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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출애굽기 3:1-4
제목: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일시: 2019. 10. 20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1505년 7월 2일 슈토테른하임이라는 한 작은 마을 어귀에서 마르틴 루터는 낙뢰를 맞는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그때 그는 Hilf Du Sankt Anna. Ich will ein Mönch werden
(성안나여 도우소서 그러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이라고 외친다. 번쩍이는 낙뢰를 통해 루터의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 그로부터 12년 후에 그는 종교개혁의 문을 열게 된다. 종교개혁 400주년을 맞아 슈토테른하임 마을 근교에 루터슈타인이라고하는 2m높이의 비를 세웠다. 그 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Geweihte Erde(거룩한 땅), Wendepunkte der Reformation(종교개혁으로의 전환점), In einem Blitz vom Himmel wurde dem jungen Luther hier der Weg gewiesen(하늘로부터 오는 번개 속에, 이곳에 있던 젊은 루터를 향한 그의 길이 제시되어 있었다.). 번쩍이는 번개는 루터를 쓰시려는 하나님의 어텐션이었다. 그 번개로 루터는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해 번쩍 정신이 든 것이다.
II. 하나님은 우리의 주의(Attention)를 끌어내신다.
우리의 삶은 무엇 하나에 집중하기 어렵다. 주변에 우리의 마음을 분산시키고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유혹들이 너무 많다. 화려한 네온사인은 자신들을 보아달라고 번쩍거리고 있다. 이러한 원색적이고 현란한 것들이 우리의 시선을 빼앗고 마음을 분산시킨다. 오늘날 사회는 진리와 거짓이 함께 섞여서 서로 내 말이 맞다 저 말이 틀리다고 하면서 진실논쟁을 벌인다. 도무지 뭐가 참이고 거짓인지 판단하기 어렵고 혼란스럽다. 진리는 질식하여 숨을 쉬지 못하고 거짓은 진실인 양 젊잖게 무게 잡고 있기도 하다. 가치의 기준에 혼돈이 생겨 내가 정상인지 그가 정상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내가 문제인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방향감각을 잃은 사람들은 동으로 가야할지 서로 가야할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그때 우리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마치 루터가 번쩍이는 낙뢰를 맞는 경험을 하고 나서 인생을 생각하게 된 것처럼 우리에게는 번쩍이는 충격이 필요하다. “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어? 이럴 때가 아니지!”라는 번쩍이는 낙뢰가 필요하다. 루터에게 그 낙뢰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attention 이었던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엉뚱한 생각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attention이 필요하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 모세는 여호와의 산 호렙에서 불은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로 인해 정신이 번쩍 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전에 그는 40년동안 왕궁의 삶에 취해 있었다. 그러나 왕궁으로 불러들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이 40에 그를 다시 왕궁 밖으로 밀어 내신다. 모세가 왕궁으로 들어올 때 갈대상자에 넣어진 불쌍한 히브리노예의 아기로 밀려서 들어온 것처럼 나갈 때도 살인자 모세로 밀려 나가게 된다. 이후 도망자 모세는 그렇게 화려했던 바로의 왕궁을 떠나 조용한 미디안광야에서 양을 치고 미디안 족장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어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낳고 가정을 이룬다. 모세는 그러한 삶이 그의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호렙산떨기나무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는 말이다. 그때까지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하신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 왕궁에서 교육을 시키셨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모세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스라엘백성을 광야에서 이끌어야 하니 미디안 광야에서 미리 광야유격전지 훈련을 시키고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때가 되니 하나님께서는 그냥 그렇게 살고 있는 모세에게 Attention을 시키신다. 양을 치던 모세가 여호와의 산 호렙에 도착하게 되어 거기서 기가 막힌 광경을 목격한다. “불타는 떨기나무”였다. 아주 특별하고 기이한 광경이었다. 불은 붙는데 나무가 타지를 않는 것이다.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3절)라고 시선이 그곳에 고정된다. 활활 타오르는 떨기나무불꽃은 모세의 관심을 끌기 위한 하나님의 Attention(Beachtung)이었다.
