동작에서
종잇날에 손가락을 베이던 날들은 쉽게 읽혀진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청춘의 각주를 찾을 수 없는 저 남자는
원고지 위에 초식의 언어를 새겨 넣는 애벌레,
이 거리의 유일한 상형문자다
간판의 활자들이 가장 높은 곳에서
의미 없는 제 이름을 반복하고
종이가루를 쓸어내며 손끝이 검어지는 그가
끈적한 문장을 상자에 나눠 담을 때
복사기 너머에서 일시에 그의 몸이 환해진다
그 환함 속, 곧은 필체로 서있는 그를 읽으며
백지로 선 나는
저 활자들 중 어떤 형(形)이 될 수 있을까
바지밑단이 거친 문장들을 쓸고 간다
스스로 둥근 활자로 돌아갈 그의 한 살이
쉽게 흠집이 생기는 몇 개의 겉표지를 가진 나는
의미가 될 수 있을까
그가 뽑아낸 사각거림이 누런 황금빛으로 뚜렷해진다
오토바이가 말을 줄이며 빠져나가는 인쇄골목
어두울수록 환해지는 유리문 안에서
나는 가만히 그의 뒷모습을 베껴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