성경에서 보면 특별히 표적과 능력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그러한 놀랍고 신기한 기적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목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엉뚱한데 정신이 팔려있고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려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주님이 베드로를 부르실 때 깊은 곳에 가서 물고기를 잡도록 했다. 주님의 의도는 물고기 잘 잡는 낚시방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Attention하여 베드로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정신 못 차리고 있었을 때 갈멜산에서 엘리야를 통해 불로써 응답하신다. 하늘에서 내린 이 불의 응답을 통해 이스라엘백성들은 정신이 번쩍 들게 되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오천명을 먹이신 것도 음식압축 방법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표적을 통해 무리의 attention을 끌기 위함이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 역시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께서 불타는 떨기나무와 같이 정신이 번쩍 들고 Attention 하게 하시는 일들이 많이 있다. 나를 아프게도 하시고, 시련을 주시기도 하고, 우리 주변에서 이런 저런 일을 목격하게도 하시고 원치 않지만 이런 저런일을 경험하게도 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어텐션Attention을 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III. Attention은 Mission으로 넘어가야 한다.
Attention이 Attention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주의를 집중시킨 다음에 그 어텐션은 본론에게 마이크를 넘겨주어야 한다. “여러분 여기를 한번 봐 주세요”라고 말한 다음에 아무 말이 없으면 실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불러 놓고 말하지 않으면 아주 싱거운 사람이 될 것이다.
주님은 Attention을 시키신 다음에 꼭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주셨다. 하지만 어텐션은 했지만 본내용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무척 답답해하셨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화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뱃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태11:20-21)이라고 한다. 수많은 표적들을 왜 행했는가? 능력은 왜 베풀었는가? 주님은 표적과 기사를 통해 어텐션을 끌어내신 것은 본론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표적과 능력을 베푸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기해하고 즐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라는 본론을 말씀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상일도 본론을 염두에 두고 어텐션을 하지 않는가!
예)반포 친구목사를 방문하였는데 설빙을 잘하는 곳으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정육점집 앞에서 큰 인사소리가 들린다. “안녕하세요” 나는 성목사에게 “아는 사람이야” 라고 했더니 그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그렇게 크게 인사한다는 것이다. 정육점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에게 어텐션을 시키는 것이다. 고기를 팔기 위해서이다. 부른 다음에는 뭔가 메시지를 주겠다는 것이다. 남대문시장에서 옷장사를 하는 사람도 골라골라... 하면서 주의를 집중케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옷을 팔기 위함이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라. 사람들은 다 놀라며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했다. 이후 무리들이 사라진 예수님을 찾아다니다 가버나움에서 발견하고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하니, 주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6-27)고 한다. 그러면서 주님은 본론을 말씀하신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요6:35).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시는 Attention을 해 놓고 주님은 당신이 바로 진정한 하늘의 생명양식이 되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의 Attention을 받아내신 다음 그에게 시키실 미션Mission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 미션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호렙산 떨기나무에 불을 붙이셨다. 불은 붙었으나 신기하게 타지 않게 하심으로 모세의 attention을 끌어내셨다. 하지만 떨기나무불꽃은 서론일 뿐이요 본론은 이제 모세에게 주시는 미션Mission인 것이다. 그 미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백성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하여 약속한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3:10).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모세를 왕궁에서 교육시키시고 또 다른 40년을 광야에서 준비시키신 것은 바로 출애굽의 특별 미션을 위한 것이었다. 이제 모세의 인생 본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스 쇼우의 묘비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고 기록된 것이나 중광스님의 묘비에 “괜히 왔다가 간다” 는 말이나 우리 인생에 미션이 없으면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는 과연 괜히 왔다가 가는 존재인가? 우리는 우물쭈물하다가 인생을 낭비하듯 흘려보내서는 안된다. 우리의 삶에는 미션이 있다. 그것이 삶의 의미이다. 그 미션, 즉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목적이 없이 방황하는 사람이다. “내가 왜 여기 있지?” “무엇 때문에 살지”라는 질문이 없이 사는 사람은 목적 없이 표류하는 인생이다. 그러나 미션을 분명히 깨닫고 있는 사람은 삶의 의미를 알고 목적을 알기에 자신의 시간과 물질, 재능, 세상이 즐겨하는 가치까지도 희생하고 생명까지도 감수한다. 연어가 폭포수도 거슬러 올라가듯이 미션을 위해서 삶을 던질 수 있다. 모세가 왕궁에 있으나 미디안 광야에 있으나 그는 미션을 위해서 준비된 사람이었다.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는 Attention을 받고 미션을 깨닫게 된 것이다.
IV. 성경 스토리는 대부분 Attention을 통해 Mission 으로 넘어가게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어텐션 시킨 다음에 본론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나 삶을 살 때 어텐션Attention에 머물지 않고 미션Mission을 발견하게 되면 하나님의 의도와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1)주님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했을 때 주님이 바로 빛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어텐션만 보았던 바리새인들은 진흙을 이겨 그 소경을 치료한 주님에게 안식일을 어겼다고 난리를 쳤다. 그들은 예수님의 미션을 못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주님이 진정한 빛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진짜 소경은 그 소경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는 소경이었던 것이다. 2)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5천명을 먹이신 주님은 무리들의 어텐션을 시킨 다음, 주님이 “하늘에서 온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3)베다니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은 어텐션이었다. 그런 다음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나사로는 attention 이었다. 그러나 본론은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이었다. 4)주님이 병자의 고치실 때 그들을 치료하는 정도가 아니다. 주님이 의원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려 했던 것이다.
종종 사람들은 어텐션에 관심을 더 가져 예수님의 미션을 잊기도 하고 오해도 한다. 그래서 보통 주님은 attention 으로 시작하여 mission 으로 결론을 맺으시지만 한번은 곧바로 mission을 보여주신 적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좀 더 강력한 attention이 되기도 했다. 가버나움에서 지붕을 뚫고 친구들이 중풍병자 친구를 침상으로 내려 주님께 고쳐달라고 할 때 주님은 attention을 하지 않고 바로 mission 으로 들어가셨다.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마가2:5). 그때 서기관들이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마가2:7)라고 생각했다. 그때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마가 2:9-10)라고 하신다. 네 상을 들고가라는 능력을 행하시지 않고 주님이 죄를 사해 주시는 하나님의 권한이 있음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1)이제 올 한해의 4분기가 되는 10월부터는 정말 많은 행사들과 교회 프로그램이 있다. 다음 주는 추수감사절이다. 11월에는 바자회가 있다. 12월에 말씀성회와 전교인수련회 그리고 청소년 수련회 년말 행사들이 있다. 이런 모든 행사들과 프로그램들은 어텐션이다. 그러기에 마지막에는 언제나 “다름이 아니라...”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라는 mission으로 결론을 맺어야 한다. 2)선교현장에서 NGO 그룹으로 우물파기도 하고, 병원도 개설하고 사회활동도 한다. “다름이 아니라...”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라는 mission으로 바톤을 넘겨주어야 한다. 3)목회현장에서 교회가 대안학교도 하고 문화사역도 하고 마더와이즈, 성품학교 등도 한다. “다름이 아니라...”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라는 mission으로 결론을 맺어야 한다. 4)목회자가 설교를 할 때 예화도 들고 이런 저런 스토리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늘 마지막에는 “다름이 아니라...”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이라는 mission 핵심이 있다.
V. 오늘 말씀의 핵심 키워드는 Attention과 Mission 이다. Attention은 루터가 경험한 번쩍이는 낙뢰와 같고, 바울이 경험한 다메섹 도상에서의 강렬한 하늘 빛과 같다. 모세가 호렙산 떨기나무가 불에 타는 것을 본 것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Attention 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텐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텐션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불꽃 가운데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모세가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고 왔지만 그가 듣게 된 본론 메시지는 이스라엘을 구해야 하는 특명 미션이었다.
우리의 삶에서 정신이 번쩍나게 하는 것이 있는가? 무감하지 말라. 통증을 느껴라. 의식이 깨어있으라. Attention하라. 그리고 이제 그 속에 뭔가를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음성 Mission을 들으라. 메시지가 그 속에 있다. 이제 또 한주간을 살아갈 때 수많은 Attention이 우리의 삶속에 있게 될 것이다. 이제 그 Attention을 통해 하나님이 뜻하시는 mission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마음과 의향을 알고 그 뜻을 이루어가기를 축원드린다.